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2(일) 낮 기온이 무려 37도라 한다.
일진선사에게 문안 인사차 전화하다.
원담: 아침부터 밖에서 열기가 들어오는 데 지내시기에 어떻습니까?
일진: 응, 꼼짝 안 하고 쉬고 있지. 움직이면 더워.
원담: 며칠 전 나눈 대화를 회상하다가, 파자소암 공안에 대해 향곡스님이 일찍이 답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노파가 보낸 딸이 암자 스님을 껴안고 ‘이럴 때 어떠합니까?’라는 말에 향곡스님은‘비구니는 본래 여자가 하는 것이지(師姑는 원래 女人作)’이라 했다고 그분의 어록에 나옵니다. 나름 平常의 도리로 如如함을 이른 것인데, 이제 做作이지 뭡니까?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진: 아이고, 큰 스님에 대해 평하는 건 조심스러워. 향곡스님의 견처가 엷은 것은 알려진 바라. 그 양반이 두 번에 걸쳐 깨달았다는 에피소드가 있지. 첫 번째는 천성산 내원사에서 운봉스님 모시고 살 때 문짝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듣고 홀연히 契悟했다고 하죠.
원담: 두 번째는 성철, 보문, 자운스님들과 봉암사 결사 때 탑(봉암사 금색전 아래 있는 삼층석탑) 밑에서 선정에 들어있다가 무릎에 놓인 자기 두 손을 보고 문득 깨달았고 하죠. 그래서 ‘忽見兩手全體活….’운운하는 오도송을 지었다고 해요.
일진: 그게 의심스러워 깨닫고 나서 8구절이나 되는 문장이 바로 나왔겠느냐는 거, 아마도 나중에 그 상황을 멋있어 보이게 지은 거 겠지. 그 양반이 정식으로 한문 교육을 받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원담: 파자소암 공안에 대해 전강스님은 이렇게 말씀했어요.’거기에 쌔바닥(혓바닥)을 댔다간 저 죽고 말지’라고 했어요. 입을 벌려 혓바닥을 굴리는 찰나 죽어 버리고 만다는 말이죠.
일진: 그 참, 제대로 핵심을 팍 찔렀네.
소문으로 듣던 예전의 큰 스님들의 견처가 지금 보면 명실상부하지 않은 게 더러 있어. 조심스러워 말은 못하겠지만 경허, 만공, 성철, 서옹, 향곡, 등등, 명성이 높고 후손의 세력이 짱짱하니, 뭐 어쩌겠나?
원담: 그러고 보니 주류에 들지 못한 스님, 예를 들어 춘성스님, 장설봉스님, 밀양 표충사에 계셨던 해산스님은 진짜 자기 실력으로 살았던 분 같아요.
일진: 그렇지. 그 양반들이야 문중의 배경도 없고 명예도 없는 비주류 선사이니 진짜 자기실력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지. 그런데 원담스님, 공안과 화두의 차이를 아는가?
원담: 말씀해 주세요.
일진: 公案이란 역대 조사가 문답을 통해 바로 直指하여 頓悟하게 만들었던 방편 言句이지. 문답이 오가는 찰나 바로 깨닫게 하여 끝내 버리지. 한바탕 소식이 확 드러나는 게야. 번개 같은 찰나에 번쩍! 그 때 거기에 알아차리지 못하면 담장 밖에 우두커니 서있는 멍청이 밖에 못되지. 반면 話頭란 공안문답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그에 대한 궁금증이 마음에 의문으로 사무쳐서, 그 의심을 끌고 간다면 그게 ‘화두를 본다’고 하는 看話禪이란 말이지. 그런데 선사들은 보통 공안을 척 보는 순간 깨닫지, 화두 일념에서 깨닫는 일은 드물어. 그런데 요즘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寤寐一如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니 부지하세월이야. 이게 성철스님의 내세운 오매일여의 폐해야.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선방에서 깨달은 사람이 나오기 힘들어. 경허스님만 해도 그래. 괴질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발심해서 동학사 조실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를 들고 의심을 지어가다가 방 바깥 툇마루에서 사미승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고 하 잖아. 그러니 화두일념이 중요하지 않는 게 아니지만 깨달음에 대한 열망과 궁금증이 가득 찬 상태가 되어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지경에 홀연히 들리는 한 소리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화두를 들고 오래 앉아 오매일여가 되기를 기다린다면 깨달음은 불가능합니다.
원담: 저보다 10년 정도 선배 되는 스님들이 가끔 법상에 올라 법문하시는 걸 들으면 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스님은 오매일여가 됐습니까?’라고 따지고 들까 봐 없지 않아 주눅이 들어 자신감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화두 의심을 어떻게 지어가며, 자기는 잘 안 되는 것을 어떻게, 어떻게 하여 지금까지 용케 끌고 와서는 지금 이렇게 건재하다는 식의 자기 고백, 그리고 심심을 가지고 해나가다 보면 좋은 소식이 올 거라는 신심, 열심, 간절, 참구…..이런 식 법문이라, 용두사미가 되고 맙니다. 대혜선사가 자기 스승 원오극근 선사에게 어떻게 하면 오매일여를 이룰 수 있습니까? 물으니 ‘망상하지 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바로 알아차려야지, 오매일여의 경지란 게 별달리 따로 있는 줄 알면, 그것 참 말릴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고질병이라. 그야말로 擔板漢(등에 판자를 짊어지고 다니는 놈이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됩니다.
일진: 그게 간화선의 병폐라. 거의 待悟禪(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며 죽치고 앉아 있는 식의 수행)입니다. 조계종 참선 수행스님들은 선의 핵심인 ‘言語道斷, 心行處滅’의 이해가 전혀 없는 듯이 보여요. 오매일여의 경지가 따로 있는 줄 알면 주 쑤어 개 주는 꼴이라. ‘나’가 사라지면 生滅이 그대로 깨달음이지. 깨달음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 있든 없든 거기에 놀아나지 않는 상태, 이 깨침이 오매일여하다는 말이죠.
원담: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요.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일진: 응,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