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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서서히 땅거미가 깔릴 무렵.
황혼으로 붉게 물든 하늘에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자그마한 시
골마을, 황농현 상허촌(常虛村).
마을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향해 하릴없는 동네 개들이 짖어댔다.
반가움은 아니고 그렇다고 맹렬한 적의도 없는 그저 본능일 뿐이었다.
"어허, 그놈들 참……."
항주성을 벗어난 후 미행이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사군명 일행은 사방 십여 리
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마을 어귀의 야산에서야 합류했다.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과도하게 심력을 소모한 그들에게는 시끄럽게 짖
어대는 개들마저 반가웠다. 마치 이제부터는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신호처럼
들리는 개들의 환영.
한가로운 시골이라 해도 가구수가 이백여 호를 헤아리고, 허름한 주막이며 상
점 따위가 늘어선 저자거리도 있는 마을이었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선다
한들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닐 테고 구름 뒤로 얼굴을 내미는 달을 보고도 짖
는 것이 개들의 속성임에야 그다지 신경 쓸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어디에 있는 겁니까?"
서수림이 표물의 행방을 물었다.
행여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해 표물이 보관(?)된 장소를 알고 있는 사
람은 사군명뿐이었다.
마을을 찬찬히 살핀 사군명은 손을 들어 마을 끝의 외딴집을 가리켰다.
왕충삼과 팽상문이 사군명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길게 빼고는 한 마디씩 읊어
댔다.
"저기 저, 마차가 서 있는 곳 말씀이오?"
"굴뚝에서 솟는 연기에 보랏빛이 도는 거 하며 망치소리를 보아하니 대장간
같은데……?"
재상 가의 후예에게는 제법 단단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가 먼저 눈에 뜨
이고 화약을 다루던 군교 출신에게는 풀무질에 피어오르는 석탄 연기나 쇠 두
드리는 소리가 더 빨리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마을에 대장간이 한 곳뿐이라 했으니 저곳이 틀림없을 겁니
다."
"내가 그래도 선대 국주님 때부터 표국에 있었건만 우리 국주님이 이런 일을
믿고 맡길 정도로 친한 대장장이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는 고숭후의 말을 천두경이 받았다.
늘 그렇듯 세사에 통달한 도인 같은 소리였다.
"사해가 다 형제요, 표국일이란 게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것인데 세권표국의
주인쯤 되는 양반이면 어디에 뭐 하는 친구인들 없겠소."
"하긴, 우리 국주님과의 관계를 따져보면 구대문파의 명숙들과 녹림의 두령들
이 호형호제해야 될 걸세. 하하하……."
가는 길이 다른 무림인들은 물론, 장사꾼에서 높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석
백송의 교분은 두루 통했다.
무리하지 않은 도움을 청하고 적당한 사례를 하되 앞뒤가 한결같으며, 이익을
추구하되 장부의 기개와 대의를 잊지 않는 석백송이야말로 누구든 쉽게 마음
을 열게 하는 매력이 있는 사내였다.
과연 어떤 인물이 천하의 안위를 좌우하는 표물을 보관하고 있는지 일말의 호
기심마저 느끼면서 그들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계십니까?"
사군명이 일행을 대표해 반쯤 열린 문을 향해 한껏 정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땅, 땅, 땅……!
규칙적인 망치질소리가 새어나오는 문 안쪽에서 쇳소리처럼 탁한 음성이 퉁명
스럽게 울렸다.
"이런, 제길……. 사람이 없는데 망치질을 한단 말인가?"
성질 급한 사람 같으면 울컥 화를 낼 법도 한 대꾸였지만 묘하게도 사군명은
편안함을 느꼈다. 어딘가 기억에 남아있는 음성이었고 그 기억은 그에게 전혀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저희는 항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만……"
사군명의 공손한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다.
"정신 나간 작자들 같으니, 항주가 뉘집 앞마당만 하단 말이냐? 항주 어디?"
국주와 어찌되는 사인인지 몰라서 나름대로는 참고있던 왕충삼이 기어코 한
마디 던졌다.
"자고로 예의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했거늘, 하는 꼴을 보아하니 사람대접
받기는 틀린 위인이로구먼!"
불을 마주하고 앉은 통에 뒷모습만 보이는 대장장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
거렸다.
"클클클, 이미 썩어서 흙이 된지 오래인 조상의 뼈다귀를 자랑으로 아는 멍청
이에게 사람대접 받을 생각은 아예 없으니 걱정 말거라."
누군지는 몰라도 왕충삼의 내력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왕충삼을 비롯해서 일행들이 모두 멍해졌건만 고승후는 떨리는 표정으로 고개
를 갸웃거렸다.
"호, 혹시…… 위 표두님?"
"쯔쯧, 칼 한 자루 메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일 텐데
…… 돈 욕심을 아직도 못 버렸구먼."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고승후에게 대꾸한 대장장이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순간, 사군명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위 표두님!"
불을 등진 탓에 윤곽만 보일 뿐이지만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다시없는 은인이었다.
상취객 위사무.
"크흐흐. 국주가 알만한 사람을 보낸다기에 누군가 했더니 바로 너였구나. 말
똥 냄새나는 꼬맹이!"
뒤이어 고승후가 달려들었고 왕충삼과 팽상문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뜻
하지 않은 만남을 반가워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십니까?"
노랭이 고승후에게 수시로 술을 뺏어 먹은, 아니 기꺼이 대접받아온 유일한
인물일 정도로 당시 세권표국의 누구에게나 알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던 위사
무였다.
위사무가 홀연히 사라진지 칠 년.
그 이후에 표국에 들어온 사내들이 영문을 모르고 두리번거리는 것과 달리 위
사무를 아는 사내들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채인 듯 마당 한쪽에 따로 지어진 큰방에 건장한 사내 아홉이 들어앉았다
"이렇듯 가까이 계시면서 어찌 한 번도 걸음을 않으셨습니까?"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인 중년의 고승후가 어린아이처럼 투정 섞인 원망을 하
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와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세상이라면 고승후도 기대
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었을 테고 그것이 위사무라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닌 것
이다.
"내가 가봐야 알토란같은 자네 은자나 축낼텐데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참, 말씀을 그리 야박하게 하십니까……."
"흐흐흐, 고선배께서 위 표두님을 만나더니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소이다."
왕충삼과 팽상문은 늘 어른행세를 하던 고승후가 위사무에게 절절매는 꼴이
고소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모양이었다.
"국주가 눈이 어두운 사람은 아니었구나."
사군명을 바라보는 위사무의 시선이 발갛게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맑았다.
"모두가 위 표두님과 국주님의 은공입니다."
"프흐흐, 하늘이 똑같이 비와 햇볕을 내려도 나무에 따라 독과(毒果) 맺기도
하고 선과(仙果)를 맺기도 한다. 너에게 그럴만한 자질이 있는 탓이었으니 굳
이 은공이라 할 것 없다."
표정도 말도 무심했지만 무심한 가운데 전해지는 느낌은 얄팍한 정 따위와는
다른 무게가 있었다.
위사무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떠나야 할 것이니 자네들은 그만 쉬게."
뜻하지 않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 잠시 막중한 임무를 잊고 있던 일행은 위사
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군명이는 표물을 확인해야지?"
일행의 인사를 뒤로하고 방을 나선 위사무가 사군명을 안내한 곳은 대숲이 우
거진 뒤뜰이었다.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군명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대숲을 스치는 바람이 요란한 뒤뜰에서 위사무는 사군명에게 입을 열었다.
"검을 펼쳐 보거라."
사군명은 망설이지 않았다.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무인의 길을 열어준 위사무
를 스승으로 생각한지 오래였다.
스승이 제자의 성취를 보고자 한다면 최선을 다해 익힌 바를 펼쳐 보이는 것
이 마땅했다.
"예."
달빛이 쏟아지는 마당 한 가운데 선 사군명은 청강검을 빼들고 깊숙이 숨을
들이 마셨다.
천천히 들이쉬던 숨결이 폐부를 가득 채우는 순간, 낮고 또렷한 기합성과 함
께 사군명의 검이 밤 공기를 갈랐다.
"차합, 태극위진!"
서서히 원호(圓弧)를 그리던 검이 전면의 일 점을 향해 내 찔러지는 순간 섬
전(閃電)이 번뜩였다.
휙, 쩌르릉!
"태극분기(太極分氣)!"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대기를 가르건만 느껴지기는 한없는 느림이었다.
떨림이 없는 느림.
검이 화공(畵工)의 붓이라면 머리털 만한 차이도 없는 굵은 선(線)을 그렸으
리라. 유장(悠長)하기는 장강의 흐름 같고 단정하기는 망망대해에서 바라보는
수평선 같은…….
바람은 달빛을 소리 없이 갈라 버린 검이 그린 선을 뚫지 못했다.
형체 없는 공간이 대기의 틈새를 가르는 검에 제압 당해 사위(四圍)가 고요할
때, 사군명의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태극만공(太極卍空)!"
검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검이 되었다.
움직이면 베일 듯 사방을 채운 검기(劍氣)는 만근의 압력으로 사방을 채우건
만 불어오는 바람에 유유히 허공을 유영(遊泳)하는 나뭇잎의 움직임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마음이 이는 대로 몸이 움직이니 이미 몸이 된 검 또한 마찬가지.
벨 뜻이 없는데 자유롭게 움직이는 나뭇잎이 검에 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검을 들었으되 불어오는 바람과 다르지 않은 사군명의 움직임은 달빛에 춤추
는 밤 나비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
이따금 터지는 사군명의 기합은 정확히 그의 검이 일으킬 변화를 예고했고,
사군명의 몸은 검의 변화를 풍요롭고 충직하게 따랐다.
휘리릭, 착!
"흐음……!"
시작할 때와 다르지 않은 가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사군명의 동작이 멈추자 위
사무는 침음성을 흘렸다.
"어디서 얻은 검법이더냐?"
검을 갈무리하고 자세를 바로 한 사군명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국주님께서 내리신 태극무허검보를 익혔습니다."
"태극무허검보라……."
지그시 눈을 감고 되뇐 위사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좋은 인연이 닿았구나. 익힐만한 검법이니 계속 정진하거라."
세권표국에서 지내던 시절, 사군명의 충후한 자질을 발견하고 전해 준 내공심
법의 뿌리는 무당의 태극혜심공(太極慧心功)이었다.
사문의 무공을 유출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이미 패배의 경험이
있는 무공을 전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 나름의 심득(心得)을 더한 심법을
전한 것이다.
한데, 같은 도가일맥으로 명맥이 끊어진지 오래인 모산잠문(茅山潛門)의 검보
를 사군명이 얻었다는 사실이 우연으로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위사무는 물끄러미 사군명을 건너보았다.
그가 상허촌에서 대장장이가 된 것을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인물인 석백송이
서찰을 보내 이번 표행에 관해 설명하며 표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위사
무는 남다른 감회에 사로잡혔다.
무적세가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까닭이었다.
무적세가가 누리는 권위를 못마땅해하면서도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사문의 어른들.
결과를 떠나 자칫 안정을 누리고 있는 천하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한다는
어른들의 명분은 무당의 기재로 일컬어지던 그가 생각하기에 너무도 나약하고
비겁한 것이었다.
결국, 금종휘가 무적신군이란 별호를 얻고 금씨검문의 현판에 무적세가라는
글이 새겨진 이후 구대문파 출신으로 유일하게 비무를 청했던 그의 패기는 좌
절로 바뀌고 말았다.
불과 백초를 넘기지 못하고 검이 부러지는 수모를 당하고 만 것이다.
수치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 술로 세월을 보내며 석백송에게 몸을 의탁해 표두
노릇까지 했던 그였다.
다시금 도전할 뜻을 세우고 상허촌에 은거해 대장장이 노릇으로 보낸 칠 년의
세월.
쇠를 다뤘다기보다는 마음을 벼리고 심검(心劍)을 담금질한 시간이었다.
한데, 쇠를 달구는 뜨거운 불길이 그의 마음마저 정화시킨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호승심은 사라졌고 필생의 숙원이던 금종휘와의 비무도 덧없어
지기 시작했다.
무적세가가 천하제일이라도 좋았고, 아니면 아닌 대로 상관없었다.
무도의 길에서 궁극(窮極)에 달하는 것은 구차한 비무를 통해 알 수 없으며,
누군가가 감히 검증(檢證)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허튼 욕심 없이 새로운
경지를 조심스레 열어 가면 그뿐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무적세가로 시집가는 봉래도의 군주를 맡아달라는 석백송의 부탁
이 전해진 것이다.
스스로에게 침잠할수록 점점 크게 다가오는 '천하의 평안'이란 가치가 위협받
으면 곤란했다.
위사무는 기꺼이 승낙했다.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 천하제일인의 영예를 차지
하는 것은 관계없으나 수 많은 피를 요구하는 세력다툼이 벌어져서는 곤란했
다.
평화도 혈란도 부를 수 있는 중요한 표행의 책임자가 되어 나타난 마구간 꼬
마의 성취가 궁금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경박한 호기심이 아닌, 능력에 대한 판단.
"이번 일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물끄러미 바라보는 위사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대하고 있던 사군명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자신감을 떠나 기필코 감당해야 할 사명일 뿐입니다."
"감당하지 못하면?"
사군명의 음성이 비장하게 울렸다.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클클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놈! 목숨이 어디 투전판의 동전이더냐?"
위사무는 질책은 매서웠다.
"자칫 잘못되면 천하가 어지러워 질 수도 있는 일. 네 놈의 목숨을 소중히 여
기고 그 목숨을 아끼듯 천하를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따위 목숨 수백 수천
이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예……!"
대답은 했으나 자신 있는 음성은 아니었다.
위사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쓸모 없는 돌멩이로 채운 보따리는 귀찮은 짐일 뿐 보배일리 없다. 천하가
소중한 것은 더 없이 소중한 생령들이 가득한 때문이니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
지 않고는 천하도 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그런
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수많은 존재가 살아가는 천하를 가슴에 새기지 않으
면 절대의 무공도 장렬한 희생도 모두 한 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말이
다."
혼탁한 저수지에 맑은 샘물이 솟는 느낌이었다.
위사무의 말을 곰씹는 사군명의 눈망울 깊은 곳에 맑은 빛이 흘렀다.
그런 사군명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음 짓는 위사무의 주름진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이 더 없이 상쾌했다.
아마도 바람이 머금고 있는 신록(新綠)의 생명력 탓이오 능히 그런 사실을 느
낄 수 있는 위사무이기 때문이리라.
젊은 청년이 보기 드문 미인을 보고 무심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사군명은 무심했다.
설운경의 미모가 그의 눈에 차지 않아서가 아니오, 그의 천성이 미색에 둔한
탓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사군명에게 설운경은 더 없이 중요한 표물인 까닭이었다.
잘 그린 그림을 대하듯 그저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도 다 있구나 하는 순수한
감탄뿐.
"기다리던 사람이 이 친구일세."
위사무의 말이 떨어지자 사군명은 정중히 포권으로 인사했다.
"세권표국의 표사 사군명이라 합니다."
사군명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눈을 가늘게 뜨고 전신을 샅샅이 훑은 해연이
뾰족한 음성을 발했다.
"당신이 우리 군주님을 모실 사람인가요?"
도무지 비범한 구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이 사내가 못 믿겠다는 뜻
을 노골적으로 들어낸 말이었다. 봉래도 같으면 해남신풍군에도 들지 못할 위
인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 표행의 책임잡니다."
"흥! 표행이라고요?"
표행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귀에 거슬리는지 해연이 톡 쏘았다.
옆에서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던 위사무가 해연의 말을 받았다.
"표행이지 않고? 표국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은 표행, 표행을 의뢰했으면 표물
. 그걸 모르겠느냐?"
해연은 기가 막힌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비죽거렸지만 아무런 대
꾸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착한 후 초라한 대장간의 모양만큼이나 형편없는 위사무의 몰골과
퉁명스런 응대에 성질을 부렸다가 혼찌검을 당한 사연이 있는 터였다.
보기에는 꼬질꼬질한 늙은이가 봉래도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인 해연을 동네 강
아지 다루듯 데리고 놀았던 것이다.
방 안쪽에 조용히 앉아있던 설운경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쉽지 않은 여정이라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보는 것은 시각이요, 듣는 것은 청각이다.
사람 따라 감각의 발달정도가 다르다는 말은 들었으나 자신이 시각보다 청각
이 예민하다는 사실을 사군명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막중한 책임감으
로만 다가오던 눈앞의 표물(?)이 생생히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설운경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의 존재가 실감되며 시각까지 함께 깨어난 것
이다.
처음으로 보는 아름다운 여인.
온 몸의 감각을 아우성치게 만들며 다가오는 황홀한 실체.
애욕(愛慾)은 분명히 아닌, 그러나 온 몸과 마음이 훈훈해지는 따사로운 느낌
통제할 수 없는 심중의 변화에 당혹감을 느낀 사군명은 황급히 입을 여는 것
으로 도피처를 삼았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시겠습니다."
설운경이 대답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해연의 앙칼진 대꾸가 마음을 진정시킬 틈을 준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나요? 표국이면 국주를 빼고라도 표두가 여럿 있을
텐데……."
"그것이……."
한 번도 자신이 국주나 표두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군명으
로서는 곤란한 질책이었다.
"가는 도중에 네가 함부로 설치지 않고 다소곳이 말을 듣는다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 걱정 말거라."
충성심이 과하고 성미가 보통이 아닌 해연의 기를 꺾어놓아야 표행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위사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못살게 구는 거예요?"
앙칼지긴 하지만 어쩐지 이빨 빠진 고양이같이 그다지 거센 저항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사군명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본 표국에서는 전력을 기울여 이번 표행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저희 국주
께서 여러 가지 안배를 해놓으셨고 두 분을 모실 제 동료들도 모두 경험 많고
뛰어난 표사들입니다. 저희를 믿고 따르셔도 좋을 것입니다."
이미 위사무를 통해 사람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는 교훈을 확인한 후라서 일까.
설운경은 우직해 보이는 젊은 표사의 말과 행동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봉래도를 떠나기 전 봉래신장이 찾아와 어두운 음모의 가능성에
대해 귀띔해 준 이후 한 가닥 불안감을 떨친 적이 없던 그녀였다. 한데, 건초
더미에 실려 도착한 이름 모를 촌구석의 대장간에 숨어있는 지금. 처량하기만
하던 그녀의 심중에 모처럼 화기(和氣)가 도는 것이다.
설운경의 방을 나온 사군명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흑마방이 제 아무리 무섭다한들 방해하지 못한다. 나 사군명은 기필코 이번
표행을 성공시킬 것이다!"
표행을 책임진 사군명과 표물 설운경이 처음 만난 그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제2권에 계속>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ㅡ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즐독 입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즐독 ㄳ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독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