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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삼아 보셔요. (초기불전연구원 묻고답하기 및 번역된 니까야 등 에서 가져왔습니다.)
해탈지견에 대하여
1.
스님, 아함경과 빠알리 삼장을 읽으면서 제가 제일 많이 읽은 부처님 말씀, 혹은 정형구를 들라고 한다면 저에겐 아마 다음과 같은 누진통 해탈지견의 정형구가 아닐까 합니다.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Khiin*aa jaati, vusitam* brahmacariyam*, katam* karan*iiyam*, naaparam* itthattaayaa’ti pajaanaatii”ti.
2.
스님, 이러한 해탈지견의 정형구를 차마 깊이 생각해보지도 못하다가 어느 웹문서에서 이 정형구를 我生已盡。自知不受後有。梵行已立。所作已作。으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바른 견해가 없이
我生已盡。自知不受後有。을 비슷하다고 여기고
(태어남은 다했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梵行已立。所作已作。을 비슷하게 여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그제서야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고 해탈지견에 대한 견해를 찾아보려 하였지만 오히려 혼란스러웠습니다.
3.
스님, 해탈지견의 네 개의 문장은 각각 어떠한 의미가 있는 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참고) 아래의 경문은 빠알리 원문에 대한 각묵스님의 번역문과 잡아함경 원문에 대한 동국역경원의 번역문입니다. /표시를 하고 덧글을 단것은 해탈지견을 나타내는 부분에 대하여 표시를 해 본 것입니다. _()_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넌더리 치고[염오] 느낌에 넌더리치고 인식에 넌더리치고 상카라들에 넌더리치고 알음알이에 넌더리친다. 넌더리치면서 욕망을 빛바래게 한다[이욕]. 욕망을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Evam* passam*, bhikkhave, sutavaa ariyasaavako ruupasmimpi nibbindati, vedanaayapi nibbindati, san$n$aayapi nibbindati, sa챞haaresupi nibbindati, vin$n$aan*asmimpi nibbindati. Nibbindam* virajjati viraagaa vimuccati. Vimuttasmim* vimuttamiti n$aan*am* hoti.
‘Khiin*aa jaati, /태어남은 다했다.
vusitam* brahmacariyam*,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katam* karan*iiyam*, /할 일을 다해 마쳤다.
naaparam* itthattaayaa’ti pajaanaatii”ti.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거룩한 제자들아, 이렇게 관찰하면 그는 곧 색을 싫어하고, 수.상.행.식을 싫어하게 되며, 싫어하기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 해탈하면 진실한 지혜가 생기나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聖弟子。如是觀者。厭於色。厭受.想.行.識。厭故不樂。不樂故得解脫。解脫者眞實智生。
我生已盡。/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梵行已立。/범행은 이미 섰으며
所作已作。/할 일은 이미 마쳐
自知不受後有。/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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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간단히 답글드리고자 합니다.
전에 번역하면서 주석서를 찾아보니 이 부분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석서는 문자적인 해석과 설명을 하고 있었던 것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다른 의미를 찾지 않으셔도 된다고 봅니다.
태어남은 다했다는 것은 말그대로 계속적으로 태어났던 것은 이제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끝이 낫다는 말입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는 것은 출가해서 청정범행을 닦는 목적인 번뇌다한 아라한의 경지를 체득했기 때문에 그러한 청정범행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으로 존재로 태어나서 해야할 생사문제의 해결 장부일대사를 이제는 다해마쳤다는 선언입니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는 것은 말그대로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라는 것은 이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번뇌다한 자, 깨달은 자는 해탈을 실현하는 순간에 이러한 네 가지에 대한 분명한 지와 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냥 해탈이라는 신비적인 현상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해탈은 반드시 이러한 투철한 해탈지견을 수반한다는 것을 이 정형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의문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하신 이런 말씀은 모든 판단의 중지입니다. 해탈, 열반, 깨달음, 번뇌의 소멸의 경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는 헤아림이나 판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san#khyam* na gacchati)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초기불교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답변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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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이것은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이 것들은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이것은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이것은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
43.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나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했다. 존재의 번뇌[有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했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했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다.(M36 각묵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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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존] “깟짜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자, 다른 믿음을 가진 자, 다른 경향을 가진 자, 다른 수행을 하는 자, 다른 스승을 따르는 자가 이러한 감각적 쾌락이나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나 감각적 쾌락의 최상의 즐거움에 관하여 알기가 어렵습니다. 깟짜나여, 수행승으로서 거룩한 이이고 모든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이 완성되고, 해야 할 일을 해마치고, 짐을 버리고, 참다운 목표에 도달하고, 존재의 결박을 끊고, 올바른 지혜로 해탈한 자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감각적 쾌락이나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나 감각적 쾌락의 최상의 즐거움에 관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17.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유행자 베카낫싸는 분노하고 불쾌해하며 그야말로 세존을 매도하고 그야말로 세존께 욕설하며 세존께 말했다,
[베카낫싸 깟짜나] “그렇다면 수행자 고타마는 악인일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말하며. 세존께 이와 같이 덧붙여 말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보지 못하면서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이러한 말은 웃음거리이고, 이름뿐인 것이고, 공허한 것이고. 허망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18. [세존] “깟짜나여, 이 세상에서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보지 못하면서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당한 비난입니다. 그러나 깟짜나여, 과거도 제쳐두고 미래도 제쳐둡시다. 솔직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현명한 사람을 오게 하십시오. 가르친 대로 행하는 자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도록 나는 그를 가르치고 그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그는 속박, 즉 무명의 속박에서 바르게 해탈합니다. 깟짜나여, 예를 들어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가 단단한 끈으로 사지가 묶이고 다섯 번째 끈으로 목이 묶여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아기가 자라서 그의 감각 능력이 성숙함에 따라 그 묶인 것이 풀리고, ’나는 벗어났다.‘라고 알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묶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솔직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현명한 사람을 오게 하십시오. 가르친 대로 행하는 자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도록 나는 그를 가르치고 그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그는 속박, 즉 무명의 속박에서 바르게 해탈합니다. (M80 전재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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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iscerns that 'If I were to direct equanimity as pure & bright as this towards the dimension of the infinitude of space and to develop the mind along those lines, that would be fabricated. One discerns that 'If I were to direct equanimity as pure and bright as this towards the dimension of the infinitude of consciousness... the dimension of nothingness... the dimension of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and to develop the mind along those lines, that would be fabricated.' One neither fabricates nor mentally fashions for the sake of becoming or un-becoming. This being the case, one is not sustained by anything in the world (does not cling to anything in the world). Unsustained, one is not agitated. Unagitated, one is totally unbound right within. One discerns that 'Birth is ended, the holy life fulfilled, the task done. There is nothing further for this world.'
"Sensing a feeling of pleasure, one discerns that it is fleeting, not grasped at, not relished. Sensing a feeling of pain... Sensing a feeling of neither pleasure nor pain, one discerns that it is fleeting, not grasped at, not relished. Sensing a feeling of pleasure, one senses it disjoined from it. Sensing a feeling of pain... Sensing a feeling of neither pleasure nor pain, one senses it disjoined from it. When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the body, one discerns that 'I am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the body.' When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life, one discerns that 'I am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life.' One discerns that 'With the break-up of the body, after the termination of life, all that is sensed, not being relished, will grow cold right here.'
"Just as an oil lamp burns in dependence on oil & wick; and from the termination of the oil & wick — and from not being provided any other sustenance — it goes out unnourished; even so, when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the body, one discerns that 'I am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the body.' When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life, one discerns that 'I am sensing a feeling limited to life.' One discerns that 'With the break-up of the body, after the termination of life, all that is sensed, not being relished, will grow cold right here.'
(M140 Thanissaro 역)
첫댓글 해탈, 열반, 깨달음, 번뇌의 소멸의 경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는 헤아림이나 판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san#khyam* na gacchati)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설명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 경지를 체득해야 할 뿐....
ㅎㅎㅎ.. 해탈 등만이 아니라.. 시설 prajuna 이라 일컫는 반야 지혜는 중생의 언어로 표현 되는 게 아니지요. 그러기에 <불경>에 대해 수많은 오해를 과거에.. 현재에.. 앞으로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
1.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후세는 물론 지금도 실재하는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제자들(불자)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2. 스스로 알 것이니라.. 지금 실재하는 게 없으니 미래에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게 보고 알고 있기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건만, 확실히 [스스로 안다]고 크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믿음 faith이 아니라 사실 fact입니다.
3. 그렇다면 단멸견이 아닌가? 이미 생은 다했다고 말하듯이 [공]을 깨쳤다면.. 이 몸이라고 말(=시설)을 하면서도.. 그것은 실재하지 않고 연기(緣起)하고 있는 몸이라고 보고 있기에.. 그럴 경우 몸은 [중도 견해]로 단멸견(=중생 견해)이 아닙니다.
존재를 실유로 말하면 결국은 단멸견으로밖에 결론지어지지 않는 것이겠지요.
이런 의견은 어떻습니까? [我生已盡。/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여기서 生은 몸이 아닌 번뇌의 나타남, 그리하여 번뇌가 멸진 하였으므로, [自知不受後有。/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의 有는 몸이 아닌 번뇌로, 후에 번뇌가 남아있지 않는다 라고, 오온의 태어남과 6육입의 획득이란 경에선 태어남은 생물적 생이 아닌 번뇌의 생을 말하고, 14무기에서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느냐는 만동자 질문에 침묵하심이 떠 오릅니다.
십이연기의 ...애-취-유-생-노사..에서 그 유와 생, 노사는 생물학적 유와 생과 노사가 아니라 번뇌로서의 유생노사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12연기의 有는 물론 번뇌의 有입니다. 그리고 위 한문경도 번뇌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自知不受後有]에 대하여 각묵스님은[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로 말하고 전재성씨는 [윤회]입장으로 말하고, 저는 [번뇌=생각] 입장으로 말하고 있는거지요.
두 입장이 확연히 다릅니다. 실유의 바탕으로 이해하면 모든 것이 쉽고 간단합니다만, 그 결과는 소멸뿐, 단멸뿐이라 생각합니다.
단상중도를 보면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것이 단견이고 죽어도 영혼이 남아 다음세에 태어난다는 것을 상견으로 배척합니다.이 말은 무아윤회가 아닌 자아윤회를 부정하는 말이겠지요.그런데 "나는 다음생에 몸을 받지않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번역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 같습니다.
다음생에 태어난다는 견해나 안 태어난다는 견해 모두 존재론적 해석이라고 보아집니다..중도편을 보면 항상 이런 상반된 질문에 부처님은 아니다 그렇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항상 12연기를 설합니다.저는 윤회에 대하여 윤회를 벗어났다는 견해가 몸을 받고 안받고 문제인지는 아직 결정을 못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