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十三章 겁화소인(劫火燒仁)
①
상허촌을 출발한 사군명 일행은 서행(西行)을 계속했다.
북경과는 반대 방향이었으나 국주와 의논한 대로 상허촌에서 서쪽으로 사일거
리인 마애령(摩崖嶺)을 넘은 후에야 북경 쪽으로 길을 잡을 계획이었다.
"이 곳이 어디쯤이더라? 예전에 지난 적이 있긴 한데 영 가물가물하구먼…….
행인의 모습을 찾기 힘든 한적한 숲길을 가기가 무료했던지 고승후가 말을 건
넸다.
어느 새 석양이 물드는 시간이 되자 슬슬 잠자리가 걱정되는 지도 몰랐다. 어
두운 밤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지금쯤은 잠자리를 정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
다.
"상허촌을 떠난 지 삼일. 모두 스물 세 시진을 속보(速步)로 진행했고 아까
점심 무렵에 건넌 작은 시내가 경덕천(景德川)의 지류(支流)라고 보면 옛날
당(唐)나라의 군진(軍鎭)이 있었다는 당성지(唐城址)쯤 되겠군요. 원래 이름
은 풍야진(豊野鎭)이고요."
별뜻 없이 말을 던진 고승후는 놀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이 근방엔 초행일텐데 어찌 그리 잘 압니까?"
사군명이 쑥스럽게 웃으며 고승후를 바라보았다.
"북경까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책에서 읽어 모두 머릿속에 담았습니다."
"허어, 참!"
고승후에겐 감탄스러운 일이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뭐라고요?"
마차 창으로 스치는 단조로운 풍경에 무료해하던 해연이 머리를 내밀고 예의
뾰족한 소리로 외친 것이다.
"아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우리 군주님을 모시고 간단 말이에요!"
"걱정 마시오. 가보지 않았다 해도 가장 안전한 길임에는 틀림없소."
우직하기만 한 대답도 해연의 성깔을 가라앉히진 못했다.
"안전한지 어떤지 가보지도 않았다면서 어떻게 안담? 도대체 우리 군주님을
어떻게 보고……."
"해연아."
석양에 둥지를 찾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설운경의 목소
리가 들리자 잔소리를 늘어놓던 해연의 얼굴이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친 고승후와 사군명은 마차 안에서 잔잔히 새
어 나오는 설운경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분들도 우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날 걱정하는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네가 자꾸 저분들을 몰아세우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는 걸 모르겠니?"
"……."
기세등등한 동장군(冬將軍)이 따사로운 봄바람에 꼼짝 못하듯 잔잔하고 아름
다운 설운경이 표독스런 해연을 순한 양으로 만드는 건 결코 주인의 권위(權
威)가 아니었다.
충심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온화한 인격의 감화(感化).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한데, 가는 동안 저 분들에게 무례하지 않았으면 좋겠
구나."
"예, 군주님."
해연이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은 고승후가 마차 안의 소리에 하나같
이 귀 기울이고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소리 없는 만세.
"후후훅!"
"키킥!"
상허촌을 출발한 이후로 꼬투리만 잡으면 까마귀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해
연의 잔소리에 질린 일행은 모두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해연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찬 기대와 행여 웃음소리가 해연의
귀에 들려 겨우 한풀 꺾인 성질을 다시 자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어우러진
행동이었다.
사군명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표사들이 키들거리는 소리를 감출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서 선배는 먼저 가서 오늘밤 숙영(宿營)할 곳을 살펴 주십시오. 이 길로 오
리쯤 가면 오른 쪽에 무너진 성터가 있을 겁니다."
"예에! 알겠습니다. 돌이 있으면 치우고 풀이 우거졌으면 모두 베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주절주절 신이 나서 늘어놓은 서수림이 일행을 앞서자 왕충삼이 소리쳤다.
"뱀이 있나 살펴보는걸 잊으면 안되네!"
"하하핫!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밤도 밤새 고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지난 밤. 마차보다는 낫겠다며 허물어진 사당에 잠자리를 폈다가 풀 뱀에 놀
란 해연이 뱀을 잡아내라고 밤새 성화를 부린 일을 빗대어 하는 소리였다.
표독스럽기가 표범보다 더한 해연이 독도 없는 풀 뱀 한 마리에 새파랗게 질
려 떠들어대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했던 것이다.
"근데, 저자가……!"
"해연아!"
행여 해연의 잔소리가 또 시작될까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서수림의 뒷모습이
금새 숲 사이로 사라졌다.
암천에 빽빽이 박혀있는 별들이 저마다의 밝기로 힘겹게 어둠과 싸우는 밤.
숲 속 널찍한 공터에 숙영지를 정한 사군명 일행의 저녁은 딱딱한 건량이 아
닌 푸짐한 사슴고기였다.
서수림이 잠자리만 살핀 것이 아니라 저녁거리까지 사냥해 놓은 것이다.
화르륵, 타탁!
모닥불 위에 걸어놓은 사슴의 몸통에서 흐른 기름이 불똥을 튀기는 불규칙한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풀벌레의 울음과 어우러져 묘한 안락감을 선사했다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에 실려오는 들꽃냄새가 어느덧 중년이 돼 버린 세
월을 서럽게 하는지 왕충삼이 투덜거렸다.
"젠장맞을 꽃 냄새……! 이거 웬 놈의 꽃이 이렇게 지천인지 모르겠구먼."
"왜 애꿎은 꽃가지고 시비람? 향기롭고 좋기만 하구먼."
왕충삼의 넋두리에 담긴 회한을 알기에는 살아온 세월이 짧은 해연이 제 버릇
남 못 주고 톡 쏘았다.
"그럼, 꽃 같은 아가씨 앞에서 그따위 늙은이 헛소리는 늘어놓는 게 아니지."
팽상문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한 마디 던지고는 고기를 한 점 썰었다. 그 역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봄밤의 요상스런 조화를 이길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수선스럽게 몸이라도 움직일 밖에.
"어디…… 잘 익었나 볼까?"
"에라, 이 놈아! 한두 번 하는 짓도 아닌데 냄새를 맡으면 모르냐? 그리고,
익었든 설었든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네 놈 순서는 한참 아랜데 어디다 먼
저 칼을 들이대?"
"내 코는 꽃 냄새가 좋은지 서러운지도 모르는 먹통이라 먹어보지 않으면 모
르겠다! 네 놈한테 돌아갈 몫이 적어질까 봐 그러는 거면 마음 곱게 써라."
"이런, 싸가지 없는 위인을 봤나!"
"뭐야? 싸가지?"
그야말로 한두 번 보는 일이 아니라 빙그레 웃는 표사들과 달리 설운경과 해
연은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을 할 것 같은 기세가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음식 때문에.
고즈넉한 봄밤의 꽃 냄새가 서러운 나이가 되면 먹을 것에 민감해지는가……?
급박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두 사람의 다툼을 참지 못한 해연이 소리를 지르
려 할 때였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이십 명쯤 됩니다."
무너진 석축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구태열의 말에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병장기를 챙기며 설운경을 둘러쌌다.
"흥, 이 길이 안전하다고 했나요?"
"아직 어떤 사람들인지도 모르고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니 조용히 하시오."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는 사군명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해연은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입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오밤중에 이런 한적한 숲을 떼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설마 나들이 나온 사람
들이겠어? 할말이 없으니까 괜히 인상을 쓰고 난리야……."
해연의 말은 맞았다.
순식간에 횃불을 들고 다가온 자들은 한 눈에도 선량한 인상이 아니었다.
"와하하핫! 예의를 모르는 친구들이구먼!"
맨 앞에선 텁석부리가 대소를 터뜨리며 대뜸 시비조로 나왔다.
"예의를 모르다니 무슨 말씀이신 지?"
사군명은 시비를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가능한 한 목적지까지 아무런 사고도 없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라에 국법이 있으면 숲에는 녹림의 법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이곳
은 절강성에 이름높은 호영채(豪英寨)의 관할이고 이 어른이 호영채를 이끄는
호면염왕(虎面閻王)이라는 호걸이시니 마땅히 예물을 내 놓아야지."
텁석부리 옆에 서 있던 곰보가 시퍼런 귀두도를 번뜩이며 본색을 드러냈다.
제법 무기는 들었으나 숫자도 얼마 안되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애송이가 고분
고분하니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복색도 제각각 이니 사군명이 의
도했던 것처럼 잘해야 어느 부잣집 사병(私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터였
다.
표사들은 이름도 듣지 못한 놈들이 녹림 운운하는 꼴에 배알이 뒤틀렸으나 사
군명의 명이 없는 이상 잠자코 있을수 밖에 없었다.
"미처 몰랐습니다. 약소하나마 이 정도로 성의를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군명이 서슴없이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텁석부리에게 건넸다.
국주가 건넨 서북로총람에 이름도 못 올린 걸 보면 십중팔구 어디서 칼 한 자
루씩 구해들고 설치는 초적 떼일 게 분명했지만 은자를 건네는 게 백 번 옳았
다.
하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순순히 내놓은 은자가 생각보다 두둑하자 텁석부리의 욕심이 고개를 들었고,
불빛에 어른거리는 설운경의 자태가 장내를 훑는 그의 눈에 스친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 것이다.
"흐음! 고을 현감도 탈 수 없는 좋은 마차에 제각기 말이 한 필씩이라…….
이 정도로는 곤란한걸."
난감해진 사군명의 눈길을 받은 고승후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경험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녹림의 호걸이시니 능숙현(陵淑縣) 도악산(道嶽山)의 주인이신 감석충(甘石
忠) 어른을 아시겠구려? 내가 그 양반의 종제(從弟)되는 사람입니다."
절강성 녹림의 패자를 들먹인 고승후의 생각은 그리 잘못된 게 아니었다.
시답지 않은 자들일수록 족보에 민감한 법이었고 혹, 의심을 품고 캐물어도
꿀릴게 없었다.
감석충의 산채에 잡혀갔다가 국주가 몸값을 치른 덕분에 풀려난 팔 년 전의
사건 이후 도악산을 지날 때면 예물과 인사를 나누는 처지였고 감석충이나 도
악산 패거리들에 관해서라면 막힐게 없는 그였다.
과연, 텁석부리의 안색이 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감석충이라……. 종제면 사촌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끄덕인 고승후는 의도가 적중했음을 느꼈다.
그래도 감석충의 이름은 들어봤는지 텁석부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것이
다.
하나 일은 엉뚱한데서 꼬였다.
딴에는 설운경이 서 있는 곳으로 아쉬운 눈길을 흘낏거리는 텁석부리에게 충
성을 못해서 안달인 곰보가 엉뚱한 주둥이를 놀린 것이다.
감석충이라는 이름에 등골이 서늘해지기는 했지만 밑천 안 드는 호기를 부린
다고 해될 것은 없었다.
"감 채주의 체면을 봐서 이 놈들 목숨은 살려둔다 해도 계집을 끌고 가는 정
도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도악산에서도 감히 채주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텐데요?"
순간, 독기를 풀풀 날리며 좌중의 고막을 때리는 앙칼진 일성.
"뭐라고 했느냐!"
아까부터 설운경을 흘끔거리는 텁석부리의 끈적한 눈길에 부글거리며 끓고있
던 있던 해연의 노화가 곰보의 손끝이 설운경을 가리키자 마침내 화산처럼 터
져 오른 것이다.
미처 말리 틈도 없이 날렵한 야조가 된 해연이 소도를 빼들고 일행의 머리를
넘어 날아올랐다.
휘이익!
"으악!"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으으으……."
미처 거두지 못한 왼팔의 팔꿈치 아래를 잃은 곰보는 어두운 바닥에서 꿈틀거
리는 팔을 바라보며 짐승 같은 신음성만 흘렸다.
"누구든 우리 군주님을 욕보이는 자는 살려두지 않겠다!"
호면염왕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지닌 녹림의 호걸이자 감석충도 함부로 못
한다는 호영채의 채주, 텁석부리는 일순간에 그만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처음 보는 놀라운 무공에 얼이 빠져 자신을 쏘아보는 해연의 눈길에 털썩 엉
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떠돌이 약장수도 펼칠 수 있는 변변치 않은 칼 솜씨로 외진 산길을 지나는 행
인들의 헌옷가지나 곡식 됫박을 털던 주제에 말로만 듣던 무림고수를 만났으
니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아, 아니올시다. 소인들이 감히 그럴 리가요. 지체 높으신 군주님이신 줄도
모르고―――."
눈물과 식은땀이 뒤범벅이 되어 무성한 수염을 타고 흐르는 모양이 가관이었
다.
원래 황실의 피가 흐르는 여인에게 사용하는 호칭이 군주인 만큼 아무나 군주
로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으흠……."
텁석부리를 쫓아 일제히 바닥에 무릎 꿇은 이십여 명의 사내들을 놓고 사군명
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선택은 두 가지뿐이었다.
모른척 보내거나 아니면, 살인멸구(殺人滅口).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책임자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만큼 사군명의 어려움을 능히 짐
작하는 고승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북경이 가깝다면 몰라도 아직 절강성도 못 벗어난 마당에 행적이 드러나는 건
너무도 위험했다.
그렇다고, 흉년을 못 이겨 초적으로 나선 듯한 무지랭이들을 죽이는 것도 쉬
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어디서 결정되는 지도 모르고 해연에게 용서를 구하느라 정
신없는 가련한 자들.
그들을 보고 갈등하는 사군명의 결심을 도운 것은 팽상문이었다.
"표행은 전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표행은 전쟁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전
쟁이지요."
그렇다.
전쟁에서의 자비는 화를 부른다.
또한, 설운경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표물을 노린 것.
사군명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어느새 무릎꿇은 자들을 에워싸고 있는 구태열과 최흘, 서수림은 물론, 가까
이 있는 동료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죄는 나중에 받도록 하지요."
"옴마니사바하……."
천두염이 주문인지 염불인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무거운 얼굴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심상치 않은 대화에 귀기울이던 설운교가 사군명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안 돼요!"
뾰족한 외침에 해연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사내들도 모두 설운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어요!"
"죽을 만한 죄를 진건 아니지만 무고한 자들은 아니오."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사내들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저희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땅을 갈아먹던 사람들입니다요!"
"집에는 저만 바라보는 노모와 처자식이 있습니다. 제발 자비를……!"
깊은 밤. 때아닌 처량한 아우성은 필사적이었다.
그들과 다름없이 울상이 된 설운경이 다시금 매달렸다.
"내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저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
하나 일단 마음을 굳힌 사군명은 흔들리지 않았다.
"군주님의 일신이 아니라 천하의 안위가 걸린 문제요. 일이 잘못되면 수천 수
만이 죽게 되오"
"저들을 죽이면 당신들은 천벌을 받을 거예요."
"달게 받겠소."
철벽보다 단단한 의지.
절망을 느낀 설운경이 해연을 불렀다.
"해연아! 이 사람을 막아라!"
해연은 어쩔 줄 몰랐다.
설운경의 안전을 생각하면 사군명이 옳았으나 그렇다고 설운경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해연을 구한 건 담담하게 내뱉은 사군명의 말이었
다.
"저들을 죽이는 건 표행을 맡은 우리가 할 일. 당신의 일은 주인의 명을 따르
는 것이니 날 막으시오!"
먼지가 풀풀 날릴 듯한 건조함.
그러나, 어딘가 속 깊은 고민과 배려가 느껴졌다.
마침내 두 자루의 도를 움켜쥐고 사군명을 향해 몸을 돌리는 해연의 얼굴에서
갈등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시오. 그래야 주인을 떳떳하게 대할 수 있고 당신도 후회가 없을
거요."
대장장이 늙은이가 장담하긴 했지만 우직하고 평범해 보이는 저 사내가 과연
자신의 무공을 당해낼까 하는 해연의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군명의 말이 맞기도 했으나, 꼿꼿한 무인의 자존심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걱정해 줘서 고맙군요!"
싸늘히 외친 해연이 쌍도를 번뜩이며 사군명의 전면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섰다
상대의 목줄기를 노리고 앞으로 향한 장도와 칼끝이 자신의 팔꿈치께 오도록
거꾸로 잡은 소도.
세 개의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은 두 개의 칼이 언제 방향을 바꾸고 어느 곳을
칠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한쪽으로 비켜서서 정작 싸움을 시작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설운경의 눈에 후
회의 빛이 스쳤다.
일개 표국의 표사가 해남신풍군의 순무 세 명과 겨뤄 이긴 적도 있는 해연의
도에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가련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저 젊은 표사가 다치
는 것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죽이겠다면 서도 잔인한 살기는커녕 깊은 고민과 의지를 애써 무덤
덤한 얼굴로 가리려는 사람.
천벌을 달게 받겠다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답답할 만큼 우직한 사군명
이라는 표사.
설운경은 진정으로 그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야압!"
마침내 해연의 기합성이 울리는 순간 그녀는 눈을 감고 말았다.
하늘을 베려했었다는 위사무의 말에 따라 단천검(斷天劍)이라 부르기로 한 위
사무의 선물을 들고 좌우로 흔들리는 해연의 쌍도를 주시하던 사군명은 눈앞
에서 도광이 번뜩이는 순간, 좌측으로 몸을 틀며 단천검을 올려쳤다.
채챙!
금속의 마찰음은 사군명의 검이 해연의 도를 막았음을 의미했고, 또한 마찰음
이 가볍고 맑다는 것은 해연의 쌍도가 재공격을 위해 일부러 가볍게 튕겨졌다
는 것을 드러냈다.
과연 그랬다.
"받아라!"
튕겨진 쌍도가 크고 작은 궤적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하는가 싶더니 장도는 허
리를 베어왔고, 소도는 단천검의 진로를 막은 것이다.
만약 강한 힘으로 소도를 내리치며 허리를 방어한다해도 문제가 적지 않았다.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소도를 밀어내고 장도까지 막을 만큼 강하고 빠르
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모험을 건다 해도 소도가 검을 흘려 버
릴 경우 허리가 아니라 목이 위험해진다는 것.
무사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장검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서는 것뿐이었다.
태극무허검보를 익히며 검의 움직임보다 검을 쓰는 사람의 뜻이 중요함을 깨
달은 사군명이었기에 위기의 순간에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으헛!"
쉬이익!
찰나의 차이로 옷을 베이는데 그친 사군명은 급격히 빨라지려는 숨결을 가다
듬었다.
"좋은 수법이었소."
"별 말씀을……."
간결한 동작으로 자신의 공세를 무산시킨 사군명을 대하는 해연의 마음이 더
욱 신중해졌다. 사군명의 칭찬이 건방진 소리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해연이 다시금 쌍도를 흔들며 사군명의 요혈을 노릴 때, 사군명이 먼저 움직
였다.
"타아핫!"
비스듬히 내디딘 오른 발로 땅을 차며 솟아오른 사군명의 단천검이 하늘높이
치켜졌다.
순간, 어디를 쳐도 좋을 만큼 온통 다 드러난 사군명의 하반신.
해연은 소도로 굽혀진 발목을 베어 들어갔고, 장도를 곧추세워 무릎을 노렸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사군명의 우렁찬 외침이 밤하늘에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태극분기!"
도도한 검의 흐름.
낙하하는 속도와 해연의 도가 마주쳐오는 속도가 합해져 일호의 틈도 아쉬우
려만 검은 유장하게 대기를 갈랐다.
잠시 거스를 수는 있으나 결국 자신의 흐름으로 만상을 쓸어 가는 장강대하처
럼 유장한 사군명의 검 앞에서 해연의 도는 무력했다.
느리게 보이나 결국 바다에 이르는 강물처럼 사군명의 단순해 보이는 검이 거
역할 수 없는 압박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에이잇!"
손발을 옭아매는 느낌을 떨치듯 일성을 터뜨린 해연이 도를 쥔 손에 공력을
더할 때, 바위를 만난 강물이 물살을 트는 것처럼 비스듬히 각을 이룬 단천검
이 해연의 장도를 내리쳤다.
빠강!
해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쇳덩이를 내리쳐도 멀쩡하던 장도가 맥없이 부러지며 사군명의 검이 자신의
머리를 가르려하지 않은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에 놀라기는 사군명도 마찬가지였다.
장도의 저항을 축으로 해연의 후방에 떨어져 공세를 이어가려 했건만 해연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은자 일곱 냥 짜리 청강검보다는 쓸만할 거라던 단천검의 위력!
사군명은 황급히 검을 거두었고, 그 바람에 그의 정강이는 해연의 소도에 속
절없이 베어졌다.
"어맛!"
사군명의 양보로 목숨을 구했음에도 도리어 그에게 상처를 입힌 해연이 깜짝
놀라 움찔할 때, 사군명이 해연의 전면에 떨어져 내렸다.
"이, 이런 일이……."
피 흘리는 사군명의 다리를 살피려 해연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다가서는 해연을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사군명이 왼손을 들어 훤히 드러
난 해연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해연의 몸뚱이가 스르르 땅바닥에 허물어졌고 넋 놓고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담담한 사군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선을 다하라고 했거늘……."
"해연아!"
설운경이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하며 해연에게 달려들었다.
한심한 초적 떼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사군명이 다치는 것을 바라지
도 않으며, 쓰러진 해연을 걱정하는…….
이래저래 설운경은 편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 순간.
동료들에게 침중한 눈짓을 보낸 사군명이 먼저 일을 시작했다.
"으으으……."
무슨 뜻인지 모를 괴성을 흘리며 떨리는 두 손을 들어올리는 텁석부리의 목에
사군명의 검이 무정하게 내리 꽂혔다.
휘이익, 푸욱!
먼저 손에 피를 묻힌 사군명의 마음을 헤아린 동료들도 무정한, 참으로 무정
한 살검(殺劍)을 휘둘렀다.
움츠리고 뒤엉켜 몸부림치는 자들의 목을 가르고 가슴을 찌르는, 증오도 분노
도 없는 살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는 그저 단 일 검에 깨끗이 죽이는 것뿐이었다.
"으아악!"
"살려…… 크아악!"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설운경이 미처 말리고 말고 할 시간도 없이 호
영채의 녹림도라고 자처하던 무리들은 모두 무너진 옛 성터를 떠도는 혼백이
되고 말았다.
"뒤처리는 내가 하지요."
대답을 기다린 말은 아니었다.
팽상문은 망연히 서 있는 사군명에게 한 마디 던지고 말안장에 매달린 보따리
를 풀었다.
화약에 송진과 인(燐)을 섞어 한 번 불이 붙으면 꺼지지 않는다는 겁화산(劫
火散)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시신 더미 위에 뿌리고 불을 붙이는 팽상문 옆에
서 천두염이 뭔지 모를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파, 파팍!
화르르……!
작은 폭발음을 일으키며 맹렬히 타오르는 파란 불꽃이 하늘 높이 솟구칠 때
사군명이 좌중을 돌아보았다.
"경비를 둘로 늘리고 나머지는 모두 잡시다. 내일도 갈 길이 멉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해연과 귀기스런 불꽃이 되어 무너진 옛 성터를 밝히
는 이십여 명의 생령들.
그리고…… 무뚝뚝한 음성만으로는 감출 수 없는 번민을 쓸어안고 펼쳐놓은
양가죽 속으로 파고드는 사내.
천하혈난(天下血亂)의 불씨가 될지 평화의 싹이 될지, 알 수 없는 운명을 지
닌 여인, 설운경을 슬프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감!
즐독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즐독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즐독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