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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묵상글 ( 사순 제5주일. - 어디로 갈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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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디로 갈까?
오늘 복음에서 죄 지은 여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구해주시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것의 뜻을 우리는 오늘 생각게 됩니다.
가라는 것은 늘 어딘가 목적지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인에게 가라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인이 살던 집입니까?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도 될 수 있겠지만 오늘 독서의 말씀들을 보면
집이라기보다는 앞을 향하여 또는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가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사야서와 필리비서 모두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기도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말처럼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살며 어디론가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 살며 어디론가 가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배 위에서 매일 먹고 자고 일하며 사는데
먹는 동안에도 가고, 자는 동안에도 가며, 일하는 동안에도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딘가로 가는데
뒤 곧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앞 곧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이
오늘 사순 제5주일의 가르침이고 그 과거가 죄스런 과거라면
더더욱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말은
단지 과거의 죄를 끝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움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의 삶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은총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꿔 얘기하면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미움을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죄의 삶을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죄지은 여인을 죽이는 것으로 끝장내려고 합니다.
그렇지요.
그녀를 죽이면 죄의 행위도 끝장나기는 합니다.
살인마를 죽이면 살인마의 계속되는 살인도 끝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죄인을 죽이는 것으로 죄를 끝장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맹세하노니,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노라."는 성무일도 육시경 말씀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살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고 오늘 선언하시는데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시편 말씀처럼 우리는 사는 새로운 길에 동참하는 것으로 오늘 응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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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3일 사순 제5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는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간음과 정결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십계명에 의거하여 간음을 절대적으로 단죄합니다. 구약시대부터 아내에게는 절대적인 정결이 요구되어 왔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기대하시는 충실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을 정신적 간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표상을 사용하시어 그 당시 사람들의 결핍된 신앙을 꾸짖셨으며,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앙자들과 당신과 당신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불충실한 자들을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마태 12,39; 마르 8,38)라고 부르십니다. 야고보 역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세속에 대한 사랑을 타협시키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합니다.(야고 4,4). 바오로는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시키는 이 죄를 피하기 위하여 사랑 안에서 정결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니스의 통령(統領) 도겔(Dogel)은 취임 의전을 거행할 때 아드라해 바닷물에 반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해상공화국 베니스, 곧 바다와 혼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바다 속에 있는 ‘게’들까지 전부 끌어 안고 바다의 모든 것과 결혼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부부와의 혼인성소 그리고 독신으로 사는 사제나 수도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혼인은 배우자뿐만 아니라 그 식구, 친적들 그리고 공동체의 미운면과 부족함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혼인하는 것입니다. 부부에게는 서로간의 사랑 하나만이 정결 생활의 결정적 이유이듯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 하나만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이처럼 정결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질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인간을 변화시켜 가장 신비롭게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어 줍니다. 정결의 진정한 가치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려는 즉 사랑하려는 원의에서 시작되고 살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과 원의는 순수하고 단순한 순결을 지니게 해 줍니다.
이러한 정결의 사랑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 부부성소이든 사제, 수도성소이든 순결한 마음을 잃어 지나친 잘못된 우정을 맺을 수 있습다. 가령 분별없는 지나친 만남, 쓸데없는 메시지 왕래, 불명료한 대화, 개인적이고 그리고 정기적인 값비싼 선물교환으로 표현되는 친밀하고 감상적인 애정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적인 것으로 위장된 쾌락과 로맨틱한 사랑이 되어 폐쇄적이고 불행한 간음적 우정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정결의 사랑이 뒷받침 될 때 분별력 있는 신중한 우정으로 충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가된 우정, 시련을 거친 우정으로서 기쁠 때에도 어려울 때에도 여전히 충실하게 남아 있는 우정이 됩니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진실된 우정이 되게 됩니다.
순수하고 정결하고 자유롭고 보편적인 사랑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1주간 온유 /절제✝️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 1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산타렘 (Santarem)에서 일어난 성찬식의 기적
포르투갈 -1266년
이제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두 사람이 이 사건 속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당황하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겸손되이 무릎을 꿇었다.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그 남편은 스테판 교회의 수도원장에게 가서 간밤에 자기 집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고백하였다. 수도원장 신부는 그를 따라갔·고 특이한 그 상황에 비추어 보아 하느님께서 이 곳에서 진찌 기적올 행하셨음을 인식했다.
그는 신자들올 불러 모으고 이 기적을 공적(公的)으로 알리기 위해 종을 울리라고 명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그 도시로 몰려들었다. 신부님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불타오르는 횃불을 가지고 기적이 일어난 집으로 갔다. 궤가 열린 후 모든 사람들은 신선한 몇 방울의 피가 묻어 있는 성체를 보았다. 그렇지만 성체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대로였다.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이 기적적인 사건올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나서 사제는 성광 속에 성체를 모셔가지고 생동하는 믿음과 환희 속에 성대한 행렬을 이루면서 산타렘 거리를 지나갔다.
이 날이 산타렘의 거룩한 기적올 공식적으로 축하한 첫날이었다.
불쌍하게도 일시적으로 점쟁이의 희생자가 된 부인은 깊은 통회룹 했고 그렇돗 간절히 바라던 그 집안의 화평을 얻었으며, 그녀도 남편도 성체를 열심히 공경하는 신자가 되었다.
그곳과 인근의 모든 성당과 소성당은 이제 “성스런 기적의 성체"를 모시는 큰 영예를 갖고 싶어했다. 하지만 스테판 교회의 신자들도 열심히 청원한 결과 그들의 교회에도 이러한 권리가 숭인되었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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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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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부님은 정말로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은 스스로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귀찮고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지런한 사람’으로 평가하십니다. 좋은 의미로 말씀하셨기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지만, 분명 저를 완전히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유령으로 만들곤 합니다. 즉, 상대를 판단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100%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판단에 앞서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유령 만들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를 말입니다.
개인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 역시 유령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간음한 여자 한 사람을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서 판단을 재촉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약혼녀가 혼전 정사를 다른 남자와 범했을 경우 친정의 동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했고, 창녀는 군중이 돌로 치고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인의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회는 로마제국의 통치 밑에 있으면서 그들 자신이 직접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치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로마 행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반대로 풀어 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멋진 말씀을 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율법에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기 전에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증인이 없었지요. 또 실제로 간음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간음한 여자의 상대 남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곤란한 상황에 놓이도록 한 여자를 극한 상황으로 몰았던 것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께서도 단죄하지 않는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단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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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행복은 딱 한 가지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조르주 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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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오늘 복음의 ‘돌’은 베트남에서는 ‘벽돌’로 번역되어있습니다. 나라마다 번역은 다르겠지만 그 의미는 같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향한 비판에 ‘돌을 던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A씨, B씨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가 바로 그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논리, 행동방식을 표준으로 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논리와 방식을 따를 것을 강요합니다. 근거없는 주관적인 판단,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수용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돌을 맞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SNS라는 문명 뒤에 숨어 한치의 망설임없이 자신의 편협되고 주관적인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수없이 많은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사자의 해명을 들을 필요도 없고, 그들의 고통은 보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으며 나와 무관합니다.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포용과 배려는 없습니다. 그들이 수 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쌓아 놓은 명예를 손상시키고 회복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줍니다. SNS에 거침없이 쏟아내는 비난은 현대 사회의 ‘거칠고 잔인한 돌’입니다. 실제 벽돌로 때리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세상에 그래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두운 과거를 잊고, 밝은 미래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주님의 사랑은 바다가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씻어주실 것입니다. 회개를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는 따뜻한 포용으로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순간의 사사로운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온몸을 던져 달려가는 기나 긴 마라톤, 그 목적지 끝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간다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시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것을 보십니다. ‘자비의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단지 ‘진실된 회개와 실천’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도 과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돌들이 상대방의 마음에 잔인한 상처를 주고 있는 지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잘못된 지난 날을 회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믿음과 사랑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주님의 용서를 통하여 무한한 자비의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심판과 용서 중 무엇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까?
2.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심판하고 있습니까?
3.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 때 그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진심으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말씀의 실천
1. SNS에 즉각적인 반응보다는 객관적인 시각과 침묵으로 지켜보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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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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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사순 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하심과 보살핌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자비를 마음 깊이 간직하기를 권고하면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필리 3,14)임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의 용서’를 통해, 실제로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혹, 우리는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라는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돌덩이는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그러자 고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더 세게 던지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단지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차마 던지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돌덩이를 품은 바람에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린 자신을 보게 하소서.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를 내려놓게 하소서.
돌덩이가 아니라, 그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도와주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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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악의 세력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원을 주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와 용서로 드러납니다. 이 시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화를 내고 못된 사람이라고 욕합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고 할 때도 있습니다. 더더구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고 상대는 못된 사람이라고 단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작 자기도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은 잊고 삽니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먼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교회는 성인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모튼 켈시).입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하고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위선자가 됩니다. “여자를 돌로 치지 마시오.” 하고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야말로 고약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까요? 아니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쓰셨을까요?’ 어찌 되었든 무엇인가 쓰고 계실 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그들은 과연 자신이 돌을 던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여인을 단죄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냉정하게 심판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로마3,10-16). 하늘 아래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돌을 던지지 않고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인식하더라도 통회 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얼마나 진심으로 통회하느냐에 따라서 용서의 체험도 달라집니다. 깊이 통회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그만큼 깊이 체험할 것이고, 적게 통회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체험할 것입니다(송봉모).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성실한 양심 성찰과 통회,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수는 복수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수를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기억하시죠?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했습니다. 꼭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와 있어서,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이 거기에 와 있어서 놀란답니다. 우리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편협한 비판이나 판단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성인이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 평생 소원은 다시는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십시오.” 이 기도를 들은 하느님께서 크게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은총을 구하는 구나. 그런데 내가 그런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를 용서해줄 수 있단 말이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한계와 죄스러움 속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자비로움으로 나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단죄했던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가타 성경을 만든 예로니모 성인은 오랜 세월 성욕에 시달리며 살았답니다. 성인은 성경번역에 더욱 열정을 쏟아 넣어 자신의 정욕을 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성인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사랑하는 예수님, 제 정성을 다하여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기뻐하실 선물이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아기예수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무엇인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수도자라 가난하지만 마침 어떤 이가 좋은 곳에 쓰라고 돈을 주었는데, 드릴 터이니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은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돈은 그대가 직접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는 돈이 필요 없으니까.” 그런대도 예로니모가 계속 고집하자 예수님께서는 웃음을 거두시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대는 정말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을 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죄와 욕망을 나에게 주어라. 내게 필요한 선물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너의 죄와 욕망 때문에 십자에서 다시 죽을 것이다. 이것만큼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은 없으니.” 예로니모 성인은 이 환시체험 후 두 번 다시 성욕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려 자비를 입고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묘비명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를 원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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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메마른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어라"
1.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때입니다. 다음 주일은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에는 부활대축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죄와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공통적인 본성은 힘과 이익을 좇다가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 죄의 현실에서 새롭게 시작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수많은 문명을 일으키고 스러졌다가 다시 일으켰지만 그 안에 공통된 특징 역시 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 죄 때문에 힘 없는 이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러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2.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모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노아 시절에 하느님께서 당시 인류가 저지르는 죄에 노하셔서 일으키신 대홍수에 대한 기억입니다. 대홍수로 인해 지구에는 커다란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산이란 산이 죄다 물에 잠겼고, 그러다가 물이 빠지면서 바다 가운데 있던 땅에 강이 흘러 물길이 났습니다. 엄청나게 거센 물이 급하게 빠져 나오면서 땅을 침식하여 커다란 협곡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의 커다란 강들과 호수 그리고 대협곡들은 이때 조성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상들이 대대로 전해준 전승을 떠올려 전해준 이사야는 대홍수로 말미암은 격변만이 아니라 그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타일러주었습니다. 다음 말씀이 그 뜻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8-19). 훗날 세례자 요한이 이사야의 이 말을 받아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이 오실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3. 과연 요한이 곧게 낸 그 길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오셨고, 뒤늦게 이를 깨달은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8). 그가 애초에 가려고 했던 바리사이즘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택한 것은 율법에서 인정받는 의로움이 쓰레기인 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정받는 의로움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시고 천국의 길을 여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처럼 부활의 힘으로 죄를 없애는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직 그 길의 목적지에 다다른 것은 아니지만,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고 가야할 길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는 필리피 교우들에게도 같은 길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자기를 본보기로 삼아 함께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자고 권고하였습니다.
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을 심판하시고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계시던 예수님께 다짜고짜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세워놓고 재판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무례하게 굴던 그들의 속셈은 그 여자의 죄를 빌미로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던 것이었습니다. 유죄로 판결하면 평소에 가르치시던 자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동네방네 모함하고 다닐 것이 뻔했고, 반대로 무죄라고 판결하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며 고소할 태세였습니다.
5.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리사이 유다인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자신들의 율법대로 재판하면 될 일이었고 굳이 예수님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그 죄가 간음행위로 인한 죄라면 상대 남자도 함께 데려와야 했는데 그들은 여자만 데리고 와서 재판을 강요했습니다. 재판의 최소 형식요건에도 맞지 않게 억지로 재판을 강요하고 있는 이 행위 자체가 죄였습니다. 평소에도 힘 없는 사람들을 율법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낙인찍던 그들이었는지라, 그들은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이 심증만으로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께서 움직이시는 동선을 미리 파악해 놓은 듯이 그분께서 백성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맞추어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네들이 짜고 치는 놀음에서 죄의 악취가 물씬 풍겨 나왔습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러 왔다가 졸지에 재판을 방청하게 된 백성은, 이미 손에 돌을 들고 여차하면 여자에게 던질 기세로 그분을 다그치던 바리사이파 유다인들보다도, 터무니 없는 재판을 느닷없이 강요당하신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하실 지가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연자약하게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분이 피우시는 딴청에 조바심이 난 바리사이들이 재촉하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한 말씀 던지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7.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이때쯤이면 지켜보던 방청 백성도 과연 누가 죄인인지 상황이 파악되었을 듯합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가자 백성도 기다렸다는 듯이 너나 할 것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떴습니다. 어렵사리 뱉으신 이 말씀 한 마디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선고였습니다. 그 말씀을 뒤집으면 죄 있는 자들은 너희들이고, 너희들이야말로 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자리를 떴다는 기록도 재미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죄가 많을 수도 있겠고, 나이가 많으면 많던 적던 지은 죄에 대한 성찰도 깊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고백은 죄에 비례하지 않고 성찰에 비례합니다.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사람, 그것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사람이 더 뉘우치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도 죄 많은 순서대로가 아니라 뉘우치는 순서대로 받습니다.
8. 여인에게 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예수님께서는 관심이 없으셨던 듯합니다. 그저 힘이 약해서 끌려온 그 여인이 안쓰러우셨고, 발언권도 없고 변호받을 권리도 없었던 그 여인이 불쌍해서 그 여인의 편에 섰을 터입니다. 다들 가 버리고 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한 눈에 척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구태여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은 그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자기를 변호할 기회조차도 빼앗긴 그 여인이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상황을 설명하라고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ㄱ)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ㄴ) 하고 말씀하시고 상황을 마무리하셨습니다.
9. 하느님께로부터 심판자의 역할을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지목된 이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보여주는 복음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또한 문명은 생활을 물질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지만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기회가 고르지 않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고, 나눔이 없는 채로 세대가 대물림되면 빈부양극화는 갈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도 늘어납니다. 사람이 죄인이고 문명이 죄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문명을 이룩한 역사 역시 죄스런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오셔서 죄를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대책을 발표하셨으니,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10.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대감염 상황이 일상화되면서, 이 여인처럼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숨도 못 쉬고 움츠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자리를 떳떳하게 차지하지 못하고 눈치 보아 가며 일하던 여러 분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고통을 참아 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방역에 성공한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재난은 평등하지 않았고 약자에게 더 가혹했습니다. 그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해 왔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생계 유지 방편조차 잃어버릴 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1. 그 약자들이란 자영업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과 돌봄을 제공했던 방과후 교사들, 여행멈춤의 시대에 여행과 관련된 일로 생업을 유지하던 이들이나 관광통역안내사들, 그리고 식당 노동자들, 재난지원금을 받을 꿈도 꾸지 못하는 임시체류 이주노동자들, 장기간 공연 방학으로 무대를 빼앗긴 공연예술 노동자들, 그리고 겹치기로 일하던 각종 알바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12. 무작정 끌려와 자기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여인에게 물어봐 주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아주신 예수님처럼, 집단감염의 대재앙 시대에 불평등한 노동현실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나 상시적 해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에게 자비로운 시선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소리 없이 세상의 죄가 쌓이는 동안에 힘 없는 약자들이 죄로 인해 입는 상처와 당하는 피해도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메마른 욕심의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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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8년 5월 4일 군대에서 제대하였습니다. 3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같은 모양의 머리 모습을 해야 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인원점검을 하였습니다. 군복을 입었고, 창의적인 일보다는 시키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였고,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고, 늦잠을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었습니다. 군복이 아닌 옷을 입을 수 있었고, 머리도 자유롭게 기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성소국장’ 신부님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성소국장 신부님은 복학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지 물었습니다. 저는 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복학 할 때까지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 학교 공부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이 기술을 배우는 학교였습니다. 학생들은 기술을 배우면서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매일 아침에 미사를 보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은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을 도와서 미사 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갈 때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과 함께 농구, 축구를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10개월간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야학에서 선생님들에게 배웠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학생들에게, 잠시 방황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학생들에게도 돈보스코 센터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기술을 배운 학생들은 취직하여 새로운 자리로 옮겨 갔고, 방송통신 고둥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학생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이 마치 군대에 있는 것 같았지만 제게는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신부님들과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칫 무료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복할 할 때까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여인은 돌에 맞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돌에 맞으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돌에 맞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여인의 입장에서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이제 곧 돌에 맞아야 하는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며 죽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저 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한참이 지난 다음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들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러자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자리를 떠났습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도 돌아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던 여인에게 이제 심판의 자리였던 곳,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습니다. 죽어야 할 여인은 이제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척박한 광야라 할지라도, 설사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헤로데의 궁궐일지라도, 풍족한 삶일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은 될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이 죽었던 새남터, 절두산, 서소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서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평화가 있는 곳이라면 곧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곳일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던 그 여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용서와 평화가 있다면 지금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내 달리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온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으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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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살기위하여’ 할 일은 무엇인가?
- “잊어라, 만나라, 달려라” -
어제의 두 감동적 사례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한분은 수도원에서, 한분은 20여년 수도생활을 하다 수도공동체의 특별 관면을 얻어 2년동안 수녀원 밖에서 살아가는 수도자입니다. 공통점은 참 치열히, 성실히 책임을 다하며 감동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친절한 분이 1년전 선물한 견고한 좋은 집무실 의자였는데 잘못 사용한 탓에 한쪽으로 몹시 기울어 수도형제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제 오전부터 오후 피정때까지 온종일 보이지 않아 저녁기도후 어디 다녀왔느냐 물어봤더니 하루 종일 일했다는 것입니다. 집무실 의자를 점검한 후 수도형제의 처방이었습니다. 수도원 주님의 집에서 무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33년을 살아왔으니 어느 혈연의 형제보다도 더 오래 살아 온 주님의 형제 수도자입니다.
“버려야 하겠습니다. 한쪽이 깨져 금이 갔습니다. 한쪽에 기대다 많이 잠을 잤나 봅니다. 다시 주문해 드릴까요? 인터넷 주문하면 즉시 옵니다.”
“그냥 놔두세요. 나무 의자를 사용하겠습니다.”
나무 의자를 대체하니 공간도 적게 차지하고 단순해서 정말 좋았습니다. 형제는 번쩍 무거운 의자를 머리에 얹고 들어다 안뜰에 있는 트럭 위에다 놓았습니다. 참 하루 종일 노동에, 친절한 배려와 적극적 도움에 감동했습니다.
또 한분은 6개월 만에 고백성사차 연락하고 수도원에 들린 수녀입니다. 수녀원밖에서 참 치열하고 열심히 삶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분입니다. 수녀원에서 특별 관면후 나온후 6개월간 방을 얻어 자취하면서 국가의 도움을 받아 학원에 다니며 두 개의 자격증을 얻었고 2개월 반 취업을 하며 지내다가, 다시 면접에 합격하여 내일부터는 새 직장에서 3년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 했습니다. 워낙 적극적으로 치열히 사는 분위기를 감지했던지 여러곳의 면접에도 모두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아, 삶은 전쟁입니다. 먹고 살며 생존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서바이블 생존 게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계속 길을 열어 주셨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잘 지냈습니다.”
수녀원 있을 때에는 온실 속에 곱던 화초같은 분이 이제는 최전방最前方 야전野戰의 ‘주님의 전사’가 된 씩씩하고 강건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참으로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정말 ‘살아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스러웠습니다. 후에 청초한 수선화꽃 사진과 함께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답신도 받았습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지금까지처럼 힘껏, 치열히, 멋지게 사세요! 주님께서 함께 늘 도와 주십니다. 수선화꽃 청초한 사랑에 위로와 힘 받으세요. 사랑하는 수녀님!”
“수사님, 용기와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이 납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요즘 젊은이 세대를 일컬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다, 여기에다 인간관계와 집을 포기한 ‘오포세대’, 또 여기에다 꿈과 희망을 포기한 ‘칠포세대’라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젊은 세대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간절히 찾고 두드리면 구원의 길은 구원의 문은 열리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참으로 ‘살기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답을 드립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참으로 살기 위하여!”이고 구체적 처방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잊어라!”입니다.
과거는 말끔히 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영성대가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이미 지난 과거입니다. 하느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일체 묻지 않고 불문에 붙입니다. 회개는 언제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체없는 지금 여기서의 회개가 백번 낫습니다.
이미 회개하여 용서받은 과거에 대하여 아파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하느님께서 절대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미 지난 용서받은 과거는 일체 거론하지도 떠올리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악마의 유혹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이를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공동번역의 성경이 더 실감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고,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이사43,18-19)
윗 성구는 제가 고백성사때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 사로잡혀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일화가 참 감동적입니다. 흡사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 화신처럼 보입니다. 그대로 예수님께 고백성사를 받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도 지난 과거를 잊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주님의 용서의 은총이 과거를 잊게 하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그러니 잊으십시오. 특히 용서 받은 어둡고 아픈 상처의 기억을 잊으십시오. 하느님의 용서 은총이 과거를 치유하십니다.
둘째, “만나라!”입니다.
바로 주님과 사랑의 만남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과거를 잊었고 사랑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밖으로 멀리 찾아갈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늘 우리 곁에 함께 계신 자비와 지혜의 파스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 살아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간음하다 사로잡혀 예수님 앞에 있는 여인이 참 가련합니다.
절체절명,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공격이 참으로 사악하고 절묘하여 예수님도 여인도 꼼짝없이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중에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에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침묵의 기도시간, 군중들은 잠시 흥분을 가라 앉혔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참으로 예나 이제나 널리 회자되는 천상 지혜의 명언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마음에서 나온 천상 지혜의 말씀입니다. 자비는 지혜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중에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거룩하고 멋진지요.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하나둘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회개하여 다 떠난 것입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는 나이 많은 이들이 오래 살았기에 죄도 많이 지었을 것입니다. 사실 살면서 보이지 않게 실제로든 마음으로든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순간 여기 있던 사내들은 노소불문하고 자신이 부끄러워 소리 없이 다 떠났던 것입니다.
순간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서 가련한 여인의 처지도 생각하며 자신들의 무자비함에 대해서도 몹시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흡사 군중이 공동 고백성사를 보고 떠나는 장면같습니다. 말그대로 전화위복입니다. 중죄의 용서를 통해 자비와 지혜의 주님을 만난 죄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중 주님을 직접 대면하여 만난이는 죄녀뿐입니다. 아마 죄녀는 평생 주님의 자비를 잊지 않고 구원의 현재를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살아가야 할 때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주님을 만나 용서 받고 늘 새롭게 살아갈 힘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죄를 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지체없이 회개를 통해 용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짐으로 참사람의 참내가 되어가는 우리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열매가 자비와 지혜, 겸손입니다. 바로 이것이 날마다 체험하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주님을 만나 용서 받음으로 극적 반전하여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을 살게 된 죄녀입니다.
셋째, “달려라!”입니다.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희망의 주님입니다. 삶에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의 방향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향해 참으로 주님의 전사답게 씩씩하고 용감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 받은 죄녀에게 “가거라!” 파견을 명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가 감히 주제넘게 남을 단죄합니까? 그러니 다시 삶의 자리로 복귀해 주님을 사랑하고 찾으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생생한 희망을 둘 때 죄를 짓지도 타락하지 않습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들을 상실하면 곧장 밀려오는 감미로운 죄의 유혹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최고의 예방 처방 명약이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바오로의 육성을 듣는 듯 감동적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나를 가득 채울 때 비로소 과거의 쓰레기들을 저절로 일소되기 마련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으로 고무적이고 힘이 됩니다.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목표와 방향 뚜렸한 삶인지요! 이래야 비로소 과거로부터의 해방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기억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2티모4,7-8ㄱ)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도 “너희는 생명의 빛이 있는 동안에 달려, 죽음의 암흑이 너희를 덮치지 않도록 하라”(성규;머리13)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살기 위하여, 과거를 잊으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희망의 주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바로 이게 진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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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 제5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마음의 돌멩이를 내려놓고 ♣
새 아침, 일어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지 다시 삶의 뿌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네 삶이 기쁘고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때도 많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희망을 던져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이사 43,18)고 하며 실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면서 희망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 3,13)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사랑이 충만하신 분, 그리고 죄가 아니라 죄인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분으로 제시하면서, 기쁨과 희망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간음한 여인을 그분께 데려와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며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한 ‘마음’을 꿰뚫으시고 앉으시어 침묵 중에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적대자들의 그릇된 마음에 침묵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땅바닥’은 바로 이기심과 아집과 교만으로 얼룩진 우리네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을 재촉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 하심으로써, 오히려 반대자들이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임을 깨우쳐 주시려 하십니다. 여인을 쳐죽이려 했던 심판의 돌멩이가 순식간에 여인에게서 예수님께로, 결국에는 고발했던 적대자들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돌멩이’는 우리의 폭력과 적대심, 시기, 질투, 무디고 모진 마음이며,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죽음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국 돌멩이는 땅바닥에 힘없이 내려지고,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던 그들은 바람처럼 떠나버립니다. 간음한 여인도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평화롭게 떠나갑니다.
이 여인은 죄를 느끼기는 했으나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버린 적대자들과는 달리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과 더불어 떠나갑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기심과 교만의 돌멩이를 내려놓고, 나의 죄를 보고 인정하며, 그분과 더불어 앞만 보며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회개를 재촉합니다. 남의 죄, 약점, 결함, 부족함, 허물을 향해 들려진 커다란 돌멩이를 거두어들여, 나의 가슴을 치도록 합시다. 반대로 따뜻한 마음과 온화한 표정, 애정어린 말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끌어안아야겠습니다.
부활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 각자 안에서 고통 받고 번민하시며 괴로워하시며 기뻐하시는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께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진정 기쁨이 충만하고 생명에 넘친 부활을 탄생시키도록 합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루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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