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한촌재회(寒村再會)
①
"아이쿠!"
콰당.
깊은 생각에 잠겨 교자의 팔걸이에 체중을 싣고있던 나운은 반사적으로 몸을
솟구쳤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와 동시에 앞채를 멘 가마꾼 둘이 쓰러지며 사인교가
주저앉은 것이다. 자칫 사인교와 함께 길바닥에 널브러지는 낭패를 겪을 뻔했
으나 나운은 항주에서 흑마방의 권위를 대신하는 분타주였다.
그의 신속한 몸놀림은 흑마방의 분타주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
명하고도 남았다.
"무슨 일이냐?"
길쭉한 얼굴에 표독스러운 인상만큼이나 나운의 음성은 날카로웠다.
"으으……."
그러나 땅바닥에 뒹구는 자들의 고통스런 비명만 요란할 뿐 아무런 대꾸도 들
리지 않았다.
급작스런 일이기도 했으나 감히 항주성 내에서 자신을 암습할 자가 있으리라
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나운은 나뒹구는 수하들을 걷어찼다.
앞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렸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
"으헉! 그, 그게……."
발길질에 나뒹구는 수하들의 오른쪽 무릎에서 흐르는 핏줄기를 발견하고서야
나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슬개골(膝蓋骨)을 뚫고 박혀있는 작은 유엽비도(柳葉飛刀).
비록 인적이 드문 교외라고는 하나 이곳은 항주요 자신은 항주의 지배자였다.
당장이라도 향전(響箭)을 쏘아 올리면 일 각 안에 달려올 수백의 수하들도
있지 않은가.
암습자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황대진의 일로 불쾌한 심사를 풀어 버릴 좋은 먹이 감이 나타났다는
즐거움마저 들었다. 제법 뻣뻣하게 버티던 창해문이 잠잠해진 후 제대로 몸을
풀지 못해 짜증마저 느끼고 있는 이즈음이었다.
"크흐흐, 어떤 친구기에 인사가 이리도 거친가? 어서 나오시게!"
언제라도 요대삼아 두른 연검을 떨칠 수 있도록 허리춤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외치는 나운의 주위를 뒤채를 메고있던 두 명의 수하들이 호위했다.
주위를 살피던 나운의 시선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전면의 정자나
무에 고정됐다. 토끼새끼라면 모를까 사람이 숨을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
다.
"나무에 불을 질러야 나오겠느냐!"
"하하핫! 수하에게 능멸을 당하는 신세이긴 하나 아주 멍청한 자는 아니로구
나."
아니나 다를까,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서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의 그
림자가 번뜩였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나무에서 날아 내리는 아주 짧은
시간.
나운의 안색은 팔색조보다 빠르게 변했다.
그가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지금도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일을 거론한
것은 물론, 음성으로 보아 이제 수염자리가 잡히기 시작한 애송이임에 틀림
없지 않은가.
"이런 죽일 놈!"
일 지역의 패자다운 여유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의 허리춤에서 싸늘한 광망
이 쏘아졌다.
휘리릭!
면철로 만든 연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사내가 발을 딛을 지점에 살기 띤 검풍이 난무했다.
하나 연검은 애꿎은 바람만 갈랐고 그 서슬에 흙먼지만 자욱히 피어났다.
"쯔쯧, 성깔이 그 모양이니 아랫것들에게 무시당할밖에……."
더운 여름날 나무그늘 아래서 벌어지는 장기판에 훈수를 두는 듯한 한가로운
음성은 더욱 나운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감히 자신의 행차를 가로막고 조롱하는 괴한의 모습이 낭랑한 음성을 쫓아 허
겁지겁 고개를 돌린 나운의 핏발선 눈에 들어왔다.
옥색장삼을 표표히 나부끼며 부서진 교자 위에 한쪽 발을 올리고 서서 조롱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청년.
귀수문을 이끌고 항주의 밤을 장악하기 위해 애쓰던 시절의 나운이었다면. 사
년 전, 흑마방에 투신하여 분타주가 되었을 즈음 상부의 인정을 받으려 노심
초사하던 나운이었다면. 최소한, 황대진과의 마찰쯤 속 깊이 묻어두고 의연할
수 있는 나운이었다면 당장 향전을 쏘아 올렸으리라.
하나 가장 속 쓰린 구석에 상처를 입은 나운은 뻔한 사실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는 자라면 감히 그의 수하를 상하게 하며 길을 막고 시비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고, 분명히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펼친 자신의 신랄한
공세에도 청년의 옷자락하나 베지 못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놓친 것이다.
나운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렸다.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새끼가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리는구나!"
순간, 청년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졌다.
이제껏 살면서 이따위 모욕적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욕설은커녕 뉘라서 감히 무적세가의 소가주에게 공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
가. 관례(冠禮)를 치른 오 년 전부터는 심지어 집안의 어른들조차 그에게 일
정한 예를 갖추고 대하는 상황 아니던가.
"네놈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만 화를 자초하는군."
따사로운 봄날의 햇볕을 꽁꽁 얼리는 싸늘함.
그제서야 작은 이성의 꼬투리가 분노로 가득한 나운의 심중을 비집고 나왔다.
"너, 너는 누구냐?"
"갈천위라면 모를까, 너 따위 쥐새끼에게 함부로 밝힐 이름이 아니다!"
일단 이성을 마비시킨 분노가 걷히고 나자 나운도 그리 우둔한 사람은 아니었
다.
"뭐라고, 갈천위?"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당금 무림에 감히 방주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올릴만한 자는 없…… 아니 있
다!'
나운은 얼마 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며 황대진이 보여준 무적세가 인물들
의 용모파기를 떠올리려 애썼다.
나이나 용모로 보아 눈앞의 청년과 부합되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몇 년 전
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 지금보다 훨씬 앳된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이맘때의 남
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는 것을 감안하면 틀림없었다.
"그, 금사익……!"
"네놈 따위가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금사익은 대뜸 노갈을 지르며 나운에게 내달렸다.
눈앞에 검광이 번뜩이는 순간, 나운은 반사적으로 연검을 쓸었고 그를 호위하
고 서 있던 수하들도 제 각기 금사익의 그림자를 향해 수중의 무기를 휘둘렀
다.
휘익, 카가강!
"막아랏!"
나운에 비해 수하들의 공세가 늦은 것이, 그것도 딱 필요한 만큼만 늦은 것이
그 순간 나운의 목을 지켰다.
돌아가신 조부에게 물려받은 경휘검(敬輝劍)으로 나운의 연검을 끊어 버리고
그의 목 줄기를 베려는 순간, 거칠게 허리춤을 노리는 서늘한 기세를 느낀 금
사익이 공세를 멈추고 몸을 솟구친 것이다.
속절없이 부러져 흐느적거리는 애검을 안타까워할 틈도 없이 나운은 재빨리
몸을 빼며 외쳤다.
"어서 신호를 올려라!"
나운을 등지고 떨어져 내린 금사익이 다시 몸을 돌리기까지 짧은 순간, 나운
이 내달린 거리는 칠팔 장여.
졸지에 나운과 금사익의 중간에 남겨져서 단순히 장애물 노릇뿐이 할 수 없는
두 명의 사내는 엉겁결에 향전을 찾는다고 품속을 더듬었다.
흑마방의 졸개들쯤 얼마든지 달려와도 두렵지 않은 금사익이었지만 일이 커져
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뜻과 관계없는 돌
발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용납하기에는 그의 자부심이 너무도 컸다.
"누구 마음대로!"
나운을 일 검에 베어 버리지 못한 수치심에 그의 경휘검은 더욱 사나워졌다.
"으악!"
"크흐윽!"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장애물은 제거되었고, 그 사이 나운의 신형은 이십 여
장 밖까지 달려갈 틈을 얻었다.
분노인지 짜증인지 모를 기색이 가득한 형형한 눈길로 도망가는 나운의 뒤를
쫓는 금사익의 시야에 땅바닥을 기면서도 향전을 쏘아 올리려 떨리는 손을 더
듬거리는 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버러지 같은 놈들!"
군더더기 없는 일 검을 선사하는 것이 금사익이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
한의 자비였다.
털썩, 쿠쿵!
가마꾼이자 호위이기도 했던 사내들이 시신이 되는 사이 그들의 주인은 보다
빠르지 못한 자신의 걸음을 원망하며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금사익은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이곳이 산이나 들이었으면 십리라도 문제가 될게 없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인
파가 붐비는 대로였다.
자신은 아직 낯설지만 나운에게는 자기 집이나 다름없는 항주가 아니던가.
어느새 거리는 사십 여장.
점점 멀어져 가는 나운의 뒷모습을 잠시 쏘아본 금사익은 몸을 날리는 것을
포기하고 전력을 다해 소매 속의 유엽비도를 떨쳤다.
휙!
금사익의 전신 공력을 담기에는 너무도 작고 가냘퍼 보이는 유엽비도는 섬전
같은 기세로 바람을 갈랐다.
"끄으으윽."
지척에 보이는 모퉁이만 돌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희망에 턱 끝까지 차 오
르는 숨을 삼키던 나운은 등줄기를 파고드는 작열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긴 신음성을 토하고 말았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음성을.
콰당!
이미 숨결이 끊어졌음에도 달려가는 탄력을 멈추지 못하고 두어 걸음 더 나아
간 몸뚱이가 큰 동작으로 넘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참지 못할 욕지거리를 내뱉은 데다 자신의 신분까지 알아보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꼬여 버린 상황이 금사익은 영 마땅치 않았다.
적당히 나운의 정신을 빼놓아 흑마방 놈들의 계획을 혼란시키고 더불어 신부
를 쫓는 힘을 분산시키리라 의도했거늘 나운은 물론 졸개들까지 몰살시키고야
만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 기분 나빴고 그런 상황조차 예상치 못한
자신의 미숙함이 못마땅했다.
최초의 실전에서 거둔 개운치 못한 성과.
졸개들과 나운의 시신에 박혀있는 유엽비도를 회수한 금사익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옷자락을 힘껏 털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석백송은 분명히 알아차렸다.
표행이 모두 출발하고 난 지금, 표국을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
길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진가보상을 찾아가는 길에 흑마방의 인물과 마주친 이후 구체적으로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거미줄이 몸에 감기는 듯한 불쾌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던
가.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성큼 다가온 서늘한 가을 바람이 후덥지근한 여름의 찌꺼기를 몰아낸 어
느 초가을 아침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놈들의 이목은 열 무리로 나뉘어 떠난 표행을 뒤쫓고 있으리라. 어느
것이 진짜 무적세가로 보내는 봉래도의 예물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최소의 경비인원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북경으로 향한 지금, 비록 완전히 자
유롭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틀 전, 문제의 표물을 황농현의 안가로 미리 옮겨놓은 것은 그가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물론 죽어도 자기 군주님을 우마차에 산처럼 쌓아올린 건초더미 속에 모실 수
없다는 표독스런 시비에게 사정사정하는 수모를 겪긴 했지만 그쯤이야 부끄
러울 일도 아니었다.
사실, 도착하는 대로 무적세가의 어른들에게 고하든지 아니면 봉래도에 알려
서라도 군주님께 범한 무례를 반드시 벌하겠다는 해연이라는 시비의 말대로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중의 일이야 어찌되든 표물이 무사히 무적세가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이제는 그들에게 달렸다."
석백송은 사군명과 그가 이끌고 떠난 표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찻잔을 들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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