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금사익은 의원 앞을 지키며 밤을 꼬박 새웠다.
어제만 해도 까짓 흑마방의 졸개들 찾을 테면 찾아보라는 배짱이었다.
가슴속에 쌓인 울화 때문에 답답하던 차에 한 바탕 치열한 싸움을 치른 후라
그런지 호기가 솟은 것이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치한 판단이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앞 뒤 안 가리고 흑마방의 졸개들을 베어 넘긴 거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
는 명분이 있었다.
하나 행여 환자를 찾아 의원을 뒤지는 놈들과 마주쳐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기
라도 하면 의외로 사태가 복잡해질 거라는 생각에 어제의 호기는 걱정과 반성
으로 되돌아왔다.
폐관수련을 가장하고 신부를 보호하겠다고 떠나온 것도 문제가 될 판인데 흑
마방과의 마찰을 피하려 애쓰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으니 아무래도 잘한 일
이 아니었다.
'내상도 아니오,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으니 조용한 곳으로 피해
상처를 치료해도 충분했을 것을…….'
집을 떠날 때 챙긴 금창약(金瘡藥)을 만지작거리며 후회해도 때는 늦은 것.
금사익은 그나마 의원의 위치가 높아 주변을 살피기 좋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
으며 어서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에헴!"
그 때, 염소 수염을 쓰다듬으며 방문을 나선 의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달려들어간 금사익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어떻소? 정신을 차렸소?"
어젯저녁 피투성이가 된 환자를 들쳐업고 나타난 금사익의 서슬에 놀라 허둥
거리던 의원은 한결 의젓해진 태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깨의 상처가 깊을 뿐 자상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 의식이 돌아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겁니다."
"치료비는 걱정 말고 약재를 아끼지 마시오."
살기가 풀풀 풍기는 무림인의 비위를 건드려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밤을
새워 환자를 보살핀 의원은 금사익의 말에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열 일곱 가지 귀한 약재가 들어가는 신조보혈탕(神造補血湯)을 다
리려고 하니 시간이 문제일 뿐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밝은 얼굴로 약탕관을 들고 걸음을 옮기던 의원이 문득 금사익을 돌아보았다.
"저기……. 환자가 소협의 친구 분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소! 나와는 생사를 함께 한 친구요."
금사익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한데, 의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친구 분이시라……! 하긴 친구라는 게 마음이 맞으면 그만이지 이것저것 따
지는 게 아니겠지요. 제가 뭐 의술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자상을 다루
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고…… 여하튼 최대한 상처가 남지 않도록 치료
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어깨에는 조금 흔적이 남겠지만 그래도 어깨야 뭐……
또, 그리 중요한 부분도 아닌데다가…… 다른 사이도 아니고 친구분이라시니
그 또한 문제될 게 없으며, 무림의 호걸들과 의원의 공통점을 들라면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그게 보통사람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대는 의원의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알아들은 금사익이 의원의 말을 잘랐다 .
"내 친구를 위해 그토록 애썼다니 고맙소이다. 충분할지는 모르나 우선 치료
비로 받아 두시오."
은자를 건넨 금사익이 휭하니 돌아서자 의원은 금사익의 친구를 위한 탕약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묵직한 은자의 감촉이 이리도 황홀한데 까짓 누가 어떤 친구를 사귀든 상관할
바 아닌 것이다.
금사익이 고갯길을 올라오는 노인을 발견한 것은 마당 가득 약향이 퍼지기 시
작할 때였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피다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금사익을 발견했는지 잠시
멈칫하던 노인은 이내 문 앞에 다다랐다.
"여기가 의원 댁이 맞는가?"
"맞게 찾으셨습니다."
온후해 보이는 노인에게서 별다른 기세를 읽지 못한 금사익이 공손히 대답했
다.
"여기 자상이 심한 환자가 있을 텐데……."
순간, 금사익의 안색이 돌변하며 말투마저 냉랭해졌다.
"노인장은 뉘신 데 그 사람을 찾으시는지?"
"나? 나는 집나간 손자를 찾으러 다니는 늙은일세."
금사익을 발견했을 때부터 문제의 두 청년중 하나이리라 확신한 봉래신장은
빙그레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좀 오만해 보이기는 하나 준수한 용모에 맑은 정기를 피워 올리는 청년이 마
음에 든 것이다. 게다가 집안의 환자가 설운교가 아니더라도 흑마방의 무리와
맞서 싸운 사람이면 최소한 악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노인의 생각을 알리 없는 금사익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내 친구에게 할아버지 얘기는 듣지 못했소이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기절한 설운교에게 무슨 얘기인들 들었으랴마는 아무래도
두 사람이 조손 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는 노인에 비해
방안에 누워있는 자는 자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무공을 지니지 않았는가.
자신의 경우를 비추어봐도 두 사람이 조손 간이라는 것은 어울리지도 믿어지
지도 않았다.
"혹, 사람을 잘못 보고 찾아오신 건 아니신 지……?"
"우리 손자 놈과 비슷한 사람이 어제 저자거리에서 큰 싸움을 벌이다 크게 다
쳤다는 얘길 듣고 여기까지 찾아 온 걸세. 흑마방인가 하는 놈들과 함께 싸웠
다는 사람이 자네인 것 같은데."
금사익은 혼란스러웠다.
노인이 흑마방에 호의가 없으며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까닭이다.
"하오시면 어르신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요?"
젊은이에게 있어 순진함은 흠이 아니었다.
다시 공손해진 말투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눈초리가 봉래신장을 웃음 짓
게 했다.
"허허허, 이 늙은이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정체는 불확실해도 최소한 흑마방의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금사익은 당당
히 신분을 밝혔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의 신분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소생은 북경에서 온 금사익이라 합니다."
"누구라고……?"
평생 살아오면서 그리 놀란 기억이 없는 봉래신장이지만 지금이 흔치 않은 그
순간이었다.
설운경과 혼약한 무적세가의 소가주가, 지금쯤 무적세가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금사익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청년이라니…….
작지 않은 충격을 빠르게 진정시킨 봉래신장이 금사익을 똑바로 응시했다. 방
안의 환자가 설운교인지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귀한 집 자제셨구먼."
형형한 안광을 발하는 노인의 기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았다.
"자네 친구가 내 손자인지 확인하고 싶네 만……."
노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금사익은 노인의 신분을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순순히 노인을 안내했다.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을 발하는 노인의 기도에 위축되기도 했고 이 마당에 거
절할 명분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정도의 기도를 풍기는 노인이라면 방안에
누워있는 인물의 할아버지에 걸맞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약탕기를 얹은 화로에 부채질을 하다말고 의혹의 시선을 던지는 의원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무명이 깔린 침상에 목까지 이불을 덮은 채 드러누워 창백한 얼굴로 가
는 숨결을 토하는 사람.
설운교였다.
"……?"
침묵으로 질문을 던지는 금사익을 향해 봉래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 손잘세"
다행히 설운교의 상세가 위중한 상태가 아닌 것을 확인한 봉래신장의 눈길이
침상아래에서 멈췄다.
피에 젖어 뭉쳐진 헝겊조각들.
아마도 의원이 치료 차 잘라낸 설운교의 옷가지로 보였다.
이불이 얇은 탓인지 가슴께가 봉긋하게 솟은 것을 의식한 봉래신장이 질문을
던져 금사익의 눈길을 잡았다.
"내 손자도 자네가 누군지 아는가?"
금사익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사실은 아직 통성명도 못한 처지입니다. 어제 우연히 손자 분께서 흑마방의
악적들과 혈전을 치르는 것을 목격하고 싸움을 거들었으나 놈들을 물리치자마
자 손자 분이 바로 혼절하는 통에……."
순간, 봉래신장은 한시바삐 설운교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설운교도 금사익의 정체를 몰랐고, 금사익도 설운교가 누군지를 몰랐다. 심지
어 여자라는 사실조차…….
어떤 이유에서든 설운교가 금사익과 함께 있으면 곤란했다.
무적세가에 대한 적대심이 가득한 설운교가 금사익의 정체를 알게되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랐다.
또한, 젊은 사람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자신할 수도 없었
다.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운교와 금사익 사이에 연정(戀情)이 싹트기
라도 한다면 그 일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했다.
이래저래 설운교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금사익과 떼어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후일, 원만히 혼사가 치러지고 두 집안간의 갈등이 사라지는 날이 오면 웃으
면서 지금의 일을 얘기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굳힌 봉래신장이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설운경의 맥을 살
폈다.
설운경에게 깊은 '우정'을 느끼는 탓인지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의심이 남아있
는 금사익을 따돌리려면 핑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허어, 기어이 일이 벌어졌구먼……."
"무슨 일입니까?"
봉래신장은 혀를 찼다.
"쯔쯧. 이 아이는 천성적으로 고질병을 앓고 있다네. 평소에는 지장이 없네
만 공력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피를 많이 흘리면 잠복해있던 병의 기운이 강
해져 생명이 위험해지지."
반신반의하는 금사익의 눈치를 읽은 봉래신장이 설운교의 몸통이 드러나지 않
도록 살며시 이불을 들췄다.
"심장에 뭉친 탁기(濁氣)가 번지기 시작하면 팔꿈치 위에서부터 증상이 나타
나기 시작하는데…… 어디 보세."
봉래신장이 오른팔을 꺼내 뒤집자 과연 겨드랑이와 팔꿈치 사이에 피가 뭉친
듯 시퍼런 멍울이 보였다.
어렸을 적 바닷가에서 놀다가 해파리의 독에 쏘인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활달하기가 남자 뺨치는 설운교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상처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남다른 친구(?)의 눈앞에.
"그런 병을 앓고 있을 줄이야……."
금사익은 노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더 이상 지체하면 생명이 위험하네. 약이 집에 있으니 당장 이 아이를 데려
가야겠네."
봉래신장은 설운교를 이불에 돌돌 말아 어깨에 들쳐 멨다.
덩달아 황망히 문을 열고 따라나서던 금사익은 문득, 이들 조손(祖孫)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한데, 제가 아직 어르신의 존함도 모르니……."
어느새 마당을 벗어난 봉래신장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멀리 남쪽 바닷가 작은 마을에 사는 늙은일세. 그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니
말해도 모를 걸세.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
바람처럼 달려가는 노인의 경공만 따진다면 자신의 아버지 금천후조차 따르지
못할 것 같았다.
벌써 가물가물 멀어진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기 드문 이인(異人)과 사
귈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죄 없는 의원에게 엉뚱한 화풀이로 돌아갔다.
"위중한 고질병이 있는지도 모르고 생사람을 잡을 뻔했으니 당신이 무슨 의원
이란 말이오!"
정성껏 약을 다리다가 날벼락을 맞은 의원이 혼자서 궁시렁거렸다.
그러나 이미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가는 금사익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리 없
었다.
"병의 가짓수가 얼마인데 그걸 다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꽃같이
아름다운 계집을 기껏 친구로 삼은 한심한 인간이 뭐 잘난 게 있다고 큰 소리
를 치는 게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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