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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駙馬)
천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에서 비롯된 말로서 임금의 사위, 즉 공주 또는 옹주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駙 : 곁말 부(馬/5)
馬 : 말 마(馬/0)
(유의어)
국서(國壻)
도위(都尉)
의빈(儀賓)
액부(額駙)
부마(駙馬)는 천자가 타는 부거(副車, 예비 수레)를 끄는 말을 가리키는데, 그 말을 관리하는 직책을 부마도위(駙馬都尉)라 한다. 부마도위는 한무제가 최초로 설치한 관직으로, 2천 석의 봉록을 받으며 주로 황실이나 외척의 자제들이 담당했다. 부마는 중국에서 죽은 공주의 혼령과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던 사람에게 주었던 직책이 부마였던 데에서 이어져 부마라는 말 자체가 임금의 사위를 뜻하게 되었다.
흔히 유교사회(儒敎社會)에서 '결혼한 딸 자식은 그 쪽 집안 귀신이 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임금에게 사랑받았던 공주라도 일단 시집을 가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궁으로 다시 돌아와 생활하는 경우가 없고 일반 사대부의 아내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 남편에게 의빈부(儀賓府)의 직위를 주었을 뿐인데 직위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임금의 외손녀의 남편은 의빈부(儀賓府)의 직위가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이 명칭을 최초로 쓴 시기는 고구려때 였고 그 이후로 백제와 신라, 발해 등에서도 왕의 사위를 부마(駙馬)라 칭했으며, 부마의 호칭은 당사자의 본향(本鄕)을 따서 불렀다. 특히 조선시대의 부마들은 왕실의 부침(浮沈; 성쇠)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명문가의 남성으로서 왕실의 사위가 된 이상은 일정 품계의 벼슬(관직)에만 나아갈수 있고, 풍류를 즐긴다는 핑계로 기생방에 출입이나 축첩(蓄妾)을 삼가야 했다고 한다.
조선 왕조사회는 15세기 후반~16세기 초에 왕권이 탄탄하게 안정되면서 다른 권신(權臣)들의 세력 확대를 막는 일이 필요했으며, 특히 부마는 어린 나이에 공주(옹주)와 결혼 했음에도 공주나 옹주(翁主)가 먼저 죽어도 재혼을 하지 못하였고, 만일에 후실을 두게 된다면(설령 정식 혼인했어도) 첩으로 간주하였고, 후실이 낳은 자녀들도 서자(庶子), 서녀(庶女)로 처리해 버렸다고 한다.
진(晉)나라 때 간보(干寶)가 편찬한 수신기(搜神記)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중국의 농서(지금의 간쑤성)에 사는 신도탁(辛道度)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학문이 뛰어난 스승을 찾아 옹주(雍州)로 가는 도중 날이 저물자 큰 저택(沮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하녀가 안내한 안방으로 들어가니 밥상이 차려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안주인이 들어와서 자신은 진(秦)나라 민왕(閔王)의 공주로서 조(曹)나라로 시집갔다가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23년 동안 혼자 지냈는데, 오늘 자신을 찾아주었으니 부부의 인연을 맺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신도탁(辛道度)은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애절한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나흘째 되는 아침에 그녀는 더 이상 인연을 맺으면 화를 당한다고 하면서 헤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별이 아쉬운 나머지 그녀는 정표(情表)로 신도탁(辛道度)에게 금 베개를 주었다. 금 베개를 받아 들고 대문을 나서서 뒤를 돌아보니 집은 온데간데 없고 잡초만 무성한 허허벌판에 무덤 하나만 있었다.
이후 신도탁은 금 베개로 음식을 사 먹었는데, 우연히 왕비가 그 금 베개를 발견하고 그를 잡아와 문초하였다. 신도탁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왕비는 "죽은 지 23년이 지났는데도 산 사람과 부부(夫婦)의 인연을 맺으니 당신이야 말로 진짜 내 사위이다. 내 그대를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임명하겠다(遂封度爲駙馬都尉)"라고 하였다.
부마(駙馬)
부마는 원래 천자가 타는 부거(副車; 예비수레)를 끄는 말이라는 뜻이며, 그 말을 맡아 보는 관리를 부마도위라 한다. 부마도위의 봉록이 재상에 버금가자 이후부터는 오직 천자의 사위에게 부여되는 벼슬이 되었다. 따라서 부마도위는, 보통 줄여서 부마라고 하는데, 왕의 사위 또는 공주의 남편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부마도위는 줄여서 부마라고도 한다. 원래 한(漢)나라 때 설치된 직책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가 타던 부마(駙馬; 副車의 말)를 맡아본 직책에 불과하였다. 위(魏), 진(晉) 이후에 임금의 딸과 결혼한 사람에 한하여 이 직책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로써 임금의 사위를 부마(駙馬)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256년 11월 고구려 중천왕이 명림홀도(明臨笏覩)를 사위로 삼으면서 이 칭호를 준 것이 기록상 처음이다. 한때는 고려왕(高麗王)이 원(元)나라 황실(皇室)의 부마(駙馬)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朝鮮) 문종 때부터 이미 봉작(封爵)받은 주(州), 현(縣)의 이름을 앞에 붙여, 모모위(某某尉)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는 이에 대한 사무관아로 부마부(駙馬府)를 두었으며, 1466년(세조 12) 이를 의빈부(儀賓府)로 고침에 따라 품계의 구별없이 의빈(儀賓)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신분의 높낮음을 분별하기 어렵자, 1484년(성종 15) 의빈(儀賓) 2품 이상은 위(尉), 3품 당상(堂上)을 부위(副尉), 3품 당하(堂下)에서 4품까지를 첨위(僉位)라고 하였다.
또한 위(尉)에는 정1품~종2품이 있었으며, 공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정1품의 위를, 옹주에게 장가든 자에게는 정2품의 위를, 부위(副尉)는 군주(郡主; 왕세자의 嫡女)에게 장가든 자에게, 첨위(僉位)는 현주(縣主; 왕세자의 庶女)에게 장가든 자에게 주었다.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초기에는 관계(官階)도 따로 마련하여 정1품에 유록대부(綏綠大夫), 성록대부(成祿大夫); 종1품에 광덕대부(光德大夫), 숭덕대부(崇德大夫); 정2품에 봉헌대부(奉憲大夫), 통헌대부(通憲大夫); 종2품에 자의대부(資義大夫), 순의대부(順義大夫); 정3품 당상(堂上)에 봉순대부(奉順大夫), 당하(堂下)에 정순대부(正順大夫), 종3품에 명신대부(明信大夫), 돈신대부(敦信大夫)를 제정하였다. 후기에는 동반관계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부마(駙馬)
부마란 본래 왕의 행차에 여벌로 준비한 예비용 수레인 부거(副車)를 끌던 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동진(東晉)의 간보(干寶)가 편찬한 설화집 '수신기(搜神記)' 권16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전국시대 농서((농,롱)西) 땅에 신도탁(辛道度)이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뛰어난 스승을 찾아 옹주(雍州)로 향했는데 불과 4, 5리를 앞두고 날이 저물어 갈 수가 없었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다가 큰 기와집을 발견하고 다가가 문을 두드리고는 묵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방으로 안내된 그에게 주인 여자의 말은 이랬다. "저는 진(秦)나라 민왕(閔王)의 딸로서 조(曹)나라로 시집갔다가 남편과 사별한 지 23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찾아 주셨으니 저와 부부의 연을 맺어 사흘만 머무십시오."
사흘이 지난 날 아침에 그 여자는 어두운 얼굴로 신도탁에게 말했다. "당신은 산 사람이고 저는 귀신입니다. 함께 더 있고 싶지만 사흘 밤 이상 머무르면 재앙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고는 금베개를 하나 주고는 작별 인사를 하였다. 신도탁은 대문을 나선 다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큰 기와집은 온데간데 없고 무덤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신도탁은 놀라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한참 내달리다 멈춰 서서 가슴을 보니 자신이 품에 금베개가 여전히 있는 것 아닌가. 진나라에 도착한 신도탁이 팔려고 내놓은 금베개를 마침 시장을 지나던 진나라 왕비가 발견하고는 갖게 된 경위를 추궁하였다.
신도탁은 그간의 정황을 빠짐없이 말했지만 왕비는 믿지 못해 공주의 무덤을 파 보도록 했다.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다른 부장품은 다 있는데 금베개만 없어졌고, 시신을 조사해 보니 부부의 정을 나눈 흔적이 완연했다. 그러자 왕비는 이렇게 말했다. "내 딸이 죽은 지 23년이 되었으나 산 사람과 정을 통했으니 이 자야말로 진정한 사위로구나"라고 하고는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많은 보물을 주었다.
부마(駙馬)
황제나 왕의 사위
개요
천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에서 비롯된 말로서 임금의 사위, 즉 공주 또는 옹주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의어 또는 유의어로 국서(國壻), 도위(都尉), 의빈, 액부(額駙) 등이 있다.
역할과 지위
어원이 된 관직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한무제(漢武帝) 때 처음 설치된 관직으로,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여러 마차 중에 어느 마차에 천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동행하는 예비 마차인 '부거(副車)'를 끄는 말인 '부마(駙馬)'를 관리하던 직책이다. 현대 사회의 직책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경호실 2호차 관리 및 선탑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하는 일이라곤 그냥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말을 관리하고 왕이 타는 마차를 관리하다가 황제의 행차가 있으면 선탑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라서 놀고 먹기 딱 좋은 직책이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직책인데 "황제의 행차 때, 황제가 몇 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가?"라는 초특급 기밀을 관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초특급 기밀이 유출된다는 것은 황제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진나라 때 장자방과 창해 역사의 시황제 암살기도가 실패했던 것은 박랑사에서 부거를 잘못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부마도위가 하는 일은 고작 왕이 타는 마차와 말을 관리하는 것 정도밖에 없으니 하는 일은 별로 없으면서도 위세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후한(後漢) 시기, 명제(明帝)의 여동생인 관도공주(館陶公主)가 한광(韓光)이라는 인물과 결혼했는데, 그가 우연히 당시 부마도위 직책을 맡고 있었으니 역사상 첫 번째 부마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위나라의 하안(何晏)은 황제의 사위로서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진(西晉) 시대에도 황녀와 결혼한 자들은 모두 이 직위를 부여받았고, 이는 관례로 자리잡았다. 황녀와 결혼한 자들은 반드시 부마도위라는 명예직을 받게 되었고, 이는 실질적인 관직이 아니라 단순한 명예 칭호로 변했다.
당·송·원·명 시대에도 공주의 남편을 부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후 청나라에서는 액부(額駙)라고 하였다. 의미 확대 버전으로 여왕의 남편도 의미하는 국서(國壻)가 있다. 다만 여왕의 남편인 경우 한국사에는 여왕이 신라시대에 3명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독신이거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거나 혼인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한국사에 한해서는 의미없는 용어다. 여왕이 종종 나왔던 서양사에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데 그나마도 여왕의 남편을 무조건 국서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여왕의 부군'이라는 식으로 풀어쓴다.
참고로 서구권에서 국서(國壻)에 해당하는 King consort 작위는 여왕과 결혼했다고 해서 무조건 주어지는 호칭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King consort라는 작위가 서임된 사례가 전무하며, King consort의 하위 단계인 Prince consort 역시 전체 칭호가 Prince consort인 인물은 앨버트 공 이외에는 없다. 스페인에서 King consort 작위를 받은 이사벨 2세의 남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애초에 이사벨의 친사촌으로 같은 보르본 왕조 출신이었고, 포르투갈의 경우 결혼 직후에는 Prince consort 칭호를 받고 여왕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면 공동 왕으로서 King이 되었다.
이 법 때문에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첫번째 남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로 아내인 마리아보다 먼저 죽어서, 프린스 칭호의 국서(國壻)에만 머물렀고 2번째 남편 페르난두 2세는 마리아와 슬하에 여러 자식을 낳으면서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한편 한 나라 안의 왕실과 일반 귀족 가문 사이나 천자국의 왕가와 제후국의 왕가 사이처럼 명백하게 급간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 관계에서 타국의 공주와 결혼했을 때는 부마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부마'라는 용어 자체가 위에서 설명된 어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 공주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4] 신하와 결혼한 경우에 사용되는 동아시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비슷한 급의 왕족끼리 겹겹이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 다반사인 서양 왕족의 결혼과 관련해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국사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이다.
최초의 석씨 왕 탈해 이사금은 박씨인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고, 최초의 김씨 왕 미추 이사금은 석씨인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으며, 신라 후기 박씨 왕조의 시조인 신덕왕은 김씨인 헌강왕의 사위였다.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제3대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부마가 가장 자주 언급되는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부마였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의 입김이 강하다보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도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고려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 업신여겼다.
다만 이때 몽골인 왕비들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시집와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먼 타향까지 왔는데 남편인 왕이 자신보다 후궁들에게 애정을 더 보이면 곱게 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인격이 미성숙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왕비 입장에선 고려 왕 하나 보고 왔는데 왕은 자길 사랑하지 않으니 밉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행보를 보면 왕비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의 입장에서 탐탁지 않은 일이 많다. 폭군 충혜왕은 아예 자신의 서모인 경화공주를 강간했다.
부마의 별칭인 의빈(儀賓)은 한국사에서는 조선 세종 때 명호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처음 실록에 보이며 의빈은 부마를 격하한 것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하고, 의빈부(儀賓府)에서 관장했는데, '예의를 갖춘 손님'이란 뜻으로 사위를 흔히 '(백년)손님'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로 봉했다. ○○에는 부마의 본관 내지 그곳에서 따온 칭호가 들어간다. 예를 들어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남편 정종의 봉호 '영양위'(寧陽尉)는 본관인 해주의 별칭인 대령(大寧)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녀(嫡女)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녀(庶女)로 무품, 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 6년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의 사위인 만큼 그 대우가 각별하고 왕실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편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처신을 잘못해서 정쟁에 휘말리거나 배짱이 두둑해져 바람을 피다가 장인에게 걸려 혼쭐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전을 맡거나, 명나라~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실권 없는 얼굴마담 역할만 할 수 있었다. 물론 왕녀와 결혼했다고 자동으로 외교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외교 실무는 부사나 서장관 등이 맡고, 정사는 사신단의 격을 높이기 위한 높으신 분이면 된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첩을 둘 수 없었고, 아내가 죽었다고 해도 후처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대로 홀아비로 살아야 했다.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 때 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왕녀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면,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 정재륜도 작은아버지 정치화가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던 사람인데,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이 후사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큰형(법적으로는 사촌) 정재대의 손자인 정석오를 죽은 아들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혼인하고 3개월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죽어 홀아비가 된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마는 재혼을 못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심지어 조선이 멸망한 뒤로도 후처를 들이지 못했고,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 그나마 고종이 그를 배려하여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어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남길 수 있었다. 그 후손들 중 한 명이 흥영군 이우 공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이다.
공주건 옹주건 왕녀는 품계를 초월한 자가(自家)들이라, 남편과 시부모조차 며느리를 받들어 모셔야 했다. '천지군친사'라는 말대로 '군'은 '친'보다 앞이니 '군'인 왕녀가 '친'인 시부모에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부마는 실직을 맡을 수 없으니 출셋길도 막히고, 재수 옴 붙으면 정종처럼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왕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이니 원래 가문이 어쨌든 간에 순식간에 1등급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부마 본인은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부마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은 과거시험이나 조정 내 승진 등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는다. 위의 정재륜 같은 경우에도 그가 부마가 된 것이 친아버지 정태화와 양아버지인 정치화가 정승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요인으로도 꼽힌다. 그리고 정재륜이 아들의 양자로 들인 정석오도 정승에 오른다.
또한 왕녀와 부마 사이의 자손은 왕실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남자는 벼슬길이, 여자는 혼삿길이 탁 트이곤 했다. 예를 들어 정명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부마 홍주원의 후손이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신하인 홍국영이다. 수빈 박씨도 화평옹주의 남편인 부마 박명원의 추천으로 후궁 간택이 되었다. 자손까지 내내 벼슬할 수 없이 무위도식해야 하는 왕자들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왕의 성향이나 어느 정도로 총애받는 딸이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긴 했어도 왕녀의 지참금이란 일반 양반가 딸들과는 자릿수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왕녀들이 시집오며 가져온 재산으로 집안을 더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례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가 매우 총애하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는데, 원래도 명문가였으나 화순옹주가 시집오면서 새삼 갑부가 되어 김정희가 그토록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시 영조의 딸로 총애받던 화완옹주의 경우, 남편이 딸 하나만 두고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자 남편의 사종질(四從姪, 11촌 지간)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는데, 정후겸의 생부모 집안까지 살림이 확 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왕실에서 부마로 찍으면 본인이나 그 부모가 싫다고 맘대로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 제3대 태종이 후궁 소생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은 지화를 쫓아내면서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고까지 말한다.
정신옹주는 신녕궁주(愼寧宮主) 신빈 신씨의 소생인데, 신녕궁주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 민씨를 모시던 몸종이었다. 그러나 정혜옹주는 정의궁주(貞懿宮主) 의빈 권씨의 소생인데, 간택받아 후궁이 된 명문가의 규수 출신이었다. 즉 풀어쓰면 "모친의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망언이었다.
다른 왕이라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라면서 대충 귀양보내고 말았겠지만, 상대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을 죽이고, 조선의 설계자와 이복동생 2명도 죽이면서 창업군주인 아버지도 사실상 쫓아내고, 동복 형과 대판 싸우고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이었다. 게다가 태종은 자식 3명을 어렸을 때 병으로 잃은지라 자식에게는 물렀다.
그러나 이속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인 연안 이씨가 할아버지 이원발부터 고려의 전공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태조가 몇 번이나 상신으로 초빙을 했어도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명신이었고, 아버지는 호조판서와 제조를 지낸 이귀산, 큰아버지인 이귀령은 좌의정을 지낸 명문가이니 왕실과 혼인을 할 때 하더라도 아무 왕녀나 허겁지겁 맞아들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물론 굳이 말을 그렇게 비꼬듯이 했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으므로 이후 인생 망한 것도 본인 책임.
결국 이속은 수 차례의 상소 러시 끝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
사실 이 시기에는 왕족이건 부마건 관직에 오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박종우는 세종대왕 대에는 형조판서를 지냈고, 문종 대에는 부친과 같이 찬성 직위까지 오른다. 단종대에는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해서 1등 공신에 오르는 등 꽤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 성종 대에 "서얼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하자 박종우의 처가 이를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신료들 중에서는 "부마의 재혼은 없다. 허락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으나, 성종이 "선대에서 허락한 일"이라고 해서 정처로 인정해줬다.
예외적인 경우로 배짱이 두둑하여 아내를 폭행하거나,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거나, 홀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종과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당연히 난리가 나서 무겁게 응징당한다. 예를 들어, 중종은 딸인 효정옹주가 남편의 홀대를 받다가 요절하자 분노해 그 부마를 처벌하기도 했다.
중종의 딸로 숙원 이씨 소생이던 효정옹주는 남편 조의정의 바람과 무시, 학대를 당하다 난산 끝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지어는 난산을 겪던 딸을 위해 왕이 보낸 의녀를 조의정이 못 들어가게 대문을 안 열어줬다. 이쯤 되면 아내가 빨리 죽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결국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옹주가 사망하자, 격노한 중종이 조의정을 국문에 부쳤다가 직위를 박탈하고 귀양보냈다. 생전의 효정옹주는 그 와중에도 남편을 변호해서 중종은 그런 딸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는지 "부녀자로서 질투가 없는 것은 진정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조의정의 상간녀 풍가이도 같이 처벌되었다. 그녀는 원래 효정옹주의 몸종이었으나, 조의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강제로 첩으로 삼았다. 박색이었던 옹주를 몹시 싫어한 조의정은 정실인 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부마에게는 원칙적으로 금지된 첩으로 들이려 했다. 그래서 중종이 풍가이를 귀양보내라 명했는데, 조의정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풍가이를 숨겨둔 채 계속 정을 통해왔던 것이 발각났다.
그러나 풍가이가 그의 첩이 된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풍가이가 평소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녀라는 점 때문에, 대신들이 극력 옹호한 덕분에 곤장 100대로 끝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궁 은대가 사람을 시켜, 가뜩이나 곤장 100대를 맞아 반죽음이 된 풍가이를 구타하고 수십일 동안 방치하여 죽게 했다. 신하들은 은대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중종이 끝까지 비호하여 1년 남짓 귀양을 살고 풀려났다.
이를 볼 때 은대의 배후에 중종이 있었거나, 꼭 그러진 않았어도 딸의 불행한 결혼생활의 원인 중 하나인 풍가이를 죽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은대가 그걸 이루어주었으니 잘 죽여줬다고(…) 생각해서 비호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지고 보면 풍가이도 조의정의 강요 때문에 그의 첩이 된 피해자였으나, 만악의 근원인 조의정에겐 정치적인 이유+효정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중종의 외손자)의 안위 때문에 중종이 유배조차 1년 만에 풀어줄 정도로 약한 처벌만 내린 걸 고려해 보면 만만한 풍가이 쪽에게 화풀이를 한 걸지도.
한국사 최후의 부마는 영혜옹주와 결혼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다. 마지막 왕녀는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이지만 그녀가 일본제국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한 것은 1931년으로,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였기 때문이다.
의빈(儀賓)
명나라에서 제후왕의 사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의빈'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정했으며, 이는 조선이나 류큐에도 유입되어 쓰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위와 같은 조치에 나름 민감하게 반응하여 부마 용어를 의빈으로 대체하려는 준비에 착수했다. 실제로 1466년에는 부마부(駙馬府)를 의빈부(儀賓府)로 개편하고, 부마의 봉작도 철폐하여 의빈·승빈(承賓)· 부빈(副賓)· 첨빈(僉賓)이란 명예직으로 대체하기도 했는데, 명나라 측에서 조선에서 부마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로는 명나라와의 외교 현장에서 쓰이는 용어로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1484년에 부마의 봉작이 복구되었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내부적으로 부마 용어 사용은 지속되어 현재에 이른다.
▶️ 駙(곁말 부)는 형성문자로 驸(부)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 마(馬; 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付(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駙(부)는 ①곁마(마차 옆에 따라가는 말) ②덧방나무(수레 가장자리에 덧대는 나무) ③가깝다 ④빠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천자가 타는 수레에 딸린 말로 왕의 사위를 이르는 말을 부마(駙馬), 부마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는 관아를 부마부(駙馬府) 등에 쓰인다.
▶️ 馬(말 마)는 ❶상형문자로 말의 모양으로 머리와 갈기와 꼬리와 네 다리를 본떴다. 개는 무는 것을, 소는 뿔을 강조한 자형(字形)이지만 말의 경우에는 갈기를 강조하고 있다. 부수로 쓰일 때 말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馬자는 ‘말’을 그린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馬자를 보면 말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큰 눈과 갈기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전으로 넘어오면서 머리와 갈기는 간략화 되었고 해서에서는 다리가 점으로 표기되면서 지금의 馬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말은 고대부터 사냥과 전쟁에 이용되었지만 주로 먼 거리를 달리는 용도로 쓰였다. 그래서 馬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주로 ‘(말을)타다’나 ‘가다’, 말의 행위, 동작과 관계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馬(마)는 (1)성(姓)의 하나 (2)말 등의 뜻으로 ①말(말과의 포유류) ②벼슬의 이름 ③산가지(수효를 셈하는 데에 쓰던 막대기) ④큰 것의 비유 ⑤아지랑이 ⑥나라의 이름, 마한(馬韓) ⑦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마구간을 마사(馬舍), 말의 똥을 마분(馬糞), 말을 타는 재주를 마술(馬術), 말이 끄는 수레를 마차(馬車), 말을 부리는 사람을 마부(馬夫),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을 마적(馬賊), 말의 몇 마리를 마필(馬匹), 말의 다리를 마각(馬脚), 말을 매어 두거나 놓아 기르는 곳을 마장(馬場), 경마할 때에 파는 투표권을 마권(馬券), 말을 타고 나감으로 선거에 입후보함을 출마(出馬), 수레와 말을 거마(車馬),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애마(愛馬), 타는 말이나 말을 탐을 기마(騎馬), 걸음이 느린 말이나 둔한 말을 노마(駑馬), 걸음이 썩 빠른 말 한마를 준마(駿馬), 말에서 떨어짐을 낙마(落馬), 말이 빨리 달리는 것을 겨룸을 경마(競馬), 말을 탐으로 사람이 말을 타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하는 경기를 승마(乘馬), 대나무를 가랑이 사이에 끼워서 말로 삼은 것을 죽마(竹馬), 기차를 말에 비유한 일컬음을 철마(鐵馬), 말의 귀에 동풍이라는 뜻으로 남의 비평이나 의견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흘려 버림을 이르는 말을 마이동풍(馬耳東風),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뜻으로 숨기려던 정체가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마각노출(馬脚露出),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의 마혁과시(馬革裹屍),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혔다는 뜻으로 학식이 없거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마우금거(馬牛襟裾),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발전하고 정진하자는 뜻의 마부정제(馬不停蹄), 말도 갈아타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예전 것도 좋기는 하지만 새것으로 바꾸어 보는 것도 즐겁다는 말의 마호체승(馬好替乘)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