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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향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고향이 있다.
태어난 곳일 수도 있고, 어머니를 생각케하는
마음의 고향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지난 인생이 있으니, 추억을 불러다 주는 곳이라면 고향이 되지 않을까.
여름이 오면 나는 어렸을적 뒷산에 올라 온갖 야생초들이 피어낸 꽃들과
열매들을 따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풀들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까마중이라는 작고 새까만 알갱이,
시커먼 털이 두둑히 붙은 보리 껌북이,
시큼 시큼한 잎사귀들, 그리고 벚찌 열매 등등.
야생초들이 준 간식들은 우리들의 입을
시뻘겋게 또 시커멓게 즐겁게 해주었다.
동요에 나오는 구절처럼,
나의 살던 고향집은 부모님의 피난살이 이래 처음으로 장만하신 집이다.
나즈막한 야산이 동네를 반달형으로 둥굴게 보듬어 안고 있고,
동네 끝자락으로 들어가면 작은 동굴이 있다.
그 동굴 안에는 낙수가 뚝뚝 떨어지고,
작은 냇물이 졸졸 흐르며, 또한 아이들의 메아리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져
어린 우리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주던 곳이였다.
충현동 집은 개량식 한옥의 구조로 7개의 방이 있었고,
뒷켠에는 작은 공장이 곁들여져 있었다.
황해도가 고향이신 할머니와 부모님은 피난시절
우연찮게 이불 만드는 기술을 익히셔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었으며,
그 공장은 시골서 올라온 처녀들로 항상 북적댔었다.
집안은 온통 황해도 사투리와 공장 언니들의 지방 사투리로 시끌 벅적했고,
음식은 주로 황해도식이 였지만,
밥하는 언니의 전라도 음식도 간혹 상에 올라왔었던 것으로 안다.
황해도 음식중 특히 녹두 부침과,
아이들 주먹만한 김치 만두는 빼놓을수 없는 부모님의 고향 음식이다.
김치 만두하면 황해도 사리원 전통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윗감이 장래 처가집에 인사를 드리러 오면 반드시 차려지는 음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만두국이였다고 한다.
사위 국 속에 고추가루 듬북 넣은 만두 하나를 넣어서 대접(?)한다 했다.
딸을 빼앗긴다는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예’를 얼마나 잘 지키나 보기위한 이유에서 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후에 그 황해도 사리원 전통은 당연히
우리 형부가 결혼 승낙 받으러 찾아온 날에 행해졌다.
할머니, 엄마, 나와 동생들, 끼륵 끼륵 웃어대며 만두를 빚었으며
저녁에 일어날 일에 온통 집안은 흥분과 즐거움에 싸였었다.
부산이 고향이며, 싱겁게 먹고 매운 것이라면 지금도 멀리하는
그 사위에게 ‘골탕국’을 먹였으니, 할머니와 엄마는 짖굿고
신나는 기억을 우리 모두에게 남겨주었다.
충현동 집 마당 허리자락엔 보름달이 잠길수 있는 우물 물이 있었다.
한 여름에는 식구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등 마륵(등목)으로 ,
또 두레박에 수박을 넣어 담아두었던,
얼음 같이 차가운 냉장고로서 삶의 한복판에 놓여져 있었다.
식수로도 한동안 쓰였지만,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들어갈때 즈음은 수도가 집집마다 놓여졌다.
내 동생 다섯명중 세명은 그 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우리 할머니가 조산원이 되셔서 아기를 받아내셨다.
소독된(제대로 됬을리 만무하지만,
어느놈 하나 파상풍에 걸렸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못들었다)
가위와 뜨거운 물동이가 들어가면 밖에서
기다리는 온 식구들과 셋방 식구들은 울음 소리가
날때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서성였다.
‘응애’ 소리가 들려오면, 탄생에 대한 환호성을 질러대며
그러나 아들 일지 딸 일지에 아마도 더 관심이 컸으리라.
그렇게 큰방 작은방 주욱 늘어서서
머리 맞대고 식구들 공장 언니들 또 셋방 식구들
고향의 정을 나누며 느린 삶들을 엮었을테고
이불 천도 가지 가지 솜 먼지도 구석 구석
재봉틀 소리 추억의 발판소리로 돌려졌으며
생일이 오고 또 오고, 명절이 오고 또 오고
시끌 벅적 흙백 필름이 꾹꾹 눌러졌었다
그렇게 살때는 그리움도 모른채
비꺽대는 대문 안에서 각자의 고향들을 불러다 함께 살았다
할머니께서는 미신을 숭배하던 분이여서 종 종 무당을 불러 궂을 했다.
그런데 환갑을 지나시고 얼마 안있어서
미신에 관한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리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내가 4살때인 것으로 안다.
그리고 나는 5살때서 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청구동에 있는 장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최성곤 목사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셨다.
키도 크시고 얼굴도 미남형으로 ‘예수님’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찬송가 부르며 성경 구절 외워서 상 타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거짓말 보태지 않고 지금 말하지만, 한번도 없었다.
우리 할머니와 부모님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이다.
할머니는 이북 사회의 험난함을 느껴 오던 차에
둘째 사위를 공산당 손에 잃게됬으며
곧 바로 남한으로의 탈출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당신 홀로 3.8선을 넘어 서울을 한번 다녀가셨다고 했다.
6.25 발 발 사태가 일어나고,
그 다음해1.4후퇴 때 할머니는
우리 부보님과 어린 손자 순녀를 이끌고 남하 하셨다.
손녀가 5살, 손자가 2살인 그 어린것들을 업고 끌면서
머리에는 이불 보따리 옷 보따리 이고
자유를 찾아 무작정 내려오셨다고 했다.
남한으로 내려오던 도중에 손자는 홍역을 심하게 앓게 됬고,
열이 오르더니 숨을 거두었단다.
공산당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니 울음 소리조차 내지도 못하고
추운 겨울 땅위에 그냥 잎사귀로만 덮어주었다 한다.
그 당시 이북은 쏘련 통치하에 있었으니,
3.8 선 근방까지는 야행을 하셨다고 했다.
며칠밤을 내려오다 어느날 밤에는 총부리와 마주쳤었고,
“이젠 죽었구나’ 했는데 미군 병사이더란다.
“ 쏼라 쏼라” 대는 소리와 함께 웃으면서
방향을 가르켜 주는대로 발길을 돌리는데
그만 그 자리에 풀석 주저앉게 되더란다.
목숨 걸고 몇날 며칠을 긴장하며 내려왔던 것이
갑작스런 안도감으로 맥이 확 ~ 풀려나서 그랬다고 하셨다.
서울에 도착했어도 그 때에는 이미 서울 사람들 모두에게 후퇴 명령이
내려진 상태라서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어린 손녀딸은
또 피난길 행렬에 들어서서 대구로 내려 가셨단다.
때론 마차나 소달구지를 얻어타기도 했다지만
주로 걸으면서 배고픔을 이겨내며,
그러나 “ 숨을 자유롭게 쉴수 있는 길” 이여서 수월하셨다 했다.
피난 길에서는 돈이 있어도 음식이 없었고,
귀중품이 있어도 돈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대구에서의 임시 정착 생활이 시작됬고,
이북서 가지고 내려온 귀중품을 밑천으로
떡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을 꾸려나가기 시작했으며,
그후로는 쌀장사를 한동안 하셨다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참으로 거룩한 자연의 섭리여!
9. 28 수복때 온 식구는 서울로 올라왔고,
그때 아버지는 이북 사람들 모임을 통해
이불 만드는 기술을 배우셨다는데 그 기술이 밥줄이 된셈이다.
불티나게 이불은 팔려나갔고,
장사가 번창하게 되서 바로 충현동 집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눈설미가 제법 있으셨던 분이셨다.
수틀을 들여다가 수 놓는기술을 일하는 언니들에게
가르켜주어서 수이불(주로 봉황새 한쌍이거나 목단이
수 놓아진 것으로 기억이 난다)이 수없이 팔려 나갔다.
또 양복 쟁이처럼 옷도 제법 만드실줄 알으셨기에
나중에 가세가 기울어졌을때는 옷도 만들어 파셨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여성 (주로 아줌마 들) 의복 스타일이 있었는데
‘월남 치마’ 라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긴 치마들은 홍제동 바닥을 쓸고 다닐 정도였다.
우리 엄마는 형제중의 막내였는데 15살에 시집와서 살다가
시집의 뜻대로 친정 식구 모두 멀리하고 피난길에 올랐다.
우리 엄마의 경우는 친정 식구가 한명도 이남에 없었다.
십여해를 서울서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아는 이(황해도 사람)의 결혼 잔치집에
갔다가 우리 이모를 만나셨단다.
그리고 또 사춘 형제들도.
극적인 상봉이라더니 영화의 한 장면으로 떠오른다.
할머니는 나중에 큰 아들(큰아버지)과 둘째 딸( 고모)
그리고 막내 아들(삼촌)도 함께 데리고 와서 사셨다.
그러나 이북에 두고 온 큰 딸은 영원한 이별이 됬고,
피난 생활 중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소식도 없는 막내 아들
또한 영원한 이별이 되였다.
전쟁이 낳은 한은 할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은 셈이다.
자주 한숨 섞인 목소리로 보고픈 딸과 아들을 찾으셨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흘러 강산이 수도 없이 변했건만
서울 살림은 고향이 될수 없었는지,
할머니와 부모님의 한 맻친 소리는 끊이지 않았었다.
“ 언제나 고향 땅 밟아보고 죽나 ”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항상 노래처럼 입에 달고 사셨다.
할머니도 그 소원을 이루시지 못하고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우리 엄마와 아버지 또한 이북에 남아있던
가족 찾기 신청을 KBS에 하시고 기다려 봤지만,
끝내 영원한 삶이 주는 고향으로 가셨다.
고향은 가끔 나를 부른다.
충현동 집으로 또 밝아 보지 못했던 황해도 땅으로도. . .
재 작년 여름 아버지 뵈러 한국 나갔을때,
아버지는 내게 당신 고향 땅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건네셨다.
당신 살아 생전 이루시지 못할 것 같다면서
당신의 고향 집과 큰누님이 사시던 집 약도가 자세히 그려진. . .
약도는 사리원역으로 시작해서,
자련강(재령강), 석햇나루, 만천면, 영천면, 신한포 다리,
초등학교, 북침동 매형집,
그리고 반대편 쪽으로는 신한포 다리가 그려져 있다.
안악군에는 단 한분이신 이모 할머니가 사셨다는
기재까지 넣으셨다.
혹여 내가 미국 시민권자여서 이북 갈수 있는 기회가
주워지거든 찾아가 보라고. 가슴이 뭉클했으며 지금도 목이 메인다.
이렇게 황해도가 나의 고향으로 다가온다.
“ 로스께놈 양놈이 갈라놓은 삼팔선 ”
을 원망하시고 가신 우리 부모님의 한을 함께 품으며.
상큼한 바람이 고향을 불러다 줍니다
풍습,환경,언어,색깔없이 하나되어
바람은 어머니도 불러다 줍니다
희생, 눈물,사랑 그리고 미소로서
바람은 영원한 고향도 알려줍니다
몸,마음 하나되여 영원한 빛의 세계로
바람은 조용히 겸허하게 끝없는 사랑으로
삶의 발자취를 묵상하라 하십니다.
첫댓글 멋진 영상과 음악... 친구의 글을 잘 정리해서 옮겨주신 후배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랜 기억과 추억을 담긴 글 같이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지요.
수고는 뭘요. 정기선배님 댓글로도 자주 좀 봅시다.
HueBaeNim, you are truly amazing.
영지선배님 너무 비행기 태우지마세요.
그러다 떨어지면 아퍼요.
같은 글인데 느낌이 다르네....예쁘게 정리 해줘서 고마워 후배님
분위기 맞게 음악도 올렸는데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뭐든지 손 좀 보며 더 좋아지지 않아요.
사람 품이 들어갔는데요.ㅋㅋ
고향을 잊고 사는 요즘...물씬 고향냄새가 나는군요...까마중,깜부기,재봉틀소리....햐~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자서전을 따로 쓸 필요가 없겠어요~
30년 만에 귀국해서 살아보는 한국....너무도 많이 발전해서 살기에 하나도 불편함이 없는데... 그래도 사람냄새 그리워 자주 시장 골목을 누빈다. 오늘도 종로6가 시장안에 있는 생선구이 집에서 대충 저녁먹고... 광장시장 빈대떡 한장에 막걸리로 남편과 함께 2차, 중구청, 충무로까지 걸어서 4호선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와 잠시 후에 "동이" 보고 잘꺼라우... ㅋㅋㅋ -정기의 서울살이-
닥터김이 여기서 하고 싶으셨던 것이니 거기 있는 동안 실컨 즐겨라~~
아무리 미국에 오래사셔도 아마 한국에서 지낸 추억들은
영영 잊지는 못하실겁니다.마음의 고향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행복하지요
정기선배님 모처럼 고국방문이시니 많이 보시고 편히 쉬시다 가세요.
동문모임에도 한 번 나오시고요.
요번 산행에 같이 안가실래요.
그냥 산에 안가셔도 밑에서 산림욕도 하시면 좋을것 같은데요.
둔내에서 바베큐파티 있으니 그 쪽에 참석하셔도 되시고 15기
부중부고모임입니다
선배님이 가신다면 제가 다 손을 써넣겠습니다.
제가 두루 두루 마당발입니다.ㅋㅋ
오정기..난 그게 젤 부러워..한국 시장 말야..ㅎ 난 여기서두 시장가는게 그리 좋으니..
모두들 알고 보면 그리움 외로움 추억에 살고들 있네... 많은 공감을 느끼며 김인홍후배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뭘요 그럼 쑥스러워 못들어오지요.ㅋㅋ
고향. 추억.....인홍후배의 손을 거치니 한결 빛이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