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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새해 설날이 햇님과 조상님에게 올리는 제사라면 , 정월 대보름은 달님에게 드리는 제삿날, 대개는 동제를 지냅니다.
오늘은 그 동제 ㅡ 특히 마을 수호수에게 드리는 당산제를 소개합니다.
광주특별시 우산동의 서작/동작마을 당산제에 대해서 자료를 이용해서 알아봅니다.
대부분의 마을에서 행하는 것과 거의 대동소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마을 전통 제사 민속입니다.
<당산제 : 광주 우산동 서작마을, 동작마을 >
출처 : 한국학연구원, (오마이뉴스)이슬떨이 블로그에서
(2025.02.20.(목)사라져 가는 우리 역사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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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글로벌 웹 아이콘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인문학연구소 https://dh.aks.ac.kr › ~gwangju › wiki › inde
개요 : 광주 지역 당산제 보기
당산제는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의례이다. 당제, 당산제, 당산굿, 당고사, 당산고제(古祭), 산제, 돌탑제, 당마제 등 지역마다 이름이나 제의 형식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호남지방에서는 당제 또는 당산제라는 명칭이 일반적이다. 특히 광주와 전남권을 비롯한 내륙 지역에서는 당산제, 해안도서 지역에서는 당제라 각각 불리는 것으로 보인다.
제일(祭日)은 주로 음력 정월대보름이나 정초가 가장 많고, 그밖에 10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공동 시설인 우물·창고·정자·다리 등을 돌면서 굿을 친 다음 각 가정을 방문하여 굿을 치는데, 이를 매구치기 또는 마당밟기·지신밟기라고도 한다. 또한, 당산제가 끝난 당일이나 그 이튿날 밤에는 마을사람들이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여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데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당산제는 다른 동제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한편, 마을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축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광주 당산제의 대표로 광주 남구 칠석동은 풍수지리설상 터가 세기 때문에 그 터를 누르기 위해서 매년 정월에 당산제를 모시고 마당밟이 굿을 치며 고싸움놀이를 해왔다고 한다. 이 칠석동_칠석마을_당산제는 마을 위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인 소나무와 마을 앞 은행나무인 할머니당산에서 지내는데, 할아버지 당산은 술도 안 들고 비린 것도 먹지 않아 나물과 미역국, 냉수로만 제사를 모신다. 할머니 당산은 술, 고기를 다 잘 먹기 때문에 한 상을 장만하여 정성을 드려 지낸다. 할머니 당산나무인 칠석동은행나무는 1979년 8월 3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광주 동구 지원동 용연마을도 60년대까지도 당산제를 지냈고 녹동마을에서는 은행나무를 당산으로 삼았고 소태마을에서는 소나무를 당산으로 삼아 당산제를 했었다. 광주 서구 덕흥동 덕흥마을에서는 당사나무 벽화 길이 있다. 덕흥마을은 2018년부터 다시 당산제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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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우산동 서작마을 당산제 (牛山洞西作-堂山祭)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서작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우산동 서작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서작마을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1912년 마을 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일대는 우산면 동작리, 서작리, 신기리, 향약리, 당사리, 마지면 운림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산동으로 통합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당산제는 1990년대까지 자연마을별로 모셔졌다. 이후 도시 개발 여파로 자연마을이 와해되면서 우산동 당산제로 통합 운영되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서작마을에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두 곳이 있었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뒤편 고갯마루의 밭둑에 있는 흙무덤인데 당산제의 제단이자 헌식터로 사용되었다. 당산 옆에는 팽나무 세 그루[고씨가 심었다 하여 '고정자(高亭子)'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수령은 500년이 넘는다고 한다. 할머니당산은 마을 앞의 느티나무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벌목되었고, 그 후에 주변에 있던 작은 입석에 모셨으나 이마저도 없어졌으며, 마을회관 앞 길옆에 작은 흙무덤을 만들어 할머니당산으로 모셨다 하나 현재는 흔적이 없다. 원래 서작과 동작은 한 마을로 서작의 할아버지당산과 동작의 할머니당산을 시간만 달리하여 모셨으나, 동작과 서작이 독자적인 당산제로 분화되면서 서작에 할머니당산이 새로이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절차]
우산동 서작마을 당산제는 정월 3일경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과 축관 1명을 제관(祭官)으로 선정한다.
화주는 제물(祭物)을 장만하는 사람으로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이 잘 맞아야 하고, 집안에 궂은 일이 없는 사람으로 정한다.
축관도 화주의 몸가짐에 준한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제비(祭費)를 각 가정의 남자 수만큼 할당하였다. 8.15 해방 이후에는 마을 공동 소유의 토지를 임대하여 비용을 충당하다가, 토지를 팔아 새로 지은 마을회관을 임대하여 제비를 마련하였다.
제물은 화주집에서 준비하는데, 제일(祭日) 아침에 장에 가서 구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물을 살 때에는 값을 깎지 않으며, 제기(祭器)는 매년 새로 구입하여 제사 이후 화주가 소유한다.
화주는 제물을 만들기 전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제일 3일 전에는 당산 주변, 마을 골목, 화주집 앞, 공동 우물 등에 금줄을 친다. 제일 아침에는 금줄이 있는 곳에 금토(*禁土)를 깔아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정월 열나흗날 초저녁에 화주 부부가 공동 우물에서 목욕을 한다. 집으로 돌아온 화주 부부는 메와 국을 끓여 마지막 준비를 한다. 밤 11시부터 12시 사이에 할아버지당산에 먼저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화주 부부와 축관 등이 제물을 들고 앞서 가면 굿을 치는 사람들이 뒤따라가며 들당산굿을 친다.
당산에 오르면 축관의 지시에 따라 화주 부부가 제물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굿을 그치고 화주 부부가 분향 재배를 올리고 축관이 독축을 한다. 독축이 끝나면 다시 재배를 하고 사신배를 올려 굿을 마친다. 이후 화주는 마을을 대표하여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끝나고 나면 제단에 차렸던 모든 제물을 깨끗한 백지로 싸서 땅에 묻는 헌식을 한다.
제상(祭床)에 올렸던 음식은 일절 음복하지 않고 모두 묻는다.
할아버지당산의 제사가 끝나면 굿을 치며 화주집으로 내려와 한 시간 가량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논다.
이후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차(祭次)는 할아버지당산과 같지만, 돼지머리가 제수에 포함되는 것과 독축이 생략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당산나무 옆에 제물을 헌식한 후 제사의 끝을 알리는 나발을 불면 각 가정에서는 조상에게 메[제사 때 신위(神位) 앞에 놓는 밥]를 올린다.
[축문]
우산동 서작마을 당산제는 독축을 할 때 촌제 축문을 읽는데, 이외에는 육갑(六甲)을 6회 읽는다. 마을 사람 모두의 성명과 사주를 읊을 수 없기 때문에 육갑으로 대신한 것이다.
[부대 행사]
할머니당산에 제사를 올린 후 미리 준비한 '허천밥'을 가지고 마을 앞 개울가를 돌아다니면서 흩뿌리는데, 농악대가 그 뒤를 따라 굿을 친다.
당산제를 지내고 사흘 뒤에는 '삼우날'이라 하여 마을 주민이 화주집에 모여 화주가 장만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마을회의를 하는데, 화주의 노고를 치하하고 당산제의 결산, 마을의 대소사 등을 의논하고 정한다.
[현황]
1990년대까지 우산동의 자연마을별로 서작마을 당산제가 모셔졌으나, 이후 자연마을이 와해되면서 우산동 당산제로 통합 운영되고 있다.
우산동 당산제는 '우산동 정월대보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산구의 후원을 통해 개최되고 있는데, '정월대보름 우산동 주민화합 민속축제', '우산골 달맞이 축제' 등의 세부 행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집필자 : 부유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광주) 우산동 동작마을 당산제
[신당/신체의 형태]
동작마을의 당산은 상천룡당산, 중천룡당산, 샘당산의 세 곳이다. 상천룡당산은 서작마을의 할아버지당산에서 100여m 떨어진 곳인 마을 뒤쪽 산등성이에 있었다. 황토로 제단을 쌓은 형태로 당산나무는 없다. 중천룡당산은 마을 동쪽의 중턱에 뿌리내린 느티나무였는데, 태풍으로 쓰러진 후 작은 느티나무를 신체로 여겼다. 당산나무의 밑둥에는 황토로 쌓은 제단이 있었다. 샘당산은 샘거리라고 불리는 자리에 있던 마을 공동샘이었다. 1993년 조사 시 주변의 형상이 너무 변하여 상천룡당산, 중천룡당산, 샘당산 등이 모두 훼손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현황]
1990년대까지 우산동의 자연마을별로 동작마을 당산제가 모셔졌으나, 이후 자연마을이 와해되면서 우산동 당산제로 통합 운영되고 있다.
우산동 당산제는 '우산동 정월대보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산구의 후원을 통해 개최되고 있는데, '정월대보름 우산동 주민화합 민속축제', '우산골 달맞이 축제' 등의 세부 행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3. 지역 주민과의 대화에서
정병호 어르신이 들려준
서작마을 정월대보름 당산제 이야기다.
서작마을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에 속한다.
어르신은 서작마을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당산나무 쉼터에서 만난 몇몇 어르신이 들려주는 당산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당산제는 해마다 지냈다.
먼저 마을회의를 통해 화주와 제관을 뽑았다.
화주와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가려야 할 것이 많았다.
궂은일은 멀리해야 했다. 초상집에도 가지 않아야 했다.
서로 화주를 맡지 않으려고 하는이유다.
이후엔 하릴없이 노인회원들이 맡았다.
<비용 문제>
비용은 마을 소유의 논을 빌려준 대가로 충당했다.
논을 팔아 마을회관을 지은 뒤로는, 회관 임대료로 충당했다.
당산제 비용은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계. 두레.. 의 흔적)
옛날처럼 돼지를 잡는 것도 아니고, 음식도 간소하게 준비하기 때문이다.
‘붕알전’으로 비용을 충당하던 때도 있었단다. (*붕알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마을사람들이 곡식을 십시일반 모아 비용으로 썼는데,
남자들만 냈다. 하여, ‘붕알전’이다.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라고 했다.
당산제에 쓸 제물을 살 때도 값을 흥정하지 않았다. 물건을 파는 장사꾼도 좋은 물건을 골라서 줬다. 화주의 집에서 제물을 장만하는 과정은 청결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화주는 마을 공동우물의 물로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 외에, 다른 주민들의 공동우물 출입도 막았다.
당산제를 지내기 사흘 전에는 당산 주변과 마을의 고샅, 화주의 집 앞, 공동우물 등에 금줄을 쳤다.
금줄을 친 이후엔 생선 같은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
화주는 물론 마을주민들도 모두 그렇게 했다. 예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정월대보름 전야가 되면 화주는 또다시 목욕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참기름 불을 바가지에 담아 우물에 띄웠다.
일년 열두 달 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쌀과 미역을 섞은 맑은 죽을 쑤어 고샅에 뿌리기도 했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믿음에서다.
이 풍습을, 보름달 구경과 한데 어우러져 '달궁'이라고 했다.
당산제를 지낼 시간이 가까워지면 화주는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흰떡과 설기떡도 했는데, 간을 일절 하지 않았다.
제사 지낼 시간이 되면, 화주의 부인은 공동우물에서 참기름 불을 가져왔다.
그는 참기름 불을 담은 시루를 머리에 이고, 화주는 제물이 든 대바구니를 들고 당산으로 향했다.
그 뒤를 제물과 풍물패가 따랐다.
제사상을 받은 서작마을의 팽나무는 당산 할아버지 나무다. 옛날엔 할머니 당산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베어버렸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서작과 동작은 본디 한 마을이었다.
당산제도 서작의 할아버지 나무와 동작의 할머니 나무에서 따로 지냈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함께 이용했다.
다만 제사 지내는 시간을 달리했다.
서작마을의 당산 할아버지 나무는 '고정자나무'로 불린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장흥 고씨가 심었다고 이름 붙었다.
고정자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느 날, 마을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이 소 한 마리를 훔쳐 끌고 가는데, 나무 주변만 빙빙 돌았다. 도둑은 발을 동동 굴렸지만, 마을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동이 트고, 때마침 논으로 향하던 마을사람한테 붙잡혔다. 사람들은 당산나무가 소도둑을 잡아줬다고 믿었다.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한테 놋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을사람들이 나무 아래에다 놋그릇을 숨겨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당산나무가 돌봤다는 얘기도 있다.
당산나무의 나뭇잎이 한꺼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얘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당산나무 아래에 쉼터가 있다. 이른바 '고정자'다. 지금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엔 전망이 정말 좋았다. 무등산도 훤히, 가까이 보였다.
"옛날엔 초가 세 칸짜리 정자였어.
대나무를 엮어서 마루를 만들었지.
동네사람들이 다 함께 이엉을 엮고, 지붕도 올렸어.
집집마다 나와 울력으로 했어.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였지.
우리는 그때 어려서, 얼씬도 못했어. 주변에서 소를 많이 키웠고, 소를 매어두기도 했는디. 논밭에서 일하다가 오신 어르신들은 쉬면서 막걸리도 한 잔씩 허고. 지나가는 지게꾼이나 리어커꾼도 쉬어가곤 했는디. 그때는…."
정병호 어르신의 회고다.
어르신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추억 속의 풍경으로만 남았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벌써 수십 년 전에 없어졌다.
1970년대 이후 새마을사업과 토지정리, 도시개발 등으로 모두 사라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던 개울도 덮여 도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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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도 당산제가 있는지 정월 대보름이면 궁금해집니다.
(*대전은 유천동도 있고, 대사동도 있고... 곳곳에 자연부락마다 고유의 동제가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본격적인 봄 농사 준비로 들어갑니다.
아직도 입춘 추위는 맹위를 떨치고 있네요. 건강하세요.
(2025년 2월 20일 (목) 카페지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