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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양방수,이승훈선생천진암 천묘식 기록영화 제작하다.●
1981년 11월28-29일.
인천직할시 남동구 만수동 반주골에 선각자이신 한국천주교회의 최초의 영세자이신, 이 승훈(베드로)성현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宅墾)의 墓所가 있는곳이다. 산 밑에 넓게 펼쳐진 마을은 새들이 많이 찾아들어 조곡(鳥谷) 마을이라 불렀고, 平昌李氏가 대대로 살아오던 곳으로, 이 승훈 성현은 부친 이 동욱(李 東郁)과 모친 驪州李氏(여주이씨)사이에서 1756년 태어나.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丁氏家門 丁 若鏞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 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승훈 셩현의 묘소가 있었던 만수동 산 전경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성조와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李檗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李 檗, 丁 若銓, 丁 若鏞 형제와, 權 日身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李 檗 성조님은 최 창현, 최 인길등에게 세례를 베풀어,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 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闢異文(벽이문)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하였닥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假聖職制度(가성직제도)에 참여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 가환, 정 약용, 홍 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 연구,·이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1973년,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이곳에 있는 선영의 묘는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낙화산골로 이장되었고, 이 승훈성현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 묘만 남게 되었다.
만수동 반주골에 모셨던 이 승훈(베드로) 성현의 묘소
반주골 조곡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승훈 성현의 6대손 이 병규씨가 이승훈 선조님께서 참수 전 마음에 뜻을 남긴 최종시[月落在天 水上池盡(월낙재천 수상지진)=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고, 물은 비록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하다]는 詩가 口傳으로 대대로 전해 온다고 증언해 주어, 이 승훈 선각자의 묘를 순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아침 일찍히 도착한 우리 일행은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 ~성가를 다같이 힘차고 우렁차게 부르고, 주례자이신 오 기선 신부님의 발굴 기도가 시작되었다.
오 기선 신부님의 주례로 오전 8시 지석 발굴 예식을 거행하고, 곧 바로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한없는 자비와 오묘한 섭리로 우리 죄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천주여 ! 오늘 우리가 200년 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현이시며, 주님의 초 자연적인 성체성사 은총을 처음으로 이 땅에 가져오신, 베드로 이 승훈 순교자의 묘를 확인하고, 정성스러이 모시고자 하오니, 살아 있을 때 주님을 알고, 섬기며, 주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된 이 베드로의 墓로 하여금, 죽은 후에도 세세에 주님을 알고, 섬기도록하는데 도움을 주게 하소서, 우리 주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훗날을 위해
묘 발굴 작업이 한참 진행 중에 인천교구 부주교님께서 오셔서, 인천교구에 유일한 성지로 가꿀 성지를 옮겨 가면 안된다는 항의로 잠시 침묵이 진행 되었으나, 후손 이 병규 선생은 우리 조상 우리 맘대로 한다며, 강하게 나가자, 부주교님께서는 뜻을 꺽지 못하시고, 떠나가셨다. 제일 왼쪽이 인천교구 부주교님 다음, 변 기영 신부님 다음, 말씀을 녹음하는 필자. 다음. 오 기선 신부님, 그다음 유 홍렬 박사님의 얼굴이 보인다. 이날 따라 날씨는 매우 쌀쌀하여 모두는 뚜꺼운 옷으로 무장하다싶이 하였고, 후손 이 병규씨는 털모자를 썼다
발굴이 시작되어 엎어진 사발이 나왔다. 정성스레 그릇속의 흙을 조심스럽게, 한참동안 파내자 아무 표석이 없자 오 기선 신부님께서는 이게 ~이게~ 정말 ~ 李자? 承자? 薰자 ? 가 아니냐며 안타까우신 마음으로 전혀 판독할수가 없는 상태를 보시다 싶이 글자가 보이지도 않는 그릇속을 유심히 살펴 보시면서 짐작하시고, 말씀 하셨지만,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다음 무덤을 혜치고 파기 시작하였다. 오전 11시경 까지 다시 엎어진 사발을 발견하고 정말 정성을 다해 깨어지지 않도록 사발속의 흙을 파내기를 시작하여 지석을 판독 할수가 있었다. 박해때에 모신 흔적으로 뚜렸한 지석은 없었고, 사발속에 붓글씨로 쓰고 흙으로 쉽게 덮고 엎어 놓은 것이 전부였다.
부인 나주정씨의 두개골, 하악골이 그대로 있었다.
이 승훈 성현의 행적을 살펴 보면, 1783년 가을 이 벽 성조께서는 몇해 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이 승훈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거룩히 훈계하시니, 이 승훈은 이를 듣고 스승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영세와 성서 성물구입등 부여된 사명을 정성껏 완수하고, 귀국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오전 11시 감격의 순간이다. "성균진사이공승훈지묘"成均進士李公承薰之墓" 라는 붓글씨가 확연이 나타나자 ~ 모두들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발굴에 임했다. 좌로 부터 오 기선 신부님, 유 홍렬 박사님, 이 승훈 성현의 6세손 후손 이병규 선생님, 변 기영 신부님께서 지석을 들고 감격해 하시는 모습을 필자는 카메라에 담았다.
이에 대한 프랑스인 역사가 샤를르 달레의 기록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렇게도 열성으로 진리를 찾고 있던, 이 정직한 영혼들의 뜨거운 소원이 실현되기를 마침내 허락 하셨다. 그 해 1783년 겨울, 이 동욱이 북경 조정에 가는 서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 이 승훈은 이벽 성조의 절친한 친구 중 하나였는데, 그 가 아버지를 따라 그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이 승훈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즉시 그를 찾아갔다.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그가 이 승훈에게 한 주목할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쎄~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道理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降生이며, 성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것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수가 없네. 종교 서적을 보지못해, 아직 모르고 있던, 이 승훈은 이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여, 그 책을 몇권 보자고, 하였다.
이 승훈 성현의 광중은 관이 없는 석회 광중으로,유골이 거의 진토 되어 있었다.오후 1시~
이 승훈 성현의 두개골, 아래 턱 부분의 모든뼈가 전무하고,두개골이 따로 떨어져 있어 참수치명을 증거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李檗聖祖께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이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자네가 북경을 가게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의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 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무릎과 다리 상하 유골 발견
이벽 성조의 이 말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가 되어 가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 승훈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 승훈은 그것을 道師의 말씀처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 승훈은 드디어 1783년 말 경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북당을 찾아가 루이드 그라몽 神父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정하였다. 이 승훈은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미구에 성세를 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성세성사를 받았는데, 그가 조선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김 수길 외과 의사(김 수길 병원장)께서 유골 측정을 하고 있다.
1784년 갑진년 봄에 이 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진기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제일 먼저 이벽성조께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그 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벽성조께서는 친구가 보내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 딴 집을 세내어, 그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 이제 그는 종교 진리의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과 7성사의 해설과 교리 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와, 그날 그날의 성인 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어 실천에 옮겨갔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주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알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나가는데,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 주고자 하는 욕망도 커 갔다. 얼마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와 이 승훈과 정 약전, 정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道理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후손 대표 이 병규씨가 외가 의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염하고 있다.
그 무렵 북경에서 영세한 이 승훈 베드로가 이 성사를 이벽 성조와 권일신에게 주었다. 본명 선택은 되는데로 하지 않고, 이 벽 성조께서는 조선의 개종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본명을 “요한 세자”로 하였고, 권 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성인을 주보로 하여 그를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벽 성조 자신은 곧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선 중인계급의 친구들 중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몇 사람에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활기있고, 박력있는 말을 듣고서 거의 즉시 응하였다. 그들 중에는 최 창현, 최 인길, 김 종교가 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여러 양반에게도 전교하여 그들을 입교 시키셨다. ~중략~
신장 성당에서 이장 미사를 집전하시는 김 남수 주교님과 변 기영 신부님 저녁 8시
한 없는 자비와 오묘한 섭리로 우리 죄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너그러이 베푸시는 천주여 ! 주께서는 베드로 이 승훈을 통하여, 주님의 초 자연적인 성세성사 은총을 처음으로 이땅에 가져오게 하시어 우리 겨레에게 전달하게 하시고, 오늘까지 흘러 넘치게 하셨사오니, 이미 주님 때문에 칼 아래 목을 바치며, 피를 흘린 그로 하여금 죽은 후에도 살아있을때와 같이 항상 온 겨레에게 소리없이 진리를 가르치며, 그침없이 은총을 전달할수 있게 하시고, 오늘의 우리와 내일의 우리 모든 후손들이 그와함께 진리와 은총속에서 영원히 주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 우리 主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신장성당에 제대앞에 모셔진 이 승훈 성현의 부부
고옥자(로사)자매가 든 꽃다발을, 선두로, 이승훈 성현 부부의 유해가 천진암 묘역에 오전 11시 도착
김 남수 주교님의 주례로 사도예절이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좌로 부터 김 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 변 기영 신부님.
시작 성가로 천주여 네 권능과 ~를 다 함께 부르고나서 주례사를 오기선 신부님께서 하시고, 발인 기도를 하셨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여.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 거룩한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었사오니, 이 큰 은혜를 감사하오며,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200년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현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진리 탐구와 그 실천, 그 전파와 수호에 있어, 굳은 신덕과 뜨거운 애덕을 발휘하게 하소서. 우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천진암으로 행렬이 이어졌다.
역사 자료를 수집하는 양방수 한국외방선교회 홍보부장 오른쪽 검은 양복을 입은 변 기영 신부.
하관예절을 하는 순간 오른쪽으로 부터 필자와 변 기영 신부님, 후손 이 병규씨. 앞에 빨간 제위를 입으신 오 기선 신부님. 김 남수 주교님께서 시작 기도로 하관 예절이 시작 되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여! 주께서는 오묘하신 섭리로써 오늘 우리가 이장하는 베드로 이 승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로 하여금 200년전에 바로 이곳에서 주의 진리를 열심히 탐구하게 하시고, 몸소 실천하므로써 우리에게 세례성사의 은총을 전달하는 도구로 선택하시고, 마침내 주께 대한 신앙으로 인하여 목숨을 바치게 하셨사오니, 하늘에서는 영원한 영광을 그에게 주시고,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는 세례성사의 효험을 기리 간직하며, 용감히 발휘하게 하소서 ~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유 홍렬 박사님의 생애 약사가 낭독되고,
무덤 축성 기도
사흘동안 무덤에 계시며, 모든 신자들의 무덤을 거룩하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육신이 묻히는 이 무덤은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시나이다. 그러므로 주여 비오니, 주의 종 베드로 이 승훈 순교자로 하여금 이 무덤에 고이 잠들어 안식을 누리다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께서 부활의 빛을 비추실 때 주의 빛나는 얼굴을 뵈오며, 천국에서 영원한 광명을 보게 하소서 ~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이멘.
● 새 묘소에 하관 오후 3시(이벽 성조의 묘소 바로 옆에 모셨다.)●
●새로 만들어진 지석의 앞면과 지석의 뒷면(모든 성현들 묘지석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됨) ●
묘 확인 및 이장위원회 위원장 이 병규 위원. 이 병찬. 이 선균, 이 창균, 이 장균, 이 광균, 이 근균, 이 인균, 아 성균, 이 상균, 류 홍렬, 이 순석, 이 숭녕, 이 원호, 김 학성, 이 각규, 참관인 김 남수 주교, 오 기선 신부, 변 기영 신부,
하관 기도
200년전 바로 이곳에서 주의 진리를 탐구케 하시고, 우리 겨례에게 세례의 은총을 전달케 하시며, 한 평생 한국 천주교회 창립을 위하여, 몸 바쳐 애쓰시다가 마침내 피를 흘리며 목숨까지 바치게 하신 베드로 이 승훈으로 하여금 이 거룩한 섭리의 땅에 돌아와 개선과 승리의 찬미속에서 안장되게 하시는 오묘하신 섭리의 천주여 ~ 주께서 오시는 영원한 승리의 날에 부활의 광채로 이 육신을 빛나게 하시고, 또 그 광명으로 이 무덤이 충만하게 하소서 ~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성수를 뿌리는 후손 이 병규 선생과, 하관후 성토 작업을 하시는 오 기선신부님, 후손 이 병규, 김 남수 주교님과 지도하시는 변 신부님
마침 기도
성인 성녀들의 열심한 모범과 보배로운 순교의 피로써 교회를 더욱 거룩하게 하시고, 지켜 주시는 천주여 ~ 주의 천사들로 하여금 이곳을 지켜 주시고, 여기 모인 이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현들도 하여금 천상에서 지상의 우리교회를 수호하게 하시며, 오늘과 내일의 우리 모든 신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주의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현들의 생활을 본받게 하시며, 순교 정신과 영생에 대한 신덕와 희망으로 현세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며, 항상 주의 자비하심에 신뢰하는 은총속에서 주를 섬길수 있게 하소서 ~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다음 성수와 분향을 드리고 기원사의 독서에 이어 천진암가를 모두 합창하고서, 마침 기도로 이어졌다. 기도 합시다.
오늘 우리가 200년전에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신 거룩하고, 위대한 은총의 전달자 베드로 이 승훈 선생의 移葬을 하오니 살아있을 때 이 육신을 통하여 크고 많은 거룩한 과업을 이땅에 시작하신 주께서는 앞으로도 이 遺骸와 墓를 통하여, 세세에 더욱 가룩하고, 빛나는 은총의 결실을 맺게 하시어, 우리 모든이로 하여금 그를 본받아 진리 탐구와 실천에 뜨거운 마음과 희생적인 용기를 갖게 하소서 ~ 우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이 승훈 성현의 이장식을 치루면서 있었던 아찔한 순간을 겪었던 잊을수 없는 추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지막날 移葬을 모두 마치고, 지친 몸으로 천진암에서 모두들 석별의 아쉬움을 남기고, 허기진 배를 안고, 동동주를 한잔씩을 나누어 마시고, 밤늦게 귀가하던 길에는 찬 바람이 유달리 살갗을 스며드는 겨울 밤이였다. 그날 밤, 이 승훈 성현의 후손중에 복자 수녀원에 입회하신 후손 수녀님과 지인 몇분이 같이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도중 신장에서 차에서 내려 차를 갈아 탈려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필자는 혼절하고 말았다. 순간 아무 의식없이 땅에 쓰러졌는데, 아련히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 했다. 모두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챙피해서 훌훌 털고, 아무렇지 않다고 일어나서 사과했지만 모두들 근심이 가득한 눈치였다. 그 때만 해도 첩첩 산중 꼬불꼬불 험한 비포장도로 삐컥거리며, 험한 산길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매서운 추운 날씨에 몸을 녹히기 위해서 모두들 히타를 틀어 놓고 왔다고 생각 되는데 따스한 차안에서 내리는 순간 찬 공기를 마시자 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유는 허기진 차에 독한 동동주가 몸속에서 부작용을 일으킨 것 같았다. 모두들 저 때문에 많은 걱정들을 하고 혜어졌다. 평소에 건강에 자신이 있었는데......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챙피한 생각이 난다........
事件(事件)이 생겼다.
복자 수녀원에서 허원하고 봉사(奉仕)하는 순교자(殉敎者) 후손(後孫) 수녀님도 있었는데,.,,.,오늘은 너무 과로한 탓이였다.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빈속에 배고프다고 동동주 한잔이 사건(事件)을 만들었다.
●양 방수 정 약종 선생 천묘식 기록영화 제작하다.●1981년 12월28일-29일.
●양 방수 한국 천주교회 창립기념 사업회 창립회의 개최. 참석하다.
●신라호텔에서 ●1982년 1월14일.
●양 방수한국 천주교회 창립 제정선포 1주기 기념기록영화 제작하다.●1982년 6월24일.
●양 방수 천진암 창립 3주년 기념 기록영화 제작하다.●1983년 6월24일.
●한국 정신사 연구원 소장 변 기영 신부님께서 공개한 니벽젼.
남원양씨 병부공파 거제문중 30세손 양 방수(바오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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