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이어짐
가야 諸國의 生存外交
서기 540년대에 이르면 花郞(화랑)제도에 의해 臨戰無退(임전무퇴)의 엘리트 戰士團(전사단)을 보유한 신라가 주변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화한다. 가야 諸國으로선 생존을 위해 백제에 기댈 수밖에 없는 정세가 도래했다.
541년, 안라국과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諸國의 대표가 백제에 모여 이미 신라에 복속된 가야 諸國 일부의 재건을 위한 대책을 협의했다. 백제의 聖王(성왕)이 이 국제회의를 주도하고 있지만, 백제와 가야 諸國의 속셈은 서로 달랐던 것 같다.
『이때 백제가 진정으로 南部 가야 諸國의 재건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비(지금의 충남 부여)회의 한 달 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제의 이율배반적 행동은 북쪽의 고구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백제로서는 앞으로 전개해야 할 對고구려 복수전을 위해 신라와의 동맹관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475년, 백제는 장수왕의 고구려軍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왕도 漢城(한성: 지금의 서울 송파구·강동구)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따라서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에 대해 백제가 앞장서 저지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이를 눈치 챈 안라국 등 가야 諸國은 신라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했다. 아마 백제와 연합해서는 존속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듯하다.
서기 540년대에 이르면 花郞(화랑)제도에 의해 臨戰無退(임전무퇴)의 엘리트 戰士團(전사단)을 보유한 신라가 주변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화한다. 가야 諸國으로선 생존을 위해 백제에 기댈 수밖에 없는 정세가 도래했다.
541년, 안라국과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諸國의 대표가 백제에 모여 이미 신라에 복속된 가야 諸國 일부의 재건을 위한 대책을 협의했다. 백제의 聖王(성왕)이 이 국제회의를 주도하고 있지만, 백제와 가야 諸國의 속셈은 서로 달랐던 것 같다.
『이때 백제가 진정으로 南部 가야 諸國의 재건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비(지금의 충남 부여)회의 한 달 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제의 이율배반적 행동은 북쪽의 고구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백제로서는 앞으로 전개해야 할 對고구려 복수전을 위해 신라와의 동맹관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475년, 백제는 장수왕의 고구려軍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왕도 漢城(한성: 지금의 서울 송파구·강동구)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따라서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에 대해 백제가 앞장서 저지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이를 눈치 챈 안라국 등 가야 諸國은 신라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했다. 아마 백제와 연합해서는 존속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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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75호로 지정된 가야의 기마인물형 토기. 무사의 투구와 갑옷, 경갑(頸甲: 목둘레 갑옷), 방패와 창, 마갑(馬甲) 등이 매우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
『이에 백제 聖王은 544년에 제2차 사비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백제는 對신라 戰線에 加耶와 倭만 내세우고 그 자신은 뒤에서 물자만 대겠다는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백제軍의 가야 지역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안라에서 활약하고 있는 親신라계 인물의 축출을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서기」 欽明(흠명) 9년 4월 條를 보면 生存(생존)을 위한 안라국의 외교정책이 매우 인상적이다. 549년, 고구려가 백제의 馬津城(마진성)을 공격했을 때 붙잡힌 고구려軍 포로의 자백에 의해 「안라가 고구려에게 백제를 징벌하기를 권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그것은 고구려와 안라의 密約(밀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안라가 기대했던 고구려는 그보다 1년 전인 548년에 이미 獨山城(독산성) 전투에서 안라의 기대와는 달리 羅濟 동맹군에 대패했습니다. 이후 안라는 다시 백제 편으로 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554년, 백제-가야-倭 연합군이 신라와의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대패하고, 聖王도 사로잡혀 참수당함으로써 백제는 더 이상 안라를 비롯한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안라국은 결국 신라에 병합되고 맙니다만, 안라국의 정확한 패망 연도는 失傳(실전)되었습니다.
『「일본서기」 欽明 22년(561)條에 따르면 신라는 이때 安羅 지역(阿羅 波斯山)에 왜군에 대비해 城을 쌓았습니다. 바로 이 561년 무렵에 안라국이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봅니다』
안라국의 병합 직후인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도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로써 한국 역사상의 4國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멸실상부한 삼국시대가 전개된다.

가야사의 복원에서 「日本書紀」의 비판적 이용은 필요하다. 「일본서기」 繼體條·欽明條 등은 한반도, 특히 가야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가 왜 남의 나라 역사에 이다지도 관심이 많은 것일까. 그 목적은 倭가 4~6세기의 200년 동안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소위 「任那日本府」를 뒷받침하려는 불순한 의도 때문이다.
『가야사의 올바른 복원은 「日本書紀」를 얼마나 제대로 읽었는가, 즉 日本書紀 기사 중 天皇主義 史觀(천황주의 사관)에 의해 날조한 부분을 가려내는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가야의 유물·유적에 대한 안목도 필수적입니다』
일본의 4세기는 「수수께끼의 世紀(세기)」라고 한다. 그것은 「日本書紀」 및 「古事記」의 기사로부터는 일본열도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는 데로부터 유래한다. 그런데도 일본학계에서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南部에 출병해 2세기에 걸쳐 지배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로 강변했다.
일본학계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廣開土王陵碑文(광개토왕릉비문)의 辛卯年(391)條 및 庚子年(400)條 기사 등을 근거로 삼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고교의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出兵과 支配(지배)」가 단정적으로 기술되었다.
「出兵과 支配」라는 일본학계의 通說(통설)이 성립되려면 그 목적과 결과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필요했다. 일본 학계는 「선진기술을 지닌 가야인들과 농·공구 및 무기의 소재인 鐵鋌(철정: 덩이쇠)을 약탈해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야마토 정권이 鐵鋌의 독점에 의해 다른 豪族(호족)들보다도 무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鐵鋌으로 농·공구를 만들고, 선진 기술자(渡來人)의 투입으로 가와치(河內) 지방을 개척해 생산력을 결정적으로 높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廣開土王陵碑文이 日帝 軍部의 의한 石灰(석회) 칠 등으로 조작되었다는 在日 사학자 李進熙(이진희)씨의 비판이 제기되고, 1985년 中·日 학계의 공동조사에서 碑面에 아직 석회가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倭가 辛卯年(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屬民(속민)으로 삼았다』는 따위의 일본 측 해석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다음은 李進熙씨의 「日本文化와 朝鮮」(NHKbooks·1999)에서 발췌한 반박 요지이다.
1) 야마토 정권이 鐵鋌(철정)을 탐해 出兵, 그것의 독점에 의해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했다는데, 이른바 「헐벗은(裸) 군대」가 鐵製 무기와 甲胄(갑주)로 무장한 加耶의 군대를 어떻게 제압할 수 있겠는가?
2) 여러 종류의 가야 기술자를 납치했다는데, 그렇다면 왜 製鐵(제철) 기술자는 붙잡아 가지 않았는가. 일본의 주고쿠(中國) 지방은 가야 지역과 같은 화강암 地質帶(지질대)로서 砂鐵(사철)의 産地인 만큼 그것을 채취해 석탄을 섞어 가열하면 철의 量産(양산)이 가능한데, 그러하지 않고 굳이 철정을 운반해 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3) 철정의 수송 능력의 문제이다. 당시의 배는 20인승 정도의 보트에 불과해 그것에 적재할 수 있는 양은 미미할 것이다. 야마토 정권의 군사력·생산력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오려면 대량의 철을 소모해야 했는데, 당시 倭는 그만한 철정을 수송할 해운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4) 「任那日本府」를 2세기에 걸쳐서 유지했다고 한다면 가야와 신라의 반격이 있게 마련인데, 4세기 말엽의 야마토 정권에겐 戰況(전황)에 따라 대군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열도에서 통일정권이 등장한 것은 6세기 후반의 일이다.


對馬島로부터 대한해협을 건너려면 北流하는 「恒流(항류·완류)」와 潮水(조수)의 干滿(간만)에 의한 「潮流(조류)」 그리고 「풍향」, 이 세 가지를 능숙하게 이용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恒流는 끊임없이 北東流하지만, 조류는 하루에 두 번 北東流(썰물)와 南西流(밀물)로 바뀐다.
日本 해상보안청이 8월부터 11월에 걸쳐 관측한 자료에 의하면 바닷물이 북동류하는 썰물 때가 아니면 古代 선박은 對岸(한반도 남해안)으로 도달할 수 없다. 즉, 이때 대마도 西岸의 북동류하는 조류의 속도는 2.7노트(5km/時)인데 부산 앞바다에 가면 3.8노트(7km/時)로 빨라진다. 따라서 북동류의 시작 때 대마도 西岸으로부터 배를 저어 南西流로 변하기 전까지 항해해야 對岸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南西流하는 밀물 때 노를 저어 건너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늦가을에 들어 북서계절풍이 불기 시작하면 삼각파도가 치는 날이 많아져 다음해 봄까지 渡海(도해)할 수 없다.
「續日本紀」에 의하면 702년 遣新羅使(견신라사)는 늦가을에 대마도의 아소완(淺茅灣)까지 와서 703년 봄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다. 결국 겨울철을 포함한 그 전후 반 년 가까이는 渡海(도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렇듯 兵站(병참)이 연중 절반 가까이 중단되는 상황에서 소위 「任那日本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갈 경우엔 겨울철 항해가 안전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기원전 3세기로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의 1000년 동안 100만 명의 이주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갔다(月刊朝鮮 2006년 4월호 참조).
그 이주민(渡來人)들의 原籍(원적)이 어디이든 그들의 출발항은 김해·마산·진동·하동 등 가야의 항만이었다. 신라 출신 이주민들의 출발항은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서 나타나 있듯 포항으로 보이지만, 赫居世(혁거세) 시절부터 신라는 倭와 宿敵(숙적)관계였던 만큼 신라 출신 이민은 가야 출신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古代 일본 건국사는 가야 출신 이주민의 일본열도 개척사에 다름아니다. 현대 일본인의 80%가 古代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의 「月刊朝鮮」 前月號 기사에서 거론했다. 어떻든, 아득한 古代에 벼농사가 더 잘 되는 땅을 찾아 대한해협을 건넜다는 것은 모험심 강한 족속들이었고, 그 후손들이 오늘날 세계적 경제대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 같다.
白承玉 박사의 안내로 함안박물관 2층 전시실에 입장했다. 전문가에게 박물관에 관한 설명을 듣는 것은 행운이다. 함안박물관은 그리 크지 않지만, 매우 알뜰한 학습장이다. 1세기代의 주머니 단지, 2~4세기代의 굽다리 접시, 5세기代 손잡이 있는 잔과 그릇받침 등 토기들이 요령 있게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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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의 前方後圓墳인 오사카 소재 大仙陵(仁德왕릉으로 전해짐). 左上은 日本 랭킹 3위 규모인 陵山고분. |
불꽃무늬 土器가 다량 출토된 지역은 함안과 그 주변 지역인 창원·마산·의령·진주의 일부 지역이며, 멀리는 김천·거창·경주·부산, 일본의 긴키(近畿) 지역 등이다. 긴키 지역, 즉 일본의 옛 수도권 지역에서 이 5세기 咸安의 불꽃무늬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 곳은 로쿠다이(六代) 유적, 후루(布留) 유적, 큐보지(久寶寺) 유적, 스즈노미야(鈴の宮) 유적 등이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불꽃무늬 토기는 약 150점이다. 이 가운데 함안 지역에서 1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같은 지역 가운데 토기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지금의 함안과 그 주변 지역인 창원·마산·의령·진주 일부 지역은 안라국의 영역으로, 그 밖의 지역은 안라국과 교류했던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다 건너 倭와는 鎭東이나 馬山港을 통해 교류했던 것입니다』
아라가야의 유물과 아라가야인의 유적은 北규슈와 긴키 지역을 이어 주는 뱃길인 세토(瀨戶) 內海 연안인 주고쿠(中國)·시고쿠(四國)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아라가야式 토기와 山城이 발견되었고, 심지어 가야神을 祭神(제신)으로 모시는 神社(신사)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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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일본에서 혁신적 기술 진보로 제작된 土器인 스에키. |
실제로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의 긴키(近畿) 지방에는 특이한 형식의 거대 무덤들이 축조되었고, 그 주위는 물이 흐르는 周濠(주호)가 감싸고 있다. 그러나 매장시설은 墳口(분구) 상부 바로 밑에 竪穴式(수혈식) 石室을 설치하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이다.
또한 副葬品(부장품)도 同시대 가야의 왕급 무덤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예컨대 대량의 청동기와 玉類(옥류), 石製 팔찌 등 샤머니즘과 관련된 寶器的(보기적)·呪術的(주술적) 성격이 짙은 유물뿐이고 야마토 정권의 강대한 군사력 및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在日 사학자 李進熙씨는 그의 「일본문화와 朝鮮」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부장품으로 말한다면 히미코(卑彌呼: 그녀는 北규슈 소재 야마다이國의 샤먼的 女王으로 「三國志」 東夷傳에 표현되어 있음)가 군림했던 3세기 중엽의 일본사회와 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古墳(고분)이 거대화한 것은 강대한 정치·군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샤먼的 권위의 肥大化(비대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5세기에 들어오면 일본열도에는 새로운 문물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에키(須惠器)」라고 불리는, 단단하게 구운 토기이다. 스에키는 흙(胎土)을 손으로 반죽해 700~800℃로 구운 종래의 토기(土師器: 하지키)에 비하면 혁명적인 新제품이었다. 우선, 녹로(회전판: 물레)의 遠心力(원심력)을 이용해 대량 생산될 뿐만 아니라 規格品(규격품)도 제조 가능했다.
또한 登窯(등요: 오름가마)의 출입구를 일정 시간 동안 막아 1200℃ 이상의 還元焰(환원염)으로 스에키를 제작했다. 그 결과, 물을 부으면 튀길 만큼 탄력적이고 쉽게 깨지지 않는 튼튼한 그릇이 되었다.
―스에키와 불꽃무늬 토기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스에키는 가야 토기의 亞流(아류)이며 모방품입니다. 스에키는 「가야系 陶質土器(도질토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스에키는 登窯와 耐水粘土(내수점토), 회전판, 還元焰燒(환원염소)라고 하는 네 개의 新기술의 등장을 의미한다. 「일본서기」 雄略 7년(463) 條를 보면 新漢陶部高貴, 鞍部賢貴, 畵部因斯羅我, 錦部定安那錦, 譯語卯安那 등 가야·백제·신라 등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기술자들의 이름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또 하나의 혁명적 사건은 5세기 중엽에 일어났다. U字形 가래와 호미, 칼날이 彎曲(만곡)한 낫, 대형 톱 등 새로운 철제 농구의 등장이다. 새로운 가래와 호미는 深耕(심경)을 가능하게 했고, 철제 낫과 톱은 풀베기 및 나무의 가지치기에 위력을 발휘했다.
또 대형 톱 및 가래, 호미는 原野의 개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이것들이 한반도에서 유래했던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의 古문헌에 보이는 「韓鋤(한서: 가라사히)」라든가 「韓鍛冶(한단야: 가라카누치)」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가라」는 新기술과 新제품의 대명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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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모양 토기. 함안읍 도항리 4호분에서 출토. |
이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실용품이 아니라 儀器(의기)로 제작된 것 같다. 古代人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거나 그 힘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위해 일련의 儀禮(의례)를 행하는데, 그때 사용되는 도구를 儀器라 한다.
함안박물관에는 함안지역 3세기 木槨墓(목곽묘: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儀器性 철기인 미늘쇠(有刺利器)가 진열되어 있다. 미늘이 동그랗게 휘감긴 고사리 모양과 새(鳥)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儀器性 투겁창(鐵矛)과 더불어 首長層(수장층)의 대형 무덤에서 발굴되는 유물이다.
손잡이가 정교한 문양과 金象嵌(금상감)으로 아로새긴 環頭大刀(환두대도: 고리자루칼), 아라가야 지배층의 부녀자의 것으로 보이는 玉製 목걸이도 눈길을 끈다. 4~5세기 아라가야 匠人(장인)들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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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모양 토기. 함안읍 도항리 (문)39호에서 출토. |
「대구집」에 앉았다. 사골과 등뼈를 우려 낸 국물에 양지머리와 등심 고기, 그리고 고구마 줄기를 넣어 다시 푹 끓인 장국밥은 입맛에 맞았다. 칠순 전후의 주인 할머니를 모시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제는 故人이 되었을 「趙大木의 그 후」를 물어보았다.
『버얼써, 별세하셨습니더』
물론 그럴 것이다. 45년 전 필자가 그 댁을 빙문했을 때 趙大木은 벌써 칠순이었다. 그 날, 趙大木의 부인은 까까머리 필자 앞에 식혜·강정·곶감 등이 차려진 소반을 내려 놓으며 『곶감 하나 드소, 이거 옛날 같으면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르는 거요』라고 말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