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암스테르담」평설 / 강영은
강인한
공짜로 휴대폰을 바꿔준다는 전화가 또 왔습니다.
만원짜리 지폐가 든 봉투를 코앞에 흔들며
신문을 바꿔 보라는 사내가 있습니다.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는 게 유행이고 미덕이랍니다.
냉장고를 바꾸고, 비포에서 애프터로 얼굴을 바꾸고
정당을 바꾸고 심장도 바꾸고, 그러므로 비행기를
바꿔 타는 환승은 당연한 절차.
고흐씨, 빈센트 반 고흐씨
한 시간 반 동안의 무색무취,
당신의 고국 네덜란드와 차단된 거기를 뭐라 할까요,
마드리드에서 인천으로 가기 위한 환승구역.
말썽 부리는 맹장처럼, 시간을 없애기 위해 있는 곳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의 한 점.
가을 잠자리가 시간을 모으는, 죽은 나뭇가지 끝의 한 점.
그때 잠자리는 환승구역에 머무르는 중이었을까요.
당신이 마중 나오지 않아서 섭섭했습니다.
무색무취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암스테르담에서
잠시 동안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고흐씨, 빈센트 반 고흐씨
겨울이 돼서 당신의 것과 비슷한 모자를 하나 샀습니다.
당신의 별에도 지금 눈이 옵니까,
이제 곧 이 별에서 당신의 별로 바꿔 탈 때가 다가옵니다.
―《문학과 창작》 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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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할 시간과 버려서 안 될 시간
강영은
우리는 대개 균질적이며 직선적인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이 시간의 비약이나 경계를 의식하는 것은 겨우 시차를 경험하는 해외여행 때 정도이다. 이때 우리는 출발과 도착이라는 과정 속에 놓인다. 필연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이 과정은 순항하거나 길항하는 두 얼굴을 지닌다. 순항과 길항은 동시에 작용하면서 서로 그 효과를 부정한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자가당착적인 속성을 지닌 두 대착점 사이를 조절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인간과 외부 세계와의 접점에서 나타난다. 이때, 세계의 접점으로 표시되는 <현재>, <과거>, <미래>의 세 가지 양태를 관철하는 것을 시간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시인은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는 게 유행이고 미덕”인 작금의 시대 속에서 ‘버려야할 시간과 버려서 안 될 시간’의 대착점인 환승구로서, 암스테르담을 주목한다. 암스테르담은 ‘안네의 집’과 ‘렘브란트 집’ 등,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인가 하면 안락사와 마약이 허용되고 시내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한 홍등가가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두 얼굴을 지닌 도시이지만 부정적 선입관을 가진 음침한 이미지를 벗겨내면 그 어느 도시보다 관용과 자유의 정신을 지닌 도시이다. 죽을 자유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마지막 장소이기도 할 터이다. 이러한 암스테르담을 시제로 채택한 것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길항하는 시인의 내면 의식이 세계의 존재를 지지하는 틀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화자는 지금 온갖 인종이 들끓는 국제공항의 대합실에서 “말썽 부리는 맹장처럼” 지루함과 조급함을 견디어내며 바꿔 타야 할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를 시인은 “한 시간 반 동안의 무색무취 시간”이라 표현한다. “무색무취의 시간”은 시인이 선택하고 결합한 시간 이미지이다. 실제적 이미지라기보다 환승구 너머의 시간을 바라보는 심상이미지이다. “가을 잠자리”와 같이 외로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만 “빈센트 반 고흐”와 반 고흐가 썼던 모자에 이르기까지 <이미 없는> 시간 속에서 버려야 할 시간과 버려서 안 되는 시간의 대착점을 변주해낸다.
암스테르담을 매개로 한 여러 이미지 중에서 선별된 이 이미지들은 급변하는 일상의 삶에서 환승의 의미로 전이되는 알레고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죽음으로 건너가는 삶의 여정을 환기시킨다. “이제 곧 이 별에서 당신의 별로 바꿔 탈 때”까지 물질문명에 노출된 자아가 아니라 물질문명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세계를 <아직 없는> 시간 속으로 끌어 들이는 존재론적 성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무거운 주제를 돋보이는 서정성으로 의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의 진미라 할 수 있는 의미와 재미와 흥미를 절묘하게 배합하는 연금술사의 손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번잡한 이국의 공항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찾아 낸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연금술사인지 모른다. “시간을 모으는, 죽은 나뭇가지 끝의 한 점”을 출사해내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 역시 하나의 커다란 환승구임을 깨닫게 된다. 세계의 존재 형식이든, 인간인식의 형식이든, 물질적 욕망으로 채워진 시대를 길항하는 아나키스트, 본질적 자아를 만나는 일이야말로 버려서는 안 될 과거 속에서 진정한 미래로 나아가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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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제주 출생.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
―《미네르바》2012년 여름호, '미네르바 셀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