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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농발 없는 장롱
안채와 별당 사이에 한 그루 서 있는 팽나무 속에서 우는 걸까 찢어지게 공간을 흔들며 매미가 운다. 병수는 글을 읽다가 얼굴을 든다. 하늘에는 덩어리를 이룬 새하얀 구름뭉치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름도 다 가는데 여태 매미가 우네? 저러다가 찬바람이 불면 어디로 갈까? 아마 죽어버릴 거야.' 병수는 늘 생각하는데 귀청이 윙윙 울리도록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싫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어머니 홍씨의 악쓰는 목청을 들으면 전신이 오그라들 듯 무섭고 괴로웠는데 그보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는 왜 싫지 않을까 하고 절에서는 안거라 해서 여름철에 탁발을 하지 않고 중들은 수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벌레들은 여름철에 성하기 때문에 모르게 밟아죽이는 일이 허다하므로 살생계를 범할까봐 중들은 나돌아다니지를 않고 하안거를 한다는 것이다. 길상이 한 말이었다. 언젠가 병수에게 들려준 말이다. 길상이 한 말이었다. 언젠가 병수에게는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높은 마루를 오르질 못하여 병수가 버둥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안아 올려준 일이 있었다. 길상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슬프고 따스한 것 같은 빛이 서려 있었지만 그후 다시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병수를 대했다. 어떤 때는 미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높은 마루를 오르질 못하여 병수가 버둥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안아 올려준 일이 있었다 길상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슬프고 따스한 것 같은 빛이 서려 있었지만 그 후 다시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병수는 길상이 좋았다
'이슬만 먹고 사는 죄 없는 벌레니까 사람들처럼 욕심부리고 싸우지도 않지 그리고 여름이 가면 죽는 슬픈 신세니까 말이야' 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다. 다시 책을 읽으려 하는데 이번에는 이 초시의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병수는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깥 하늘을 바라본다. 덩어리를 이룬 새하얀 구름뭉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으흠으흠 큰기침하는 것 허우대 좋은 것 게을러 빠진 것과 낮잠을 즐기는 버릇 이외 이렇다할 특징이라곤 없는 이초시는 병수의 글선생이다. 코를 골거나 말거나 장죽을 물고 낮잠을 자거나 말거나 별채에는 윤씨부인 생존시에 조준구네 식구들이 거처하던 곳 조준구와 홍씨는 얼씬거린 일이 없었으므로 누가 가타부타할 사람도없다. 애초부터 병신 아들 면무식이나 하게 하자고 데려다 놓은 사람인 만큼 두 내외는 이초시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자식인 병수조차 있으나마나 어떤 경우에는 있어서 곤란한 존재로 생각했으니 글선생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내색한 일이 없었고 설령 내색을 했다손치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었겠지만 병수는 이초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고향에라도 다니러 가고 없는 날이면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글 읽기가 싫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글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병수는 이초시의 코고는 소리만 들으면 악을 쓸 때 어머니가 씨익씨익 숨을 몰아쉬던 소리와 혼동을 하게 된다. 코고는 소리하고 씩씩대는 숨소리는 분명 다를 터인데 그만큼 병수 의식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 혐오감이 깊이 박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서 열두 살까지 불구자식을 수치로 아는 홍씨에 의한 세상 구경을 못하고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자란 병수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4년이 지났지만 자라지 않은 채 열다섯이 되었다. 사대부집 자제로서는 성례를 마쳤어야 할 나이다. 자라지않는 신체 그 신체와는 반대로 정신의 성장은 이상하게 빨랐다.
넓은 천지 그러니까 서울에서의 골방살이에 비한다면 사리는 넓고 넓은 천지였던 것이다. 그는 시시로 뒷산에 올라 하늘과 강물과 숲과 들판을 철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자연을 볼 수 있었고 날짐승, 들짐승 붓벌레들, 사철의 식물들을 볼 수 있었고 먼발치로 들일 하는 농부들의 생태도 볼 수 있었다. 별당을 제외한 넓은 집안을 돌아다녀도 방해하거나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두어진 생활에서 일시에 밀어닥친 외계의 상황은 그런 만큼 신선하고 강렬했을 것이다. 목마른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새로운 환경은 그에게 숱한 지혜를 주었고 생각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 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랑까 분위기랄까. 의식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극히 탐미적인 요소를 띤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 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초시한테 소학을 배우고 통감을 떼고 사서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 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지각하게 되었다. 실로 병수는 조상이 남겼으며 스승의 인격을 느낀 바도 없었으나 옛날 성현의 글 그 행간 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 물론 십오 세라는 나이의 한도에서 우수했었다는 애기다. 이러한 자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석으로 함께 거주하는 이초시도 병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엿보지 못했고 부모 역시 그러했다. 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겠으나 그들은 모두 어느 면으로서든 범속한 인물들이었으니까 그토록 오랜 시일 집념으로 적대해오던 길상이가 의외로 병수의 남다른 점을 감지하고 있는 듯 세정에 밝고 처세에 늘란하며 제반사에 현통하다 하여 우이에 있는 사람들이 도금된 자신들을 높이되 진토 속에 묻힌 옥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들이 옥의 동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병수 내부에 숨은 청랑한 오성을 느낀 길상은 비록 신분이 얕고 천애 고아이나 조물주께서 선험을 풍부히 부여한 운명으로 많은 장님 속의 눈뜬 사람의 하나라고나 할까, 왈 꼽추도령이요 천지바보요 오줌도 가릴 줄 모른다는 사실과 억측 속에 하여간 병수는 인간 폐물로 추호의 동정 없는 낙인 찍힌 존재다.
코고는 소리가 여전했다. 병수는 책을 덮고 일어선다. 신돌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마루를 미끄럼타듯 내려선 그는 잠시 동안 코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살금살금 걷기 시작한다. 얼굴에 부드럽고 약간의 장난스런 미소가 흘렀다. 구름뭉치는 어느새 층으로 변하여 서서히 움직이는 것 같다. 별채 모퉁이를 돌아서면 뒤켠 대숲이다. 대숲 속에 실낱처럼 가는 한 줄기 길이 있다. 사달으로 통하는 길이다. 병수는 사당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여러 번 가보려고 마음먹었으나 종내 못 가고 말았다. 옛날 대숲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포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애기도 애기지만 별당 담장가에만 대나무가 성글었을 뿐 나머지 곳에 가득 들어찬 대나무숲이 어찌나 울창했던지 대낮에도 여우가 나타날 것 같은 무서움 증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수는 대숲 속에 난 오솔길 초입에서 오른편으로 걸음을 꺾는다. 그곳은 길이 아니었고 바로 대숲 속이지만 담장이 연이어져 대나무는 드문드문하고 햇볕이 환하게 비치는 곳이다. 마른 댓잎이 발밑에서 와삭와삭 바스라지는 소리를 낸다. 담장을 따라 한참을 가던 병수는 걸음을 멈춘다. 얼굴에 부드럽고 약간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다시 지나간다. 담장 가까이로 행복해진 얼굴을 가져간다. 담벽 흙이 좀 허물어진 곳에 돌과 돌을 맞물린 사이에 조그마한 구멍이 하나 나 있다. 그 구멍에 한쪽 눈을 바싹 갖다댄다. 한쪽 눈에 비친 곳은 별당 뜨락이다. 해당화 잎이 아랫도리를 가렸으나 별당 전부가 보인다. 마루가 있고 마루 안쪽에 방이 있고 마루 곁에 있는 툇마루가 달린 큰방이 서희의 거실이다. 한데 그 툇마루에는 문짝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남치마에 흰 적삼을 입은 엉덩이까지 내려온 머리꼬리에 자줏빛 댕기가 흔들리는 봉순이 모습이다. 신돌 위에서 허리를 구부린 봉순이는 풀비로 종이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곁에는 얹은머리가 부스스한 김서방댁이 지껄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풀칠을 마친 한지를 맞잡아 들고 툇마루에 기대어 세워놓은 문짝 앞에 가더니 문을 바른다. 그러기를 몇 차례 다 발라버린 문짝을 번쩍 치켜든 김서방댁이 별당 출입문 근처 담장에다 문짝을 옮겨놓은 뒤 사발에 떠서 들고 나온 물을 입에 머금더니 문짝에다 푸우! 하고 뿜는다.
이때 문짝을 들어내어 반듯하게 네모로 드러난 문틀 공간에 서희 모습이 나타났다. 병수 눈빛이 환해진다. 두 주먹을 꼭 쥔다. 연분홍 치마, 유록빛 회장저고리를 입었다. 서희는 문기둥에 한 손을 짚고 병수 쪽을 향해 서 있다. 서희 모습 뒤켠에 백동 장식이 반짝이는 장롱의 일부분이 보인다. '가엽은 서희......' 훤하게 트인 이마, 갸름한 얼굴 윤곽에 꺼뭇꺼뭇한 눈은 멀리서도 또렷하다. '하늘의 선녀라고 저렇게 어여쁘게 생겼을까.' 병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내 이 병신만 아니더라면...... 이 세상 끝까지 너를 따라가겠다! 내 이 병신만 아니더라면 너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야. 가엾은 서희, 너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하리.' 눈물에 흐려 서희 모습이 물감처럼 번져난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이 집도 살림도 땅도 모두 서희네 건데...... 우린 비렁뱅인데 말이야!'
"도련님."
용수철같이 튀면서 돌아섰다. 노기에 찬 길상의 눈이 쏘아보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시오?"
병수의 얼굴은 사색이다.
"도련님!"
평소 준수했던 모습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낸다. 다음은 웃었다. 살기보다 무서운 모멸의 웃움이다.
"숯구리 꽁 잡아묵는다 카더마는."
"......"
"병신 육갑하다 카더마는 흥! 그 말이 조금도 그르잖구마."
"나, 나......"
"꿈도 꾸지 마시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물어보시오. 될 법이나 한 일이요?"
"꾸, 꿈에도."
"그렇소, 꿈도 꿈도 꾸지 말라고 말했소! 천지개벽이 있어도 우리 애기씨는 안 될 기요!"
"......"
"나, 나는 서희가 불쌍했을 뿐이다. 꾸 꿈에도 아 아버님이 굳이 혼인하시겠다면 나, 나는 죽어버릴 테야."
길상의 눈이 차츰 가늘게 좁혀진다.
"도련님?"
속삭이듯 낮았다.
"정말로 그리 생각하시오?"
"정말이야."
"정녕 그렇소?"
여전히 속삭이듯.
"정녕!"
"그라믄 와 이런 짓을 하시오?"
"너, 너무 이뻐서."
길상의 얼굴은 다시 질린다.
"죽어버릴 테야. 맹세하겠어. 나는 죽어버릴 테야!"
"......"
"아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난 그걸 알어. 어째 길상이는 그걸 몰라주니?"
"알겄소."
"나, 나, 난 말이야. 누이동생이 예, 예뻐서 말이야."
"알겄소."
병수에 비하면 거인같은 큰 길상이 어두운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사색이 되었던 병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그 핏기는 얼굴에서 목덜미까지, 봄을 알기에는 아직 부드럽고 연약한 살갗이 해당화 꽃빛으로 물든다.
"길상아."
"예."
"내 이 수치스런 짓 아, 아무에게도 말 안 하겠지?"
"예. 입밖에 내지 않겄십니다."
병수는 흐느껴 운다. 울음은 격렬해져서 경기 들릴 아이처럼 전신을 떤다. 길상은 병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대숲을 빠져나간다. 김서방댁은 담장에 세워놓은 문짝을 손가락으로 톡톡 퉁겨본다.
"다 말랐소?"
봉순이 뒤에서 물었다.
"응, 햇볕이 좋아서 금시 탕글탕글 말랐다."
"그라문 가지가서 문을 답시다."
"그러까? 오늘이 칠월 스무이틀인가?"
"야, 스무이틀이요."
"팔월에 문을 바르믄 도둑이 든다 카니께...... 아따, 금년에는 늦기까지 매미도 울어쌌는다."
"팔월에 물을 바르믄 정말 도둑이 드요?"
"그거사 머 옛적부터 내리온 말이고, 밖에서 이 거궁한 집에 무신 도둑이 들까마는 집안 도둑이 더 무서븐 기라."
"그기이 무신 말이요?"
"말이 그렇대는 기제. 흥, 집안 도둑이사 벌써 들었이니께."
김서방댁과 봉순이는 오래간만에 의견이 일치되어 서로 마주보며 쓰디쓴 웃음을 띤다.
"그렁저렁 추석이 오고 나믄 금년 한해도 가는데, 빌어묵을! 이래서 우찌 살 긴지 내사 통 모르겄다."
문을 달 생각은 않고 김서방댁은 풀이 듬성듬성 돋아난 땅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이래가지고 못 산다, 못 살아."
김서방댁은 주머니 속에서 담뱃가루를 한줌 꺼내어 찢어낸 창호지에 담배를 말고 침을 칠한 뒤 붙여문다. 콧구멍으로 연기를 뿜어 내며
"서울서 올 그 연놈들은 촌에 사는 우리 겉은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모양이라."
"시끄럽소. 김서방댁은 여기 오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는 저 말 하고, 안다가도 모르겄십니다."
봉순이 한마디 쏘아준다.
"사람 잡네. 내가 언지?"
"언지나 마나 늘 그란하요?"
"어맨 소리 하지 마라. 초록은 동색이요 가제는 게 펜이더라고 우찌 내가 거기 가서 저 말 할 것꼬? 니는 글리 싶어서 그러는 기지. 요새사 머 길상이놈도 서울서 온 옥이년하고 친하더마."
"듣기 싫소!"
봉순이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걱정마라. 내가 니 맘 떠보니라고, 하하핫...... 머시마가 헌헌장부요 관옥겉이 생깄이니 가시나들이 딸는 것은 이치가 그리 돼 있는 기고 그래도, 우리 길상이사 넘어갈 성미가 아닌께."
"되잖은 소리도 해쌌는다."
눈을 흘겼으나 봉순이의 말투는 한결 누그러졌다.
"하여간에 서울서 온 그 연놈들은 우리 겉은 촌사람은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모양인데 생각해보믄 주제넘는 년들 아니가? 아 그래 봉순이, 니나 내나 어디 이 집의 종년이더란 말가? 내사 본시부터 농사꾼 달이었고 죽은 우리 김서방만 해도 옛날 윤참판댁의 씨종이기는 하지만 그 댁이 천주학을 해서 종순서를 없이 해주었으며 면천한 지는 삼사십 년 전이고, 니는 그 내력을 잘 모를 기다마는 그 댁 어른이 돌아가신 마님의 친정 아부닌데 우리 김서방이 그 어른을 업고 밤길을 도주해가지고 이곳까지 왔이니께, 말을 하자믄 마님한데는 은인인 기라. 그리그리 해서 김서방이 이 댁 살림을 모두 두량하게 됐는데 수십 년을 뻬빠지게 일을 보아온 거사 천하가 다 아는 일이제. 기찰 일이다. 마님만 살아 기싰으믄 우리가 이 천대를 받고 살 기든가?"
콧수멍으로부터 연신 연기를 뿜어내면서 혀를 끌끌 찬다.
"마님이 처리를 잘못하싰지, 잘못하싰어."
"지나간 일을 말하믄 머하겄소. 우리 애기씨 수모당하시는 거 생각하믄 김서방댁 억울한 거사 소분지애씨요."
"그야 머 내 일만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다. 어느 구석을 봐도 그저 복통을 찍을 일뿐인께. 우째서 우리 꼴들이 이리 됐는지 모르겄다. 내가 문딩인가, 안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안 하나. 멋이 우떻고 함시로 숭만 찔찔 봄서, 옛말에 날아온 돌이 본돌 친다 카고 객이 준인 노릇한다 카더라마는 서울서 온 그 연놈들은 물도 씻어가지고 묵는가, 나를 짜잖다 카더라나? 그뿐이믄 또 좋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내가 꼴이사 이렇다마는 내 세상 밖에 나와가지고는 남으 눈 기신 일이 한분이라도 있었이믄 참말이제 앉고 못 일어 날 기다. 바늘 하나 기신 일이 없구마. 한데 그 연놈들이 내가 요전분에 깨 한 됫박 장에 팔고 온 거를 알고 안에서 퍼내간 줄 생각하는 모양이다. 세상에 그런 벼락맞일 연놈들이 어디 있겄노? 서울서는 모두 도둑질하는 거만 보고 살았던가? 옛날부터 내가 부치묵는 밭뙈기서 나는 거는 내 맘대로 쓰게 돼 있는 거고, 아 그거사 모를 사람이 없지. 그저껜가 내가 도장 앞을 지나가니께 나를 보고 얼른 도장 문을 잠그는 거 아니가. 우찌나 괘씸하던지. 그래 지나다가 정기에 타도 들어가믄 반찬 하나 손을 못 대게 하니 더러바서 이 세상을 우찌 살겄노. 내가 그렇게도 안 살았구만. 마님 살아 기실 적에는 늘인 듯이 임석해가지고 갈라묵고 살았구만.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더라고, 제 배만 부르믄 종들 배도 부른가, 손톱 밑에 끼워놓고 발발 떠는데 그것도 이녁이 모은 살림이라믄 또 모르지. 누구 살림인데? 돌아가신 우리 마님이사 당신은 절용하시도 아랫사람들한테는 얼마나 후하싰노? 남으 살림 가지고 양칠봉칠 쓰믄서."
어느덧 김서방댁은 홍씨 험담에 기승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때 삼월이 시적시적 걸어들어왔다. 어딘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어오는 모양이다. 봉순이는 샐쭉해지면서 마루 쪽으로 가서 앉아 버린다.
"삼월아."
"야?"
"니 얼굴이 와 그렇노."
"뭐가 우떻소."
"숭년 묵은 풀째기 겉다. 그래 젖은 잘 나오나."
"잘 나기는...... 암밥 묵소."
먼산을 바라보면 되는 대로 대꾸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서방댁은 새로운 말상대가 생긴 것이 신이 나는 모양으로 또다시 지껄이기를 시작한다. 삼수 애기며 두리 애기며.
"김서방댁! 해가 져야 문 달 기요!"
삼월이를 멸시하기 위해 마루에 뻗치고 앉았던 봉순이 기다리다 못해 팩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편은 김서방댁보다 삼월이였다. 멀거나 쳐다보다가 삼월이는 비실비실 나갔다.
"졸갑스런 구신이 물밥 천신 못한다 카든에 머가 바빠서 이 긴긴해에, 아이구 허리야."
김서방댁은 문짝을 옮겨놓는다.
"나 김서방댁겉이 말 많은 사람 첨 봤소!"
"아따 지랄 그만하고 자아, 문이나 달자."
책을 읽고 있던 서희가 일어섰다. 분홍 춘사치마 밑에 오복한 버선발이 내다 보인다.
"다 말랐느냐?"
"예."
김서방댁은 문을 달아놓고 이리저리 밀어본다. 그러더니
"애기씨."
"왜 그러느냐."
"저어, 저어 잘롱 말입니다."
서희가 돌아본다.
"본시 놀발이 있었일 긴데"
순간 서희의 낯빛이 살짝 변한다.
"와 막대기로 고이놨이까요?"
"......"
"전부터 그랬십니까."
봉순이도 김서방댁 어깨 너머 방안을 들여다본다.
"쓸대없는 걱정 하는군."
서희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떠밀어내듯 엄격했으나 왠지 당황해지는 기색이 있다.
"차암, 나는 여태 그것도 몰랐네요."
봉순이 말이다. 김서방댁은 다시
"농발이 있었을 긴데 농발을 우짜고 농을 벵신 맨들었이까."
"나머지 문이나 달아."
"예. 그래도 저 좋은 농이 농발이 없어 되겄십니까. 소목꾼 불러다가 맞추도록 하시이소."
"왜 이리 시끄러우냐? 내가 알아 할 터이니 참견 말어!"
서희는 화를 낸다. 작은방의 문까지 다 끼워놓고 손을 씻으면서 김서방댁은 중얼거렸다.
"그 농은 별당아씨 혼인 때 마친건데 얼마나 좋은 농이라꼬? 언제부터 농발이 없어졌이까."
"모르겄소. 생각이 안 나네요. 옛날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무심코 보았는데."
"살림이 콩가리가 됐지. 집안이 망할라 카믄...... 하기사 농발 하나가 그리 대단하겄노."
"봉순아!"
길상이 부르는 소리가 담장 밖에서 들려왔다. 다급한 목소리다. 봉순이 일어나서 치맛자락에 손을 닦으며 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