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고신대학교 교수)
1. 의료선교의 기원과 발전
현대선교운동 개관
근대선교운동은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쿡(David Cook)선장의 항해기인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 [지리학 입문],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등을 읽고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 성경연구를 통해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알게 된 그는 1792년 [이방인의 개종을 위하여 우리들이 사용해야 할 책임에 관한 연구](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라는 제목의 87페이지에 달하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케리가 속해있던 침례교회를 포함하여 당시 교회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다. 첫째는 선교명령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명령으로 이해했다. 승천시 예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은 오직 사도들에게 주신 명령이지 오늘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받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거나 선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당시 교회는 선교의 이상을 갖지 못했다. 사실 예정론은 복음전도의 사명을 약화시키지 않고 도리어 전도의 희망과 동기이지만 당시 교회는 예정론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 케리는 선교는 개인과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위의 소책자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는 1792년 5월 30일 노팅검에서 모인 침례교 교역자 회의에서 이사야 54장 2, 3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는데 대단한 열정으로 설교하고 선교를 강조하였으나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케리는 침례교선교회(BMS, 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고, 자신이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고 1793년 6월 13일 아내와 4자녀, 그리고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인도를 출발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선교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793년의 케리에 의해 조직된 침례교선교회, 케리의 호소와 선교활동, 그의 편지와 보고서 등은 근대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런던선교회(LMS, 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 스코틀랜드 및 글라스고선교회(Socttish and Glasgow Missionary Society, 1796), 화란선교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1797), 영국교회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 미국해외선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 스위스의 바젤선교회(Basel Mission, 1815)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선교회(Berlin Missionary Society, 1824) 등과 같은 많은 선교단체들이 조직되었다.
흔히 케리가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영국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였다. 그는 1719년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Jesus shall reign where'er the Sun)라는 찬송을 썼는데, 이 노래는 후일 선교의 찬송이 되었다. 그는 영국의 비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1702년 독립교회 목사가 되었고 평생동안 약 600여편의 찬송가를 작시하여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로버트 밀러(Robert Millar of Paisley)였다. 그는 1723년 [기독교의 복음전파와 이교도 정복사](A History of the Propagation of Christianity and the Overthrow of Paganism)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교도를 회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중보기도라고 주장하고 중보기도를 호소한 바 있다. 그의 호소는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약 20년 후 영국에서는 많은 기도모임이 일어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였다. 윌리엄 케리 이전에도 선교를 강조한 이들이 있었으나 케리 이후 비로소 영어권 세계의 선교사업은 본격화되었고, 19세기는 위대한 교회사학자인 라토렛(K. S. Latouette)의 말처럼 '선교의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of Missions)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18, 19세기를 거쳐가면서 개신교의 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수행되었다. 유럽과 영미의 개신교회들은 선교사업을 감당할 힘도 없었고, 그 의도도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선교에 대한 소명과 사명을 가진 자발적인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초교파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 첫 단체가 1793년에 조직된 '침례교선교회'(BMS)였다. 비록 그 이름은 '침례교선교회'였으나 이 단체는 침례교회라는 교회기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에는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교회가 중심이 된 교파적 선교단체가 생겨났고, 또 특정한 교파나 교단, 혹은 선교기구의 지원 없이 시작된 신앙선교(Faith Mission) 단체들도 생겨났다. 그 외에도 특정한 인종, 예컨대 유대인, 인디안, 에스키모 등과, 특수계층 예컨대, 나환자, 부녀자나 아동, 군인 등과 특수한 사업, 곧 성경번역, 문맹퇴치, 봉사와 구호 등을 주로 하는 다양한 선교기구나 단체도 조직되어 스테판 닐의 말처럼 "위대한 선교단체의 시기"(the great age of societies)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 선교사들은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였고 출신 배경도 비교적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영국교회선교회(CMS), 중국내지선교회(CIM, China Inland Mission, 1865년 창립)를 비롯한 당시의 선교단체들은 선교사의 학력은 중시하지 않았다. 영국교회선교회의 경우 1815년에서 1891년까지 파송한 650명의 선교사 가운데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은 37%에 해당하는 240명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내지선교회의 경우는 이보다 더 낮았다. 선교사의 자격에 있어서 교육정도를 문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피선교지에서도 비슷한 계층의 사람과 접촉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선교사들이 상류층의 사람을 회심시키지 못한 점에 대한 비판은 항상 옳지는 못하다. 선교사의 교육정도에 있어서 스코틀랜드와 미국은 예외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당시로는 최상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 선교사로 파송 되었다. 그것은 장로교전통이 교육을 강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선교사의 교육정도를 중시하였다. 예컨대 1812년 미국이 파송한 첫 선교사들이 모두 신학교 출신이었고, 그 아내들도 교양을 갖춘 부인들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교육과 교육선교, 혹은 선교학교의 설립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스코틀랜드교회의 첫 해외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였다. 그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인데, 고등교육은 단지 기독교인의 교육수단으로 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접촉할 길이 없는 엘리트 집단에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었다.
의료선교의 기원과 발전
교회의 의료활동 혹은 의료사역은 근본적으로 복음증거를 위한 선교사역이지만 선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봉사였다. 교회의 의료활동이 복음화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선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사도시대부터 선교의 3대 분야는 전도(preaching), 교육(teaching), 의료(healing)였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선교사역의 중요한 3 영역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3 영역의 선교가 실행된 것은 19세기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주로 설교가 선교사역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선교는 주로 안수 받은 목사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고, 결과적으로 남성들의 독점적인 활동영역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를 거쳐가면서 선교에 있어서 3가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목사선교사만이 아닌 평신도선교가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선교영역의 다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전문인 선교가 강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료활동과 교육활동이 선교지에서 환영을 받았고 의료 및 교육선교는 아아제국(亞阿諸國)의 선교에서 가장 주요한 사역이 되었다. 그 결과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서양문화의 배경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의도적이었든, 비의도적이었든 간에 서양 문화의 전파자(Kulturpropagandisten)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9세기 이후 선교에 있어서 두 번째 변화는 여성 선교사의 출현이었다. 그 동안 남성 위주의 선교사역이 수행되었으나 여성도 선교의 동반자로 인식된 것이다. 이것은 평신도 사역의 증가와 함께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런 변화는 19세기부터는 여성의 헌신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은 개신교만의 경우가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도 동일했다. 특히 19세기 중엽을 거쳐가면서 거의 모든 선교단체들은 독신 여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독신 여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반대의 여론도 없지 않았으나, 19세기말에 와서는 의사, 간호사를 포함한 여 선교사의 숫자가 남자들의 숫자를 능가하였다. 이 점은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사역이 선교현장에서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셋째는 세계선교의 주도권이 종전의 구라파(특히 영국)교회에서 미국교회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스테판 닐은 심지어 이재는 "유럽의 시대는 지나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00년대를 거쳐가면서 미국에서는 젊은 학생들에 의해 선교운동이 일어났고, 점차 선교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였는데, 이 점은 파송 선교사 수에 있어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이런 현상은 심화되었다. 일례를 들면, 1900년도의 개신교의 총 선교사 수는 1만3천6백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영국출신이 5천9백 명이었고 미국출신 선교사수는 4천명에 달했다. 이 자료를 보면 영어사용권의 선교사 수가 전체 개신교 선교사의 4분지 3을 점하고 있었고, 미국출신 선교사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에는 미국선교사의 수는 1900년의 두배가 되었고, 1925년에는 미국선교사의 수는 1만3천명으로 증가되어 전 세계 선교사수의 50%를 넘었다. 이런 미국 선교사들의 급증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와 그 정책은 선교영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로 선교사의 사역을 선교지에서의 사역만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호소, 선교교육 그리고 본국에서의 사역 등 선교를 보다 광범위한 교회적 사역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또 선교사의 안식년 제도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1800년까지는 아직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 할 전망이 밝지 못했다. 물론 이 때는 기독교는 순수한 유럽적인 종교로서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선교운동의 결과로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서 자리를 확보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는 종교개혁이후 발전이 있었으나 18세기, 특히 19세기 현대선교를 통해 개신교는 비로소 세계적인 종교로 발 돋음 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 시기 선교운동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서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합리주의에 난타 당하여 백인의 종교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루스 터커(Ruth A. Tucker)의 가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확실히 19세기는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다.
전도나 설교 외에 의료나 교육활동이 강조된 것은 19세기 이후라고 지적했는데, 의료활동은 교육활동과 더불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제국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이 문명의 도구는 효과적인 전도의 수단으로 강조되었던 것이다.
교회의 의료적 봉사는 윌리엄 케리의 현대선교운동과 거의 동시적으로 시작되었다. 윌리엄 케리가 1793년 인도로 갈 때 동료였던 존 토마스(John Thomas)는 의사였고, 그를 통해 선교지에서의 의료봉사가 시작되었다. 또 18세기에 트란크바르 선교회(Tranquebar Mission)에는 의료활동을 하는 의료인이 있었으나 덴마크의 선교사 파송기관에 의해 선교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때까지 선교란 직접적으로 '말씀의 증거'라고 보았고, 전문인 선교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선교사로 파송되어 의료활동을 하는 선교사가 등장한 것은 사실 19세기 이후였다. 보다 광범위한 국제적인 활동이 요구되던 19세기 후반에 와서 의료적 봉사 정도가 아니라 공인된 선교사로서 의료선교사가 요구되었고, 선교활동은 의료 영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19년 실론(Ceylon)에 도착한 미국출신의 의사 존 스커더(John Scudder)는 미국교회가 파송한 첫 의료선교사로 불리고 있다. 그는 실론과 인도에서 36년간 의료선교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13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유아기에 죽은 4명을 제외하고 장성한 9명 중 7명이 후일 아버지를 이어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존 스커더의 손녀인 이다 스커더(Ida Scudder) 또한 의료선교사가 되어 인도 벨로어(Vellore)에 병원을 세우고,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을 세우는 등 위대한 의료선교사로 일생 동안 봉사했다. 1835년 중국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한 피터 파커(Peter Parker)도 초기의 의료선교사였다.
최초의 여자 의료선교사는 필라델피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1870년 인도에 도착했던 미국 감리교의 클라라 스웨인(Clara Swain)과 1880년에 인도에 도착한 화니 버틀러(Fanny Butler)로 알려져 있다. 이들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작은 진료소 혹은 시약소로 시작하여 후일에는 병원을 건축하였고, 보다 조직적인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최초의 간호사 선교사는 1884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던 미국의 엘리자베스 맥케니(Elizabeth M. McKechnie)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후일에는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의료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전에도 목사선교사들이 선교지로 파송되기 전에 짧게는 3개월 혹은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의 의료교육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런던선교회(LMS)의 파송을 받아 1841년 아프리카에 파송된 이후 23년간 사역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톤(1813-1873)이나, 1854년 중국에 파송되었던 허드슨 테일러(1832-1905) 등은 상당한 정도의의학교육을 받았던 인물이지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저들의 의료활동은 단지 '부수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의료선교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역은 나환자들을 위한 사역이었다. 영국 더블린에서 1894년 윌스리 베일리(Wollesly C. Bailey)라는 장로교 교육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나환자선교회(The Mission to Lepers in India and the East)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선교회는 특히 인도에서 나병으로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기독교적 인간애와 사랑으로 거룩한 봉사의 역사를 엮어 갔다는 점에서 의료선교사의 획기적인 봉사였다. 이 선교회는 부산과 대구, 광주에 있던 나병원과 수용시설에도 재정적인 후원을 한 바 있다.
의료선교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이다. 의사이자 신학자였고, 유명한 음악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는 1913년 서부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여 람바레네(Lambarene)에 병원을 건립하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형제들'의 생명을 돌보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공중보건 혹은 의학의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1851-1897년 어간에 개최된 국제 공중위생협회(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s)는 이런 국제주의의 중요한 징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보건(international health)의 문제는 선교단체들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러나 선교단체들은 제한된 자원 때문에 선교지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의료선교의 목적이 복음전도를 위한 간접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즉 선교단체들은 의료활동은 복음전도를 위한 실제적 형식으로 보았고, 치유사역은 복음 전도의 과정을 평탄케 해주는(softening up) 것으로 믿었다. 중국에서의 경우가 이 점을 확인해 준다. 1907년 상해에서 개최된 '중국백주년선교대회'(China Centenary Missionary Conference)에서는 선교지에서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막아줄 수 있는 교회의 구제를 요구하기 때문에 본국에 더 많은 의료선교사를 파송해 주도록 요구했다.
의료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예방활동, 보건교육, 진료와 치료를 통해 많은 기여를 했지만 공중보건 프로그램은 의료선교활동의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와서 의료선교사의 수는 급증하였다. 이미 1925년에는 2천명이 넘는 미국과 유럽의 의사, 간호사들이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1935년 중국의 경우 전체 병원의 절반 이상이 선교부가 운영하는 선교병원이었을 정도였다.
2. 한국에서의 의료선교활동
기독교의 한국전래
한국에서의 기독교와의 접촉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개신교와의 첫 접촉은 1832년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 1803-1851)를 통해서였다. 그후 제레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의 내한과 순교,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인 존 로스(J. Ross, 1841-1915)와 존 메킨타이어(J. MacIntyre, 1837-?) 번역을 통한 간헐적인 접촉이 있었으나 1880년대 이전까지는 기독교가 국법으로 금지된 상태였으므로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1880년대 이후에는 선교사가 내한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전래,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876년의 개항과 외국과의 외교 관계의 수립 등 국내외의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 통상조약'의 체결로 1883년 5월에는 미국공사관이 설치되었고 1884년에는 영국, 독일 등과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길목에서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본국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장로교회는 이미 1830년대부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조선의 개방정책에 자극을 받아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녹스(George W. Knox), 리드(Gilbert Reid) 같은 선교사들은 선교본부와 선교잡지에 한국선교를 청원하는 편지를 썼고, 가우쳐대학의 학장이었던 가우쳐(John F. Goucher)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의 결과로 미국으로 파견된 견미(遣美)사절단의 대표인 민영익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도 선교사역이 시작되기를 바란다"며 2천달러의 기부금을 내놓기도 했다. 1883년 7월 16일 제물포를 출발하여 요꼬하마를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민영익 일행이 시카고로 가는 열차 안에서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은 가우쳐박사를 만난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가우쳐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1883년 11월 6일에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 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또 그의 요청에 의해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는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2주간 한국을 방문하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일본에 있던 이수정은 '한국의 실정'이라는 글을 [세계선교 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기고하고 한국선교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 글이 발표된 후 북장로교 선교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한국선교의 긴박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호소가 마케도니아의 부름이 되어 1884년 이래로 한국에 여러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1892), 미국 남감리교(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교회가 한국선교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헌법상 정교(政敎)가 분리되어 국교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적 형태의 기독교가 발전한 대표적인 국가였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운동은 미국의 여러 교파 혹은 교단 선교부에 의해 주도되었고, 1880년대 말 이후 미국 외에도 호주, 캐나다 교회들에 의해 선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첫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
감리교회는 맥클레이를 한국에 보내어 교육과 의료활동을 통한 선교사업을 허락 받기까지 했으나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최초의 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였다. 북장로교회는 의사 헤론(Dr John W. Heron)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나 이미 중국에 와 있던 알렌이 한국으로 임지를 옮기고 내한함으로서 그는 한국에서 거주하게 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알렌(Dr. 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은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서 1883년 10월부터 중국상해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선교지가 된 한국으로 가서 일하도록 권유받은 그는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고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나 부산을 거쳐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9월 22일 입경함으로서 공적으로 입국한 최초의 거주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척사윤음(斥邪輪音)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미국공사 푸트는 알렌을 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임명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중국에 남겨두었던 가족을 서울로 데리고 왔고 외국 거류민을 위한 의사로 일하면서 한글을 익히는 등 은밀하게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갖추어 갔다.
1884년 12월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는데 이때 알렌은 개화파에 의해 크게 다친 민영익(閔詠翊)을 치료하여 완쾌시켜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알렌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협조를 얻게 되었고 어의(御醫)로 임명되기도 했다. 1885년 2월 25일에는 고종으로부터 병원설립의 허락을 받아 4월 10일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의 신식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개원 13일 후에는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되었고 후일에는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의료선교활동의 시작이었다.
의료선교사역의 의의
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의 의료선교 사역은 한국선교와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의료선교사(醫療宣敎史)는 한국교회사 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의 의료선교 사역은 기독교적 사랑과 자애의 사역인 동시에 한국 근대의학의 보급과 발전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그 이후 한국선교를 시작한 각 교파의 선교활동에서 의료선교는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의료선교는 한국선교 초기부터 강조되었고 선교부(mission station)의 설치와 더불어 의료활동, 곧 검역, 시약, 보건-위생 교육이 시행되었고 곧 이어 시약소의 설치와 병원설립을 입안, 실행해 갔다. 이러한 의료선교의 중요성은 1893년 장로교 공의회가 정한 선교정책에도 잘 나타나 있다. 네비우스(Nevius)선교방법을 원용하여 채택한 이 정책 중에는 "의료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갖게 되고,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시약(施藥)만 가지고는 별 효과를 볼 수 없다.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고향의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해서 의료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치는 간호의 경험을 본받아 전도의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1880년대 이후 적어도 1940년까지는 (그 이후도 물론이지만) 한국에는 각종 전염병과 피부병이 만연하였고 외과적 질병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안과, 치과적 병도 심각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의료, 보건활동은 필요하고도 적절한 선교의 방법이었다.
1) 광혜원(廣惠院, 濟衆院)의 설립과 발전
첫 의료선교사 알렌(Dr Allen)
한국에서의 의료사업은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의 자격으로 입국한 알렌의사 (Dr. Allen, 1858-1932)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오하이오(Ohio)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한 그는 1881년 오하이오 웨즐리안 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오주 옥스포드에 있는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1883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1883년 10월 11일 상해(上海)에 도착하여 의료 선교사로 일하던 중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고 선교본부의 동의를 얻고 1884년 9월 내한하였다. 그해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수구파의 거두 우영사(右營使)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3개월간 치료하여 준 일로 왕실의 신임을 얻고 공개적인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의 시의(侍醫)로 임명받은 알렌은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 폴크(George C. Foulk)를 통해 한국정부에 서양식 병원건립을 제의하였고, 이 제안에 따라 고종의 윤허를 얻고 한국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이 병원이 1885년 4월 10일 재동의 이윤봉의 저택 터에서 개원한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ted Grace)이다. 이 때에 장로교본부와 광혜원과의 관계는 장로교본부는 진료의 책임자를 제공하는데 불과했고 정부는 건물과 제반설비 및 경상비 등을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알렌은 국립병원의 고용인으로 일한 샘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서의 의료사업은 시작되었다.
왕립병원인 광혜원은 개원 13일 후인 4월 23일(음력으로는 3월 12일)에는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란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그 해 5월 3일에는 미국 북감리회가 파송한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이 내한하여 5월 22일부터 제중원에서 근무하였고, 6월 21일 내한한 북장로교의 헤론의사(Dr. Heron) 또한 제중원에서 봉사하였다.
당시 이 병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는데 하루 265명의 환자를 진료할 때도 있었으며 개원후 일년간 10,46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그 중 800여명이 부녀자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394건의 소규모 수술과 150건의 마취를 요하는 대수술을 했다고 한다. 환자는 걸인 나환자로부터 궁정의 귀인까지 다양했고 왕진도 빈번했다.
제중원은 날로 증가하는 환자들을 다 수용 할 수 없었으므로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7년에는 재동에서 현재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銅峴)로 이전하였다. 병원건물은 개화파 인물로 타살당한 홍영식(洪英植)의 집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886년에는 이 병원에 부녀과를 신설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남자 의사가 부녀자를 치료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부녀과의 책임은 그해 7월 4일 입국한 여의사 엘러스양(Miss Annie J. Ellers)이 맡았다. 그녀는 왕비 및 왕실부인들의 진료를 맡아 '왕비와 궁중여인들로부터 충심의 환영'을 받았고, 곧 민비의 시의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감리교 선교사 벙커(D. A. Bunker)와 결혼하게 되자 이 병원을 사임하였다.
고종은 1887년 선교사직을 일시 사임하는 알렌의사에게는 정이품 자헌대부, 엘러스양에게는 정이품 정경부인의 직첩을 주어 그들의 의료사업의 공로를 치하한바 있다.
엘러스양이 사임하자 1888년에 입국한 의학박사 호톤(Dr. Lillias Horton)이 후임으로 일하였고, 정동과 모화관(慕華館)에 있는 진료소를 책임 맡기도 했다. 2년 후 그녀는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헤론((Dr J. W. Heron)
2년 5개월간 병원 책임자로 일했던 알렌은 1887년 9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헤론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헤론은 알렌보다 늦게 입국하여 제중원에서 일했으나 의학적 지식과 인술은 알렌을 능가하였다. 이것이 한때 알렌과 헤론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8-1890)은 미국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최초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사람으로서 어떤 점에서 미국 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길을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858년 조합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나이 1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Knoxville)로 이주하였고 1883년에는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미국으로 이민 온 지 꼭 11년만에 이 대학 개교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모교인 테네시 의과대학에서는 교수요원으로 남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그후 그는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블랙웰 아일런드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그는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첫 미국인이였으나 입국은 알렌보다 9개월 늦은 1885년 6월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입국 즉시 제중원의 의사로 임명된 그는 1887년에는 알렌의 뒤를 이어 병원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탁월한 의술로 많은 기여를 했으나 국립병원 책임자로써 격무에 시달렸고 한국에 온 지 5년만인 1890년 7월 26일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둔 채 이질로 사망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는 서울에 주재했던 외국인으로써 첫 희생자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 헤론부인(Harriet Gibson Heron)은 꼭 2년 후인 1892년 7일 캐나다에서 온 미혼 선교사 게일과 결혼하였다.
빈톤(Dr C. Vinton)
헤론이 순직한 후 캐나다 출신 의사 하디(Dr R. A. Hardie)가 1891년 4월까지 임시원장으로 있었고, 그 후 의사 빈톤(Dr C. Vinton)이 1891년 4월 내한함으로서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빈톤은 119일간 일한 결과에 대한 보고서에서 1,633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67명을 입원치료 하였고 74회의 소수술과 19회의 대수술을 집도했다고 했다. 그는 국립병원인 제중원에서의 복음전도 사역에 제약이 있었으므로 1892년 9월 1일부터 그의 자택에 진료소(Dispensary)를 설치하고 진료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개월간 그의 사저인 진료소에서 187명을 치료했고 이들에게 전도하였는데 의료사업은 복음전도의 첩경임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에비슨(Dr O. R. Avison)
그후 북장로교 선교부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젊은 교수였던 에비슨박사 (Dr 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를 1893년 병원책임자로 파송하였는데, 그는 11월 1일 부터 빈톤을 대신하여 국립병원장에 취임하였다.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주 출신인 그는 오타와 사범학교를 마치고 1884년에는 토론토대학 약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수학한 후 식물학 강사가 되었다. 그후 그는 의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의과대학에 편입하여 의학을 공부하였고 1890년에는 의사가 되었다. 그는 모교인 의과대학에서 약리학 강사로 일하는 한편 개인병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나이 32세 때인 1892년 한국 선교를 자원하였고 이듬해인 1893년 6월 16일 아내와 3아이를 데리고 일본을 거처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해 11월부터 제중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1935년 12월 75세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42년간 한국에서 일했다.
원장에 취임한 에비슨은 왕립병원의 부조리를 발견하고 병원에서 연락관 외의 모든 관리를 철수케 했고 1894년 병원의 전 재산권을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시키는 동시에 병원의 개축과 운영에 관한 제정을 담당하도록 하는 일대 개혁 조치를 취하므로 병원 경영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말하자면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을 명실상부한 선교병원으로 만들었다. 에비슨이 부산에 도착한지 5일 후에 태어난 4번째 아이 더글라스(Douglas)는 후일 아버지를 이어 한국에서 1921년에서 1947년까지 의료선교사로 봉사하였다
1895년 4월에는 여의사 화이팅(Georgiana Whiting)과 간호사 제이콥슨(Miss Anna P. Jacobson, R.N.)이 내한하여 함께 에비슨과 함께 일했다.
간호사역, 간호사 선교사 제이콥슨과 쉴즈
제중원이 세워졌으나 초기에는 훈련된 간호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간호'라는 전문직업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또 그 누구도 간호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호사가 없던 초기에는 기생 몇을 채용해서 진료를 돕게 했는데 당시 풍습이 기생은 남녀간에 간격없이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는 여 선교사들 이를테면, 테이트(Miss Mattie Tate)와 아부클(Miss Victoria Arbuckle)이 간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젊은 과부나 쫓겨난 첩들을 훈련시켜 간호사로 일하게 했다고 한다. 간호사란 직업이 젊은 여성들의 품위 있는 직업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는 더 많은 인내의 날들이 필요했다. 우리 나라에서 간호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때는 1903년부터였는데 마가렛 에드먼즈 (Margaret Edmunds)양이 평양에서 처음으로 간호원 양성소를 시작하면서부터 이 단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우리말에는 이런 일을 하는 이를 칭하는 단어가 없었기에 어느 학식 높은 한국 노인이 선교사들을 위해 이 '간호원'이라는 단어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된 최초의 간호사는 제이콥슨 이었는데, 그는 1895년 4월에 내한하였다. 노르웨이출생의 미국인인 그는 미국 메인주의 포틀랜드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교육을 받고 내한했는데, 그녀는 장로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간호사였다. 불행하게도 내한한지 2년 후에 건강의 악화로 한국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쉴즈양(Miss Esther L. Shields, R.N.)이 1897년 내한하여 제중원에서 봉사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종합병원 간호학교 출신으로 나이팅게일식 간호교육을 받은 유능한 간호사이자 선교사였다. 1902년에는 세브란스 간호사양성학교 교장으로, 1906년부터 1923년까지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간호학교 초대학교장으로 간호사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938년까지 40여년간의 간호사로서의 의료선교사역을 마감하고 은퇴하였다. 그는 실로 한국간호사 교육과 양성의 역사이자 간호사의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세브란스씨의 기여
이 때의 병원 건물은 한국식 단층건물에 지나지 않았고 의료시설이나 치료 기구는 변변치 못했다. 1899는 에비슨은 건강상의 이유로 임시 휴가차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친구인 건축가 고든(H. B. Gorden)에게 현대식 병원설계를 부탁하였다.
에비슨은 안식년이었던 1900년 봄에는 뉴욕에서 모인 [해외선교에 관한 에큐메니칼회의](Ecumenical Conference on Foreign Missions)에서 강연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에서의 의료선교에 관해서 강연하게 되었는데 이때 강연을 들은 스탠다드 석유회사 지배인이었던 세브란스(L. H. Severance)씨는 1만 달러를 희사하였다. 이 세브란스씨가 희사한 거액의 기부금을 가지고 1902년 남대문밖(현 서울역전, 도동)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병원 신축을 시작하여 1904년 완공하였고 그해 11월 정식 개원하였다. 이 때에 병원 이름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세브란스씨는 또 의료선교사 한사람의 사역비를 지원하였는데 그 의사는 1934년까지 한국에서 봉사하였던 허스트(Dr J. W. Hirst)였다. 개원 17개월이 지난 후 보고된 기록에 의하면 490명의 입원환자와 1만 6천명의 외래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거액을 기증했던 세브란스씨는 1907년 주치의 루드로우(Dr A. I. Ludlow)를 대동하고 방한하였는데 병원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추가로 3만 달러의 선교비를 희사하고 자신의 주치의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래서 루드로우씨는 1938년 은퇴 시까지 한국에서 외과의사로 일했다.
에비슨과 의학교육
제중원에서는 의학교육도 시행하였는데, 알렌의 보고에 의하면 1886년 3월 29일에 시작되었다. 경쟁시험을 거쳐 16명의 학생을 선발하였고 이들에게 영어, 기초과학분야와 의학교육을 시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에비슨은 병원의 운영과 함께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의학서적을 역간하고 1899년부터는 정규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의학교육기관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7명의 젊은이들을 의학교육을 받은 후 각종시험에 합격하므로 1908년 6월 졸업과 동시에 의사가 되었다. 그들이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이다.
에비슨과 함께 초기 한국 의학교육에 기여한 선교사로는 1895년에 내한한 웰즈(Dr J. Hunter Wells, 禹越時), 1901년에 내한한 샤록스(Dr Alfred M. Sharrocks, 謝樂秀), 1904년에 내한한 허스트(Dr Jesse W. Hirst) 등이었다.
어떻든 에비슨은 모국인 캐나다의 영예로운 교수직과 의사직을 버리고 내한 한 이후 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의학교,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의 책임자로 한국의료선교사와 한국의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스크랜톤과 민간병원.
시(施)병원
제중원의 경우가 왕립병원의 성격을 띤 것임에 반하여 민간병원의 경우는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의사가 된 후 1885년 5월 3일 입국한 스크랜톤은 6월 24일까지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봉사했으나 헤론의 내한을 계기로 병원을 사임하고 미국 공사관 근처의 집을 매입하여 독자적인 의료활동을 구상, 준비하였다. 그러다가 9월 10일 사저에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이것이 감리교선교부가 중심이 된 민간병원인 시(施)병원의 시작이었다. 제중원이 왕립병원으로서 왕실중심의 의료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시병원은 특별한 의의를 지난다. 시병원(Universal Relief Hospital)이란 이름은 1886년 6월 고종이 하사한 것이지만 처음에는 '미국의사 진료소'로 불리었다. 이 병원을 개원할 때 스크랜톤의 한국어 선생은 '미국의사 진료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슨 병이든지 매일 오전 10시부터 치료받을 수 있음'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이 병원의 설비는 미비하였으나 설립후 9개월 동안에 522명의 환자를 검진, 치료하였고 일년간 842명의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병원이 시설을 정비하고 환자를 입원시켰을 때는 1886년이었다. 또 스크랜톤은 1886년 선교보고서에서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진료소 설치를 요청하였는데 당시 전염병 환자들은 적절한 대책도 없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국 선교부로부터 자금을 허락 받은 감리고 선교부는 1888년 12월 성밖에 버려진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아현동과 상동에 설치된 진료소였다. 이곳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하였으나 아현동진료소는 제정상의 이유로 1890년 폐쇄되었다. 1887년에는 정동의 시병원을 구리개로 옮겨 남대문 상동병원으로 개칭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스크랜톤이 한국에 온지 3년째인 1888년 한해동안 5천 5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여성만을 위한 병원, 보구녀관(保救女館)
미감리회 의료사업에 있어서의 공헌은 여성들을 위한 진료였다. 당시로서는 남녀를 한 병원에서 진료하기는 어려웠고, 남자가 사가(私家)여자들을 진료하는데는 거부반응이 컸다. 이에 스크랜톤은 선교부에 어린이와 부녀자를 위한 병원을 구상하고 여의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되어 1887년 10월 20일에 내한한 여의사가 하워드(Dr Meta Howard)인데, 그는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과 어린이만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이에 명성왕후는 이를 가상히 여겨 보구녀관(保救女館)이라는 병원이름을 하사하였다. 하워드는 미감리회가 파송한 최초의 여의사로서 상당한 포부를 가진 분이었으나 건강의 악화로 2년후인 1889년 9월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대신 캐나다출신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의사가 1890년 10월 14일 내한하여 부인병원의 업무를 계승하였다. 3년동안 셔우드는 1만 4천명을 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한국 도착 즉시 '여성을 위한 의료 사업은 여성의 힘으로'(Medical work for women by women)라는 표어를 내걸고 여성을 위한 의료교육도 시작하였다. 이때 교육을 받아 후일 한국인으로 첫 의사가 된 사람이 김에스더인데 귀국하여 보구녀관에서 봉사하였다.
이 병원은 1892년에는 동대문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 시약소(Boldwin Dispensary)라고 명명하였다. 로제타 셔우드의사는 1892년에는 감리교 의료선교사이자 목사였던 윌리엄 홀(Dr, Rev William Hall)과 결혼하였으나 2년 후인 1894년 남편과 사별하였고 1935년까지 40년이 넘도록 한국에서 봉사했다. 1892년에는 여의사 커틀러(Dr Mary Cutler), 1897년10월에는 해리스(Miss Lillian A. Harris, 1865-1902), 1899년 9월에는 에른스버거(Dr Emma Ernsberger) 등이 내한하여 부인병원에서 일했다. 이 병원이 정동에서 동대문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1912) 1902년 티푸스에 감염되어 한국에서 사망한 여의사 해리스를 기념하여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으로 개칭되었다. 이 병원이 1930년부터는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불렸는데, 현재의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대문 부속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3) 각 선교부의 의료선교활동
예양협정, 선교지역의 분할
1884년 의사 알렌의 입국 그리고 1885년 장로교의 언더우드(1858-1916)와 감리교의 아펜젤러(1858-1902)의 입국 이후 1898년까지 미국, 호주, 캐나다 등지로부터 아홉 개의 선교단체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좁은 땅에 여러 선교부가 함께 일하게 될 때 야기되고 또 야기될 수 있는 불필요한 대립이나 경쟁을 막고, 선교부 간의 상호협조와 조정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주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6개 선교부는 1893년 선교부 간의 협력 그리고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선교지역을 분할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분할정책을 보통 교계예양(敎界禮讓) 혹은 예양협정(禮讓協定, Comity Arrangement)이라고 한다. 이 분할 안은 몇 차례의 조정이 뒤따랐으나 대략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즉 미국 북장로교는 재령, 강계,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경상북도 지방을 맡았고, 미국 남장로교는 평양,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대전, 부여 등 전라도와 충청남도 일부 지방과 제주도를, 캐나다 장로교 (후에는 캐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 지방과 간도 지방을, 그리고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부산과 진주, 마산, 거창, 통영 등 경남 지역을 맡았다. 미국 북감리교는 평양, 해주, 서울, 인천, 충주, 원주 등 평안도, 황해도, 경기, 충북, 강원도 일부지역을, 남감리회는 원산, 서울, 송도(개성), 춘천 등 함남, 경기 강원 일부지역을 각각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처럼 서울, 평양, 원산 등 세 지역은 두 개 이상의 선교부가 공동으로 선교한 곳이고 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도록 분할하였다.
물론 다른 교단들, 이를테면 침례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성공회 등과는 선교지역 분할에 대한 협의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 교파는 선교지 분할정책과 관계없이 선교하였다. 바로 이런 정책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 등 주요교파들이 여러 지역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s)를 설치함에 따라 의료선교 사역도 자연히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앞 항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의료선교활동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이제 각 지방에서의 의료선교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북장로교 선교부
미국 북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알렌 의사에 이어 언더우드목사, 헤론의사를 파송함으로서 북장로교 한국 선교부가 조직되었다. 북장로교선교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했으나, 마포삼열(Rev S. A. Moffett, 1890), 배위량(Rev W. M. Baird, 1891), 소안론(Rev W. L. Swallen, 1892), 이길함(Rev Graham Lee, 1892) 목사 등이 내한하게 됨으로 1891년 평양과 부산에 선교지부(Station)를 개설하고 선교지역을 확대해 갔다. 그 후에 내한 한 아담스목사(Rev J. E. Adams, 1895) 부부는 대구에, 밀러 목사(Rev F. S. Miller, 1892)는 청주에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선천(1901), 안동(1909)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립되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가 두 번째로 선교지부를 설치한 곳은 부산인데, 부산에서는 1891년 이래로 시약소를 시작으로 의료선교가 시작되어 정킨기념병원이 설립되었다. 특히 1893년 어빈의사(Dr Irvin)의사 부처가 부산에 도착하여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는데,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의료선교활동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다.
평양에서의 의료사역은 189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래드병원(Ladd Hospital)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평양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병원은 후에 감리교의 선교병원이었던 기홀병원과 합병하여 1923년에는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되었다.
대구에서의 의료활동은 1897년 존슨(Woodbridge O. Johnson)의사가 진료소를 세우므로 시작되었는데 눌(Dr Null), 플레처(Dr Fletcher), 스미드(Dr R. K. Smith), 호이트(Dr Hoyt) 등이 진료활동을 계속하였고, 카메론(Cameron) 등 다수의 간호사가 참여하여 오늘의 동산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이 병원의 지 병원으로 안동 성소병원, 포항 선린병원, 경주 기독병원 등이 있다.
1913년 대구에 나병원이 설립되었는데 당시의 동산병원장 플레처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나병원은 1963년에 이르러 현대식 병원시설을 갖춘 애락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되어 북장로교는 서울 이외에도 부산, 평양, 대구 등지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게 되었다.
이밖에 북장로교가 경영하던 병원으로는 평북 선천에서 1901년 샤록스(Sharrocks)의사가 시작한 시약소에서 출발한 미동병원, 강계에는 밀즈(Mills)에 의해 시작된(1909) 계례지병원, 청주에는 1903년 눌의사(Dr M. N. Null)에 의해 시작된 던칸기념병원(Duncan Memorial Hospital) 등이 있었다.
호주장로교선교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장로교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나 데이비스(Miss Mary T. Davies)에 의해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헤론의사 등과 함께 생활하며 서울서 5개월을 보낸 후 1890년 3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해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와 폐렴으로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4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891년 10월에는 멕카이 목사(Rev J. Mackay)부부와 세 사람의 미혼선교사인 멘지스(Miss B. Menzies), 페리(Miss J. Perry), 퍼셋(Miss M. Fawcett) 등 5명의 제2진 선교사들이 내한함으로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계속되었다. 이 때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78명의 선교사들이 내한했는데, 나환자를 위한 사역을 했던 메켄지목사를 포함하여 4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사 곧 7명의 의료선교사가 주로 부산, 진주, 통영, 그리고 세브란스에서 봉사하였다.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의료사역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별도로 취급하였다.
감리교 선교부
1884년 미국 감리교의 매클레이가 방한하여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시작하도록 허락 받았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에 이어 의료선교사 스크랜톤(W.B. Scranton)과 그의 어머니 스크랜톤 부인(M. F. Scranton)이 입국함으로 북감리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남 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는 1896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윤치호(尹致昊)의 역할이 컸다. 1888년 미국에 유학하여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의 근대인물 중 신학을 공부한 첫 인물이 되었는데 그는 미국 남감리회에 한국선교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895년 10월 18일 중국주재 선교사인 헨드릭스(E. R. Hendrix)감독과 리드(C. F. Reid, 李德)가 내한하여 선교 가능성을 점검한 바 있고 이듬해인 1896년 5월 리드가 한국선교사로 내한함으로서 남감리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감리교회 선교부 또한 서울 이외의 여러 지역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선교초기 한국정부는 전도사업을 제한하고 있었으므로 감리교 선교부는 병원이나 시약소를 통한 간접선교를 강조하였다.
원산에서는 1889년 8월에 내한한 맥길(Dr William B. McGill, 1859-1918)에 의해 1892년 진료소가 설치되므로 의료활동이 시작되었고 1896년에는 병원이 설립되었다. 1898년 이후 하디(Dr R. M. Hardie)에 의료사역이 구체화되었고, 1901년에는 로스 (Dr J. B. Ross)가 내한하여 하디를 보좌하였고 후에는 로스가 이곳에서의 의료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병원이 원산 구세병원으로 발전하였다.
평양에서는 캐나다 출신 의사이자 목사인 홀(Rev Dr William J. Hall, 1860-1895)에 의해 1892년 의료활동이 시작되었다. 1860년 1월 16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 뷰엘(Glen Buel)에서 태어난 홀은 킹스톤(Kingston)에 있는 퀸즈(Queens)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였고 다시 뉴욕의 벨리뷰(Bellevue) 의과대학을 거쳐 감리교 의료 선교부 책임의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후 그는 북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1년 12월 내한하였다. 이듬해인 1892년 3월에는 죤스(Jones, 1887년 내한)목사와 함께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순회하였고, 1892년부터는 평양지방에서 의료선교에 종사하였다. 1892년 6월에는 앞서(1890) 내한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와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그 동안 이 부부는 각기 서울과 평양에서 별도의 의료활동을 해왔으나 1894년 봄에는 평양에서 함께 일하기 위해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때문에 홀의사 가족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윌리엄 홀 자신은 평양에 남아 전쟁에서 부당상한 한국인들을 치료하기 힘썼다. 그는 환자치료와 당시 만연하던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 치료를 위해 힘썼으나 과로에 학질(typhus fever)까지 발병하여 평양을 떠나 선편으로 인천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으나 일주일 후인 1894년 11월 24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국에 온지 꼭 3년 만이었다. 홀의사의 미망인은 임신 7개월 중이었으므로 겨우 돌 지낸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1894년 12월 본국으로 돌아갔다. 약 3년 후인 1897년 셔우드 홀 부인은 아들 셔우드와 유복녀인 딸 에디스를 데리고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으나, 딸 에디스는 이질로 사망하였다. 남편과 딸을 잃은 홀 부인은 처음 얼마간은 서울에 있었으나 곧 평양으로 가서 동료, 친지의 협조를 얻어 홀의사를 기념한 기홀(紀笏)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을 설립하였다. 이 병원은 1897년 2월 포웰의사(Dr E. D. Follwell)을 원장 개원하였다. 자신은 이 병원에서 부인과장으로 일했다. 평양에서의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던 이 병원은 북한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찾아오는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으로 크게 공헌하였다. 1901년 한해동안 5,862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수술을 받은 환자는 1,562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병원에는 홀 부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인 정진학교도 개설하였는데, 이것은 맹인을 위한 선교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기홀병원은 1920년에는 평양의 장로교병원과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1923년부터는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개칭되어 장, 감 두선교부에 의해 공동 운영되었다. 장기려박사는 후일 이 병원의 첫 한국인 원장으로 취임하여 일한 바 있다. 1890년 미혼으로 내한하였던 로세타 셔우드는 도합 47년간(1890. 10-1894. 11, 1897-1940) 한국에서 의료선교사로 일생을 봉사하였고 1940년 한국을 떠났다. 그후 1951년 4월 5일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1900년부터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곳에서는 노튼(Dr A. H. Norton)의사가 자기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1913년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노튼기념병원(The Louisa Holmes Norton Memorial Hospital)이다. 이 병원이 후일 해주 구세(救世)병원이 되었고, 1928년에는 결핵전문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Haiju Tuberculosis Sanitarium)을 부설하였다. 이 요양원은 윌리암 홀의 아들로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후일 의사가 된 셔도우 홀(賀樂)이 1926년 내한하여 1928년 설립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셔우드 홀에 대해 부기해 두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윌리엄 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캐나다로 돌아갔다가 다시 내한하여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유니온대학에서 수학하고, 그후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역시 의사였던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결혼하고 1926년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꼭 15년만에 제2대 선교사로 다시 한국으로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면서 해주 의창(懿昌)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후 그는 조선에서의 결핵의 심각성을 보고 결핵 퇴치를 위해 한국에서는 최초로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1928년 해주 교외 왕신리(王神里)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후 결핵협회(The Tuberculosi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결핵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1932년 12월부터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씰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로부터 1940년까지 14년간 한국에서 실로 값진 봉사를 하였다. 1940년에는 일제로부터 간첩 누명으로 체포되어 제판을 받고 그해 10월 9일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심문을 받을 때 총독부 고등계 형사가 "당신 부부는 위대한 의사로서 본국에서 얼마든지 존경과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지만 조선에 와서 박봉을 받으며 고생하며 사는 것은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간첩활동이라고" 추궁했을 때 셔우드 홀은 "당신은 당신의 봉급과 관계없이 천왕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받는 봉급과 관계없이 나의 왕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한다"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한국을 떠난 그는 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후 1963년 은퇴하였다. 본국에서 노후를 보내던 홀박사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1978년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 라는 자서전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동아일보사에 의해 1984년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이라는 제목으로 역간 되었다. 그후 홀박사는 1992년 98세를, 부인 마리안은 9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유해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감리회 지역인 개성에서는 1901년부터 로스선교사에 의해 병원설립이 준비되었고 1907년 이위만(Dr Wightman Reid)에 의해 '아이베이 기념병원(Ivey Memorial Hospital)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이 후일 개성 남성(南星)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1900년부터 모리스부인(Mrs L. O. Morris)이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1924년 내한한 맥매니스 의사(Dr S. E. McManis)가 1925년 스웨덴기념병원, 곧 서미감(瑞美監, The Swedish Memorial Hospital)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전도와 계몽사업에도 기여하였고, 간호사 양성에도 힘썼다. 맥매니스가 1929년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자 잠정 폐쇄되기도 했으나 1957년 원주기독병원으로 재출발하였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원주의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밖에 인천, 수원, 공주 등에도 감리교 선교부의 의료활동이 있었고 특히 인천 진료소는 인천기독병원으로, 수원에서는 수원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병원들은 단순한 진료사업뿐 아니라 원목실을 통한 복음전도와 순회진료 및 전도, 개척교회지원과 기독교인에 대한 무료진료 혜택을 주었다.
남장로교 선교부
미국 남장로교회의 공식 명칭은 연방장로교회(The Per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인데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북장로교보다 8년 늦게 시작되었다. 1891년 10월 언더우드가 첫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내시빌(Nashville)에서 모인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 협의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 연차대회에서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때 미국 벤더빌트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맥코믹(McComic)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ewis Boyd Tate)와 릿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 출신인 정킨(William M. Junkin), 레이놀드(William D. Reynolds)가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2년 내한했는데 이것이 남장로교의 한국선교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서울에 주거를 정하고 한국말을 배우기를 시작했다. 그 후 그들은 최초의 선교부를 전주에 세웠고, 1898년에는 목포에 선교지부를 세웠다. 이 외에 미혼 여선교사들인 테이트(Miss Mattie S. Tate, 1892),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1893) 등이 입국하여 호남지방, 곧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지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 역시 전도사역과 함께 의료사역을 병행하였다. 전주지역에서 사역했던 테이트목사와 1894년 내한한 헤리슨(William B. Harrison, 河緯廉)목사 등은 여의사 잉골드(Dr Mattie B. Ingold)와 함께 1898년 11월 시약소를 열었는데, 이것이 후일 전주 예수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일골드는 볼티모어(Baltimore) 여자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조업한 유능한 의사로서 1897년 30세의 나이로 내한하였다. 1905년에는 테이트목사와 결혼하였고, 1925년까지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예수병원은 1902년 헤리슨선교사에 의해 이 지방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세우게 되었고, 1904년에는 포사이드(Dr Wiley H. Forsythe, 保衛廉)가 제2대 원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1904년 내한했는데, 내한하기 전 쿠바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목포와 광주 노상에서 데려온 한 여자 문둥병자를 진료하였는데, 이 작은 시작이 광주 나병원의 기원이 되어 1912년에는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나병선교회(Mission to Lepers)의 후원으로 광주 나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오늘의 여수 애양원으로 발전하였다. 나환자들에 대한 그의 봉사 때문에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897년에는 뚜루(Dr A. Damer Drew, 1893)에 의해 군산에서 의료사역이 시작되었는데, 1904년에 내한한 다니엘(Dr Thomas H. Daniel)의사가 이 사역을 계승하였다. 1898년에는 오웬(Dr Clement C. Owen, 1895)에 의해 목포에 진료소가 설치되었는데, 1904년 내한한 놀란의사(Dr Joseph W. Nolan)가 의료활동을 계승하였다. 1899년에는 여의사 잉골드에 의해 전주에 부녀 진료소가 개설되었다.
캐나다(장로교, 연합교회)선교부
캐나다인으로 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게일(James S. Gale, 奇一, 1863-1937)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그는 그 대학의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을 받아 1888년 12월 15일 내한하였다. 게일의 뒤를 이어 1890년 9월에는 하디의사(Dr Robert A. Hardie, 河鯉永)가, 1893년 12월에는 멕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가 독립선교사로 입국하였다. 맥켄지는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에 거주하면서 서경조(徐景祚)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1895년 6월 23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것이 캐나다 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계기가 되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선교에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이듬해인 1898년 9월에 푸트목사(Rev W. R. Foote, 富斗一) 부부, 그리어슨 의사(Dr Robert G. Grierson, 具禮孫) 부부 그리고 맥레 목사(Rev D. McRae, 馬具禮)를 한국에 파송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함경도와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였고 후일 원산, 함흥, 용정 등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캐나다교회는 1941년 일제에 의해 모든 선교사가 한국에서 추방될 때까지 약 8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25년 감리교 그리고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카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를 구성하는 모체교회가 되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던 캐나다장로교 선교사들은 오직 한 사람, 루터 영(Rev Luther Young, 泳在馨)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다 이 연합에 찬성하였다. 따라서 1925년 이후에 한국에서 일한 선교사는 캐나다 연합교회 소속 선교사였음을 밝혀 둔다.
캐나다장로교의 함흥에서의 의료선교 사역은 1898년에 내한한 그리어슨(Dr R. G. Grierson)에 의해 시작되어, 1901년에 내한한 맥밀란(Dr Kate MacMillan)에 의해 1908년 6월에 함흥의 제혜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병원은 1921년에 내한한 머레이(Dr F. J. Murray, 1894-1975)의사, 1927년에 내한한 불랙의사(Dr Donald Black) 등의 봉사로 함남 굴지의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여의사인 머레이는 1919년 달하우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1년 9월 27세의 미혼 처녀로 한국으로 나왔고, 간도 용정의 제창병원(성 엔드류병원)의 원장으로 봉사한 후 1923년부터는 맥밀란의사에 이어 함흥의 제혜병원의 2대 원장으로 일하다가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국을 떠났던 훌륭한 의사였다. 해방 후에도 내한하여 세브란스병원의 부원장으로 봉사하였고, 원주연합기독병원을 설립하였으며, 구라선교회에서 일하는 등 일생을 바친 봉사를 통해 의료선교에 종적이 자취를 남겼다. 그는 후일 자신의 자서전 [팔용산 언덕에서](At the Foot of Dragon Hill)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김동열씨에 의해 번역되어 [맹부인 맹부인] 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미완, 1987). 그리고, 성진, 용정 등지에도 의료사역을 전개하였는데 용정의 제창병원은 이 지역 한인들의 진료와 선교는 물론이며 3.1 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병원장 마틴(Dr Stanley Martin)은 한국인 독립운동가 및 기독교 지도자들과 자주 회합을 갖고 세계 여론을 전하며 독립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 지역의 병원들은 활동을 재개하지 못하고 공산정권의 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 참고로 1913년까지의 각 교파의 병원(혹은 진료소) 설립현황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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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파 | 장로교회 | 감리교회 | | |
+ +------+------+--------+--------+------+------+--------+ 성공회 |안식교|
| | 북장 | 남장 |카나다장| 호주장 | 북감 | 남감 |여선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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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계 | 군산 | (회령) | 진주 | 영변 | 원산 | 평양 | 제물포 | 순안 |
| | 선천 | 전주 | 성진 | (통영) | 평양 | 송도 | 서울 | 진천 | |
| | 평양 | 목포 | 함흥 | | 해주 | 춘천 | | | |
| | 제령 | 광주 | (원산) | | 원주 | | | | |
| 지역 | 서울 | 순천 | | | 공주 | | | | |
| | 청주 | | | | | | | | |
| | 안동 | | | | | | | | |
| | 대구 | | | | | | | | |
| | 부산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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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 표는 진료소만 있는 곳임
맺는 말, 한국에서의 의료선교사들
의료선교활동은 교회와 교회공동체 곧 선교단체가 행해왔던 가장 고귀한 활동이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이자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의 행위였다. 19세기 이후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제국에서 일한 의료선교사들의 봉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목사선교사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목사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없거나 활동이 제한된 곳에서 선교의 길을 평탄케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더 나아가서 의료선교사들은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치료해 줌으로서 복음의 위력과 기독교적 사랑을 보여주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었다. 따라서 의료활동은 교육활동과 더불어 아아제국에서 가장 환영받는 사역이자 가장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이었다.
한국에서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1884년 알렌의 입국이후 한국에는 330여명의 의료선교사들이 내한하여 30여개 처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한국의료선교사 협의회(The Korea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어 의료선교사들간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이들의 수고와 봉사는 기독교의 선교할동 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근대 의학의 발전과 의학교육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던 것이다. 1938년 통계에 의하면 주한 의료선교사수는 328명이었는데 선교부별로 보면 북장로교 선교사가 84명, 남장로교 44명, 북감리회 59명, 남감리회 32명, 성공회 31명, 카나다연합교회 22명, 그리고 독립선교사가 35명이었다. 또 안식교가 파송한 10명, 천주교의 11명의 의료선교사들도 해방 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다. 내한했던 의료선교사 중에 헤론(Heron), 홀(W. Hall), 랜디스(E. B. Landis) 오웬(C. C. Owen) 등은 과로와 격무로 한국에서 순직 혹은 순교하였다. 알렌(Allen), 빈톤(Vinton), 하디(Hardie), 파이팅(Henry Whiting)은 의료선교사로 내한했으나 일정기간 후에는 의료선교를 그만두고 전도사역에 전념하기도 했다. 어떻든 한국에서의 의료 선교사들의 기여와 봉사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의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를 통해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자유케 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증거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에비슨 박사는 초기 의료선교가 남긴 공헌에 대하여 다음의 5가지로 설명한바가 있다. 첫째, 호열자나 각종 전염병이 발병했을 때 의료선교사들의 시약, 시료, 종두 등 예방과 치료활동을 통해 병이 미신과 악신(惡神)에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을 미신적 공포에서 해방한 점, 둘째, 종두(種痘)의 보급에 의한 어린이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현상, 셋째, 이웃을 돕는 사랑의 정신을 구현함으로서 구제사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 점, 넷째, 예방, 시약, 치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 각종 의료활동을 통해 기독교신앙이 전파되고 수용된 점, 다섯째, 의학교제의 번역 및 의료관계 저술을 통해 한국에서의 과학교육 혹은 의학교육에 영향을 준 점을 지적하였다.
의료선교는 궁극적으로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이었고 한국에서의 경우 이일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도 우리의 위대한 의사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아픈 자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은 복음운동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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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는,
고신대학교 신학과에서 교회사와 역사신학을 가르치는 이상규(李象奎)교수는 고신대학교 신학과(B.A), 신학대학원(M. Div)과 대학원(Th.M)에서 수학하고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공부하고 호주신학대학(ACT)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쓴 책으로는「성경공부의 이론과 실제」,「한국교회의 역사적 흐름」,「교회개혁사」,「교회의 역사」등이 있고,「행복한 가정 생활」,「기독교세계관에서 본 서편제」,「고신 선교 40년」 등을 공저했다. 이 메일 주소는 sglee@sdg.kosin.ac.k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