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번을 봅시다. ‘정의의 원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용어가 롤스에게는 문제 없지만, 노직에게 사용해도 될까요? 노직은 자신의 소유권 이론을 entitlement theory라고 했고, 그 내용을 ‘취득, 이전, 교정’으로 설명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정의’라는 용어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그 용어의 사용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에요(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더욱이 우리 교육과정에서는 ‘정의의 원칙’은 롤스에게 특유한 용어로 가르치고 있고, 노직에 있어서는 ‘소유할 권리’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죠.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정의의 원칙’은 롤스에게 특유한 용어로 배웠는데(그리고 학문적 팩트에도 부합함), 느닷없이 그 용어가 노직에게도 공유된다는 게 평가원의 입장이라면, 상당히 혼란스러울 겁니다.
평린이 여러분! 나는 당연히 여러분도 그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도무지 선지를 만들 수 없다 보니 그런 무리수를 감행한 거겠죠. 롤스와 노직의 공통점에 무엇이 있을까요? 몇 개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이미 다 써먹었고, 심지어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내용 역시 이미 선지로 써먹었는데, 여기에 뭔가 새로운 표현을 첨가해야만 할 것 같으니 느닷없이 ‘정의의 원칙’이라는 표현을 두 사상가의 공통점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학문적으로 검토된 건가요? 여러분은 학문적으로 검토할 실력도 솔직히 안 되잖아요? 그러니 시간은 없겠다, 이 표현의 정오를 가려줄 실력 있는 사람도 없겠다, 욕은 먹겠지만 그냥 모른 척하면 되지, 하는 심정(자포자기하는 심정 및 이심전심)으로 ‘정의의 원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자꾸 평가원 윤리 문제들을 싸구려로 보이게 하는 겁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달리 대안도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차피 실력 있는 사람을 섭외할 수는 없고, 윤리교육과 풀에 실력 있는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고 윤리 교과를 수능 과목에서 제외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①번도 역시 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 ①번도 다시 써봅시다.
① 천부적 자산에 대한 개인의 소유 권리는 제한될 수 없다.
이것 역시 엄밀하게 말하면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롤스는 천부적 자산은 ‘개인의 소유’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증거 제시 안 함). 이 문제에 있어서 롤스에게 중요한 것은, 천부적 자산이 누구의 소유인가가 아니에요. 그러니 천부적 자산에 대한 개인의 소유 권리가 제한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해서 롤스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것은 롤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은, 여러분이 롤스 이론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롤스 이론, 물론 어려워요. 그러니 띨띨한 여러분이 헤매는 거죠. 어쨌든, 이제 전국의 윤리교사들, 찌질한 인강강사들, 생윤을 선택한 학생들은 ‘롤스는 천부적 자산에 대한 개인의 소유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무조건 암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평린이들 입장’이라면, 한번 물어봅시다.
천부적 자산에 대한 소유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데, 어떻게 제한될 수 있다는 건가요? 어떻게 하는 게 천부적 자산에 대한 소유 권리를 제한하는 겁니까?
지금 여러분의 지식수준이 너무나 형편없으니...공부 더 열심히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적해준들, 이게 10년 안에 해결될 사태겠냐는 절망감만 듭니다.
참 답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