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박목월 시인의 아들인
박동규님의 에세이집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박동규님은 문학평론가이시고,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셨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박동규님이고,
아버지는 박목월 시인이십니다.
한국 전쟁 당시 박동규님은 11살이었습니다.
얘야, 착한 게 잘못은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6.25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손가락 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 자료 출처 : 박동규님의 에세이집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북한에 '김소월'
남한에 '박목월'
견주는 시인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정서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것이 박목월 시인의 사랑 이야기다.
중년의 박목월 시인이 대학교 제자와 사랑에 빠져,
사라진 사건은 충격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제주도에서 박목월 시인과 여제자가 사랑에 빠져
살림까지 차렸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교수였던 박목월 시인은 교수라는 직업도,
한 가정의 가정의 자리도 잊은 채 사랑을 따라 제주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박목월 시인의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남편을 찾아 나섰는데 ...
마주하게 되자 목월의 아내는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냐? 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 지내라고 두 사람의 겨울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마음 여린, 박목월 시인에게는 최고의 형벌이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두 여인을 두고 한 명을 선택해야 했던 박목월 시인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떠나면서 남긴 시가
그 유명한 노래, 이별의 노래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첫댓글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페이지에
박목월시인 님
인생의 한 페이지를요
고운 시를 소개 해 주셨습니다
박목월시인 님의
詩...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