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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안 소바냐르그, 『들뢰즈와 예술』, 이정하 옮김, 열화당, 2009. 59~66쪽
1. 요약
1.1.
기호론과 윤리학/ 1983년 『니체와 철학』 영여판 서문에서 들뢰즈는 니체는 이론가가 아닌 주로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니체의 사유가 실천론적 방식으로 전파되어서이다.
1.1.1.
니체 사유는 힘들과 관계한다.
힘은 힘들의 관계로 주어지는 것이며, 복수로만 존재한다.
들뢰즈는 니체 철학을 1)일반기호론 2)윤리학과 역량의 존재론으로 니체 철학을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1.2.
기호와 역량이라는 짝패는 시몽동이 ‘이것임hecc?it?’이라 불렀던 힘의 철학, 빠름과 느림의 구성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1.2.1.
기호학과 윤리학, 기호와 감응을 통한 힘에 대한 사유는 다음 3가지 예술의 사명을 정의하고,
이것은 들뢰즈 저작의 세 양상과 상응한다.
1.2.2.
1) 의(醫, 치료)-예술로서의 니체적 징후학
2) 힘의 포획으로서의 예술
3)영화에서 지각이미지의 힘, 운동이미지의 힘이 감정이미지의 역량과 결합한 작용과 반응으로서의 이미지
1.2.3.
들뢰즈에게 예술은 물질적인 힘들의 관계이며 구성이다. 니체 철학은 힘들과 관계한다.
1.2.4.
모든 힘들의 관계가 기호론을 만들어내고, 또 기호론은 역량의 기호적 신호계의 지도를 만든다.
1.2.5.
힘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기호 혹은 징후는 어떤 기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에 상태, 감응(존재론과 윤리학)에
상응하는 힘들의 관계(기호학)를 지시할 뿐이다.
1.2.6.
기호처럼 이미지도 속도들로 구성되고 감응이 가능한 힘들의 관계이다.
1.3.
모든 힘은 ‘다른 힘과 본질적 관계’를 가지므로 힘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복수적이다.
힘들의 관계가 아닌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3.1.
기호와 이미지, 힘들과 형태들의 관계는 들뢰즈의 저서에서 스피노자를 경유하여 니체와 푸코를 접속시킨다.
1.3.2.
기표냐 기의냐, 또는 형샹이나 질료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시몽동의 변조(modulation) 원칙에 부합하는 힘과 재료가
문제이다.
1.3.3.
감응은 힘들의 상태에 상응하는 역량의 행동학적 양태 혹은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을 이미지의 감응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부합하는 세 가지 지표는
니체의 힘의 의지,
스피노자와 새로운 신체의 지도 제작으로서의 이것임, 주체화 과정에 있는 이미지이다.
1.4.
니체와 징후학/ 니체는 힘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각 ‘현상’, 각 상태의 배면에서 감응과 역량을 추적하여,
그것의 ‘능동적’ 양태와 ‘수동적’ 양태를 구별한다.
1.4.1.
철학자, 예술가는 니체적 의미에서 해석한다.
해석한다는 것은 힘들의 관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해석은 번역의 문헌학적 방식에서 벗어나 진동을 그리며 동화하는 생명의 방식과 결합한다.
1.5.
힘의 철학은 기호학과 역량의 행동학으로 분할된다.
1.5.1.
기호학(어떤 사물의 상태)은 징후로서 어떤 힘들의 상태를 지시하며, 그 역량의 존재론을 함축한다.
기호는 그 자체로 역량의 변주를 겪은 어떤 힘들의 관계를 구성한다.
1.5.2.
들뢰즈는 니체에게서 예술의 징후학적 사명을 취하고, 의미작용의 해석을 힘들의 실험으로 대체한다.
1.5.3.
들뢰즈는 문자 그대로 문학을 하나의 의학으로 이해한다.
1.5.4.
들뢰즈가 문학가들의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 감각적 문턱을 넘어 지각될 수 있었던 힘들의 유형의 지진계를 구성한다.
1.6.
들뢰즈는, 기호들은 다양한 세계들로 서로 공존한다고 말한다.
1.7.
예술의 기호들은 미래전망적인 비균질성과 파편적 불규칙성을 보존한다.
1.8.
기호적 신호계가 의학적이란 것, 혹은 기호들의 진단학이 의학적 진단과 맞먹는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러한 진단이 역량의 행동학, 즉 윤리학과 존재론을 개진시키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85~87쪽
1.1.
들뢰즈는 아르토의 시 작품에서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선취했다.
1.1.1.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년 9월 4일 ~ 1948년 3월 4일): 프랑스 시인, 연출가다.
부모는 터키의 이즈미르 출신으로 그리스 계통이었다.
4세때 뇌수막염을 앓아 일찍부터 병약했고 평생 신경통, 우울증을 앓아 아편을 약으로 복용하며 중독되었다.
1916년 프랑스 군에 징집되기 전까지 5년 동안 요양원 생활을 했는데, 군대에서 몽유병이라는 이유로 강제 제대되었다.
연극은 관객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기이하고 불편한 조명과 소리들을 작품에 사용했다.
“잔인극”(Theatre of cruelty)을 주창했다.
그는 “잔인”이라는 말로 사디즘이나 가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허위적인 현실을 깨트리기 위한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결정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문자가 의미의 독재자였다고 말하면서, 연극은 사유와 몸짓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특이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1.1.2.
아르토와 들뢰즈 : 들뢰즈는 아르토의 라디오극 Pour en finir le jugement de dieu (To Have Done With The Judgment of God, 1947)
에서 이 개념을 차용했다고 한다.
이 극은 외설적이고 반미주의적이고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방송이 금지되었었다.
When you will have made him a body without organs,
then you will have delivered him from all his automatic reactions
and restored him to his true freedom. [1]
1.2.
들뢰즈에게 기관은 생명과 반대되는 유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힘의 논리학과 개체화에 대한 양태적 이해에 따르면 생명은 비유기적인 것이다.
1.3.
기관 없는 신체 개념에는 두 기능이 있다.
첫 번째는 중심을 갖는 유기적 조직화 이전의 신체의 개체화 방식을 다루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아르토, 베이컨, 생-틸레르에 기댄다.
1.4.
두 번째는 예술과 신체의 접합에 관한 성찰이다.
기관 없는 신체(『의미의 논리』)에 대한 최초의 규정은 예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 한계에 이른 사유, ‘사유의 무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아르토가 바로 이 사유의 무능력을 특징적으로 규정했다. 예술과 광기의 관계가 아트로의 정신분열적 형상을 중심으로 정립되었다.
1.5.
사유의 무능력이 사유의 창조 조건이다.
한계와 마주친 사유에게는 창조가 요구된다.
이것이 사유의 구성적 외부성이다. 즉 사유는 권능의 종말을 표시하는 감각적 충격과의 이접적 조우로부터 탄생한다.
1.6.
사유의 무능력이 정신병의 문 또한 열게 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독단적 사유와 정신분열증적 사유를 대립시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분열증이 ‘사유의 한 가능성’임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1.7.
아르토는 “나는 본유적 생식기이다”라고 쓰면서 본유적inn? 사유가 아닌 생식기적g?nital 사유에 대한 “끔찍한 폭로”를 계속했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내 본유성을 채찍질해야 하는 자다... 사유란 아직 존재한 적이 없는 산파이기 때문이다”
1.8.
또한 기관 없는 신체는 신체의 강도적 정의와 관련된다.
정신분열증 개념은 『안티-오이디푸스』를 통해 좀더 한정된 정신의학적/진단적 의미를 갖게 되고, 정상성에 대한 비판의
무기가 된다.
1.9.
이제 기관 없는 신체는 해석 비판의 본질적 부분으로 되고, 유기체와 유기적 조직화 개념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된다.
104~109쪽
시몽동, 그리고 힘과 재료의 변조
1.1.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는 질베르 시몽동의 강도적 물리학과 힘의 기호론을 취해 완성한 신체의 물리학과 작품의
물리학이다.
이는 생명과학과 예술의 창조적 사유에서의 신체에 대한 규정에 동시에 관련되어 형상(형태)과 질료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1.2.
개체화란 정지해 있는 질료와 능동적인 형태를 대립시키는 주형鑄型의 개념 즉 힘과 재료의 결합이라는 형태의 포착인
변조 과정이며, 변조는 질료 자체의 층위에 자리 잡아 질료를 독특성과 표현적 특질의 보유자로 사유할 수 있게 하고,
우리는 형태와 질료의 정태적 대립에서 매개적인 중간 차원, 에너지의 차원, 분자적 차원의 지대로 이행한다.
1.3.
따라서 우리는 “기형화 과정과 조합된 … 암묵적인 형태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독특성 혹은 이것임의 보유자라 할 운
동하는 에너지로서의 물질성”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예술에 대한 정의에서 예술작품이 사유에 대해 생산한 효과는 재료의 능동적 기형화 역량에
의해 설명된다.
1.4.
모든 예술은 힘을 포획한다.
각 예술은 단일한 통일성에 추상적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재료들로 강렬한 힘들을 포획하는 것을 공유하는
공동체에 부응한다.
1.5.
자연에 대한 모방과 구상적 재현에 종속되었는가 혹은 벗어난 예술인가가 아닌 즉 더 이상 존재하는 형태들을 재생
하거나 또 다른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내재적이고 소박한 힘의 포획이 형태의 창조나 재생을 대체한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힘들을 포획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예술은 힘의 징후학의 영역 혹은 전적으로 내재적인 행동학의
영역에 위치한 실행자가 된다.
1.6.
포획은 재료에 감각을 합병하고 작품에 재료의 표현적 힘과 감응의 힘을 병합한다.
즉 “질료-형태의 쌍은 힘-재료로 대체된다”
1.7.
형태와 질료의 대립에서 작품 자체의 층위에 존재하는 표현 재료의 구축으로 이행하는 것은, 진정한 재료의 분석으로
향하는 미학적 분석을 위해 유리하다.
이것임 혹은 독특성을 조사하고 감응, 감각의 용어로 작품과 관객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쓰일 감각의 논리는 이러한
재료의 분석에 기대고 있다.
1.8.
변조로서의 예술은 힘의 포획으로 정의된다. 구상된 재료와 이 재료를 통해서만 지각될 수 있는 지각 불가능한 힘들의
쌍으로 대체한 것은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한 강도적 정의에도 합당하다.
1.9.
유사성의 대립
1.10.
변조는, 유사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시간성을 획득하는 어떤 이질적 관계를 예술의 재료와 그것이 생산한 감각 사이에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1.11.
이 이질적 관계는 힘의 포획과 생성, 그리고 모방이 아닌 현전하는 힘들의 식별 불가능성과 이질성이며 이를 통해 생성의
블록이 공고해진다.
1.12.
사진 이미지의 움직이지 않는 단면의 정적인 형태를 떠나 균형을 움직이는 단면 혹은 “끊임없이 주형을 변형시키고”
“변이 가능하며 연속적 시간적인 주형을 구성하는” 힘의 생성인 형태의 강도적 이해로 이행하는 변조로 대체한 것이
영화이다.
1.13.
연속적으로 변주하는 형태에 대한 이 새로운 강도적 개념화에서 추상적 형태와 강도적 힘, 감각적 형태(변조)의 구분은,
감각적 모델의 복사나 그 가지적 구조를 포착하는 방식 즉 상상적 유사성, 구조적 유비성에 기대지 않고서도 가능한
예술과 표현의 관계를 보장한다.
1.14.
유사성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모방으로부터 생명력의 작동으로 만드는 생성이론, 즉 말벌과 양란의 포획의 예가 보여준
생명 유형의 공생, 공동-진화 혹은 비평행적 생성으로 이행하여 예술의 표현 문제를 사유하게 한 생성 이론, 동물-되기,
소수-되기로 유사성, 유비성을 대체한다.
1.15.
포획 개념은, 상상적인 것과 그 뒤에서 작품을 작가의 해석이나 수용자의 해석에 흡수시키는 모든 정신분석학적 이론,
또 구조적인 것과 함께 예술의 효과를 그 내적 구조로 환원시키는 모든 형식주의 이론을 동시에 퇴출하여 예술을
상상적 유사성이나 구조적 상동성 이론에서 벗어나게 한다.
1.16.
힘의 포획은 작품을 주체 위에 붙여 씌우는 해석학에 반대하고 작품에서 객관적 구조의 유효성을 탐색하는 구조적,
사회학적 해석에 반대하여 형태-질료의 관계를 재료-힘들의 관계로 대체한다.
1.17.
전대미문의 포획을 생산한 이질적 힘들과 접촉한 작품은 문화의 변동을 설명할 실제적 생성 속에서 창조자와 수용자를
결합시킨다.
1.18.
예술을 ‘실재의 작동’인 변조를 통해 “감각할 수 없었던 힘들을 감각하게 하는” 작동이라고 정의하는 들뢰즈 철학은,
예술 철학을 신체에 작용하는 힘으로서 물질적으로 이해된 감각 이론이자, 변조를 통해 새로운 재료로 포획한 이질적
힘들을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감각 이론과 연결시킨다.
1.19.
변조는 현전하는 힘들의 식별불가능성과 이질성의 결합이며, 모든 기호들과 유형은 이렇게 대상 자체의 변조와 분화에
참여하며, 이 분화를 통해 신호계적 질료, 즉 언어학적 재료가 아닌 각 예술에 따라 다르게 변이하면서 감수성에 효과를
낳는 재료가 “모든 변조적 특질을 함유하게 ”된다.
111~116쪽
1.1.
재현 비판의 실행자인 문학에서 징후학인 문학으로 이행한 들뢰즈는, 사실상 1967년을 기점으로 그리고 1970년부터는
전면적으로, 단순히 문학만이 아닌 예술 전반에 비인칭적 실험이라는 기능을 부여한다.
분석의 이론적 쟁점들은 더 이상 특별히 문학적인 것만이 아닌 다른 예술적 실천들에도 적용되며, 특히 문학을 포함한
언어학적 영역의 암묵적인 우선권 포기를 요청하게 된다.
1.2.
두 번째 시기의 문학철학에서 예술철학으로의 이행은 해석적 입장에 대한 미련 없는 간단한 포기와 관계한다.
독서의 새로운 실천론을 표방하면서 이차 담론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들뢰즈는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전복시킬
일반기호론에 착수한다.
1.3.
해석에서 ‘기계적 작동’으로 가는 이행은 해석 비판을 계속 밀고나가면서 의미의 초월성을 텍스트의 내재적 기능으로
대체하는 구조적 입장 또한 고발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구조적 입장을 <<의미의 논리>>와 <<차이와 반복>>에서 주석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해왔다.)
해석에 대한 이와 같은 근본적 거부에서 두 가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1.4.
첫째 비평의 정치적 전환에 관한 것으로 1968년 5월의 반향과 1969년 가타리와의 만남과 상응한다.
실험의 개념은 이전의 독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치적 억양을 띠게 된다.
기호는 여전히 물리적 사건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적 체계에서 생산되어, 이에 역으로 작용하게 된다.
실험을 지지하는 징후학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니체적 독법 또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받는다.
1.5.
예술가는 문명의 병리학을 진단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새로운 힘들의 성운, 즉 한 문화에 가능한 삶의 유형들의 징후들,
현행 조건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변형의 동인 등을 출현시키는 실행자가 된다.
작품은 이제 미학적 기능을 통해 곧바로 비평적 가치를 갖게 된다.
작품은 풍속의 내부에 직접 개입해 들어가 작품과 사회적 신체의 실질적 관계를 조정한다.
1.6.
창조자와 작품의 관계, 작품과 대중의 관계, 예술가와 사회적 신체의 관계는 개체들을 생산하는 개체화의 장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작품만이 아닌 예술가 또한 이러한 개체들이다.
예술은 비인칭적 삶, 전개체적 독특성들로 구성된 강렬한 포텐셜을 향해 열린다.
작가는 이제 비인칭적이고 집단적인 사회적 형상이 된다.
1.7.
둘째, 해석에 대한 투쟁, 실험이라는 예술적 지위, 사회적 힘들의 변조라 할 징후학 등을 통해 들뢰즈는 무의식과 예술의
관계, 생명의 규범과 예술의 관계를 체계화한다.
들뢰즈는 정상적 측면뿐만 아니라 특히 병리적 측면에서 문화 내 규범들의 삶을 탐색한다.
이는 그의 저서에 이미 나타나 있던 관심사이지만, 이제 해석 비판과 밀접히 연계되어 정신분석의 작동 틀에서 들뢰즈가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1.8.
기표에 대한 거부는 해석 비판에 이어 구조적 체계의 형식적 상징주의에 대한 거부로 논리적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은 <<카프카>>의 출판과 함께 확고하게 입장을 정립한다.
정신분석은 <<천개의 고원>>에서 다시 한번 급진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곧 이론적 대상으로서의 실효성을 상실하고
사라진다.
1.9.
해석 비판, 실험, 징후학, 기표 비판이라는 네 요소들은 더 이상 언어적이 아닌 기호론을 결정하는 데 공헌한 것들이다.
1.10.
정신분석과의 결별은 사유와 사유의 실천론적 차원이 맺는 관계에 대한 재평가를 함축한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삶과 사유의 관계는 이제 사회적 차원을 획득한다.
삶은 단순히 비유기적인 역량만이 아니라 경험적 역사성을 갖는 정치적 현실이 된다.
욕망과 권력이라는 주제의 출현이 잘 보여주듯이, 이 새로운 쟁점은 철학과 예술철학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1.11.
기표의 구조, 정신분석적 해석체계와 개인적 무의식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천 개의 고원>>까지 계속 비판대상이
된다. 기표는 기계로 대체되고, 실험은 해석을 대체한다.
1.12.
정신분석은 <<프루스트>>의 두 번째 판본(1970)까지 들뢰즈 철학에 계속 출현하여 특정한 개인성이라는 주체로 환원할 수 없는 비인칭적 전개체적 역량으로 사유를 설명하려는 들뢰즈의 기획을 확고히 정립시키는 데 공헌한다.
들뢰즈는 자신의 주관적 종합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정신분석의 범주들을 활용한다. <
구조주의를 어떻게 호명할 것인가>에서 들뢰즈는 라캉의 기표를 비인칭적 독특성, 주체 없는 초월성을 정초하는 분화소라는 계열적 양태로 정의된다.
116:13~121:6쪽
1.1.
정신분석이 문화에서 소수 담론의 입장에 있을 때, 들뢰즈는 정신분석과 더불어 사유했다.
정신분석이 담론의 지형 내에서 주도적 입장을 쟁취하면서 지배이론의 위치를 점하게 되자, 해석행위에 대한 거부와 기표에
대한 거부는 주요한 이론적 쟁점이 된다. (116:14)
1.2.
인문과학의 구조적 방법론에 대한 투쟁이 완료되면서, 정신분석은 단지 지엽적 공리 공론적인 사례, 혹은 지체의 사례로 보일
뿐이었다.
푸코의 행보와 비교된다. 그는 성과 성의 사회적 억압은 잘못된 근거 위에 세워진 추상화라는 것을 『성의 역사』에서 보여
주려 했다. (117:2)
해석에서 횡단성으로
1.3.
『프루스트』연구의 1부(1964)와 2부(1970)사이에 체계적으로 발전된 해석 비판은, 『카프카』(1975)를 통해 최종적인 균형을
획득한다. (117:18)
여기서 사유행위의 발생은 기호의 해석, 그리고 이 기호의 펼쳐짐으로 규정되어 있다.
순수 사유가 매개가 된 예술과 사유의 관계는, 『의미의 논리』의 기관 없는 신체가 촉발한 사유와 신체성의 관계를 붇는
진단적 분석에서 재사유 되기 시작하여, 시몽동의 변조이론과 더불어 전면적으로 재성찰 된다. (118:2)
1.4.
가타리가 1965년부터 독자적으로 구상한 횡단성transversalit?의 개념- 무의식의 소통과 관계들을 설명하는 -을 들뢰즈는 받아
들이면서 ‘예술작품의 형식적 구조’라 부른 것을 밝혀내기 위해 횡단성 개념을 자유로이 사용한다.
해석한다는 것은 횡단적 단일성 이외의 어떤 단일성도 갖고 있지 않다.
‘횡단적 단일성’을 발전시킨 ‘다수적 입구들의 원칙’ -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라는 새로운
원칙을 직접적인 논쟁적 쟁점으로 발전시킨다. (118:18)
1.5.
횡단성은, 피라미드적 위계를 갖는 수직적 모델과 그 파생물인 순차적 질서의 연결로 이루어진 수평계를, 탈중심적 체계를
갖는 새로운 양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양식과 더불어 처음으로 리좀의 개념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진다. (119:17)
외부적 측정 단위나 내부적 원칙에 따른 순차적 질서를 갖는 통합에 저항하는 강도적 모델을 통해, 구조가 아닌 관계의 우위성,
동일성이 아닌 생성의 우위성을 긍정한다. (119:21)
가타리는 횡단성의 정치적 개념을 통해. 집단의 서로 다른 두 양상, 즉 위계를 제거하고 비인격적 주체성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생산하고자 하는 ‘주체 집단’들과 피라미드적 조직과 중심적 구조를 갖는 ‘종속 집단’들을 구별한다.
이 구별은 정치조직의 비판과 사회적 구조화에 대한 정신 요법적 검토에 유호하게 작용한다. (120:6)
1.7.
제도적 정신요법의 쟁점은, 자아치료에 개인의 정신병리들을 시동시키는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비판을
결합함으로써, 무의식을 정치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120:21)
1.8.
미리 결정된 작품의 구조 - 피라미드적 위계에 대해 들리니F.Deligny 식의 궤적들의 복합체나 흔적선들의 복합체로 -로 정렬
되지도 않고 유기적 총체성과 관련하지도 않는 탈중심적 조직망이 대립하게 된다.
횡단성은 이렇게 화용적(話用的) 언어학과 실천적 문학비평을 결정한다. (121:2)
즉 횡단성이야말로 새로운 언어학적 관습, 작품의 형식적 구조이다.
121:06~125:22쪽
1.1.
황단성의 이론적 유효성은 『카프카』에서 잘 드러난다.
황단성은 단순히 작품의 위계 구조에 대한 이의 제기를 넘어선다.
완벽한 총체성에서 이접적 파편으로 가는 이행 자체에 독서의 실천론적 이론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
1.2.
들뢰즈와 과타리는 『카프카』에서 이를 사실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데, 작품의 입구는 파편적이다.
입구는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어떤 임의의 지점, 결정되지 않은 유입지점을 선택한다.
더 이상 작품의 방향들을 위계화하는 총체성도, 미리 규정된 질서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입구도 특권이 없다.” 입구는 “차후 다른 것들과 접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3.
작품의 유기적인 발단, 위계적 총체성은 운동학적 입구로 대체된다.
모든 독서가 가치있는 것은 아니며 또 동일한 순환적 밀도를 갖지도 않지만, 매번 독서를 통해 작품은 변모된다.
1.4.
독서 행위는 행로를 여는 행위로서, 이 행로는 독서가 실행되는 현행성-우연성이 아닌-을 표현한다.
“어떻게 카프카의 작품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리좀, 은신처이다.”
비평의 시행은 이 은신처에 통행로를 제공하고, 리좀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1.5.
입구는 어디나 가능하고, 이 입구는 글쓰기의 진행 과정에서 변조한다.
독서는 숨은 의미나 가능적 의미를 포착하려는 해석과 다르다.
독서는 침입 행위(‘은신처로 들어가다’)이기 때문인데, 이 침입 행위야말로 작품의 살아 있는 성격, 서식할 영양공급망의
존재, 그리고 역으로 작품을 위한 이러한 조력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즉 독서 이론으로서의 리좀은 독서 행위를 고려하며 작품의 수용을 능동적 생산, 진정한 변형, 직품의 포획으로 전화시킨다.
1.6.
1970년에 들뢰즈는 총체적이 아닌 파편적 작품의 횡단적 해석의 가능성을 고수하지만, 1975년의 작품의 파편적 존재론은
작품의 복수성과 독서의 실천론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기한다.
다수적 입구들의 원칙-논쟁적 가치를 띤-은 작품의 궤도들을 ‘봉쇄하는’ 모든 해석을 사전에 저지한다는 쟁점을 갖게 된다. 다수적 입구들의 원칙만이 기표라는 적의 도입을 막고, 실험의 대상일 뿐인 작품을 해석하려 하는 모든 시도들을 저지한다.
1.7.
이 횡단적 독서는 예술과 삶, 작품과 해석 사이의 관례적인 단절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기표의 폐기라는 명목으로 해석이라는 용어 자체를 거부한다.
1.8.
모든 독서는 작품의 작동에 공조하며, 영토의 가능한 궤적들, 지도 제작, 답사 만큼의 독서들이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천 개의 고원』의 방법론적 서론을 구성하고 해석에 반대하는 리좀적 이론의 체계를 만들 독서 원칙들이
나온다.
횡단기계에서 문학기계로
1.9.
들뢰즈는 무의식을 변형시키고 기표를 비판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틀에서 벗어난다. 즉 과타리의 기계 이론에 공조
하여 무의식을 사회적 장 전체에 분배한다.
1.10.
예술은 (상상적) 환상이나 (상징적) 담론과 같은 심리적 차원으로 미학을 되돌려 보내는 해석에서 벗어날 때, 정치적인 것, 기계적인 것, 실험적인 것이 된다.
예술은 초개체적인 것, 사회적 신체와 관련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는 정치, 실험과 연대하고, 예술의 실재적 기본규칙은 상상적 혹은 상징적 효과, 구조적 혹은 환상적 효과를 축출한다.
1.11.
글쓰기는 자기목적적인 것이 아니며, 작가 개인의 몫에 속한 것 또한 아니다.
생산적 활동인 예술은 사회적 신체에 정치적 효과들을 생산할 경험적 기본규칙을 투여한다.
해석에 내맡겨진 상상적 환상의 개인적 심리 차원이나 기표적 상징 장치의 구조적 차원 또한 예술의 효과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주관적 효과의 미학에서 예술을 풍속의 작용으로 만드는 비평으로 이행했다.
155~159쪽
1.1.
언어학과 기호론/ 주류 문법성에 대한 비판은 사회적 배치와 랑그 체계를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는 기호론에 근거하고 있다.
1.1.1.
언어의 기원은 비존재하고, 랑그는 열린 체계다. 들뢰즈/가따리에게 언어는 사회적 ‘언표행위의 배치’라 부른 열린 화용적 체계다.
1.1.2.
물리적 정신적 언어학적 인칭들로 언어를 시동시킬 수 없다. ‘나는 말한다’와 ‘누군가는 말한다’의 대립.
1.2.
들뢰즈/가따리는 화용적 언표행위의 배치와 단절한 내부론적 언어학의 네 가지 전제를 거부한다.
그리고 언어학적 기호들과 다른 기호 체제들의 분리를 거부하는 기호론의 원칙을 주장한다.
1.3.
전제1) 언어는 정보적이고 의사소통적인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화용적이다.
언어는 의미작용이 아닌 명령어로 ‘기호화’한다. 즉 가르치며 명령한다.
1.3.1.
의미란 불변항처럼 실행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상의 언표행위의 배체 의존하는 것이다.
1.4.
전제2) 어떤 ‘외재적’ 요소의 도움도 필요 없는 랑그의 추상 기계가 존재할 수 있다.
1.5.
전제3) 랑그를 동질적 체계로 정의할 수 있는 랑그의 상수 혹은 보편소들이 존재할 수 있다.
공시적 통시적으로 랑그들을 변용시키는 실제 변주를 무시할 때만 이 전제는 가능하다.
1.6.
전제4) 주류어 혹은 표준어라는 조건에서만 랑그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주류적 내부론적 언어학이 매우 엄격한 형식적 주장을 제시할 때조차 끝까지 충분히 분석을 밀고 나가지
않으며 추상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1.7.
언어는 그 단독으로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배치의 집단적 조건 혹은 기호론적 조건 속에서만 생산적이
된다.
1.8.
언어학적 요소들은 사회적 정치적이고 물질적 구체적인 언표행위의 배치에 의존한다.
1.9.
배치는 구조가 아닌 잠재적 다이어그램을 현실화한다.
이 잠재적 다이어그램은 다양한 비균질적 약호들의 분절들을 배치하는 기호론적 리좀의 정의에 따라 항상 이질적으로
존재한다.
159~164쪽.
소수와 주류
1.1.
체계적 문법성의 옹호자 촘스키와 사회언어학의 지지자 라보프는 변주와 변수를 다르게 취급한다.
촘스키는 변주(흑인영어)는 동질적 체계의 법규(표준영어)를 적용해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라보프는 변주들이, 언어학의
동질적 체계라는 생각이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1.2.
촘스키에 의하면 동질적 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소수어는 주류가 될 수 있다.
라보프는 오히려 랑그를 작동시키는 변주를 고려하지 않으면 주류어조차 연구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1.3.
두 사람은 변수의 인식론적 지위를 취급하는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갈리는데, 촘스키는 변수에서 상수를 추출함에 반해
라보프는 변수를 랑그의 연속적 변주상태에 결부시킨다.
1.4.
촘스키의 변주는 체계의 규칙을 갖는 변형이다. 라보프의 변주는 내재적 변주, 체계적 변주, 변주하는 체계로, 체계로의 환원을
거부하는 ‘권리상의 구성 요소’이다.
1.5.
이 열린 체계가 리좀의 정의에 상응한다. 이 열린 체계도 명확한 문법성의 규칙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열린 체계의 문법성의 구역들은 불명확한 구역과 내재적 변주를 배제하지 않는다.
1.6.
규칙의 존재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보다 모든 체계들을 변주에 열어놓는 내재적 변이 가능성을 정의하는 것이 문제이다.
1.7.
랑그의 연속적 변주 속에서 상수들은 변수들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상수의 성격이 기본적 요소에서 파생적 부차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관 없는 신체의 분석 결과들이 주류적 불변항에 대한 비판이 된다.
1.8.
“상수는 변수에 대립하지 않으며, 연속적 변주라는 또 다른 취급과 반대되는 변수에 대한 하나의 취급일 뿐이다.”
즉 불변항이 상수의 기능을 하며, 변주는 과도한 흐름이 아닌 변수의 변주화인 것이다.
창조적 말더듬기
1.9.
창조적 말더듬기, 창조란 랑그 속에 ‘외국어’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파롤의 잘못된 용법으로 이루어진 외부 규칙을 부과하는 것(변용)이 아니라 ‘실문법성’의 한계까지 랑그를 밀고
가는 강도적 용법, 랑그에 변이가 가능한 구성적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1.10.
문체가 이렇게 강도적 실문법적 변주, 소수-되기, 동물-되기와 관계하는 조건들의 창조적 변형을 함축한 탈주선으로 묘사될 때,
우리는 랑그의 기관 없는 신체에 이른다.
1.11.
창조란 항상 감산적이다. 문체는 새로운 배치를 시도하기 위해 랑그에서 평형조건들을 삭제하고, 랑그에 소수-되기를 부과한다.
164~170쪽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와 권력 비판
1.1.
카프카의 권력에 대한 진단은 혁명적이다. 이는 문체의 새로움과 실재 사회조직에 대한 전대미문의 탐색이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2.
이제 문학은 감응의 물리학, 사회적 행동학이 된다.
즉 작가는 그 자신이 시대의 사회 물리학을 통해 감응하는 방식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
1.3.
카프카의 작품이 표현해 낸 언표의 새로움과 새로운 배치란 언표행위의 사회적 배치, 집단적 배치를 형성하는 관료사회와
권력관계의 배치에 있다. 따라서 저자-기능은 항상 집단적이다.
1.4.
관료사회의 현상을 포착한 건조하고 중성적인 카프카의 산문은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비인격적 저자)를 형성하는데,
이 배치가 창조적인 이유는 하나의 동일한 배치 내에 새로운 언표행위와 현실의 진단적 탐색을 결합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배치의 힘들을 ‘포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1.5.
카프카 텍스트의 혁명적 영향력은 사회조직에 대한 개별적 저항이 아닌 간결하고 건조한 랑그 체제를 강요한 사회적 힘들의
장에 대한 탐색에 있으며, 푸코 또한 오늘날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을 새롭게 갱신할 수 있는 권력 분석을 제안하는데
있어 여타 모든 방법들과 더불어 카프카적 울림을 전제한다.
1.6.
카프카와 푸코는 사회적 신체에서 새로운 가시성들을 추출해 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료사회의 최근 영토들을 측량했던 카프카가 추출한 가시성은 지형도이며,『감시와 처벌』에서 외관상의
공간을 활성화하고 있는 힘들의 관계를 들춰낸 푸코에게 그것은 지도제작이다.
1.7.
그들에게 권력은 첫째, 국가 장치로 국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이지 않으므로 국지적이지만, 위치를 탐지할 수 없고 산포되어 있다.
둘째, 권력은 경제적 토대에 의한 최종 심급이 아닌 오히려 생산자이다.
즉 관료주의 메커니즘은 사회적 요소들과 분리될 수 없지만, 이 요소들에 의해 내재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이미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치한다.
셋째 따라서 권력은 본질이 없으며 조작적이다. 넷째 권력은 어떤 속성이 아닌 관계이다.
다섯째 이 점에서 권력은 힘들의 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스며든다.
여섯째 권력의 작용은 억압적 폭력의 형태나 기만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진압하기 전에 ‘실재를 생산한다.’
즉 규범적인 권력은 효과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에 억압과 이데올로기는 실제적 배치를 전제하며 이 배치 내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1.8.
진단과 연속적 변주
1.9.
결국 문학은 개인적 환상이나 사회적 개인과의 동일화와는 반대로 외관상 개인들의 기저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닌 오히려 독
특한 비인칭성의 역량을 발견함으로써만 존립한다.
1.10.
문학은 대문자 나라고 하는 권력에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는 삼인칭(블랑쇼의 ‘중성적인 것’)이 우리 안에서 태어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
1.11.
저자-되기는 능동적인 사회적 기계와 언어의 특질들을 동시에 배치하는 비인칭적이고 독특한 양태이다.
1.12.
이는 들뢰즈의 ‘고유명사’ 혹은 바슐라르적 의미의 ‘K 양식’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유명사란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장 혹독한 탈인격화 훈련에서 출발해 사방에서 자신을 횡단하는 다양체들로 열릴 때, 진정한 자신의 고유
명사를 획득하는 것이다.
1.13.
저자-되기는 이 비인격적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며 고유명사는 강도의 장 내에서 순수한 부정법 동사의 주어로 이해된,
바로 그 비인칭적 주어로 남는다.
1.14.
이 부정법은 소수 문학의 특징적 규정을 다시 보여주지만, 그러나 주어진 약호들의 소수화에 한정되지 않으며 강도적 변주의
평면에 이를 옮겨 놓는다. 그리하여 주체화의 비인칭적 역량인 고유명사와 ‘탈인격화’는 예술의 조건이 된다.
1.15.
소수문학은 예술, 랑그, 사회적 규범이 서로 접속된 장애 규범을 제기하는 변주의 인식론을 제안함으로써 연속적 변주로 가는
이론적 이행을 보여준다. 즉 주류건 소수건 불변항의 변주를 변수들의 변주로 대체하였다.
1.16.
소수와 주류는 분리될 수 없다. 주류란 추상적 원형도, 어떤 양量이나 숫자상의 우월성도 아닌, 측량 단위 혹은 상수의 위치로
승격된 변수일 뿐이다.
즉 동질적 항상적 체계인 주류는 만약 우리가 소수와 주류 이 양자 모두를 생산하는 구성 관계의 하위 체계로 이 둘을 분리시켜
놓으면, 단지 소수로 존재할 뿐이다.
1.17.
주류적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수적 생성만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의 생성과 같은, 소수적 의식의 보편적 형상이 존재하며, 이러한 생성이야말로 창조이다.
연속적 변주는 개인이라는 주류적 사실과 대립하여, 모든 이들의 소수적 생성을 구성한다.
1.18.
유일하게 실재하는 소수화 과정이 주류를 지배의 입장에 놓으며, 동시에 소수를 생산한다.
주류란 결국 소수가 창조한 소수의 한 입장이다.
1.19.
주류는 지배의 실재적 효과를 즉자적 주류가 아닌 숭배, 정상화 또는 지배의 과정으로 보여주며, 이를 통해 변수는 주류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결국 문학은 대자적對者的으로 영웅적 포즈를 요구하는 교화적 기형화를 통해서는 스스로 소수가 될 수 없다.
171 - 175쪽
1.
정신분열증과 강도성
1.1.
주류와 소수의 주제는 구성된 주체성의 해체 체험이라 할 정신분열증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1.2.
들뢰즈는, 사유가 더 이상 의식적 지배라는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근본적인 직접성 속에서 자신의 신체적 물질성
대변하게 되는 한계 체험을 지칭하는 상당히 불확실한 명칭이었던 정신분열증의 임상적 진단표에 개의치 않고, 블랑쇼가
횔덜린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받아들인다.
1.3.
즉, 횔덜린의 예는 정신분열정의 통상적 진단표에 속하지만, 횔덜린은 “질병의 경험을 최상의 지고한 의미 ? 바로 시의
의미인 ? 까지 고양시킴”으로써 자신의 이성이 아닌 우리의 이성을 구했다는 것이다.
1.4.
“정신분열증은 그 자체로는 창조적이지 않다. 정신분열증은 오직 창조적 인격들에서만 그 깊이가 열리는 조건(잠시 인과적
관점을 채택하자면)이 된다. 질병 없는 고귀한 시인이 분열증자가 된다.”
1.5.
문학과 예술은 분명한 사회적 기능, 즉 오이디푸스적 참조에서 벗어나 문화의 경직된 존재들에게 강렬한 실험의 세계를
선사하는 기능을 부여받는다.
1.6.
분열증자 아르토는 기표의 벽에 구멍을 냈다. 그는 사회적 구조의 기저에서 비유기적 삶을 탐지해내고, 지층화한 유기적
조직의 기저에 있는 기관없는 신체가 감각될 수 있게 했다.
1.7.
사실상 성은 흐름이 아닌 복합적 기계, 곧 사회적 가족적 요소들, 정치적 개체적 요소들을 배치하려는 유기적 조직이다.
1.8.
예술은 비유기적 삶, 즉 살아 있는 개체성들을 뒤섞는 분화의 강도적 역량에 근거한 것이다.
1.9.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처럼 강도적 삶은 철저히 유기적 삶과 접속되어 있으며, 기관없는 신체 또한 유기체와 접속되어 있다.
1.10.
예술은 구성된 형태들의 재현이 아닌 힘의 포획이다.
1.11.
공통감과 기성가치에 대한 비판은 몰적 molaire 구성체와 분자적 mol?culaire 흐름에 대한 구분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몰적 구성체 비판은 이 두 양태를 이항적 대립구도로 설정하는 대신, 분자적 과정 ? 바로 몰적 구성체를 구성하는 ? 을
명목으로 내세워 행해진다. 이렇게 기관없는 신체는 신체의 강도적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기능한다.
2.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2.1.
섬광 같은 강도와 개체적 분화에 대한 들뢰즈의 구분은, 과타리가 도입한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이라는 양극성의 관점에서
재고되고 강화된다.
2.2.
몰적 질서는 주체, 질서, 형태를 경직시키고 약호화하며 한계를 정하는 조직의 지층화 또는 조직의 추동력이다.
그러나 분자적 질서는 흐름, 단계들의 전이, 생성, 강도에 해당한다.
2.3.
유기체가 이렇게 개체화 하는 신체의 몰적 경향을 가리킨다면, 기관없는 신체는 명백히 분자적이다.
2.4.
개체의 현실화는 몰적인 것으로 나아가고, 기관 없는 신체의 잠재적 강도는 분자적임이 밝혀진다.
2.5.
그러나 분자적인 것과 잠재태를 동일시하고 몰적인 것과 현실태를 동일시하는 이러한 설명은, 들뢰즈의 구분의 특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6.
과타리는 들뢰즈의 규정에 욕망과 권력의 주제를 첨가한다. 그는 조직의 주관적인 두 양상, 즉 종속과 해방이라는 대립된 두
유형을 표현하는 ‘종속집단’과 ‘주체집단’을 정치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강도성의 물리학을 이중화한다.
2.7.
주체집단들이 권력과 내재적 관계를 유지하는 지점에서, 종속집단들은 지배원칙으로 승격된 조직의 초월적 원칙에 조종되어
간다.
이 두 대립된 주체화의 경향은 억압적인 몰적 기계와 분자적 질서로 이루어진 욕망하는 기계의 대립 관계를 명확히 해명한다.
195~200쪽
1.1.
모든 선들의 뒤얽힘이야말로 구체적인 것, 실존하는 것이다. 이것임은 사회적 규정이 아닌 재료의 운동학적 관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를 취한다.
1.2.
공속성의 평면은 빠름과 느림의 관계, 평면의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강도적 감응으로 구성된다.
“기관 없는 신체(고원)는 이것임에 따른 개체화, 강도성의 생산을 위해 작동된다.”
1.3.
“개체건 집단이건 우리는 동일한 리듬으로 고동치지도, 동일한 성질을 갖지도 않은 자오선들, 측지선들, 회귀선들, 방추선들과
같은 다양한 선들에 의해 횡단된다. 바로 이 선들이 우리를 구성한다.”
1.4.
들뢰즈와 가타리를 다양한 운동들로 활성화한 세 종류의 주선主線을 구분한다. 그것은 탈주선, 몰적인 선, 분자적인 선이다.
1.5.
먼저 몰적인 성들-약호를 경직시키고 절편화하는 지층화의 선-과, 이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갖는, 약호를 해체함과 동시에 선들
사이에서 약호에서 약호로 순환하는 분자적 선의 쌍을 분리해야 할 것이다.
1.6.
중요한 것은 양태적 차이이다.
즉 몰적인 선과 분자적인 선은 서로 다른 차원의 현상들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를 미분의 잠재적 양태와 연결하느냐,
지층화의 역사적 양태와 연결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른 양상들을 함축한다.
이처럼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각기 절편화한 것과 선적인 것을 가리킨다.
1.7.
탈주선은 구성된 분화(개체, 신체)에서 미분의 운동(강도)으로, 또는 지층화한 몰적인 것에서 분자적인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도적 운동을 탐색한다.
1.8.
들뢰즈와 가타리가 조립한 장치의 결정적 쌍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분자적인 탈영토화의 선이 보증
하는 몰적인 것과 탈주선의 필연적인 상호침투이다.
탈주선은 새로운 방향성, 즉 분자적 선이 항상 몰적 선에 침투하여 융합하는 곳에서, 이들의 실제적인 식별 불가능성을 지시
하면서 탈주하고 벗어나는 탈영토화하는 새로운 방향을 그린다.
1.9.
세 선들은 서로 얽혀 온갖 신체들을 구성한다. 몰적 구성체에 상응하며 전면적으로 확대된 초약호화를 통해 실행되는 단단한 선,
서로 교착된 약호와 영토성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유연한 선인 반자적 선은 항상 몰적인 선들을 가로질러 간다.
예술은 천재성의 탁월함에 이를 때 탈주선을 포함하지만, 탈약호화하고 탈영토화하는 탈주선은 자신이 탈영토화하는 영토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예술은 다른 신체처럼 지속적으로 이 세 선들을 뒤섞는다.
1.10.
포획이론을 분자-되기로 규정한 이것임은 이제 예술의 모델이 된다.
힘의 포획은 각 예술이 어떤 차이와 독특성을 갖든지 예술들의 공동체, 공통의 문제를 결정한다.
1.11.
이것임은, 모든 개체화 과정에서 작동하는 분자적인 것(위도와 경고)을 보여주고 이를 적극적으로 정식화함으로써,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대립관계를 재조정하여 양자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즉 분자적인 것은 더 이상 몰적인 것에 대한 투쟁과 그것의 소수화에 의해 쟁취되지 않고, 전체 현실 속에 분자적인 것이 현전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이용가능하다는 것을 이것임은 보여준다.
1.12.
이것임에서 탈주선은 더 이상 사회의 지층들에 유용한 반작용이 아니라, 생명성을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제시된다.
1.13.
욕망은 이제 관계와 감응의 문제가 되고 그 자체로 이것임의 이론에 포섭되어 대체된다. 이것임에 의해 기계들의 몰적/분자적
균열은 극복된다.
그리고 욕망에 대한 언급은 <<주름>>과 <,철학이란 무엇인가>>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상 욕망은 지각작용으로 이행한다. 욕망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배치, 그러나 충분하게 사유되지 않은 배치로 밝혀
진다.
205~211쪽
1.1.
미쇼가 쓴 이글은 명백히 비인격적 개체화와 이것임의 사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것임의 포획은 그 점차적 소멸과 ‘무감동한 양식’으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난관’으로 드러난다.
1.2.
미쇼가 인간을 휘저어 주름들로 쭈그러뜨리는 비인칭적 역량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무엇보다 이것임의
포획자로서 행동하고 있으며 창조자의 비인칭성, 자아의 축소는 그 결과일 뿐이다.
1.3.
들뢰즈는 1970년대에 능동적인 정신분열증에 대해 주장하고 환각 체험에 관심을 보였지만, 이제 『천 개의 고원』에서 미쇼를
참조함으로써 분열증자의 비순응적 매력에 대한 논증은 이것임에 대한 세심한 관찰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1.4.
들뢰즈는 미쇼가 “제의와 문명에서 벗어나 놀라우리만치 정교한 체험의 서식들을 만들고, 마약의 인과 관계에서 문제를 빼내어,
최대한 명확하게 이해하면서 착란과 환각으로부터 분리해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1.5. 들
뢰즈와 과타리는 미쇼의 보고서와 카스타네다가 돈 후안의 가르침에 대해 쓴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따라가면서, ‘마약은 형태와
인격을 상실하게 하고’ 지각작용을 변형시켜, 지각된 것에 가속된 혹은 감속된 미립자들을 송신하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에,
지각작용에 미시적 작용을 포착할 수 있는 분자적 역량을 부여한다고 쓴다.
1.6.
이 지그재그 선-차이와 반복의 섬광 같은 강도성-은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표준적 좌표를 독점해 온 원근법의 주관적
지표(얼굴)와 객관적 지표(풍경)들인 얼굴과 풍경을 해체한다.
1.7.
미쇼의 메스칼린 체험은 회화적 제스처, 선의 필적, 정신의 속기술로서의 글쓰기 같은 서로 구분되는 과정들이, 이 중 어느 하나가
해설이나 주석의 역할을 담당함이 없이 서로 구분된 채로 도움을 주면서 한곳으로 수렴되는 순간이라 간주할 수 있다.
1.8.
글쓰기에서 제스처로 이행하면서 우리는 ‘정거장’을 바꾸고, ‘아주 간단히’ ‘현기증 나는 속도로’ 사라지는 ‘말하는 기관’ 혹은 ‘말
공장’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난다.
1.9.
만일 마약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우리가 지각한 것을 통해 구성한 이것임의 분자적 특성을 지각할 수 있게 한다는 한에서이다.
그러나 마약은 곧 상대적인 것이 된다.
마약은 이것임들의 이행을 창조할 수 없으며, 마약과 더불어 “장조적 선 혹은 탈주선은 곧바로 죽음의 선으로 선회한다.”
마약 중독자들은 ‘자신들이 달아나려 한 바로 그곳’, 즉 주변부 한계상황의 ‘훨씬 냉혹한 절편성’ ‘화학 물질, 환각적 형태, 환상적
주체화’라는 훨씬 더 ‘인위적인’ 영토화로 끊임없이 전락한다.
1.10.
마약에 대한 관심은, 재생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닌, 강렬한 ‘질료의 흐름을 따른다’는 원칙에 부합한 것이다.
1.11.
창조적 포획은, 리좀적 논리의 다섯 번째 원칙인 ‘모방이 아닌 지도 그리기’의 원칙에 따라 실행된다.
마약은 어떤 현상들에 대한 촉매제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이를 생산하지는 못하며,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신중함의 예술, 소박한 절
제 앞에서 보류된다.
1.12.
예술의 소명은 존재나 형태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형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형태와는 또 다른 방식의 훨씬 더 기이한
힘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 이것임을 어떤 토대에 고정시켜 지속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지각된 이것임의 짧은 지속성은 물론 재료의 이것임의 빠름에 부응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하나의 작품, 즉 지속하는 ‘기념물’이다.
1.13.
미쇼가 매번 지각의 가속장치로 소개한 매스칼린은, 이런 관점에서 미쇼의 말과는 정반대로 일종의 ‘감속장치Ralentie’, 즉 지각
할 수 없는 강도적 운동에 좀더 농밀한 밀도를 부여하여 감각적 운동을 통해 이 지각할 수 없는 힘들을 회복하는 포획실로
간주해야 한다.
1.14. 미쇼의 작업에서 회화는 비기표적 재료와의 만남을 뜻한다. 회화는 물과 얼룩의 투쟁에서 볼 수 있듯 말의 포착 능력
보다도 더 능수능란하게 이 리듬과 ‘전기적 흔적’을 포착할 수 있게 한다.
미쇼는 스스로를 ‘타시스트tachiste’라 부르기도 하지만, 얼룩tache은 ‘사방으로 나뒹구는 거대한 물컹한 것들’로 와해되는 것이
므로, ‘만약 내가 타시스트라면 얼룩을 참지 못하는 타시스트일 것’이라고 말한다.
1.15.
미쇼의 작품에는 회화적 혹은 언어적 질료의 유동적인 이것임이 해방한 비유기적 생명력, 운동학적 변형의 역량 사이의 조정이
존재하며, 이것은 들뢰즈가 그로부터 거의 이십 년 후에 체계화할 개념적 장치를 이미 눈부신 산문으로 에워싸고 있다.
251~259쪽
1.1.
네오 리얼리즘에서 이미지는 공간에서의 팽창이 아닌 시간에서의 수축과 관계하므로, 결국 결정체-이미지란 형태와 그 강도적
현실화의 가장 압축된 회로에 상응한다.
결정체-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잠재태의 강도적 내속성에 최대한의 현실성을 부여하는 힘들의 관계 혹은 이것임이다.
결정체-이미지는 잠재태와 현실태의 병합체이며, 잠재태는 그 자체로 현실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임이 확인된다.
1.2.
시간-이미지와 함께, 현실태적 대상은 확실히 그 개체화 과정 속에서 해체되지만, 이미지의 물리적 현존성은 또한 모든 잠재태가
자신의 현실화 과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잠재태가 현실태보다 더 가치있는 건 아니다. 혹여 시간-이미지가 운동-이미지보다 더 중요한 듯이 보일 수 있다면 잠재태를
통해 사유가 스스로의 한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시간-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힘의 감응을 경험하게 된다.
1.3.
“시간이 우리 애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변용시킴으로써 우리를 규정하는 바로 그것에서, 항상 시간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1.4.
감각-운동적 관계의 단절로 우리는 운동의 방어력을 상실한 반면, 비전의 역량을 감내한다.
이미지는 행동에 흡수되지 않고 투시력으로 배가되어 증폭되었다.
감각-운동적 관계의 단절은 “이미지 내의 무언가가 너무도 강렬한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에는 강도성의 낭만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이 단절은 한계의 강도적 체험, 숭고와 맞먹는 경험이다.
1.5.
참을 수 없는 것은 일상적인 주체성의 조건을 넘어서지만, 변증법적 전복을 통해 극복될 수 없다.
이 참을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사유할 수 없는 것과 대면하게 되어 사유를 자신의 극한적 한계로 나아가게 한다. 운
동적 출구, 능동적 탈주가 박탈된 이미지의 투시력은 한편으로 실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연다.
1.6.
공통적 행동에서 지각작용을 벗어나게 한 시간-이미지는 보다 상위의 감각 실행을 위해 지각작용을 해방한다.
감각-운동적 관계는 상투적이고 사회적인 방식, 습득된 반응, 행동양식을 시동시킨다.
결국 운동-이미지는 신호를 통해 우리에게서 어떤 행동을 우려낸다는 점에서 여전히 은유적이다.
1.7.
클리세, 상투적 이미지, 은유는 사실상 사용되어 하찮게 되거나 낡거나 힘을 잃은 이미지가 아니라, 반대로 즉각적으로 반응을
시동시키는 규범적인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근육과 관절에 직접 호소하며, 우리가 느끼기도 전에 벌써 반응하도록 추동한다.
1.8.
투시력은 즉각적인 행동에 저항하고, 종속된 감각-운동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이 투시력이 가능하려면 감각-운동적 도식은 깨어져야 하며 반응의 연쇄는 끊어져야 한다.
1.9.
“말 그대로 사물 그 자체를 솟아오르게 하는 순수한 시지각적-음향적 이미지, 완전하고 은유가 필요 없는 이미지...” 견자의
영화는, 허구도 상상도 은유도 아닌 현실의 강도적 성격을 지닌 “진정한 이미지를 클리세에서 떼어내려” 한다.
이미지를 시동시키는 역량이 클리세를 해체하며, 또 힘의 시간적 감응이 운동으로 소멸하게 하는 대신 이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
1.10.
클리세가 사물화한 이미지를 행동 양식으로 전락시킨다 해도 이미지는 클리세 아래서 뚫고 나오며, 도한 역으로 모든 이미지는
클리세의 유효성을 꿈꾼다.
그러므로 클리세와 이미지의 완전한 공존이 존재하며, 그 둘 사이에서 우리는 잠재태와 현실태의 평화적 공존을 다시 만나게 된다.
1.11.
클리세는 그림에 앞서 존재한다.
화폭은 제거하고 삭제하고 떼어내야 할 클리세들로 가득 차 있다.
“구상은 회화에 앞서 이미 전제된 것이기까지 하다. ... 진부한 지각작용, 추억, 환상 등 물리적인 클리세들만큼이나 심리적인
클리세들이 존재한다.”
1.12.
클리세가 상투적인 반응의 안락함을 획득하는 바로 거기서, 이미지는 클리세에 저항하면서 실재하는 감각의 폭력성을 얻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미지는 견딜 만한 것이 되기 위해 항상 매우 미미하게나마 클리세로 중화된다.
결국 이미지와 클리세는 박탈과 묵인의 관계다.
취향과 천재, 클리세와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강도적 극점들 혹은 문턱들, 창조가 이루어지는 텐서들을 표시할 뿐이다.
1.13.
잠재태와 현실태의 필연적 공존이 사회의 권능으로부터 위협받는 창조를 위한 투쟁을 약화시켜서는 안되며, 새로운 것을 사유
하고 창조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를 분산시켜서도 안된다.
클리세는 취향의 관습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새로운 힘을 일깨우고자 한다.
“예술가는 혼돈에 대해 투쟁한다기보다 여론의 ‘클리세’에 대항해 투쟁한다.”
(다중지성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