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로 나를 포함하여 '푼수' 몇을 불렀다. 거기에는 박 교수도 있었고 안 교수도 왔다. 안 교수는 교수가 아니어서 내가 임의로 붙인 직함인데 호가 '대야'다. 너른 벌판처럼 살란 뜻을 담았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삿갓을 쓰고 쪽을 낸 틈새로 고누어 붙인 이름이다. 안 교수가 그 뜻이 좋다고 입이 벌어진 데 대해 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다만, 대야 앞에 '세숫'이란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주 교수는 미국의 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하)고, 지방 대학 두어 곳에서 또 박사를 받았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런가보다...그렇겠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런가?'하고 갸웃거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주 교수는 여지없이 푼수짓을 하고 있었을 때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얼마 전에 박 교수와 함께 충남 보령의 조각 심포지움에 다녀오는 길에 '말이 그리운 사람끼리 푼수 모임이나 하나 만들자'고 제안을 한 바 있다. 박 교수는 흔쾌히 동의하여 그러마고 했다가 하루 이틀 새에 푼수끼가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한 타스나 모이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주 교수도 섞여있었던 것이다.
오늘 그가 나를 부르고, 아직 서먹서먹했을 법한 자칭 푼수들도 같이 불러 모은 풍신들의 자리였는데 그 장소가 다름아닌 주교수의 개인 사무실 겸, 모 학교의 재단 이사장 사무실도 겸한 자리였다. 개인 사무실은 칸막이로 가르고, 홀은 제법 넓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쇠고기가 푸성귀 옆에서 익고 있었고, 어느 푼수가 특히 좋아한다 하여 특별히 주문한 소의 삶은 간과 허파도 있었다.
술이 몇 잔 돌고, 대학가요제 입상 경력이 있는 박 교수가 컴퓨터 노래방기기에 맞추어 한 곡 땡겼다. 주 교수는 옆에서 섹소폰을 불었다. 박 교수가 이광조 노래를 뽑은 뒤에 앵콜을 받아서 '샌프란시스코'를 주문했다. 노래방기기의 주인인 주교수가 예약을 해야 했는데 컴퓨터 반주기의 특성 상 노래 제목을 일일이 타이핑을 했어야 했다.
목에 건 섹소폰에서 손을 뗀 주교수는 독수리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주 교수가 그렇게 더듬거릴 줄은 몰랐다. 반주가 나와야 할 시간에 반주가 없자 박 교수는 들던 술잔을 목 께에서 멈추고 주 교수를 향하여 돌아다보며 말했다.
"어이, 주 교수, 샌프란시스코말야 샌프란시스코!"
"스펠이 어떻게 되지?"
나는 흠칫 놀랐다. 천하의 주 교수가 샌프란시스코의 스펠을 묻다니...
술이 거나했던 박 교수는 마침 영문과 교수였다. '친절한 박 교수씨'는 특유의 따뜻한 가슴으로 스펠을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샌프란시스코 있잖아, 에스 에이 엔 에프..."
주 교수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뭐라고? 천천히 말해 봐"
박 교수는 언성을 높여서 더욱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어갔다.
"에쓰, 에이! 엔! 에푸! 아알! 에이엔에스아이에스씨! 오!'
"에스에이엔...그 다음?"
주 교수의 질문이다.
참다 못한 박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 참, 미국에서 박사를 했다는 사람이 샌프란시스코 스펠도 몰라?"
마른 날 번개 같은 박 교수의 명징한 언어에 나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도장만 찍으면 누구라도 박사가 될 수 있다던 주 교수의 얼굴을 나는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그 뒤부터 주 교수의 섹소폰은 값싼 플라스틱 피리가 되어 버린 건 말할 것도 없고...
첫댓글 그런셈이죠...요즘엔...
그렇지요 선생님? 졸문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여지없이 무너진 주교수? 님의 값싼 플라스틱 피리 소리가 된 섹스폰이 웬수다 했겠습니다.
연당님의 통찰에 놀랍니다. ㅎ
^^* 월촌님의 글솜씨에 더욱 ....
아하하하 예원님...그 안목에 부끄러울 뿐...ㅎ
제가 모질랭이 클럽 창단 멤버인데......그곳엔 세숫대야란 닉네임을 사용하는 친구가 있답니다.ㅎㅎ그 모임에 들어오실래요?
덜컥 가입했다가 모두 '넘칠랭이'시면 저 죽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