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예찬
옛 시골 가정에서는 쌀로 빚은 막걸리를 만들어 자급자족했다. 쌀을 익혀 고두밥을 만들어 여기에 누룩과 이스트를 넣어 방 아랫목에 놓고 담요를 덮어 삼사일이면 술이 익는 소리가 나고 술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엄마는 체에 걸러 술을 빚는다. 이때 빚은 술은 알코올의 농도가 아주 높아 물로 희석하여도 시중의 막걸리보다 도수가 높다.
막걸리는 농부들의 시름과 일의 고달픔을 덜어주는 전통 술이다. 농부들은 농번기가 되면 종일 들에서 일한다. 그 고됨은 말할 것도 없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자식들을 위해 그 고통을 잊고 희생의 삶을 살았다. 그 시름을 달래주는 묘약이 막걸리이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마시고 안주는 왕소금 한 알이 전부였다. 얼큰한 기분에 또 허리 굽혀 일했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에 하교하면 꼴망태기를 메고 주전자에 술을 가득 넣어 아버지의 일터로 갔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들판이 멀기도 하여 주전자에 담긴 술이 출렁거려 밖으로 버려지는 술이 한 사발은 족히 되었다. 그 뒤부터는 쏟아지는 술이 아까워 조금씩 마시며 시작했다. 그렇게 술의 맛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터득했다.
중학 시절에는 농번기가 되면 가정실습을 하여 아버지의 일손을 도왔다.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를 베고 추수하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베를 베는 날에는 한잔하라고 권한다. 못 마시는 척하면서 한 잔을 마신다. 술이 몸에 퍼지면 기분도 묘하지만, 일의 고통도 잊어버렸다. 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술을 배웠으며 술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나의 술 실력은 대학 생활에서 두드려졌다. 수업이 끝나면 서문 옆에 ‘열차 식당’이 있다. 그곳에 가면 으레 선후배 술꾼을 만난다. 한 잔 술이 더해지면서 노랫가락이 이어진다. 대학의 낭만을 마음껏 즐기자는 듯 향촌동 주막촌으로 간다. 젓가락으로 얼마나 주전자를 두드렸으면 저렇게 움푹진푹 쭈글쭈글하였을까 싶었다. 통금 시간에 이르러 술판은 끝이 나곤 했다.
그 실력이 어디 가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군에 몸담았다. 강원도 인제 원통의 술집은 다 섭렵했으니 말이다. 꽤 많은 월급이었는데 술값으로 다 날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만하면 막걸리 애주가로 그만한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니 막걸리 박사 학위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수십 년 동안 막걸리를 무지막지로 마셨으니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위가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버렸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후회스러웠다. 수술하고 투병하며 완치 판정을 받는 5년 동안 술을 멀리했다. 그 뒤에 다시 술에 입문했지만, 역시 그 맛은 막걸리이다. 옛날과 달리 막걸리를 절제하며 두세 잔 정도 마시며, 주로 반주로 한 잔 마신다. 막걸리에는 항암 효과가 맥주의 50배인 스쿠알렌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적당히 마시면 술은 약이다. 특히 신토불이인 전통 막걸리가 그렇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오용과 남용은 몸을 망친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반주로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장수하셨다. 살아생전 할머니의 막걸리 예찬에 이 손자도 답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