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번째 편지 - [학술]은 어떤 영어 단어를 번역한 것일까요?
저는 개념어의 어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Happiness를 누가 '행복'이라고 번역했을까?', 'Philosophy를 왜 '철학'이라고 번역했을까?'라는 질문에 관심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를 상당 부분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 번역되어 기쁜 마음으로 탐독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이고 부제는 "서양 학술용어 번역과 근대어의 탄생"입니다.
나는 별 관심이 없는데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으시면 '아하'하고 깨닫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 믿고 읽어 주세요.
「哲学」(철학), 「藝術」(예술), 「理性」(이성), 「科學」(과학), 「技術」(기술), 「心理学」(심리학), 「意識」(의식), 「知識」(지식), 「概念」(개념), 「帰納」(귀납), 「演繹」(연역), 「定義」(정의), 「命題」(명제), 「分解」(분해) 등은 누군가가 번역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에서 현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위 단어들을 영어에서 한자어로 번역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믿어지십니까? 그 사람은 이들 단어 이외에도 수많은 영어 단어를 한자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바로 < 니시 아마네(西周,1829-1897, 일본)>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니시 아마네>가 1870년경 쓴 <백학연환>이라는 책을 해설한 책입니다. <니시 아마네>가 누구인지 <백학연환>이 어떤 책인지를 소개하는 것은 건너뛰고 바로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책은 <학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술>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학술>은 영어 단어 무엇을 번역한 것일까요?
니시 아마네는 " 학술 學術 두 자를 영어에서는 Science와 Arts로 말한다."라고 설명합니다. Science의 한자 번역어는 '학 學'이고, Arts의 한자 번역어는 '술 術'이라는 것입니다.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Science를 찾으면 '과학'이라고 번역되고, Arts를 찾으면 '미술'이라고 번역됩니다.
1870년대 일본에서는 Science와 Arts를 '학술'이라고 번역하였는데 2023년 한국에서는 Science와 Arts를 '과학과 미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면 유명한 영어사전인 웹스터 영어사전에서는 두 단어를 어떻게 해설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Science에 대해서는 두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a : knowledge or a system of knowledge covering general truths or the operation of general laws especially as obtained and tested through scientific method (특히 과학적 방법을 통해 획득하고 검증한 일반 진리 또는 일반 법칙의 적용을 다루는 지식 또는 지식 체계)
b : such knowledge or such a system of knowledge concerned with the physical world and its phenomena : NATURAL SCIENCE (물리적 세계와 그 현상에 관련된 지식 또는 지식체계 : 자연과학)첫 번째가 니시 아마네가 이야기한 <학>에 해당하는 설명이고 두 번째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과학>에 대한 설명입니다.
Arts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1 : skill acquired by experience, study, or observation (경험, 학습, 관찰을 통해 습득한 기술)
4 a : FINE ARTS (미술)
첫 번째 설명은 니시 아마네가 이야기한 <술>에 해당하는 것 같고, 나중에 나오는 설명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미술>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니시 아마네는 Science와 Arts의 의미를 웹스터 사전에 나오는 가장 첫 번째 설명을 따른 것 같고, 우리는 웹스터 사전의 단어 설명 중 부차적인 설명을 따른 것 같습니다.
다시 니시 아마네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학(Science)과 술(Arts)을 구별하기 위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한 사람이 다리에 총을 맞았다고 해보자.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하는데, 그 의사가 인체의 근육과 뼈, 피부와 살, 오장육부의 구조를 잘 아는 것은 학(Science)에 해당하고, 그 지식을 이용하여 총탄을 어떻게 빼낼까를 궁리하여 치료를 하는 것은 술(Arts)이다"
이에 따라 설명하면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병리적 지식은 의학(Medical Science)이고, 그 지식에 기초해 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의술(Medical Art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학과 의술의 개념 구분에 따라 다른 분야도 '학'과 '술'로 대입해 살펴보겠습니다. 상학과 상술, 법학과 법술, 공학과 공술, 미학과 미술 등으로 대입할 수 있습니다. 이중 '상술'과 '미술'이 눈에 띕니다. '상술'은 '장사하는 기술', '미술'은 '그림 그리는 기술'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법술'과 '공술'은 왠지 어색합니다.
위 책의 해설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Science와 Arts는 모두 진리의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Science에서는 지식을 위해 탐구하지만 Arts에서는 제작을 위해 탐구한다. Science는 더 상위의 진리에 관련된 것이고, Arts는 상대적으로 하위의 진리에 관련된 것이다."
이렇게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 '학'이란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고, '술'이란 대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제 대강 Science(학)과 Arts(술)이 어떻게 다른지, 그래서 진리 탐구 전반을 왜 '학술'이라고 번역하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는 Science와 Arts를 함께 쓰는 사례가 많습니다.
University of Science and Arts of Oklahoma,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The College of Arts & Sciences, Bachelor of Arts and Sciences, European Academy of Sciences and Arts, Journal Of Science and Arts 등이 그런 용례입니다.
이를 니시 아마네는 <학술>로 번역하였지만 저는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관념에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어떻게 쓰고 있을까요.
학술원이 있습니다. 영문으로 어떻게 표기할까요.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라고 홈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학술>을 <Sciences>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Arts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학술원과 같은 비중을 갖는 예술원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술원의 영문 표기는 "The National Academy of Arts, Republic of Korea"입니다. <예술>을 <Arts>로 번역하였습니다.
니시 아마네가 Science and Arts의 번역어로 제시한 <학술>이 2023년 한국에서는 <학술과 예술>로 바뀌어 있습니다. 저는 이 분야 전공자가 아니라 이 변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Arts가 예술로만 번역되는 것은 웹스터 사전의 첫 번째 의미와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왜 학문을 Science와 Arts로 나눈 것일까요. 또 누가 그렇게 나누었을까요.
"목수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을 하기 때문에 직각(90도)을 구하지만, 기하학자는 진리를 알기 위해 직각(90도)을 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목수가 직각을 구하는 행위는 Arts이고 기하학자가 직각을 구하는 행위는 Science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술>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이처럼 복잡한 연원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개념어 번역 과정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3.11.13. 조근호 드림
<월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