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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해 (5) 2021-06-13
굳세게 함과 위로함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3장 전체를 살펴볼 것입니다. 1장에서 우리는 성도의 거룩한 생활이 거듭난 생명에서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이뤄졌음을 보았고, 2장에서 생명의 양육에 그 중요성을 살펴보았으며, 이제 3장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 디모데를 파송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나눌 것입니다.
1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러므로>라는 말은 앞장 끝부분에서 너희 얼굴보기를 원해서 다시 방문하려고 했을 때, 사단이 그 길을 막았던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아덴에서 바울만 홀로 남겨지고 2절에서 그를 대신하여 디모데를 보내게 된 것을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토록 내적 압력을 견디지 못했던 것은
사도행전 17장 13절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행17:13) 했다는 기록을 보면 남겨두고 온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어려움과 박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바울의 일행은 이런 상황을 참다 못하여- 바울만 홀로 에덴에 남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실라는 빌립보로 보내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덴에 홀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선교지에서 혼자 남겨지는 것은 새로 세워진 교회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덴에 <머물기를>이라고 번역된 동사는 <카탈레이포>인데 그 뜻이 <버려지다. 포기하다 고립되다>라는 말로써 이 단어에 바울의 처지와 심정이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위험한 선교지에서 홀로 외롭게 남겨진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진실한 사랑과 헌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2절에서 “우리형제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라고 했는데- 여기서 “디모데를 보내노니”라고 말한 것은- 우선 디모데가 누구인지를말해 주면서 또, 그를 보낸 이유를 말씀해 줍니다. 먼저, 디모데의 호칭을 살펴보면, 맨 앞에 <우리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과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형제로 그리스도의 지체 중 하나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속한 형제들과도 동일하게 한 피를 받은 한 형제요 가족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호칭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보면 <쉬네르소스>는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는 뜻으로 바울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전하시고 동역을 통해 교회를 세우십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디모데도 바울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성도들의 영적 유익과 필요를 위해서 자격을 갖춘 신실한 자로 추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동역자로 디모데의 자격을 충분히 인식시킨 후에- 그를 보낸 이유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이어지는 3절에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디모데의 임무는 환난을 겪고 있는 데살로니가의 믿는 이들이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 후에 가장 신중하게 힘써야 하는 것은- 갓거듭난 신자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돌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갓난아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백일잔치를 성대하게 베푸는 이유는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다고 봅니다. 초신자들은 아직 믿음의 뿌리가 깊게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시험으로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갓 믿음을 가진 자들인데 2장 14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저들도 저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주변의 동료로부터 믿음을 포기하도록 박해를 받거나 달콤한 말로 회유를 당하고 있었고. 심지어 유대인의 간교한 음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장 6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한 것처럼- 이들이 어려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 하반 절에 우리에게 다소 난해한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알리라” 했는데, 이 말을 다시 표현해 보면- ”우리가 환난을 받도록 정해졌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마 바울이 복음을 전해 줄 때,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원수 마귀가 이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 곧 환난이 닥치게 될 것을 미리 권고해 준 말입니다.
여기서 특별히<세우신 줄을 안다> 했는데 여기서 ‘세우신’은 헬라어로 <케이마이>는 <놓여있다> <운명 지어졌다>는 뜻으로 이는 우리가 이 여러 환란을 통과하도록 예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이 예상하지 못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아시고 그분의 심오한 뜻 가운데서- 우리가 예정된 고난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이 고난의 필연성과 그 유익을 생각하므로- 이는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에 대한 보증으로도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을 보시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셨고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우리가 환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로마서 5장 2절에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고 이어지는 3, 4절을 보시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우리가 당하는 환란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들어가는 과정 가운데서 소망을 이루는 한 방편임을 말씀해 줍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4절에서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도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단어는 ‘미리 말하였더니’입니다. 영어로 보면 told로 단순 과거이지만 헬라어 동사 시제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고는 반복적으로 여러 번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복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겪게 되는 불가피한 결과임을 미리 반복해서 말씀해 준 걸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하반 절에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예견된 사실임을 확증해 줍니다.
5절에서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여기서 ’알기 위하여‘는 ’확인하다‘ ’알아내다‘는 뜻으로 이는 박해중에도 저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는지 <믿음의 확증>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하는 자는 간교한 마귀를 가리킵니다. 곧 하와를 시험했던 옛 뱀입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사단의 시험은 저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수고가 헛되게 된 것은 아닌지- 그것을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고 속이는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했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는 말씀대로- 이 세상 신인 사탄, 마귀는 믿지 아니하는 자를 미혹하고 혼미케 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혼미하게 한다는 말은 <튀플로오>로 <눈멀게 하다> <시력을 빼앗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주된 활동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가복음 4장 15절에서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 끝부분에서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라는이 말씀은- 마귀가 저들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활동으로 인하여 사도들의 수고가 헛되게 될까를 염려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사탄의 활동이 있었을지라도 이 시험을 미리 말해 주었기 때문에- 잘 이겨냈을 것으로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하니”
디모데가 지금 좋은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옮겨와 있었습니다. 디모데의 이 보고가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본 서신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대적자들에게서 들은 비난에 대한 변증적 내용과 함께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6-10절까지 좋은 소식을 듣고 기쁨이 넘치는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서- 이 보고로 인하여 11-13까지 이 은혜에 감사하므로 그의 마음의 소원이 기도로 흘러나온 것을 보게 됩니다.
6절 下 반절을 보면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쁨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하니”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이 함께 역사하고 있음을 기뻐하면서 복음을 전해 준 사역자들에 대해서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성도의 사랑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저들의 믿음이 요동하지 않고 건전하다는 증거로 말씀한 것을 봅니다. 맞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믿음은 생명(구원)을 얻게 한 근원(뿌리)이고 사랑은 그 생명이 흘러나온 삶의 열매임을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뿌리이고 소망이 그 싹이며 줄기라면 거기서 맺힌 열매가 바로 사랑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장에서 먼저 믿음의 역사를 말한 다음에 사랑의 수고를 말씀하며 끝으로 소망의 인내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칭찬합니다. 이렇게 믿는 이들의 건강한 믿음이 그들로 교회의 필요를 돌아보게 하므로 자발적으로 짐을 지는 사랑의 수고가 나온 것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건강한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고 말씀해 줍니다. 이는 양육을 받는 자뿐만 아니라 사역자들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사역자의 위로와 격려가 무엇이겠습니까? 양육 받는 자들의 믿음이 건전함으로 사랑의 싹이 나오고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볼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양육 받는 자의 믿음의 성장과 진보가 바로 사역자들에게 큰 기쁨과 위로(격려)가 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궁핍과 환란‘ 이란 두 단어는 사역자가 임무를 수행할 때, 받는 어려움으로 궁핍은 물질적인 압박을 가리키며, 환란은 인간에게서 오는 핍박과 고난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의 믿음이 건강하게 성장하므로 이제 이 짐들이 가벼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다”라고 말씀합니다.
8절에서 계속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믿는 이들이 굳게 선 것이 바로 사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준 겁니다. 사역자들이 힘을 얻고 기쁨이 되는 것은- 주 안에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사역의 결과가 고무적일 때, 보람을 느끼고 기쁨의 활력을 얻는 겁니다. 바울의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적 사정을 몰랐을 때는- 무거운 압박감으로 궁핍과 환난을 겪고 있었지만, 이제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을 접하고 난 후에는 다시금 숨을 돌리고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시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바울 사도는 이 놀라운 사역의 결과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여기서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했는데- 이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깊고 놀라운 것임을 고백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기쁨과 감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인하여“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영적인 기쁨이며 ‘너희로 인하여’는 기쁨의 원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고 여러 환란으로 인해 위태롭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음이 너무도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사도들의 염려가 고난을 통해서 더 넘치는 기쁨으로 승화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10절을 봅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앞의 감사 기도와 함께 이제 바울의 기도가 간구로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간구에 대한 강조하는 두 개의 수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야로”이고 ‘심히“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밤낮으로 드려졌고 그 간구함이 심히 간절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깊은 사랑의 감정이 묻어 나옵니다. 바울의 기도는 형식적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의무적인 기도가 아닌 자발적이고 진심 어린 뜨거운 간구였습니다. 바울의 간구는 분명하고 간결했습니다.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즉 그들에게 되돌아가서 만나 볼 수 있기를 바랐고, 그들의 믿음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열정적인 마음으로 간구한 겁니다. 여기서 온전함으로 번역한 헬라어는 <카타르티죠>인데- 올바르게 배열하기 위해서 복구한다는 말인데- 이는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거나 부러진 뼈를 제 자리에 맞추어 치료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여전히 결핍된 걸 더 좋게 만들거나 온전히 복구시키는 상태로 이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때, 이 교회는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머물렀던 기간도 세 주간밖에 되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여러 환란을 잘 견뎌준 것은 정말로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순전한 열정과 충성됨(loyalty)은 최상이었지만 연륜으로 볼 때, 이 교회는 아직도 알아야 할 계시적인 말씀의 지식과 통찰력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야로 간구한 것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저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 때문에 밤낮으로 심히 간구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제 11, 1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수 있게 하시오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기도가 계속됩니다. 11절에서 바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만나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피차간에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믿음과 함께 역사하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서도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바울은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기를 간구하였음을 봅니다.
이제 13절에서 결론을 짓습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기도로 3장이 마무리됩니다.
믿는 이들의 마음이굳건하게 되어서 주님 다시오시는 그날에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기를 바라는것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소망은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 이 세 가지는 거룩한 삶의 세 요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온전케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성령으로 행함으로써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넘치는 은혜 속에서 살면서-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로 서게 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소망‘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어도- 우리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 이 세 가지는 거듭난 성도들을 위한 거룩한 삶의 전부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듭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졌기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거룩한 교회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이 생명이 계속 자라랄 수 있도록 양육되며, 또 양육 받아야 합니다. 이 생명으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거룩한 삶으로 견고케 되도록-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걸 배울 수 있습니다. 아멘!! 우리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은 믿음이 그 기초입니다. 이 믿음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나오고, 더욱 소망이 가득한 견고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도록 믿음과 사랑으로 살도록,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아버지 앞에서 완전함과 거룩함에 있어서 나무랄 데 없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아멘!! 우리 안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하여- 성도의 거룩한 삶의 열매가 풍성히 나타나도록-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 하나님! 저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구속하여 주시고 새 생명으로 살게 하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 안에 시작된 거룩한 삶의 열망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이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나타나게 하시고 이로 인하여 피차에 사랑과 위로와 격려를 받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에게 어떤 시련과 환난이 몰려와도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이를 통하여 더욱더 견고하게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아름다운 성장을 계속하게 하셔서 양육 받고 양육하는 일에 더 충성된 교회 생활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더욱더 아름다운 사랑의 수고가 나오게 하시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칭찬과 부르심의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더욱 인내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제 우리가 더욱더 견고한 믿음으로 풍성한 사랑으로 더 깊은 소망의 인내로 자라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