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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나 엘레지
- 나마스테
너희가 기(氣)를 아느냐?
'아 유 프롬?'
온통 붉은, 기묘한 바위들이 지천인 '세도나'를 돌다 우리 일행이 카페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홀짝 거리고 있을 때였다. 2층이었는데 아랫 쪽 주차장에서 한국인같이 보이는 젊은 남.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타향에서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는 말대로, 이 외진 곳에서 한국인들을 볼 수 있다는 게 반가워서 뜬금 없이 말을 붙인 것이었다.
아리조나 깊숙이 숨어 있는 세도나는 붉은 산, 붉은 땅, 붉은 나라였다.
볼모의 광야 모하브 사막을 가로지르고도 한참을 더 달려야 하는 곳에 세도나가 있었다.
광막하고 똑 같은 사막 풍경을 가로지르는 차량이동에 반쯤 지친 시선은, 이곳에 도착하면서부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와 같이 붙어 있는 같은 땅이면서도 전혀 다른 땅이 세도나였다.
자연이라는 예술가 역시 옳다. 최고다. 누구는 소설 한편 쓰는데 몇 년이 걸리는 노동을 한다는데 자연이라는 예술가를 만나면 꼬리를 내릴 일이다. 몇 년이 뭐야. 수만년이 걸려 색 붉은 바위를 각각 다른 조각들을 빗어냈고, 역시 붉은 물감으로 세도나 고원이라는 작품을 마감하였다.
때를 맞은 단풍도 세도나를 빗은 예술가의 뜻을 헤아린 듯 대지의 색갈을 닮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땅도 산도 온통 벌겋게 불타고 있는 세도나.
한국의 민속에 오방색(五方色)이라는 게 있다. 동서남북과 중앙을 포함한 5군데를 색으로 나타냈는데 오방을 색으로 나타낸 것은 민속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물론 사람이 사는 시간의 공간인 춘하추동의 계절과도 관계가 있다. 방위, 색채, 계절은 서로 관련이 있으며, 그 색의 구별은 나아가 인간사의 길흉에도 관계가 있다고 우리네 조상들은 믿었다.
중앙을 나타내는 황색은 귀한 색이어서 황제의 색갈이었고 일반인들은 그 색을 사용할 수 없었다. 구중궁궐 임금이 입던 곤룡포가 황색인 이유가 거기 있다.
동양인들은 붉은 색(赤)은 길한 색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현대의 중국인들이 아직 붉은 색에 열광하는 이유도 거기서 기인한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난방이라고는 군불 지핀 아랫목이 최고였겠는데, 겨울이면 그곳에 요를 깔고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잤던 기억이 있다. 그 이불의 겉감이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조화를 이룬 것도 그런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땅도 산도 온통 붉은 이곳은, 원주민인 인디언들... 신성한 장소였다는 설명도 왠지 낮설지 않
았다. 이곳이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인의 시각으로 만든 영화 로케이션 단골 현장이었다고 했다.
아리조나 광막한 사막을 횡단하는 백인들 포장마차를 습격하는 인디언들. 쌈박질로 유명한 아파치족들 인디언들의 집단 거주지가 이곳이라 했다.
거의 몰살 당 할 위기에 몰린 포장마차의 백인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미국 군대가 나팔을 불며 등장 할 때는 열광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 점을 반성한다. 지금 같아선 절대로 안 칠 것 같다. 자기 땅 지킴이의 학살에 박수를 친다는 것은 뭔가.
조선을 강탈한 일본군에게 나라 찾자는 독립군이 죽어 가는 것에 박수를 치는 격이 아닌가.
세도나에는 이제 인디언이 없다. 그래도 느낌은 좋다. 이곳이 붉은 색 도는 그들의 피부를 닮아 신성시되었는지, 같은 몽골리언으로서 대물림한 본능적 느낌의 발현이었는지는 모른다. 동양의 정신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는 오방색에 대한 본능적 발로가, 온통 붉은 이곳에 그런 신성을 부여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자연이 빗은 놀라운 경이를 볼 수 있음에 세도나의 이름이, 포장만 근사한 관광지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내내 받았었다. 자연과 어우러지게 조성된 시가지며 조형물에서, 도로며 건물의 외관까지 주변의 색감과 어울리도록 신경 쓴 흔적이 돋보였다. 여늬 관광지에서 볼 수 없는 높은 격조가 세도나에는 있었다.
파란 창공을 찌를 듯 서있는 수많은 붉은 바위봉우리들은, 훨훨 타오르고 있는 봉화불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삽상한 가을 바람과 쾌적한 날씨는, 7시간을 쉬지 않고 사막을 횡단하며 달려 온 노동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이곳이 볼거리 많은 광활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로 추천 받고 있는 이유일 터였다. 대도시에서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탓인지 관광객들은 거의가 백인들 일색이었다. 비지터센터에서 정보를 얻은 후 하루종일 드라이브를 하며 볼거리를 찾아 돌아도 유색인종은 만날 수 없었다.
누군가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이 그런 사실을 지적했고, 정말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같은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이 분명한 사람들을 볼 수 있음에 반가워 한국인이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2
무심하게 걸어가고 있는 위쪽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아 유 프롬?'이라는 물음에, 일행중 남자가 대답했다.
'프롬 코리아'
반가웠다. 붉은 색은 나쁜 것이라는 이상한 반공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붉은 나라 감상을 하러 이 먼 곳을 오다니. 반가웠다. 반가우면 짐짓 딴청을 부리는가. 그들은 내가 한국인인 줄 모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을 한 그들에게 한 말은 내가 생각해도 엉뚱했다.
'노굿, 코리아. 베리 배더 코리안'
단어 따먹기 수준의 영어를, 그들 역시 그 수준인지 금새 알아들었다. 그들은 선 채 한참 우리를 뜨악하게 쳐다보더니, 역시 남자라고 그예 한마디한다.
'와이?'
이어 우리 일행의 폭소가 터지고, 웃는 모습에서 농담인줄 그들도 금새 알아 버렸다.
그들은 당연히 우리 테이블로 초대를 받았고, 기꺼이 합류 한 것은 그들도 우리처럼 한국인을 처음 보니 반가웠기 때문이겠다.
배낭여행을 온 대학생들이었다. 기특했다. 10여년전부터 배낭여행은 한국 대학생들에게 필수가 되었고 세계 여러 곳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예 그들을 호칭하는 '배낭족'이라는 명사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이 더 기특한 것은, 그들이 다리 품 팔아 얻은 방대한 정보는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수록된다는 점이었다. 죽은 정보가 아니라, 발로 뛴 따끈하게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였다. 그것은 다시 후발 배낭족에게 귀한 정보로 활용되고, 업그레이드 되어 재창조되고 있었다.
맥주를 한 컵씩 먹인 후, 말했다.
'볼펜 꺼내'
역시 배낭족은 다르다. 배낭족은 눈치가 빨라야 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절 집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대로 배낭족은 눈치 빠른 게 고생 덜하는 지름길이다. 당연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그 말에 왜 꺼내야 되는지 묻지도 않고 잽싸게 필기 준비를 끝낸다.
낮에 일행의 통역으로 머리 속에 기억해 두었던 레인저의 설명을 외워 내기 시작했다.
'이곳은 대략 7000만년쯤 전에 생성된 곳이다. 원래 이곳은 바다였었다. 빙하기가 지나고 바다 속에서 대륙이 융기하면서 고원 형태로 남았는데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 때문에 이런 형상이 된 것이다. 그 증거로 많은 고생대 바다 생물 화석이 이곳에서 발견된다. 이곳은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신성시되던 땅이었고, 지구상에서 가장 기(氣)가 충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氣 연구가와 명상가들은 생명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氣의 영어식 표현인 볼텍스(Vortex)가 지구상에 스물 한 군데 있다고 말들 한다.
볼텍스는 바꿔 말한다면 지구의 단전, 즉 배꼽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가운데 무려 4에서 13개 정도의 볼텍스가 세도나에 몰려 있다고 그 사람들은 주장한다. 氣, 혹은 그 에너지의 영역은, 세도나 중심으로부터 약 4마일 정도에 걸쳐 흐르고 있다고도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자유다.
왜냐하면 그 氣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니 그렇다. 만질 수 도 없고, 따라서 계량 할 수도 없는 기를 찾아 많은 사람이 오는데 우리도 그중 하나다.
먼 길 온 것은 이 기묘한 자연 감상과 함께 氣를 받자는 또 다른 목적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氣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 용어로 알게 모르게 氣를 많이 말하고 있다. 기가막히다. 기똥차다. 기가죽어... 기가 드세서, 기분나빠, 좋아, 오기, 분기, 색기, 요기 등등 하루에도 수십 번씩 氣를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氣가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 존재의 발상은 중국이다. 음향오행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서구의 창조론에 대비되는 동양에서의 만물의 근원으로서 氣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자연은 물론 이거니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모든 존재현상은 氣가 모이고 흩어짐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으로 보기도 했고. 이기(理氣)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어졌다.
이 이기철학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그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辨)으로 발전되었다. 다른 건 생략하거니와 그 기의 해석 싸움이 퇴계와 율곡을 정상으로 하는 양대 학파로 발전 된 것이다. 후세에는 그들의 출신 지역에 근거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류하기도 한다. 바로 性理學이다.
氣싸움은 붕당을 낳고, 당파를 낳고, 피 터지는 숙청과 음모와 배반을 낳았지만, 양쪽 모두 氣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氣라는 해석이 자연의 형세, 기운, 조짐,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자는, 건강에까지 같다 붙여 해석을 하고 있다.
그건 가짜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와 같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이므로 그렇다. 앞에 예를 든 대로 신체상의 생명력과 에너지, 나아가 생체에너지 등을 표현 할 대 우리는 그 氣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한다.
예를 들면, 니네들 같이 겁도 없이 배낭하나 메고 헤메는 모양을 보고 '그 녀석 참 기가 세다.'라든가, '기운이 넘친다'라는 말 등이 죄다 그런 것이다. 氣막히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그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氣를 팔아 호구하는 비지니스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눈에 보이고 잡을 수 있는 물건 팔아먹는 것 보다 안전하며, 수익이 좋을 수 있다. 말로는 설명 가능 하지만 눈앞에 보여 줄 수 있는 물건으로서의 氣가 아니니까 그렇다.
하나님 팔아 고소당한 사람 없듯 氣팔아 욕먹은 사람 없다.
한 때는 피라밋이 氣가 충만하다고 설래발을 치더니, 이번에는 이곳 세도나가 氣가 모이는 곳으로 지구촌에 소문이 나있다. 하여 이곳은 세계 각국의 명상가들이 찾는 곳이며, 정말 이곳이 氣가 넘친다는, 만화 같은 책도 여러 권 나와 있다.
당연히 귀 크고 발빠른 한국인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氣하면 한국인데.
3
한국에서도 유명한 '단학'의 창시자인 일지(一指) 이승헌님이 둥지를 튼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이승헌이란 사람은 누구냐.
이 사람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거니와 아마존 닷컴에서 베스트셀러 목록 1위를 한 '힐링소사이어티' 저자라는 정도만 알면 되겠다. 아마 동양인으로서 아마존 닷컴에서 베스트 셀러의 기록을 남긴 사례는 이분이 유일한 것 같다.
영어로 출간되었는데 그 원고를 이곳에서 쓴 것이다. 당연히 한국에서 번역되었고, 나는 그것을 한국
에서 빠른 우편으로 붙여와 읽고 있는 중이다.
그 책이 주장하는 것에는 율려(律呂), 파장, 빛... 사랑, 각성, 기존 신앙에 대한 비판, 뇌 호흡, 신피질의 활용 등등이 있는데 너네 수준에서는 이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못하고 있으니까.
좌우간 좋은 말만 써 있는데 그 핵심은, 역시 氣다.
아마존 닷컴에서는 이 책을 이렇게 평했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통쾌 할 정도로 정직하게 쓴 짧지만 대단한 작품'이라고.
우리가 여기 온 이유 중 하나가 그 사람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분을 잘 안다거나 氣에 대하여 공부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분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들고 있는 이 책에 싸인을 받는다는 게 전부다.
여기까지 들고 와 두 번째 읽고 있는 이 책에 대한 내 생각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번 읽고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또 내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은 데도 기인하지만, 노자와 장자, 예수와 부처가 한 말 편집해 놓은 것으로 사료된다.
솔직히 독창적인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 무식한 내가 혹시 놓친 것이 없나 해서 다시 읽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읽고 난 독후감은, 이미 선각자들이 다 해 놓은 말 모음집이라는 것이다.
氣는 추임새고 구색 맞추기로 동원 된 느낌이다. 그러나 배경 없는 사진 없듯 氣는 이 책에서 그림자 배경을 하고 있다.
다만, 신피질 뇌간등 의학적 분석을 시도 한 점은 노 코멘트다. 그쪽은 전혀 모르므로. 아마 이 책에서 독창적인 학설이라면 그것이 될 것이다. 이승헌 님이 의학을 전공한 분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이 사람을 만나러 그가 만든 명상센터로 갈 것이다.
다 적었냐?'
4
세도나는 아리조나 주에 있다.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어릴 적 흥얼거렸던 그 노랫말의 무대가 실감나는 사막이다. 걸어간다는 것은 상상으로도 끔찍한 사막이니 사람들은 당연히 말을 타야 했을 것이다.
인디언 말로 '작은 샘'이라는 뜻이 아리조나라는 말이라는데, 작은 샘은 커녕 한 방울의 물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암갈색 사막이다.
차창 밖으로는 한낮의 태양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미이라로 만들려고 작정 한 듯, 사정없이 그 뜨거운 볕을 내려 쏟아 붙고 있었다. 그러므로 셍떽쥬베리의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사막은 현실감이 결여된 문학적 상상으로 쓴 미문일뿐 이다.
그 책 읽고 공연히 어린왕자 찾으러 모하비 사막 어정거리다가는 틀림없이 미이라가 될 것이다.
시원스레 잘 뚫린 프리웨이 양 켠에 철망이 쳐저 있는 것이 궁금했다. 그 엄청난 길이의 철망은 동물들이 프리웨이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울타리였다.
이 회색 빛 사막에 동물이 살고 있었다. 철조망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동물이 산다는 생각에 차창에 스치는 사막도 자세히 보니 거기도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일교차가 크고 녹색 식물은 눈뜨고 찾을 길 없는, 어느 혹성 같은 사막도 보기에 따라 특화된 아름다움으로 보인다.
삭막하고 생존하기에 적당하지 않는 사막에도 적응하여 살고 있는 동물들이 있다. 바꿔 말하면 그 동물들은 우리가 주장하는 아름다운 초목 지대가 살기 흉한 곳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아까 한 말은 취소다. 역시 셍떽쥬베리는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다.
미국이 돈 많은 나라라는 것을 웅변하는 것은 여러가지 있겠으나 한가지를 꼽으라면 프리웨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프리웨이의 거대한 구조를 보면 그 말이 실감난다. 거기에 보너스로 도로 따라 철망까지 따라 쳐 놓았으니 돈 자랑도 이만 저만 아니다.
사막이 끝나 간다는 신호는 아리조나 주도인 피닉스 시가 가까워지며 목화밭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또 노랫말이 생각났다. 목화밭~ 목화밭 그 옛날 목화밭... 서유석이 부른 목화밭을 흥얼거렸다. 단조로운 사막의 풍경이 잊혀진 노랫말을 불러일으키는 듯 했다.
예전 미주대륙 원주민인 인디언 중에 문익점 닮은 사람이 있어, 중국에서 붓 뚜껑에 목화씨를 숨겨왔을까?. 목화밭이 끝간데 없이 광활하다. 엉클 톰이 같은 흑인 노예들 노동력으로 저 광대한 목화밭을 가꾸었겠다.
노예제도 폐지에 반대하여 이곳 남서부의 인간들이 남북전쟁 한 판 붙은 이유를 알겠다. 넓은 땅덩어리에 비하여 사람이 턱없이 모자란 데, 이 넓고 넓은 염전의 소금밭처럼 하얗게 피어난 목화 꽃은 누가 딸까.
아직도 아리조나에는 인디언이 가장 많이 산다고 했다. 원근법처럼 끝이 맞닿은 직선의 프리웨이로 모하브 사막을 횡단하여 피닉스를 지났다.
5
세도나에 이르는 하이웨이 89A는, 랜드 맥넬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의 추천에 따른다면 미 대륙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다. 선인장중에서도 대형인, 큰 나무 닮은 오르간파이프 선인장이 녹색이 나타나기 시작한 고만고만한 산에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
이 파이프오르간 선인장은 아리조나의 상징이다.
세도나에 가까워지면서 여태 풍경과는 다르게 붉은 기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암봉들이 기세 좋게 솟구친 것이 경이롭다. 이 놀라움은 명상가들에게는 기의 발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거룩한 영혼의 성지라는 인디언들의 믿음대로, 세도나는 확실히 여태 보아 온 자연과는 분명 달랐다.
이곳은 이미 해발 1400여 미터의 고원지대이므로, 저지대의 사막성 기후에 비하여 연중 따듯한 기온이고 금상첨화로 일년중 300여일이 쾌청한 날씨라고 했다. 독특하고 신비한 자연 경관에 더불어 날씨 좋고 공기가 깨끗해 세계의 많은 관광객이 찾아 드는 관광지이기도 했다.
세계적 관광지답게 수준 높은 숙박 시설과 식당들 그리고 예술품을 팔고 있는 갤러리도 많았다.
최근 Money 매거진에서는 미국 내 12대 최고 여행지의 하나로 세도나를 선정했다. 세도나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자연 경관과 좋은 기후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들릴 것이다.
거기에 등산과 야영 시설의 완벽한 준비도 가난한 나그네까지 아우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루 관광으로는 세도나를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며칠씩 체류하며 퍼즐 맞추기처럼 세도나의 숨은 비경을 찾아야 한다.
다리품 팔기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도나는 많은 탈것을 준비해 놓았다. 찝차, 말, 풍선, 경비행기, 헬리콥터까지 세도나를 헤메는 데 사용 될 탈것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타고 간 차로, 지도를 참조하여 2박 3일을 이곳에서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낙옆이 융단처럼 푹신한 캠프사이드에서 쳐 놓은 천막을 무시하고, 침낭 하나로 밖에서 잠을 청했다.
氣가 융성하다는 세도나의 땅과 교감을 위하여.
적당한 취기(醉氣)가 그렇게 시켰기도 하거니와 옆에서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캠프화이어 불꽃이 세도나 바위 닮은 듯 너울 너울 춤을 추는 환상 때문이기도 했다.
서늘한 한기(寒氣) 때문에 침낭에서 얼굴만 내 놓고 보는, 성큼 내려앉은 눈 앞 하늘의 별들이, 신비의 땅 세도나를 향해 우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 아침에 일어나 세도나 중심가에 있는 단학선원을 찾았다. 일지 이승헌님 찾기는 쉬웠다. 아마존 닷컴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서점에서 일등 한 사람 답게 그 사람이 경영하는 단학선원은 이곳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선원은 이곳말고도 조금 떨어진 다른 곳에 더 큰 곳이 있다했다.
쇼핑 몰 한 켠에 자리잡은 선원에는 외국인 몇 명이 발이 쳐진 도장 안에서 와선(누워 있는) 중이었다. 바닥은 한국 식 온돌이 분명했다.
접수처에는 단학 사범이라는 묘령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일지 대 선사님께서 지금 어디 계신지 확인 할 수 없습니다. 일년 스케쥴이 꽉 차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바드 옥스포드등 대학 강연과 세미나 참석에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쁘시지요. 인류의 영성 완성을 위하여, 氣의 보급을 위하여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혹시 연락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이승헌님의 공식 명칭이 대선사(大仙士)인 줄 그때 알았다.
한국에서 김지하 시인과 있었던 토론을, 현대판 사칠논변(四七論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토론 끝에 둘은,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붕당 했다.
역시 氣는 함부로 말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점이다.
둘은 그 氣토론을 계기로 평생 원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둘의 공통된 관심사는, 지금도 氣에 대한 연구와 믿음이라는 것은 같았다.
대덕 고승의 흉내를 내어 '선사'라는 호칭을 쓰는 이승헌 님의 제자답게 절 집 흉내를 낸다. '끽다거'라는 말이 그것인데 사범은 우리에게 다향 짙은 녹차를 권했다. 쓰잘데 없는 소리하지 말고, 끽다거 즉 '차나 한잔 드시게'였다.
이승헌 대선사에게 보내는 그 사범의 예우는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는' 군사부일체였다.
묘령의 사범은 氣를 많이 받아 그런지 자그마한 키임에도 당당했다. 그리고 아름다웠고.
우리는 하릴없이 차나 한잔 얻어 마시고 나왔다.
가지고 간 책에 저자의 흔적 남기기는 실패했지만, 시간당 계산이 엄청 비싼 선원을 방문한 것은 기억에 남는 일일 터였다.
'야, 우리 여기서 살자. 법당하나 짓고. 끼(氣)가 많은 네가 스님 노릇하고'
귀환 길에 오른 것이 못내 아쉬워서 그랬는지, 氣가 넘친 덕인지 몰라도 일행 중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안돼요. 가무음곡(歌舞音曲)을 벗삼아 주유(周遊) 한 세상이 존재의 기쁨인데요. 주체 못 할 방랑기(放浪氣)는, 한곳에 정착하면 바로 그 氣가 죽습니다.'
첫댓글 예수나 부처 도 한곳에 정착하지 않은 이유가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