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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11일 포로수용소로 고안된 오그덴 방위 수용소는 미국에 최초로 건설된 10개의 포로수용소중의 하나였다. 약 5,000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들이 보냈졌으며, 이와 더불어 약 4,000명의 독일군 포로들도 함께 수용되었다. 포로들은 이 지역의 작업장, 농장, 그리고 과수원등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후에 이들에게는 시내로의 외출을 허용하는 등 독일군포로에 비해 더 많은 자유가 부여가 되었다. 이 수용소는 10,000명의 이르는 포로들이 귀국한 직후 인 1946년 여름에 폐쇄되었다.
이 전시물들은 스튜어트 특별 컬렉션의 오그덴 포로수용소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진들은 이탈리아와 독일군 포로들과 연관되었던 사람들의 구술증언을 인용하였다.
수 용 소 Compound
성 요셉 진료소
성 요셉 진료소에서 매주 열리는 목요일 밤의 댄스파티에서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오느냐 하는 것이었죠. 초기엔 25명정도 밖에 오지 않았거든요. 남자들은 백명이나 되는데 말이죠. 어쨌든 이탈리안 포로 오케스트라는 매주 목요일 그들에게 흥겨운 댄스음악을 선사했지요. 지금은 파트너를 충분히 채울만큼 온답니다.
- 군목 Raphael Monteleone 중위, 1945년 1월 9일 -
극 장
오그덴의 포로 수용소에는 4개의 극장이 있었다.....미군영화공급단에서 배급한 영화들이 이들 극장에서 상영되었으며 이탈리어로 번역된 자막이 제공되었다. 이탈리아군 포로 연기자들은 가벼운 희극을 공연하거나 다채로운 공연을 개최하였다.
- 오그덴 포로수용소의 역사에서-
포 로 수 용 소
포로 수용소가 거기에 있었을때 전 택시 운전수였습니다. 그 택시들은 단지 수용소를 위한 택시였죠. 가끔 미군장교들이 수용소를 떠날 일이 있으면 저는 허가를 받고 오그덴이나 그들이 가고자 하는 어느 곳이든지 택시를 몰았습니다. 그럴일이 없으면 전 수용소에 머물렀지요....제 택시는 2개의 뒷좌석을 가진 충분히 큰 것이었고 그래서 전 한번에 6~7명의 포로들을 태울수 있었죠.
- Bergetta Grant -
내 무 반
저희가 집에 갈때면 당시 DDO라고 알려진 곳을 지나가야만 했죠. 포로들은 북서쪽 모퉁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길은 저희가 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모퉁이였죠. 포로들은 적군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제가 그들을 보았던 유일한 시간동안 포로들은 육군 작업복과 같은 푸른 작업복을 입고 있었어요. 그들의 등에는 하얀색의 POW라는 글자가 가로새겨져 있었고요. 이탈리아인들은 지역을 청소하거나 작업을 하였지요. 포로들은 항상 행복해보였고 종종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지요. 우리가 지나가면 그들은 멈춰서 지켜보곤 하였고 결코 소리를 질러대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저 우리가 지나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지요. 가끔 당신이 지나갈 때, 아마 그들이 행진을 하거나 체조를 한다거나 그 무언가를 보게 될겁니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어요.
- Lois Polson -
틴 토 리 아
충분한 푸른색 데님 자켓과 바지가 보급되었지만 푸른색 셔츠는 예외였다. 폐품처리장에서 수거한 2개의 드럼으로 1942년 5월 14일 첫번째 염색 설비가 세워졌다. 이 염색대는 13명의 이탈리아 포로병사와 1명의 하사관포로로 이루어졌으며 정열적인 Walsh 중사의 지휘아래 10개월 뒤에는 매우 놀랍고도 성공적으로 "Tintoria"를 구현해 내었다.
- 수용소의 역사 중에서 -
작 업 W o r k
과수원에서 일하기
그들은 좋은 일꾼 들이었습니다. 포로들은 자신들의 할당량이 채워지면 하루에 50bushel의 사과를 가져갈 수 있었죠. 그건 그들과 경비병들의 몫이었습니다. 할당량을 초과하게 되면 수확물을 가게에 가져다 팔수도 있었고 원하는 것들을 구입할 수 있었죠. 좋은 일꾼들이었죠. 우리농장의 토마토를 수확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한 저희 농장에서 수확할 땐 최소한 20명 정도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들은 경비병 한명의 인솔로 왔는데 그 경비병이 총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Dean & Glade Gillman -
창 고 작 업
처음부터 이탈리아 포로들과 같이 일을 한건 아니었지만 포로들이 일을 시작하자 적응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작업반은 5-6명의 그룹들로 구성되었고 이탈리아 포로 부사관들의 지휘를 받았죠. 부사관은 총을 내려놓고 앉아있는 경비병에게 가끔 영어로 뭐라 하고 했죠.
- Eleanor Painter -
칠 면 조 농 장
우리는 한창 바쁠때 인력난를 겪고있었는데 아버지가 수용소에 독일군 포로들이 잔뜩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의 할일은 깃털 전부를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아마 당신 같으면 큰 깃털몇 개를 뽑는게 다였겠죠. 우리 일이 끝난후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포로들은 정말 성실했고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을 데려와 우리를 도울수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기뻤습니다.
- Charles McFarland -
농장에서 일하는 포로들
나중에서야 우리는 돌아왔고 포로들의 오른편에서 일하였습니다..... 제 기억엔 우리가 먼저 도착한 뒤 포로들로 가득찬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들 중 5-6명이 내려서 음식과 자재, 음료수와 커피들을 내렸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버스 뒤에 짚엔 G.I들이 타고 있었는데 한명이 내렸서 포로들을 지휘했고 포로들은 저희가 하던 일들을 했죠.
- Jack Mecham -
지게차를 운전하는 포로
의문중의 하나는 제가 1년동안 말하여왔던 것을 이들이 과연 알아듣는지 였습니다. 야적장엔 저와 제 친구 한명이 독일군 포로들과 같이 일하였습니다. 대개의 경우 지게차 운전 경험이 있는 독일군 포로들이 있었죠. 그들 중 일부는 매우 능숙하기도지만 우리랑 일하면서 인내력 또한 강하다는 것을 입증했죠. 우리는 그저 15-16먹은 철부지 였으니까요. 제가 운전수에게 독일어로 처음 말했을때 독일군 포로들이 매우 웃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제가 천장위에 팔레트를 올려놔라고 말했거든요. 매우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 Bud Eliiot -
바 느 질 반
"바느질 반(The Sewing Circle)"이라고도 불리는 포로양복점은 또 다른 혁신이었다. 포로들의 재봉능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조직되고 설립되었다.....이 포로들은......버려지던 수많은 의류들이 수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양복점은 매우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포로들은 개인 의류와 수용복을 개인시간을 이용하여 수선할 수 있었다.
- 수용소의 역사 중에서 -
포 로 신 발 수 선 소
1943년 4월부터 7월까지 일곱명의 수선공이 약 1,200개의 신발을 수작업으로 수선했다. 이탈리아 수선공들이 현대화된 기계작업을 하도록 훈련받자 그들은 한달에 3,000켤레의 신발을 수선했다.
- 포로 수용소의 역사 중에서-
수 용 소 경 비 G u a r d s
경 비 대
우리는 육군에 배속된 부대로서 그저 수용소 주위를 어슬렁거리기만 했습니다. 경비탑에 들어가거나 담장 경비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일하는 때였죠. 농땡이 피다 걸리면 헌병대가 우리들은 잡아서 마샬 헌병감에게 인계하기도 했는데, 그는 우리들은 영창에 보내버리겠다고 호통을 쳤죠. 그 뒤엔 우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Gary Larsson-
경 비 견
경비견들은 밤에 창고주변을 순찰하는 여성경비대원들과 수용소를 경비하는 병사들이 이용했다. 유타 수용소는 여성경비대원과 1마리의 경비견은 남성대원 2명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경비견은 1945년부터 도입되었다.
- 허브 수용소 25주년 기념판 -
경 비 초 소
그들은 1946년 떠났죠. 저는 8월 4일 떠났면서 입구를 잠갔습니다. 그 곳을 뒤로 하고 저는 떠났습니다.그는 포로들이 모두 송환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었다.
- Gene and Allie Lawler -
수용소 파티 P a r t i e s
제 빵 사 들
이 포로들은 요리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죠. 그들은 매우 큰 저녁파티를 열었고 이 곳 Ogden의 아주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죠. 심지어 시장까지도 말이죠. 우리는 그들과 즐겁게 어울렸죠.
- Robert Busico -
파티 관람객들
저는 수용소를 나갔습니다. 물론 그는 따라오지 않았죠. 제가 경비초소를 지날때 그들이 저에게 당신이 보고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더군요. 그들은 그를 불렀고 그는 저를 모두가 모여있는 강당으로 다시 데리고 갔지요. 그러자 모두가 저희를 둘러싸버려서 우리는 거기에 앉을 수 밖에 없었지요. 뒤에서 누군가 묻더군요. "이봐 Giusep, 어떤 여자야?" 그는 말했죠. " 내 마누라가 될 여자야!" 그게 바로 우리의 시작이었어요.
- Cleone Battisti-
밴 드
그들은 매우 재능있는 이탈리아인들이었고 노래하던 대부분의 이탈리아 포로들과 특히 제가 눈여겼던 한명을 기억합니다... 저 프로그램에서 그들은 무대를 가질수 있었고 몇몇은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죠. 그중에서 저는 기막히게 노랠 잘해서 절 깜짝 놀라게 했던 포로를 기억합니다.
- Madelon Besso Fallows-
일 상 Compound's Life
주 방
이탈리안인들이 미국에 왔을때 그들은 그들의 필요한 것은 다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고 싶어하는 모든 복장, 먹고싶어하는 모든 음식....물론 그들의 식당을 위해 농사를 짓기도 했고요. 이탈리안인들은 자신들의 먹거리를 요리했고 빵을 구었어요.....또 그들의 오케스트라도 있었죠. 수용소내서 원하는 모든 것을 농사지을 수 있었어요.
- Beth Giordano -
타 자 교 실
타자 교실은 전에 사무 경험이 있거나 영어를 알고 있는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성공적이었다. 교육훈련부의 Spendlove부인이 지도하였고 하루에 4시간씩 6주의 교육과정이었다.
- 포로 수용소의 역사 중에서 -
예 술 전 시 회
우리는 포로들로부터 어떤 종류의 것이던지 아주 좋은 것들을 구할수 있었어요. 선물로 주기도 했구요. 진은 포로들이 온실에서 꽃을 키울때면 아름다운 꽃들을 집으로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포로들 중에는 목수, 예술가도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실력발휘를 할 수 있었죠. 저는 포로들이 절 위해 만든 몇몇 회화작품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답례로 담배 한보루씩을 주었고요. 그리고 저희는 포로들이 만든 커피 테이블과 작은 6각형의 테이블도 가지도 있습니다.
- Gene & Allie Lawler -
포 로 농 장
포로들은 저쪽에 커다란 농장에서 모든지 경작했습니다. 제 생각엔 이것이 포로들에겐 딱 맞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은 관개수로의 담밑에서 미끄러지기도 했고 저희 부모님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죠. 아버님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요. 사실 포로들은 저녁까지 있다 서둘러 가고 하였죠. 길의 맞은 편으로, 담 밑으로, 수로를 따라 그들은 그렇게 가곤 하였습니다.
-Gary Larson -
시 계
금속 조각들로 그들은 많은 쓸만한 것들을 만들었다. 한 포로는 튼튼한 나무의자의 부속과 활석 깡통 그리고 못으로 시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쓸만했다.
- 포로 수용소의 역사 중에서 -
축 구 팀
어느 토요일 날, 그는 제게 솔트레이크에 축구보러 가자구 그러더군요. "내 친구의 여자친구도 갈거라구. " 그래서 우리는 점심을 준비해서 솔트레이크에 갔습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에서 내려서 축구경기가 열리는 프리몬트 공원으로 가는 택시를 탔죠. 이탈리아 포로들은 가득 태운 2대의 트럭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내릴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놀란 택시기사는 우리들은 내려주지 않은 채 시내로 돌아가려 하였죠. 기사양반에게 우리가 무엇을 할려는지 납득시킨 다음에야 내릴수 있었습니다.
- Cleone Battisi -
장 교 클 럽
그는 그들이 이탈리아 포로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과 싸울일이 없었기 때문에 버스에 그들을 태우고 오그덴 시내에 있는 극장에 가기도 했죠. 그러나 그들은 독일과는 여전히 전쟁중이었기에 그들은 좀 더 각별한 보호가 필요했습니다....그러나 그는 거기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그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책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원문만 읽어서는 주어와 목적어가 누굴 의미하는지 아리송(?))
- Eleanor Kososik -
포로 수용소의 여자들
어느날 제가 25명의 포로를 인솔하고 창고에 있는 3개의 구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죠. 포로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저는 구역을 왔다갔다하며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죠. 관리를 맡고 있던 중위가 "포로 한명이 없었졌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포로는 휴게실에 있을거라고 했는데도 믿지않았고 상관에게 연락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전 영어를 좀 할 줄 하는 이탈리아 부사관에게 당신 부하는 어딨냐고 물었죠. 그런데 그의 대답이 부하는 옆의 창고에서 여지친구랑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사실 전 항상 우리가 거기에 있는 것은 포로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우리의 아가씨들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 Carl Ferelius -
옮긴이의 주 : 행여 이 지루한 포스트를 퍼가실 때는 본문만 가져 가지 마시고 출처 또한 가져가 주시길 바랍니다. 워낚에 번역이 개발새발인 것도 있지만 근거없는 글이 되긴 싫거든요. 그럼 이 지루한 포스트 읽어주실 분들에게 이탈리아 형님들의 해맑은 기운이 감도시길.....
출처 http://blog.daum.net/kiwoo97/9533948
이민아니에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