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살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살아보지도 않고 죽어간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제2장 초두에 나오는 장 자크 루소의 뼈아픈 토로다.
왜 살지 않았겠나. 그가 이 글을 쓸 때는 그의 인생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였는데.
하지만 루소의 의식엔 가난과 고통과 인간세상에서의 부대낌으로 점철된
자기 인생에 드러난 거대한 공백이 자기 인생의 부재처럼 의식됐을 것이다.
루소는 자기가 난 아이들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맡기는 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또 피해망상증이 심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백록 등 그의 책에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과대 피해 의식이 나타난다.
그런 걸 제외하면 뭐가 됐든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다.
책 속에서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의도적인 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했다.
자기 자녀 다섯명을 좋은 말로는 고아원에 위탁한 것이요,
나쁜 말로는 내다버린 행위가 되기에 그의 그런 주장은 공신력을 얻기가 힘들다.
그의 고백으로 보아 인생 말년에 자기 인생 전체를 의미 있게 채워주는 영적 생명의 부재를 경험했을 것이다.
영적 관계의 부재와 자기 인생의 영적인 의미 부재. 이것이 문제다.
나름대로는 자기 인생을 경영하려고 했던 한 철학자의 뼈아픈 고백에서 인류 일반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각자 역할을 찾아 수행하는 일개미들.
그들은 수많은 장소 수만 가지 직업에 종사하며 수많은 조건과 싸워가면서 자기 인생 실현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여념이 없을 정도로 자기 일에 몰두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최종 심판을 비껴갈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된다.
나름대로 살았다는 것이 최종 운명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인생에는 준엄한 기준과 준엄한 심판과 준엄한 결과라는 게 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을 주관적으로 운영한 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인생의 질과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다.
그것을 누가 하는가? 하나님이 하신다.
자신은 결백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는 유서를 남기는 사람이나,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현재의 자신은 비참하다는 유서를 남기는 사람이나,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유서를 남기는 사람이나,
아니면 유서 없이 인위적으로 생을 하직하는 사람이나 우리는 많은 자결자를 접한다.
또 그런 방법은 아니더라도 늙어서 정신이 떨리거나 공황 상태에 이르기까지 견디는 사람도 접한다.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
준엄한 기준과 준엄한 심판과 준엄한 결과 모두를 통과하며 생명의 결과에 이르는 것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접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세속적 기준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받아들여진 자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보았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루소가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작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나 충족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종종 만났다."
고 말한 부분이 의미 있지만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충족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진정한 행복, 진정한 충족, 진정한 영광이 무엇인가?
나는 안다. 나는 믿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보배라는 것을.
회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회한마저 자기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바꿔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8장 28절의 비밀인 것이다.
2026. 7. 6
이 호 혁
첫댓글 아멘~잘 읽었습니다.
아멘!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