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사상기행-(1)'엇'의 문화, 우리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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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와 미국 등 세계 사이의 한 ‘엇’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 ‘엇’에 대답하는 한민족 나름의 한 ‘엇박’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희승 국어 대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다른 말의 앞에 붙어서 ‘비뚜로’, ‘어긋나게’, ‘서로 걸쳐서’, ‘서로 비켜서’, ‘조금’의 뜻을 나타내는 말”.
‘엇박’은 다 알다시피 ‘혼돈 박’이니 대개 3박자와 2박자 혹은 4박자의 혼합이다.
이 ‘엇’, ‘엇박’이 가장 집약적으로 또 가장 미학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 음악에서 ‘엇모리’, ‘엇모리장단’이다.
이 방면 전문가인 이보형(李補亨) 선생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판소리, 산조, 무가, 민요에 쓰이는 장단의 하나로 매우 빠른 3박자와 2박자가 ‘3+2+3+2’로 짜인 10/8박자의 장단으로 엇모리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엇갈려 나아가며 몰아가는 장단이란 뜻이고 10박자의 장단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10박자의 장단이나 3박자로 된 긴 박자와 그 박자로 된 짧은 박자가 섞인 절름거리는 4박자로 느껴진다. 매우 빠른 10박자로 꼽을 때 음악이 맺는 경우에 제8박자에서 북의 온각 자리나 장구의 변죽을 크고 강하게 친다고 설명한다. 이 장단의 음악은 절름거리는 느낌을 주며 생동하는 리듬감이 있다. 이상이다.
그런데 ‘엇’의 한자풀이는 혹시 없을까? 있다. ‘(엇)’이다.
고시조집에 ‘농(弄)’, ‘엇농(엇弄)’ 따위로 적혀 있는 ‘엇시조’의 그 ‘엇’이다.
‘농’은 정조(正凋)에 대한 ‘변조(變凋)’를 뜻하고 ‘엇’은 이두식 표기로 ‘얻’의 한자화다.
‘엇가다’, ‘얼치기’의 뜻이므로 어쩌면 시도, 학문도 아닌 양자 사이에서 ‘엇가는 얼치기 형님짓’을 하는 나의 ‘엇공부’의 참뜻이기도 하다.
‘엇시조’에 관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망월은 눈속에 찬데’는 3.6.3.5조로서 정격 평시조에서 약간의 변조가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규격화한 율조여서 볼 때는 신선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엇시조다.
엇시조는 정격을 지키려는 이른바 사대부시조와 몌별(袂別)한 가객(歌客)이나 기루(妓樓)의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있으니 ‘엇’의 미학적 특징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혼돈적 질서’는 ‘생명성’이다.
한국 현대 대중문화 역사에 바로 이 ‘엇’이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일대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그것은 2002년 월드컵 축구 때의 붉은 악마들이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대~한’의 3박자와 ‘민국’의 2박자의 혼합이니 바로 ‘엇박’이요 다름 아닌 ‘혼돈의 질서’다. 뒤에 오는 장단인 ‘짝짝짝 짝짝’도 이와 똑같다. 문화적 원형이다.
그리고 그 시뻘건 도깨비 문양. 바로 4천500년 전 동이(東夷)족 추장 치우(蚩尤)다.
치우는 4천500여 년 전 북방계 유목문명을 청산하고 남방계 농경문명을 유일문명으로 세우고자 했던 중국 화하(華夏)족의 추장 황제(黃帝)에 대항해 유목과 농경의 결합을 위해 어로, 채취, 수렵 등 각종 생산양식을 병합하는 부족연맹체의 복합문명을 건설하려고 했다. 또 선진 유럽이 유일도시 유목이동 문명으로 세계화하려는 때 그 유목과 함께 농경 정착문명으로 지역화를 융합하려는 제3세계와 우리 민족 등의 지역화 입장에 대해 예언적 의미를 가진 신화적 콘텐츠다.
유목·농경의 문명복합은 다른 말로는 ‘디지털·에코’로서 이 역시 ‘엇’이다. 역사적 기준이다. 그렇다면 700만 붉은 악마의 대파도의 세 번째 충격은 태극기다.
그 절반이 넘는 젊은 여성들과 어린이들, 청소년들이 태극기로 망토해 쓰고, 태극기로 치마해 입고, 태극기로 온갖 보디 페인팅을 하고 거리와 경기장을 내닫는 장관은 5만 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인류의 출현 이래 최대, 최고, 최초의 일대 ‘신체 철학’, ‘몸 철학’ 사건이다. 온 우주와 심층 무의식의 일대 철학을 몸 위에 그려댔으니 말이다.
한국 태극기는 중국과 같으면서도 엄청나게 다르다.
이것이 전 인류 눈앞에 나타났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한국 공산(共産) 사상사 최고 이론가인 알마아타의 ‘박일’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인류의 철학사에 변증법을 넘어설 사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역(易)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한국 역이 바로 그 새 가능성이니 2002년 6월, 700만의 몸 위에 칠해진 붉고 푸른 태극과 네 간방(間方)의 괘상은 변증법을 극복하는 다름 아닌 새 역(易)인 것이다. 철학적 담론이다. 이상이 붉은 악마의 인문학, 문(文), 사(史), 철(哲)이다.
우리의 새 사상 공부와 새 철학 창조는 붉은 악마가 붉은 악마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니 바로 붉고 푸른 저 ‘엇’의 공부다.
세계현실의 이름은 ‘대혼돈(Big Chaos)'이다. 대혼돈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탁월하고 통합적인 새 과학뿐이다. 그러나 이 새 과학은 탁월하고 통합적인 새 인문학으로부터 새 담론의 촉매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새 담론은 문학·예술 등의 탁월한 새 기준(paradigm)으로부터 촉발되어야 하고 또 그 새 기준은 신화와 종교적 상상력 등에서 나타나는 새 원형(archetype)에 의해 발화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담론, 새 기준과 새 원형이 유럽과 미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일고 있는 ‘이스트 터닝(East Turning)·동풍(東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을 동아시아에서 발견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는 그것이 있는가? 중국에는 그것이 있는가? 있다.
그러나 없다. 있지만 살아 있지 않고 죽어 있다. 산 채로 죽임당한 것이다.
수천 년, 수백 년, 수십 년을 내리 교활하고 능란한 관료 지식인들의 주류 통치철학에 의해 산 채로 봉인당한 것이다. 그러니 허로는 있는 듯하지만 실로는 없는 것이다.
왕조의 변혁 때마다 그 계기를 만들었던 무수한 이름 없는 농민 반란군들의 사상이 바로 그것들이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동아시아에 그것은 아예 없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어디 있는가? 한국이다. 한국에는 그것이 없는 듯하지만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도처에 있고 고금에 다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바로 누이 한민족, 여러 뭇 민초들의 생명학인 동학에 있다는 점이다. 동학 사상의 특징은 광활하면서도 간략한 데에 있다(吾道博而約). 즉 모든 이치가 부적과 주문 두 가지 안에 압축돼 있다.
동학 사상 안에 유럽과 전 세계의 과학이 타는 목마름으로 찾고 있는 ‘담론(discourse)’의 내용이, 그들이 찾고 있는 ‘기준(paradigm)’이 그리고 그들이 그리도 절실하게 찾고 또 찾아 헤매고 있는 ‘원형(archetype)’이 숨어 있다.
우리의 ‘엇공부’는 바로 이 세 가지로부터 시작하고 확장 반복하고, 반복 확장하여 여러 차원, 여러 종류들로 비약할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현대 유럽의 최고 신비주의자다. 현대 녹색운동과 영성교육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 유언을 남겼다.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할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오는 법이다. 그 민족은 본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도 깊은 영성을 지닌 뛰어난 민족으로 본래부터 세계에 대한 큰 이상을 가진 민족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외국의 침략과 폭정으로 그 이상이 좌절되어 내상(內傷)이 깊어진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소명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 문명 당시 그 성배의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지금 그때보다 엄청나게 거대한 인류 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이 오고 있는 이때 그 민족은 아마도 극동에 와 있는 듯하다. 그들을 찾아가 경배하고 힘써 도우라!”
이것을 나에게 전한 사람은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 ‘다케하지 이와오’선생이다. 그리고 그 민족이 바로 한민족임을 가르쳐주었다. 다음에는 동학사상이 가진 문명사적 의미를 되살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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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09월 14일 -
[김지하의 사상기행] ②동학의 운세 삼은삼현(三隱三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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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본거지에서 매일신문 지상으로, 영남대에서 내 강의가 시작됐다.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 그리고 다음날 경주 용담(龍潭)으로 수은선생의 넋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거듭 확인한 것은, 영남에서 동학사상의 실질적 복권은 아직도 아득하다는 사실이다.
아득함에도 그리고 어떠한 피곤함이 있더라도 동학의 실질적 복권을 위한 나의 중계자적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동학의 실질적 복권은 종교와는 다른 독특함으로, 그럼에도 보편적인 새 문화의 대(大) 파도로 다가올 것이다.
그 과정은 여러사상들과의 조우와 융합, 그리고 젊은이들의 훌륭한 공부와 힘찬 실천을 통해 현실화 될 것이다.
이를 동학의 운세를 말한 삼은삼현(三隱三顯)을 통해 확인해보자.
삼은삼현.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난다’는 뜻의 이말은 동학역사의 운명이라고도 한다.
생각컨대 운명이 아니라 도리어 전개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세 번 숨었다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다시 드러나는 때는 완연히 환골탈태, 그 모습과 자취가 전과는 판이하게 달리 나타날 것이다.
동학 역사의 전개를 한번 살펴보자.
1864년 최수운(崔水雲)의 처형 직후 동학당은 풍비박산,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옥중에서 수운이 최해월(崔海月)에게 내린 지시가 그 시작이다.
나는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터이니
너는 높이 날고 멀리 도망치라.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이것이 ‘첫번째 숨음’이다.
그러면 ‘첫번째 드러남’은 무엇인가?
거의 40년에 가까운 해월의 지하조직 활동으로 전국화, 대규모화한 동학당이 포접(包接)과 육임제(六任制)로 생동하는 체제를 갖춘 후 삼례(參禮)집회, 보은(報恩)집회, 대한문복합상소(大韓門伏閤上疏)등 일련의 공개적, 합법적인 대중운동을 거친 끝에 마침내는 1894년 봄, 갑오무장혁명으로 천하를 뒤집고 집강소(執綱所)를 통해서 본격적인 대 정치변혁을 실천한 것이 그것이다.
‘두번째 숨음’은 무엇인가?
그 갑오년 겨울 공주 우금치와 태인 등지에서 치명적인 패전에 이어 전국에서 30만 내지 50만이 도륙당하고 그 뒤 세 해가 지나 해월이 체포,처형되면서 동학은 완전히 지하로 잠복하고 만다.
그렇다면 ‘두번째 드러남’은 무엇인가?
물론 이 두 번째 숨음과 두 번째 드러남의 시기에는 수십개 동학 분파의 확산과 각개약진이 있고 해월 최시형의 장자 최동희(崔東熙)의 고려혁명당이나 강증산(姜甑山)의 정세개벽(靖世開闢)운동, 김단야(金丹冶)의 형평사(衡平社)운동 등이 있다. 그리고 의암(義菴 孫秉熙)의 법통에 대한 의혹과 친일개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 복잡하게 저류에 깔려 있다.
그러나 대세(大勢)는 의연히 의암 노선에 있었으니 그것이 갑진개혁(甲辰改革), 천도교 창건, 신문화운동과 농민사(農民社) 및 부인회(婦人會) 등을 위시한 광범위한 민중변혁 운동, 그리고 저 3·1 운동과 그 이후의 천도교 청우당(靑友黨) 및 신간회(新幹會)운동, 지하 유격조직인 오심당(吾心黨) 활동에 이은 해방 직후의 삼일재현 단정반대운동(三一再現單政反對運動)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드러남’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단정 반대운동의 실패로 인한 대숙청, 동란 당시 남한에서의 친공 부역에 대한 국군수복대의 대학살로 동학은 남북한 똑같이 겨우 뒷골목의 가난한 간판 하나씩만 남기고는 거의 완전에 가까울 만큼 해체되어버린다. 그러고는 스산한 적막강산이다.
이른바 ‘세번째 숨음’이다.
반세기(半世紀)동안 어둠이 지속되었다.
죽었는가?.
동학은 이제 완전히 자기의 역사적 생명을 종결하고 말았는가?.
그래서 한낱 민족사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인가?.
그러나 수운 자신이 ‘우리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앞으로 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온다’고 했고 ‘삼은삼현’의 비밀은 도리어 해월 자신의 말씀이라는 설까지도 있다.
수운 이후 140여 년이 흘렀다. ‘삼은’ 이후 55년 여가 지났다.
동학에 대한 완전한 이해, 즉 ‘만사지(萬事知)’에 터한 ‘삼현’이 실현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있고 없음을 가리기 전에 동학이 지닌 진리의 새 원형(原形,archetype)에 대한 요구가 동아시아보다 오히려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식계에서 ‘이스트 터닝(東風)’이라 부르는, 일종의 예감과 갈증의 토네이도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얘기다.
국내에서는 목하 담론부재의 황량한 현실에서 지식인의 방황과 10대, 20대, 30대 초반 신세대의 갈증에 대한 아주 조그마한, 극소수 청장년층의 대안 모색의 한 담론으로 동학이 토론되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한 ‘삼은’에 이은 결정적 ‘삼현’이 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만약 참으로 ‘삼현’이 온다면 그것은 왜, 어떻게, 어떤 형태로, 누구에 의해서 올 것인가?
그 특징적 사안들을 열한 개 정도의 예감 영역의 항목으로 약술해볼까 한다.
하나.
동학 진리의 특징은 넓으나 간략한 곳에 있다(吾道博而約). 동학사상은 앞뒤 두 개의 주문(呪文)과 하나의 부적에 요약된다. 앞 주문인 강령주문(降靈呪文)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에 이르러 나에게 크게 내리시기를 바라옵니다(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수운은 이때의 ‘지극한 기운(至氣)’을 ‘극(極)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混元之一氣)’이라 해설했다.
‘극에 이르름’이란 우주 진화의 극치, 곧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로서 동학 용어로는 ‘지화점(至化點)’이겠다. 그리고 ‘한 기운(一氣)’이란 주역(周易)에서 우주의 체계적 질서를 상징하는 ‘태극(太極)’의 다른 말이다.
그러매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이란 ‘혼돈의 질서’를 말하니 바로 형용모순(形容矛盾)과 반대일치(反對一致)의 역설로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른바 ‘카오스모스(chaosmos)'이다. 더욱이 ‘극에 이르름’이라 했으니 동아시아 성리학의 최고 난제인 이(理)와 기(氣)의 회통이라는 커다란 차원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지성계가 보는 인간과 지구와 주변 우주의 현실은 한마디로 ‘대혼돈(big chaos)'이다.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은 탁월한 통합적 과학뿐인데 이 과학을 촉발할 수 있는 ‘혼돈 나름의 질서’의 인문학적 원형과 기준과 담론이 유럽과 아메리카에는 없다.
그들이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현상, 즉 ‘이스트 터닝’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중국에 있는 것도 아니다. 유럽도 중국도 그것이 있는 듯하지만 없다. 중국의 경우, 그것의 가능성들을 산 채로 죽였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그것이 없는 듯하지만 살아 있다.
‘지극한 기운’, 즉 ‘지기(至氣)’, ‘극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元之一氣)’. 이것이다. 바로 ‘혼돈의 질서’다.
그것이 살아 있음을 어찌 아는가?. 2002년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라는 ‘엇박’, ‘혼돈박’을 보고서 안다. 그것은 곧 지금 오고 있는 ‘쓰나미 시대’, ‘온난화’와 ‘생태계 오염’과 ‘이산화탄소’의 시대를 관통하게 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새 지구문화의 기준, ‘패러다임’인 것이다. 당연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둘.
두 번째 주문인 본주문(本呪文)의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는 세계 지성과 과학계가 갈구하고 있는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뼈대다. 즉, ‘디스커스(discourse)’다. 이 주문이 바로 ‘모심’과 ‘살림’과 ‘생명학·우주생명학’의 연찬 및 창조와 실천의 전 과정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주문 열석 자는 그 의미체계로서는 ‘시천주 조화정 만사지’의 삼단계이지만 위상구조로서는 ‘영세불망’까지 더해서 사위체(四位體)다.
이것은 ‘천부경(天符經)’의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룬다(三四成環)’의 비밀에 이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이치요 위상과 활동 사이의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으로서, 유불선 및 그리스도교, 모슬렘과 자기조직화의 진화론, 나아가 창조적 진화론, 불확정성의 원리와 관찰자 참여 우주론, 심리물리학과 동아시아의 역학(易學)등을 통합한다.
만약 ‘삼은삼현’이 단순한 불행이나 운명 정도가 아니라 동학사상의 역사적 전개의 필연이요 법칙이라고 할 경우, 주문의 의미체계 및 위상구조와 그 논리적 연관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첫번째 드러남’이 최해월류의 ‘모심(侍天主)사상 시대’라 보고 ‘두번째 드러남’이 손의암류의 ‘살림(造化定)사상 시대’라 한다면, 이제부터 오고 있는 ‘세번째 드러남’은 당연히 ‘생명학·우주생명학(萬事知)사상 시대’가 될 것이다.
<영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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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사상기행]-(3)한울님의 부적 '태극궁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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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을 이어 세번째 드러남의 예견을 계속 이어가도록 한다.
셋.
혼돈적 질서의 과학은 생명학·우주생명학의 담론에 의해 촉발되고 그 담론은 ‘극에 이른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 즉 ‘혼돈의 질서’라는 기준에 의해 이끌린다면, 그 기준은 결국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점인 오늘에서 인류 전체와 생명·비생명, 인격·비인격을 모두 포함한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원형을 동반하는 기준일 것이다.
동학에 바로 그 원형이 있는가? 그렇다. 있다. 그것도 살아 있다. 1860년 경주 용담에서 최수운이 받은 계시의 첫 번째가 바로 그 원형에 해당하는 한울님의 부적(靈符)이다.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고 또 그 모양은 궁궁(弓弓)이니 ‘태극궁궁’이 곧 후천개벽 시대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원형인 것이다. ‘태극궁궁’은 무엇인가? 태극은 선천시대의 생명학·우주생명학인 주역의 질서 정연한 코스몰로지의 상징이고 궁궁은 후천시대의 혼돈한 삶의 비결인 ‘정감록’의 암호다. 후천개벽은 후천에 의한 선천의 섬멸적 파괴가 아니라 후천을 중심으로 해체·재구성되는 선천과 후천 사이의 공존과 균형, 후천 쪽으로 약간 더 중심이 기우는(時中원리) 역철학, 음양원리의 핵심이다. ‘기우뚱한 균형’인 것이다.
따라서 ‘태극궁궁’은 이미 19세기에 세계화한 후천개벽 시대를 살아갈 민중의 새 삶과 새 세계의 새로운 원형이 되는 것이다.
넷.
20년 전 강원도 원주에서 시작된 생명운동, 유기농생협, 반공해 환경운동, 생태생명문화운동 등이 모두 동학사상, 특히 그 중에서도 최해월 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조직적 실천을 토대로 했다. 원주에서 비롯된 생명운동은 이후 계속적으로 확충되면서 종교, 과학, 시민, 빈민, 예술, 그 중에서도 유독 시문학에서 뚜렷한 성장을 보이며 오늘에는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생명과 평화의 새 문명을 건설하는 큰 문화 운동으로까지 비약하고 있다. 이것은 ‘세번째 드러남’과 연관이 없는 것인가?
다섯.
오늘날 전 인류와 함께 동아시아, 특히 한민족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롭고 평화적인 문화대혁명이고 동아시아 대문예 부흥운동으로서 정치와 경제에 앞서 문화적인 대전환이다. 동학은 바로 이 대전환의 기점(起點)이다. 우리에게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문화혁명으로, 후천개벽은 신화가 아니라 문화과학으로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즉 ‘상상력’과 ‘미학’ 방면의 대규모 사건이 된 것이다.
여섯.
동학은 기초예술과 문화산업 사이에, 문화사업의 ‘경제력(상품가치)과 질(미학적 품질)’사이의 ‘긴장’에 대한 웅숭깊은 대답으로서 검토되기 시작한다. 동학은 붉은 악마, 촛불에서 한류(韓流)열풍에 이르는 눈부신 비약을 설명하고 다시금 그 개벽적 에너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
김용옥의 ‘도올심득동경대전’역시 신세대 속에서 동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에 기여했다고 한다. ‘세번째 드러남’이 붉은 악마, 촛불과 한류에 연계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전 인구의 79%를 차지하는 10대, 20대, 30대 초반 신세대 남녀의 이른바 붉은 악마 현상, 즉 ‘엇박’, ‘치우’, ‘태극기’ 문화의 새로운 비약, 새로운 차원 변화의 근거이자 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세번째 드러남’의 주체 문제다. 여기엔 필연코 ‘자재연원(自在淵源)’, 즉 ‘가르침의 샘물이 내 안에 있다’, 또는 ‘자기 가르침을 자기가 배운다’는 동학의 진리대로 붉은 악마 세대 자신이 자신들이 내세우고 약동했던 ‘엇박’, ‘치우’, ‘태극기’의 문화적 원형, 역사적 기준, 철학적 담론을 토론하고 공부해야만 한다.
‘세번째 드러남’의 주체 문제는 바로 교육혁명에 있는 것이다. 이것 없이 우리나라의 교육,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여덟.
‘혼돈의 질서’, ‘지극한 기운’, ‘궁궁태극’, ‘모심과 살림’, ‘생명학·우주생명학’ 등 모든 사상 안에는 세 가지 원리가 숨어 있다. 민중성, 여성성, 영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세번째 드러남’의 필수조건이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성, 모성, 살림의 능력, 모심의 능력은 으뜸가는 원칙이요, 그 중심이다. 새 삶과 새 세계, 새 문화와 새 문명 창조의 주체 중의 주체는 바로 여성이요, 어머니요, 할머니인 것이니, ‘세번째 드러남은’은 어쩌면 원시와 고대를 관통했던 전통 신화의 창조적 회복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다름아닌 ‘궁궁(弓弓)’인 것이다. 그래서 ‘궁궁태극’이라고 말한다.
아홉.
19세기에 식별되지 않았던 지구와 주변 우주의 후천개벽적 사태들이 이제는 거의 일상화되고 있다. 인간의 내면적 황폐와 불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에 따른 빈·부국 사이의 격차 심화와 시장 불안, 전 지구 생태계의 오염, 테러와 전쟁 이외에 온난화, 기상이변, 지각의 대변동, 북극 해체, 빙산과 그린랜드의 해빙, 이산화탄소의 과잉배출, 황사, 남반구 해수면 상승과 장기적 폭염, 저지대 곡창의 침수와 식량난의 도래, 지구 자전축 및 대륙·해양 지각판들의 충돌, ‘쓰나미’에 이은 폭설, 혹한, 먹이사슬 파괴 등은 문자 그대로 후천개벽이다. 개벽의 인식과 대응으로서 ‘세번째 드러남’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닌 필연적 대세인듯 하다.
열.
집단과 종(種)선행론으로 기울었던 다윈 이후 자연선택의 진화론이 타파되고 자기 선택과 자유의 진화론,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이 상승하면서 집단주의, 공산주위, 파시즘, 공동체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개체, 개별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는 분권(分權)적 융합, 퓨전’의 ‘내부공생(內部共生)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상 및 역사인 ‘풍류’와 ‘화백’과 ‘신시’ 등에서 관철 되었던 ‘호혜(互惠)’와 기존의 ‘교환’시장이 이중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재분배(再分配)’를 실현하는 ‘품앗이’와 ‘계(契)’의 전통, 그 ‘개체적 융합’의 전통을 새롭게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학의 ‘포(包)’와 ‘접(接)’, ‘육임제(六壬制)’등은 모두 이 같은 고대 전통의 부활이며 실천이었다. 사회경제사적으로, 경제인류학적으로 신시는 곧 호혜요, 계이며 그 정치적 관철양식이 화백의 직접민주주의, 전원일치제이고 거기에 따르는 생명과 평화의 문화, 생명학·우주생명학이 곧 풍류였다. 그 풍류의 근대적 부흥이 동학이었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동아시아에서 이것이야말로 동학의 참다운 ‘세번째 드러남’이 아니겠는가!
열하나.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인 동학은 한발 더 나아가 창조적 진화론을 관철했다. 왜 그러한가?
창조론과 진화론 결합의 조건은 ‘신(神)의 규정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을 모색하는 과학철학 및 과학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규정과 신의 본질 설정으로 가득 찬 기독교(모슬렘 역시 마찬가지)신학 텍스트로부터 유럽신학과 철학, 과학이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바깥으로 추방했던 ‘무(無)’, ‘공(空)’, ‘허(虛)’, ‘비존재’, ‘혼돈’, ‘정열’, ‘무의미’ 등을 다시 끌어들여 타협하고 있다. 신이 공허이든가, 배고픈 영혼이나 굶주린 비움이 아니라면, 혼돈이면서 탈혼돈인 모순이 아니라면 창조와 진화는 서로 만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복수하는 자’, ‘저주하는 자’, ‘사랑하는 자’ 등등 무수한 명함을 가진, 그야말로 존재 그 자체인 신은 결코 생성도 창조도 혼돈적 질서에도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라! 최수운은 두 번째의 본주문 해설에서 가장 중요한 ‘하늘’, 즉‘천(天)’을 한마디 해석도 없이 ‘모심’에서 ‘님’으로 그냥 넘어가고 만다. ‘신’과 ‘하늘’은 그야말로 무요, 공이요, 허이며 자유요, 빈터요, 가능성이요, 혼돈이며, 비존재이니 그러므로 도리어 생성이요, 변화요, 과정인 것이다. 바로 ‘없음’이니 곧 ‘살아 있음’이다.
이 모든 ‘세번째 드러남’의 특징들을 미학 쪽에서 정리해보자. 그것은 곧 ‘흥비(興比)의 미학’이니 흥의 창조력을 중심으로 교술과 비유를 배합해 ‘비판적 감동(탈춤, 판소리, 진경산수, 속화, 민화, 민요의 산조, 시나위, 허튼소리, 허튼 춤 등 한류의 전통적 원리)’에로 이끄는 미학 원리다. ‘세번째 드러남’은 다분히 미학의 얼굴을 하고 올 것이다. 한(恨)을 동반한 흥(興)의 미학, 한을 흰 그늘로 극복하고 흥이 중심이 된, 즉 흥비(興比)의 미학. 왜냐하면 문화, 감성, 상상력, 새 세대가 거대한 차원변화, 후천개벽의 특징적 주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한류다. ‘한류’의 저 앞날에 드디어 ‘세번째 드러남’인 ‘삼은삼현’의 대문예부흥,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아마도 남한의 ‘한(恨)을 밑에 거느린 흥’의 미학과 북한의 ‘흥취(興趣)론’이 만나는 민족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만사지’요, 그것이 생명의 차원변화 즉, ‘지화(至化)’, ‘만 년의 진화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는’ 대개벽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 하나의 고구려를, 새 세계를 잉태하고 출산할 것이다.
<영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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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0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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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사상기행-(4)'모심'과 '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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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이른바 ‘모심과 살림’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전통적인 생명론에 대해 20여 년 넘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한국의 생태 담론·생명론의 핵심은 ‘모심’이라는 것이다. 모심이 충족돼야 살림이 가능하고, 살림이 충족돼야 아름다움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모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생명론, 환경운동, 생태학적인 모든 모색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또는 미적 충족감에 도달해야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즉, 생명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미적 판단에 도달해야, 생명이 아름답다는 것에 도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딛고서야 비로소 각 부분, 교육·문화·언론·과학에 있어서 함부로 생명 복제니 유전 공학이니 하는 얘기가 안 나오고, 환경문제도 온전하게 풀릴 길이 생길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오래된 전승들을 원형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인류의 시원으로서의 아시아의 고대, 아시아의 상고·원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족의식은 세계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전승을 얘기하는 것은 곧 세계적 전승의 중요한 부분을 얘기하는 것이 된다.
우선, 우리 민족의 사유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 ’, ‘ ’, ‘ ’, ‘ ’ 네 가지를 살펴보자. ‘ ’은 광명, 빛, 햇빛, 태양을 말하고, ‘ ’은 어둠, 물, 구멍, 여성성, 어둑어둑한 것으로 노자가 동굴이나 현빈(玄牝)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 ’은 아시다시피 우주, 큰 것, 낱 개, 한 개, 중앙을 의미한다. 우주를 말한다.
그리고 ‘ ’은 햇살, 솔개, 새, 생명을 뜻한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네 가지 말은 모두가 생명과 연관된다. 바로 생명의 원초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사상, 동아시아 고대의 전승은 생명과 깊이 뿌리를 대고 있다.
두 번째, 우리 민족은 북두칠성을 보고 경배하고, 북두칠성을 통해서 우주에 대한 인식을 키워왔고, 특히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관계를 통해서 종교적 심성을 발전시켜 왔다.
스티븐 호킹도 지구 생명의 기원을 북극에 두고 있다. 북극은 물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전승들은 모두 북극, 북극성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고 있다. 한민족, 또는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고대 생명론, 고대 생태담론의 기원은 바로 북극에 있는 것이다. 지구의 생성도 북극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것은 설화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세 번째는 아주 쉬운 얘기지만, 우리 할머니들은 정화수 떠놓고 삼신(三神)할머니한테 생명의 탄생을 빌었다. 좋은 아들 점지해달라고. 삼신은 생명과 바로 직결되는 신앙 대상이었는데, 이것은 천(天)·지(地)·인(人)·삼재(三才)·삼극(三極)사상의 기원이기도 하다.
1만 4천년 전인가 2만년전 직녀성, 태양계 중심의 남두성, 은하계 중심의 북두칠성 등 삼신이 지구 중력권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 우주의 상태가 가장 평화로웠다는 설화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삼신은 생명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산해경(山海經)에는 예맥·숙신 등 동이족, 한민족을 ‘호생불살생군자지국(好生不殺生君子之國)’이라고 표현한다. 호생은 산 것을 좋아한다, 살리기를 좋아한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살생은 산 것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져서, 민족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실제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적 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생명 또는 산 것을 좋아하고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 근본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우리 민족의 종교, 시원의 종교는 풍류도(風流道)이다. 풍류도에 대해 고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이 풍류다. 그것은 애당초부터 유(儒)·불(佛)·선(仙) 3교를 아울러 포함하고 있고, 인간뿐 아니라 뭇 동식물과 무기물까지 포함하여 산 것, 존재하는 것 일체를 사랑하고 가까이 사귀어서 감화, 변화, 진화시킨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包含三敎 接化群生)”고 설명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뭇 동식물, 산 것들, 그리고 살았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실제 산 것과 다름없는 무기물들, 돌, 흙, 물, 바람, 티끌마저도 다 산 것으로 인정해서 접하고, 사귀어서 감화시키고 진화시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접화군생(接化群生), 네 글자 안에 현대생태학, 생명론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이다.
생명의 가장 큰 특성은 세 가지 또는 네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영성,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네 가지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영성을 다양성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성에만 영성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관계성, 순환성에도 다 영성이 작용한다. 그러나 영성만 따로 떼어서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세 가지가 되든가 네 가지가 되는 것이다. 접(接)은 관계성, 화(化)는 순환성, 군(群)은 다양성, 생(生)은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생명의 중요한 특성들을 접화군생 네 글자가 다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생태학 뿐만 아니라 탈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철학 쪽에서도 중요하게 제시되는 문화의 내용에 있어서 미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인 패러다임을 모색하려 할 때, 접화군생처럼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은 드둘다.
변화한다는 화(化)를 진화로 생각하면 생태윤리적 패러다임이 되고, 감화라고 할 때는 미적인 패러다임이 된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나온 ‘나의 청춘 마리안느’라는 영화를 보면, 뱅상이라는 주인공이 기타를 치니까 기숙사 안에 있던 친구들뿐만 아니라 사슴들, 토끼, 다람쥐들이 감동하여 함께 창밖에 몰려드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물이나 풀, 흙, 돌까지 감동을 했다는 것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해 유추한다면 그것까지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이게 접화군생이 아닐까.
예술의 최고 목표는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감동시켜서 그의 행동이라든가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그런데 진짜 예술의 대가들은 비밀일기라든지 여러 가지 흔적 없는 기록들을 통해서 또는 대화를 통해서 사물까지 감동시키는 것이 예술의 최고목표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동서양이 같다. 동식물뿐만이 아니라 무기물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을 때 예술은 비로소 종교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최고목표다. 그렇다면 접화군생의 풍류도가 어째서 화랑들의 수련지침이었는지, 그리고 많은 선인(仙人)들의 수련 목표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오늘 우리가 한국 생명론의 맨 마지막 결론을 왜 미적 판단, 미적 체험에 두는지, 풍류가 왜 종교이면서 동시에 예술인지, 또 생태 환경운동의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문화운동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생태적 감각으로 바꿔야 해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감시 고발만 일삼는 환경운동이 어째서 미래의 전망이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면은 하느님이 창조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창조를 끝내고 나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라는 구절속의 “참 좋다”라고 했던 부분이다. 그것처럼 멋진 것은 없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완성의 의미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프랑스 혁명을 실패작으로 규정한다.아주 냉정하게, 도덕과 자연충동, 즉 정치나 경제적 충동, 또는 그 방향에서만 혁명을 다그쳤기 때문에 그렇게 혼란이 왔다는 것이다. 5월 학살, 루이16세 처형, 그 뒤로도 혁명이념의 전파라는 슬로건 아래 나폴레옹은 전 세계를 짓밟고 다녔다. 이것에 대해 실러는, 만약에 제3의 충동인 미의 충동 또는 종교적 충동인 유희충동에 기초를 두고 혁명을 진행했더라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즉, 미적 교양과 미적 교육을 통해서 완성된, 평형 잡힌 인간, 즉 옛날 종교적인 인간에 대해서 요구했던 그런 근본적이고 아름다운 인간, 온전한 인간에 대한 교육을 대중화시켜서 그런 인간들이 세계를 변혁시키는 운동을 했더라면 그것과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다시 문제가 되는 내용이다. 미적 교육과 상상력, 미적 판단의 온전함, 이것들을 통해서 성스러움에, 거룩함에 도달했을 때-이것이 최고의 미인 숭고미이다- 세계가 제 모습을 찾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찾는 미적이면서도 윤리적인 패러다임의 핵심내용이 아닐까. 하느님이 자기가 만든 예술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듯이 우리가 변혁시킨, 치유한 세계를 두고 아름답다 하고, 우리가 치유해야 할 세계의 미래상을 아름답다고 보고, 거기에 근접한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그런 미적 의식을 가질 때, 우리 소인들, 쌍놈들도 비로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영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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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0월 06일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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