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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1966년 12월 25일 성탄주일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4장 26절
설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제목: 당신 안에 흐르는 예수의 생명을 깨달으라
우리가 성탄절 아침에 이렇게 모인 목적은 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철저한 개신교도이자 청교도이지만, 성탄절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과 역사를 다루지만, 언제나 이 사실을 잊고마는 심대한 위험 가운데 살아갑니다.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메시지를 일개의 철학이나 가르침으로 보는 시각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전부와 우리가 소망하고 붙잡는 전부가 철저히 사실에 기초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떠올린다면, 이것은 매우 좋은 태도입니다. 우리가, 여기, 이 아침에 모인 것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며,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탄생이 온 인류에게도 구원의 메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이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라는 사실은 이미 짚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왜 올해를 1966년이라고 부릅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가 우리의 달력을 바꿔놓았습니다. 베들레헴의 아기가 모든 역사의 전환점이며, 이것은 세상의 역사가들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성탄절이 공교롭게도 주일(主日)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더 상기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일주일을 사는 방식까지도 바꿔놓으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안식일, 즉 일곱째 날(토요일)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일은 한 주의 첫날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영혼과 영원한 것들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분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로 세상에 오신 분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바꿔놓으셨습니다. 그분이 '시간의 암초'를 뛰어넘으셨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십자가와 그분에 관한 놀라운 메시지는 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요소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오늘 함께 모여 기념하며, 어떤 의미로는 주일마다 모여 기념하는 위대하고 특별하며 기념비적인 사건의 의미를 깨닫습니까?
주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라.
슬프게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오늘'(성탄절)의 의미를 전혀 꺠닫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성탄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성탄이 그 누구의 삶에도 제대로 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성탄절이 자기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듯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탄절을 휴일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휴일로서의 성탄절이 아니라, 성탄절이 의미하는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베들레헴의 아기가 태어날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 그분이 구유에서 나셔야 했습니까? 성경이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첫 출산을 코앞에 둔 여인이 산통을 느끼지만, 베들레헴 어느 여관에도 빈방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향이나 본적지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하는 중요한 일 때문에 베들레헴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마리아도 정혼한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어느 여관에도 이들을 위한 빈방이 없었고, 누구 하나 방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기 생각만 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천사장이 마리아를 찾아간 줄 몰랐습니다. 천사장이 태어날 아기를 '거룩한 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날 베들레헴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평범한 임산부일 뿐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세상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사람들은 세금을 내야 했고, 문제도 많았습니다. 그때도 일종의 '신용경색'(信用梗塞, credit squeeze(영), credit crunch(미))이 있었고, 불만과 불행이 넘쳐났습니다. 세상은 그때도 지금처럼 전쟁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하였으며, 이런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단 한 분이 세상에 오시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 큰 비극은 세상이 지금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할 뿐, 기념비적인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붙잡지도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아관
이 시간에 모든 문제의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눈 대화에 비추어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곳은 우물가입니다. 피곤하셨던 주님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가는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않으셨습니다. 지친 주님이 우물가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여느 떄처럼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이때 주님이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면서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 대화가 주님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라고 말씀하신 극적인 부분에 이르렀을 때,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 (요 4:25)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요 4:2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에, 우리 모두를 위한 몇 가지 큰 교훈이 있습니다.
1. 메시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하지 못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여인이 매우 잘 설명해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이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여인의 말은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 즉 모세오경만 있고 선지서와 시편 등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차 오실 해방자, 메시아, 구원자에 대해 어렴풋이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를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줄 분으로 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물론 유대인의 경우, 메시아 대망은 훨씬 더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를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얻은 추가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민족 전체가 위대한 메시아가 오시길 고대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주님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자랑하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분을 자세히 예언합니다. 그런데도, 실제 그분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 종교 지도자, 정치인, 헤롯당원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한 가지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바라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욯안은 이것을 요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느낍니다. 왜 그분의 백성이 그 모든 지식이 있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 궁금증을 풀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고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메시아관(觀)을 갖는 것입니다.
2. 메시아를 국가 지도자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메시아를 정치 지도자나 군사 지도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위대한 왕을 고대헀으며, 따라서 그분이 궁전에서 태어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분의 탄생을 알리는 엄청나고 특별한 신호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이상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군사적인 행동을 하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구유에 한 아기가 태어났을 때, 유대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가난과 비천함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초라하고 비천한 출생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위대함이나 민족적인 영광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3.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들이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민족들이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겪는 문제들의 한 가지 원인입니다. 민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실제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보기에 메시아가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아기가 30세가 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심히 불쾌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분은 바리새인의 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율법 선생의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목수로 자랐고 육체 노동자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가 도대체 누구냐?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
유대인들이 보기에, 시골뜨기 목수가 사람들 앞에서 권위 있는 선생인 양하는 꼴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안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머릿속에 그리는 그분의 모습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의 문제였고, 또한 지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졌는가?
여기서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가봅시다. 왜 유대인들을 이같이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중용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없었다면, 또 자신들의 전승(傳承, tradition)이 없었다면, 메시아사상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며, 메시아를 고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성경과 전승(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이 있었는데도, 완전히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졌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고, 성경을 그대로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고 믿기만 했어도 결코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성경, 곧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도래를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메시아와 그분의 오심에 대해 아주 자세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가 선지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지명(地名)까지 정확하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수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중요한 일은 베들레헴 같은 하찮은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만 했었도, 이렇게까지 곁길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 다니엘에는 메시아가 태어날 정확한 시간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고, 메시아의 가난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사상을 취하기만 했지, 이것을 성경의 말과 표현대로 이해하고 결국 자신들의 방식대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금도 이런 이유로, 그분을 믿지 않고,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그분의 오심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 전체의 비극입니다. 우리가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것이 비극입니다. 우리는 개념을 취해 자신의 생각과 철학에 맞게 조작합니다. 기독교와 기독교 원리에 관한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과는 무관한 주장이 매우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사상의 일부를 취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사고에 맞게 치장했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생산품은 성경의 세세한 부분 및 사실과는 완전히 무관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을 안다고 하면서도 "물론, 그런 것들은 안 믿어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들은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나 주님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과 승천(昇天)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에서도 자주 접합니다. 이들은 기독교 사상을 좋아하며, 사랑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의 오류를 똑같이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참모습 그대로(요일 3:2, as He is)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분을 참모습 그대로 보지 않는 것이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으며, 그분의 탄생에서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그분에 관한 온전한 기사(記事)를 읽지 않습니다. 오~ 세상이 이 사실을 직시(直視)하기만 한다면!
주님을 참 모습 그대로 직시하라
우리의 달력을 바꿔놓고, 일주일을 사는 방식까지 바꿔놓은 이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온 인류 역사에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한 영향을 끼친 이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는 이분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적절한 설명은 하나 뿐이며,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사실 그대로가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난신 사건과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이 옳으며 또 유익합니다. 세상이 이것을 직시하고 교회사(敎會史)의 전 과정을 직시한다면...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천년에 가까운 교회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초자연적 용어를 쓰지 않고는 교회사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더 나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믿었습니다. 문명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극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세상이 주님의 가르침과 예언에 주목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주님께서 전쟁이 사라지고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난리와 난리의 소문 (마 24:6)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노아의 때가 된 것 같이 인자의 때도 그리하리라 (눅 17:2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마지막 때가 노아 홍수 직전의 삶,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과 아주 비슷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 17:28)
베들레헴의 아기가 어른으로 자라 전도자와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며,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참혹할 것이며, 오직 주님의 재림만이 이러한 상황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하며, 온 우주의 평화를 회복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분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을 믿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잘못을 반복하고, 그 개념을 취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왜곡합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5)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실 메시아에 관한 상세한 말씀들을 받아들입니까?
주님이 계시하셔야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그 다음 원리로 인도합니다. 인간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성경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영적(靈的) 맹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원리는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만 주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여인이 있습니다. 불쌍한 여인이며, 부도덕한 여인이지만(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닙니다.) 분명히 유능한(?) 여인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말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에게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5)라는 말을 이끌어 내십니다. 여인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여인을 보면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요 4:26)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다. 너는 메시아를 고대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오면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가? 나를 보라. 내가 바로 메시아이다."
주님은 여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원리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7-10)
그러나 주님은 훨씬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무엇이 이보다 더 분명하고 명확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타락과 죄 때문에 우리의 메시아, 우리의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주님을 아지 못했으며, 그분을 협잡꾼과 신성모독자로 몰아 십자가에 달았듯이, 세상은 지금도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세상이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 순간, 여인은 주님을 알아보며,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뛰어가 외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29)
주님의 탄생 스토리를 보면, 첫 순간부터 계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을 천사장이 진리를 계시해주는데도, 마리아는 계속해서 비틀거립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태어나신 후에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다 기록합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시지 않으시는 일 때문에 계속 비틀거립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도 이와 같은 핵심이 드러납니다. 목자들을 보십시오. 목자들이 왜 베들레헴에 갔으며, 왜 믿었습니까?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0-11)
바로 계시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눅 2:15) 하고 결정합니다. 목자들이 서둘러 베들레헴에 가보니, 모든 것이 천사가 일러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이 계시와 지혜를 받지 않았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29)
여선지자 안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38)
아기 예수가 자라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하시는 중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여러가지로 답하자,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그 다음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혈육(血肉)!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성! 철학! 이런 것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것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을 거부합니다. 죄 때문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라!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로 이런 계시를 직접 주십니다. 주님은 자신에 고나해 말씀하실 때 자신이 누구인지 계시하십니다.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7,28)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 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