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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齋 鄭 敾 (1676~1759)
鄭敾의 本貫은 光州로, 先代는 경기도 廣州 일대(현 江東區 遁村洞)에서 世居하다가
高祖父 演 때부터 都城의 서쪽에 터전을 잡았으며, 鄭敾은 1676년 아버지 時翊과 어머니
密陽 朴氏 사이에서 漢城府 북부 順化坊 幽蘭洞(현재 종로구 淸雲洞 89번지
景福高等學校가 있는 北岳山 서남쪽 기슭)에서 태어났다.
字는 元伯, 호는 謙齋∙蘭谷인 鄭敾은 兩班 家門이지만 여러 代에 걸쳐 科擧를 통하여 出仕하지
못하여 寒微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같은 동네의
外家에 의탁하여 자랐다.
정선은 유란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安東 金氏 名門家인 金昌協, 金昌翕, 金昌業의 門下에
드나들면서 性理學과 詩文을 배우며 깊은 인연을 쌓아갔으며, 18년 年下인 英祖(1694~1776)와
60년 가까이 함께 하며 총애를 받았다. (*翕: 합할 흡)
겸재는 38세(1713년) 때 첫 벼슬 世子翊衛司 率(從六品)을 시작으로 義禁莩事(종5품),
경상도 河陽縣監, 淸河縣監, 경기도 陽川縣(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 縣令, 司導寺僉正(종4품),
同知中樞府事(從二品) 등을 역임하였다.
36세(1711년)에 금강산을 다녀와 <楓嶽圖帖(국보 1875호)>을 그렸으며, 이후 <海嶽傳神帖>,
<嶠南名勝帖>, <海嶽八曲屛>, <淸河城邑圖>, <內延山三龍湫圖>, < 金剛全圖>, <關東名勝帖>,
<壯洞八景帖-淸風溪圖>,< 毓祥廟圖>, <京郊名勝帖>, <陽川八景帖>, <退尤二先生眞蹟帖>,
<海嶽傳神帖(다시 제작)>, <仁王霽色圖>, <聽松堂圖> 등을 그렸다. (*毓: 기를 육)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처음에는 중국 南畵 형태로 그림을 그렸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寫生의 眞景山水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名勝을 찾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謙齋 鄭敾은 玄齋 沈師正, 觀我齋 趙榮祏과 함께 ‘三齋’로 불렸으며 강한 濃淡의 對照 위에
靑色을 主調로 岩壁의 面과 質感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인 眞景山水畵를 개척하였다. (*祏: 위패 석)
*眞景山水畵
그림의 소재는 前代와 마찬가지로 名勝名所와 別墅幽居∙野外雅集類 등이 主流를 이루고,
그 중에서도 金剛山과 關東地方, 漢陽 近郊의 景觀을 가장 많이 다루었으며,
畵風은 實景山水畵의 전통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南宗畵法을 곁들인 것으로,
謙齋 鄭敾이 개발하였다. (*墅: 농막 서)
정선의 화풍은 姜熙彦∙金有聲∙崔北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添齋 姜世晃 등의 화가들이 형식화된 당시의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한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했는데, 그들의 이러한 화풍은 檀園 金弘道가 構圖와 筆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畵風으로 발전시켰으며 李寅文∙李在寬 등으로 繼承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鄭敾과 金弘道派 이외에 沈師正∙李麟祥 등의 文人畵家들이
색다른 個性美를 보여주면서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이바지하였다.
진경산수화는 實景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려 했던 근대지향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繪畵發展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근대 및 현대에 생긴 특정 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선의 <仁旺霽色圖)>, 姜熙彦의 <仁王山圖)>, 金碩臣의 <道峯山圖>,
李麟祥의 <九龍淵圖>, 姜世晃의 <松都紀行名勝圖帖>, 金弘道의 <四郡帖>,
李寅文의 <斷髮令金剛全圖>, 趙廷奎의 <金剛山屛風> 등이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原本이 아닌 影印本이나 複寫本이며, 사진에 대한
간단한 설명문은 현지 안내문과 겸재정선미술관 홈페이지, 그리고 다른 곳의 자료를
발췌∙요약하였으며 사진을 2회로 나누어 올린다.
謙齋 鄭敾美術館을 관람하다(2-1)
겸재정선미술관 사진
(01) 겸재정선미술관 전경
(02) 謙齋 鄭敾, 그림은 <讀書餘暇>이다.
(03) 江西區와 겸재정선미술관
謙齋가 65세(1740년)부터 5년간 陽川縣令으로 在職한 때와 경상도 河陽縣監 5년,
淸河縣監 2년 등 12년을 제외하면 겸재가 탄생하여 他界할 때까지 72년동안을
漢城府 順化坊 幽蘭洞(현재 종로구 淸雲洞)에서 살았는데 겸재와의 인연이 더 오랜
鍾路區를 제치고 江西區에서 미술관을 건립하였다.
(04) 전시관 안내-所藏遺物 안내
(05) 樂健亭. 비단에 淡彩,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中-
낙건정은 吏曹判書를 지낸 金東弼의 別墅 樂健亭을 그린 것으로
杏湖江(*高陽지역에서 漢江을 일컫는 말) 변에 있는
德陽山 끝자락의 절벽 위에 있던 亭子이다.
*淡彩: 색의 농도를 묽게 하여 엷게 塗彩하는 것. 軟彩라고도 한다.
*別墅: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농사짓는 별장)
(06) 歸來亭.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귀래정은 刑曹判書를 지낸 竹所 金光煜이 幸州 德陽山 기슭
杏湖江邊에 세운 정자로,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집을 고치고
그 정자에 <歸來亭>이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東晋시대 대표적인
隱居詩人 陶淵明의 <歸去來辭>에서 따온 이름이다. (*煜: 빛날 욱)
(07) 逍遙亭.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소요정은 加陽洞 塔山 남쪽 기슭에 있던 沈貞 소유의 정자로
高宗 28년(1891)에 편찬된 <陽川縣邑誌>에 이미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겸재가 英祖 18년(1742)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에도
정자의 모습은 없다.
沈貞은 中宗反正에 가담한 靖國功臣이었으나 己卯士禍로 平安道 江西로
流配 되었다가 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賜死되었다.
*辛卯三奸: 中宗 26년(1531) 辛卯年에 정권을 잡은 金安老에 의하여
奸臣으로 몰려 처형된 沈貞, 李沆, 金克愊 등 세 사람. (*愊: 답답할 핍)
(08) 二水亭.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이수정은 강서구 鹽倉洞 都堂山(현재 繒山) 上峰에 있던 정자로,
<陽川郡邑誌>의 기록에 鹽倉灘(현 安養川)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孝寧大君의 林亭이 있었으나 후에 韓興君 李德演과 竹泉 李德泂 兄弟가
늙어서 정자를 고쳐 짓고’二水亭’이라고 했다. (*泂: 멀 형)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과 音은 같으나 漢陰 李德馨은 廣州 李氏이고,
竹泉 李德泂은 韓山(지금의 충남 舒川) 李氏이다.
(09) 開花寺.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개화사는 현재 江西區 開花洞에 있는 開花山 藥師寺의 모습으로
그 때는 駐龍山 開花寺라고 했기 때문에 ‘개화사’라고
그림 제목을 삼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漢江과 幸州山城을 사이에 두고 멀리 漢江과 臨津江이 合流하는
湖海 風光을 볼 수 있으며, 漢陽을 둘러싸고 있는 仁王山, 北岳山,
南山, 冠岳山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한강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였다.
(10) 小岳樓.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소악루는 강서구 加陽洞 宮山 동쪽 기슭에 있던 누각으로 전라도
同福(현 和順)縣監을 지낸 笑窩 李楺가 英祖 13년(1737) 자신의 집
뒷동산 남쪽 기슭에 지었다. (*窩: 움 와 *楺: 나무 휠 유)
한강 폭이 넓어져 西湖 또는 洞庭湖로 불리던 드넓은 강물을 동쪽으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져 <小岳樓>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소악루는 ‘小岳陽樓(작은 악양루)의 준말로 본래 岳陽樓는 중국
湖南省 岳州 巴陵縣의 縣城 西門의 門樓로 洞庭湖를 굽어보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고 한다.
(11) 謙齋 鄭敾이 그린 江西의 옛모습, 孔巖層塔-錦城平沙(오른쪽)
(12) 孔岩層塔.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京郊名勝帖; 원본 澗松美術館 소장-
공암층탑은 구멍이 뚫린 바위라는 뜻의 孔岩을 그린 것으로 ‘공암’은 陽川의 옛 이름으로
‘허가바위’, ‘광주바위’라고도 불렀다.
(*孔巖바위와 허가바위는 현재 許浚博物館 뒤 龜岩公園에 있다.)
산중턱에 옛날 탑이 감추어져 있어 ‘層塔’을 표현하였고 지금도 이 산을 ‘塔山’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遠景을 淡墨으로 疏略하게 표현하여 近景의 孔岩과 塔山을 부각시키고 있다.
(13) 錦城平沙.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京郊名勝帖; 澗松美術館 소장-
금성평사는 陽川 쪽에서 바라본 지금의 蘭芝島 부근의 勝景을 근처에 있는 錦城山에서
이름을 따 畵題를 짓고 畵幅에 담은 것이다.
원래 난지도는 모래내와 弘智川, 佛光川이 합류하는 드넓은 低地帶로 漢江의 폭이
호수처럼 넓어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광활한 한강줄기를 中景에 두고 近景과 遠山의 대각선 構圖로 시원한 風光을 보여주고 있다.
(14) 楊花津.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中에서-
양화진은 蠶頭峰(현 切頭山) 일대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나루터의
모습보다는 西湖 잠두봉 부근의 경치를 묘사하였다.
近景의 나루터 모래톱을 따라 한가롭게 매여있는 나룻배 4척만
양화나루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으며, 잠두봉 절벽 아래 삿갓 쓴 사람이
悠悠自適 낚싯대를 강물에 드리우고 있어 그림의 風流를 더해주고 있다.
(15) 仙遊峯. 비단에 담채, 33.3cm x 24.7cm -陽川八景帖-
선유봉은 영등포구 楊花洞 楊花船着場 일대의 260년 전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신선이 놀던 산’이라는 뜻의 仙遊峯은 매혹적인 산으로
冠岳山과 淸溪山의 서쪽 물과 廣敎山, 修理山, 蘇萊山의 북쪽 물을
몰고 온 安養川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漢江에 합류하는 지점에
붓끝처럼 솟아난 산봉우리였다.
높이 약 40m의 선유봉은 1965넌 楊花大橋가 貫通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仙遊島公園이 들어섰다.
이 산자락 강변에는 서울로 가는 큰 나루와 안양천을 건너 陽川으로 가는
작은 나루가 있었으며 모두 ‘楊花나루’라고 불렀는데 이 곳의 지명이
당시에도 陽川縣 南面 楊花里였기 때문이다.
(16) 雪坪騎驢.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原本 澗松美術館 소장-
설평기려는 ‘눈 덮인 평야를 나귀를 타고 가다’라는 뜻이다. (*騎: 말 탈 기 *驢: 당나귀 려)
눈이 내린 어는 겨울날 새벽 縣衙가 있던 宮山 뒤편의 陽川平野를 뒤덮은 하얀 눈을 보면서
梅花를 찾아 떠난 唐나라 시인 孟浩然의 詩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나귀 탄 인물이 출발하는 곳은 지금 江西區 加陽洞 부근 陽川縣衙 입구이고, 넓은 벌판은
登村3洞이며, 멀리 보이는 두 봉우리는 禾谷洞에 있는 雨裝山이다.
*漢字成語: 雪中騎驢孟浩然(설중기려맹호연)
/唐나라 시인 猛浩然이 눈을 맞으며 말 타고 시를 읊은 일.
*孟浩然: 당나라의 시인으로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閑寂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詩 <春曉>가 유명하다.
春曉(춘효) / 봄날 새벽
春眠不覺曉(춘면불각효) / 봄 잠에 날 밝는 줄 몰랐는데
處處聞啼鳥(처처문제조) / 여기저기서 새 소리 들려오네. (*啼: 울 제)
夜來風雨聲(야래풍우성) /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으니
花落知多少(화락지다소) / 꽃잎은 얼마나 떨어졌을까?
(17) 宗海聽潮. 비단에 담채, 23cmx29.2cm –京郊名勝帖 原本 澗松美術館 소장-
종해청조는 ‘宗海軒에서 조수소리를 듣다’라는 뜻이며, 종해헌은 陽川縣衙에서
縣令이 집무를 보던 東軒의 이름으로, 관아가 들어서 있는 宮山의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視角으로 宗海軒을 비롯한 부근의 風光을 담았다.
西海의 한강이 흘러 드는 곳은 潮水干滿의 차가 큰 지역으로, 난간에 기댄 채 樓 마루에
앉아 潮水가 밀려드는 소리를 듣는 선비는 아마도 鄭敾 자신일 것이다.
(18) 안현석봉.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京郊名勝帖, 澗松美術館 소장-
鞍峴夕烽(안현의 저녁 봉화 불)은 해질녘 양천현아가 있는 궁산에서 江 건너 鞍峴의
봉화불을 바라본 情景을 그린 것이다.
鞍峴은 현재 梨花女大 뒷산으로 ‘길마재’, ‘鞍山’, ‘母岳山’이라고도 한다.
遠景에는 정상에 붉은 점으로 봉화불을 표현한 鞍峴이 臥牛山, 정토산과 이어져 펼쳐지고
近景의 좌우에는 궁산 자락의 울창한 樹木 사이에 자리잡은 小岳樓와 塔山과 孔岩을
각각 배치하였다.
(19) 목멱조돈.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京郊名勝帖, 澗松美術館 소장-
木覓朝暾(목멱산에 아침 해가 떠오르다)은 목멱산(남산)에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양천현아에서 목멱산은 한강 건너 동쪽으로 보인다.
鄭敾은 새벽마다 寢所에서 나와 목멱산 뒤에서 올라오는 해를 바라보며
畵幅에 담고 싶어 했을 것이며, 동틀 무렵 태양이 중앙의 남산중턱에 절반쯤 걸려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는 만리재, 애오개, 老姑山, 臥牛山 등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南山의 정상부분은 濃墨의 美點을 강하게 찍어 표현하였다.
(20) 소악후월.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京郊名勝帖, 澗松美術館 소장-
小岳候月(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은 宮山의 小岳樓에서 달 뜬 情景을 그린 것으로
소악루는 同福縣監을 지낸 笑窩 李楺가 중국의 岳陽樓를 모방해 1737년에 지은 누각으로
궁산 동쪽기슭에 있었다. (*窩: 움 와 *楺: 나무 휠 유)
화면 왼쪽 下端에는 소나무와 雜木으로 파묻힌 소악루가 있고 그 너머에는 李楺의 집
본채로 보이는 기와집들이 있다.
화면 우측 변에는 塔山, 斗尾岩, 仙遊峯을 차례로 배치하고, 遠景에는 木覓山을 위시하여
금성산과 臥牛山이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아래는 육중한 바위절벽인
蠶頭峰(切頭山)이 있다.
(21) 행호관어. 비단에 담채, 23cm x 29.2cm –京郊名勝帖, 澗松美術館 소장-
杏湖觀漁(행호에서 고기잡이를 보다)는 행호에서 고기잡이하는 情景을 그린 것으로,
杏湖는 현재 高陽市 德陽區 德陽山 부근의 漢江으로 호수처럼 넓다고 ‘杏湖’라고 불렀다.
中景의 산자락은 한강변의 빼어난 風光을 자랑하는 勝景地로 당시 高官들의 別墅가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맨 왼쪽 벼랑 위 수풀에 숨겨진 기와집 두어 채는 英祖 때 漢城府判尹을 지낸
樂健亭 金東弼의 別墅인 樂健亭, 가운데는 영조 때 左議政인 藏密軒 宋寅明의 藏密軒,
맨 오른쪽 기와집들은 金時佐의 歸來亭이다.
(22) <讀書餘暇> 모형
독서여가는 鄭敾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툇마루에 나와 앉아
화분에 핀 모란을 감상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여 정선의 讀書癖을 알 수 있다.
(23) 謙齋 鄭敾
(24) 겸재 정선의 眞景山水畵
(25) 江西區와 겸재 정선의 깊은 인연
(26) 한국화 화가들이 작품에 남긴 落款과 題跋 (*款: 항목 관 *跋: 밟을 발)
(27) 한국화를 그릴 때 필요한 것
(28) 겸재 정선의 洗劍亭, 이 그림 옆에는 현재의 사진 모습을 걸어놓아 비교할 수 있게 하였다.
세검정은 紫霞門 밖, 종로구 新營洞에 있는 정자로 조선시대 詩人墨客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세검정의 秀麗한 川石을 부채에 가득 담은 그림으로 지금은 이 그림과 같은 全景은 볼 수
없으나 당시 蕩春臺 주변의 돌이 많은 골짜기를 흐르는 石澗水와 정자 洗劍亭은 아직도
남아있다.
(29) 겸재 정선의 <廣津>
경기도 廣州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광나루와 峨嵯山을 근접 포착한 것으로 지금은
워커 힐 호텔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아차산 廣壯洞 일대를 그린 것이다.
아차산은 지금도 千戶洞 쪽에서 바라보면 層이 진 모습을 볼 수 있다.
(30) 겸재 정선의 <松坡津>
한강 북쪽에서 바라본 松坡津 일대를 그린 것으로 멀리 淸凉山(南漢山)의 능선을 따라
축성된 南漢山城이 보인다.
송파진은 지금 松坡大路가 石村湖水를 가로 지른 후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로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에 있어 경기도 廣州와 漢陽을 왕래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나루였다.
(31) 겸재 정선의 <東門祖道>, 오른쪽 사진은 현재의 東大門(興仁之門)
東大門 일대를 그린 것으로 화면의 前景에 동대문이 뚜렷하게 보이고 그 왼쪽에
落山줄기가, 오른쪽에는 南山줄기가 이어지다가 淸溪川으로 끊어지면서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며 화면의 중심에 東關王廟가 부각되고 있다.
*서울 東關王廟(보물 제142호): 중국의 關羽를 奉祀한 廟祠
(32) 겸재 정선의 <狎鷗亭>
압구정에서 보이는 동호의 경치를 그린 것으로 東湖는 지금의 城東區 玉水洞 앞의 한강을
일컫는다.
近景의 언덕에 狎鷗亭을 두고 中景에는 압구정과 마주하고 있는 모래 섬인 楮子島가 있으며,
멀리 물길을 따라가서 만날 수 있는 곳은 立石浦로, 中浪川이 漢江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楮: 닥나무 저)
遠景에는 漢陽의 북∙동부를 감싸고 있는 三角山, 道峰山, 水落山 등이 펼쳐져 있다.
*狎鷗亭: 世祖 때의 權臣인 上黨府院君 韓明澮의 별장에 있던 亭子
*楮子島: 옛날에 닥나무가 많이 있어 ‘저자도’라고 했으며, 三成洞 동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으로, 1970년대에 압구정동 일대에 고층아파트를 건축하면서 이 섬의
흙을 파다 써서 섬은 사라지고 말았다.
*立石浦: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鷹峰洞 한강변에 있던 조선시대의 나루
(33) <鄭敾筆 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三星美術館 리움 소장)-
謙齋 鄭敾이 英祖 27년(1751) 비 온 뒤의 仁王山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가로 138.2㎝,
세로 79.2㎝이다. (*霽: 비 갤 제)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三淸洞∙淸雲洞∙宮井洞 쪽에서 바라본,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의
인상을 그린 것으로, 日氣變化에 대한 感覺表出과 實景의 인상적인 순간포착에 그의
天才性이 충분히 발휘된, 그의 나이 75세에 그린 그림으로 眞景山水作品 가운데서도 같은
시기에 함께 국보로 지정된 <金剛全圖(국보 제217호)>와 함께 겸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를 잘 표현하였으며
겸재의 400여점에 이르는 遺作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34) <仁谷幽居圖>. 종이에 담채, 27.4cm x 27.4cm. –원본; 간송미술관소장-
겸재가 인왕산 아래 자신의 집 풍경을 그린 仁谷幽居圖는 조용하고 韻致 있는
삶의 분위기를 아주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려낸 그림이다.
그림의 제목인 ‘仁谷幽居’는 謙齋가 살던 현재 종로구 玉仁洞에 있던 집의 이름으로,
52세부터 84세로 他界할 때까지 살았던 자신의 집 이름을 ‘仁谷幽居’ 또는 ‘仁谷精舍’라고
불렀는데 ‘유거’는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란 의미이고,
‘정사’는 心身을 연마하며 학문을 傳受하는 집이란 뜻이다.
(35) 朴淵瀑. 종이에 수묵, 119cm x52cm
조선 중기의 名妓 黃眞伊와 花潭 徐敬德과 함께 松都三絶의 하나인
朴淵瀑布의 웅장한 모습을 단순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構圖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瀑布水는 화면을 압도하고 있는 암벽 사이를 수직으로 가르며 한 갈래로
쏟아져 내리고 이를 좌우에서 옹립하듯 감싸고 있는 거대한 암벽의
威壓的인 존재는 눈 여겨 볼만한 하다.
폭포 아래쪽에는 정자와 선비가, 폭포 위 절벽 위에는 城門이 그려져 있어,
화면의 上下 모두 역동성이 느껴지며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단순한
사실성을 뛰어넘는 겸재의 藝術性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謙齋의 眞景山水는 實景을 바로 寫生하지 않고 繪畵的으로
재해석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金剛全圖> <仁王霽色圖>와 함께 겸재의 3대 名作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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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글
올리시느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미술관 잘 둘러 보았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 하세요.
미술관 구경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이글은 이방보다
갤러리방에 올려 주셨으면
더 좋았을것을요~^^
,,
구천동도사님
안녕하세요
,
잘 보았습니다
,
,
삶의 향기실은
살아가는 이야기
자신의 자작글을
올리는 방입니다
,
다음에는
그리해 주셨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