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김욱동/민음사
동떨어진 시골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부친상을 당합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시골에 돌아와 아버지가 남긴 자그마한 농장을 운영합니다. 농장 운영이 맞지 않아 매물로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운영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병환이 깊어집니다. 병치레를 위해 한 여자가 집에 들어옵니다. 어머니는 병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뜹니다. 병치레를 위해 집에 온 여자와 살림을 꾸리게 됩니다. 그 여자도 몸에 좋지 않게 됩니다. 아내가 된 여자는 자신을 돕기 위해 도우미 여자를 들입니다.
남자의 남성은 이 여자를 통해 드러납니다. 여자의 속내나 마음은 소설에 나오지 않습니다. 마을 행사가 있던 날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구체적으로 여자를 안아볼 생각을 합니다.
여자인 아내는 남자의 변화를 눈치챈 것일까요. 지금의 아이를 돌려보내고 다른 아이를 들이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생각을 토해냅니다. 해결 방법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이 순간을 멈추는 방법 외에는 없어 보입니다.
둘이 탄 썰매는 죽음을 향해 미끄러진 듯했으나, 여자만 반신불수가 됩니다.
집에는 이제 남자와 반신불수가 된 젊은 여자, 그리고 젊은 여자를 수발하는 아내인 여자, 이렇게 3명이 기거하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운명인가 선택인가?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이선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핑계 삼아 현재 구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 같)고, 해서 마지막 수단인 자살까지 동원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가족으로 돌아와야 했고, 부양가족에는 젊은 매트가 추가되었다.
책을 덮으면서 박범신의 [소금]이 떠올랐다. 가정을 떠났지만, 다른 가족을 구성하고 만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은 서로 계산할 수 없는, 필요가 없는 가정(가족)이며 이것이 사회를 지켜나가는 주된 요소로서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것으로 나에게는 읽혔다. 그리고 [이선 프롬]에서도 동일한 코드가 느껴졌다.
가족이라는 코드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경제활동의 최소 단위이고 가족의 수에 따라 벌어들이는 금전에도 차이가 발생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 가족에 대한 의미와 정의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이디스 워튼은 이 시대에 느꼈을까? 이전에 읽었던 전작 [여름]에서도 나는 비슷하게 느꼈다.
어쩌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가족, 평안함을 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 그리고 결국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족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26년 지금의 나는 작가에 동의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