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谿谷) 장 유(張 維: 1587~1638):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로 문장가요 사상가이다.
삼전도비를 지을 찬술자 후보로 추천된 4명의 문장가(李 景奭, 李 慶全, 張 維, 趙 希逸) 중에 한 사람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서 있었다. 이른바 삼전도비이다.
높이 395cm, 넓이 140cm이다. 이 비석은 1637년(인조 15)에 청나라의 요구로 세워진 승전비이다.
조선으로 보면 치욕의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1637년 3월에 청나라는 그들의 전승기념비를 세우라고 했다. 인
조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청나라는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이들은 물론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의리를 저버린 사람으로 낙인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경전은 병을 이유로 비문 찬술에 나서지 않았다.나머지 세 사람은 2,3일 사이에 비문을 지어 바쳤다.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졸렬하게 지어 채택되지 않았다.이경석과 장유의 글이 청나라로 보내졌다.
청나라에서는 귀화한 명의 유학자 범문정(范文程) 등이 이경석의 글을 채택했으나 너무 간략하니 보완해서 올리라고 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아 간략하게 사실만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경석이 고쳐 쓰기를 싫어할 것은 뻔했다.
인조는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이것에 의해 판가름 나게 되어 있다.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 라고 하면서
간곡하게 비문개수를 부탁했다. 이경석은 왕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하는 수 없이 비문개수를 수락했다.
이경석은 일부를 고치고는 공부를 가르쳐 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경석은 나라의 보존이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란 소절(小節)을 버린 것이다.
“남초(南草·담배)는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유래해서 일본에서 번성했다.
무오 연간(1618년)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장유가 가장 먼저 피웠다.”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우리나라 담배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선조는 1275년 충렬왕비인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한 위구르족 출신인 장순룡이었다.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됐다
그의 12대 손인 장유는 조선 중엽의 4대 문장가(이정구·신흠·이식·장유)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그 장유가 담배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우선 <대동기년>이 언급하고 있듯 장유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계곡만필>에서 조선에서 담배가 전래되고 퍼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남령초(담배)는 20년 전 조선에 들어왔다. 위로는 고관대작들과 아래로는 가마꾼과 초동목수들까지
피우지 않은 자가 백 사람, 아니 천 사람 가운데 겨우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 <본초강목>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효능은 알 수 없다. 다만 담배맛을 보니 매우면서도 독기가 있다.
많이 들이마시면 어지럼증이 생기지만 오래 피운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담배 짝사랑 장유의 담배 짝사랑을 둘러싼, 그야말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많다.예컨대 몇가지 문헌을 살펴보자.
“담파고(담배)는 광해군 때 들어왔는데. 장유가 흡입하기를 가장 즐겼다.
그의 장인 김상용이 임금에 건의해서 ‘요망한 풀’을 금하도록 청했다.”(<임하필기> ‘문헌지장편·담파고’)
“일찍이 사위(장유)가 연석(筵席·임금과 신하가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장인(김상용)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여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조) 탑전(榻前·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위를 꾸짖었으니
‘탑전 힐난(榻前詰難)’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사위(장유)와 장인(김상용)의 일화는 구전설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즉 장유가 담배를 피울 무렵엔 당연히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장유는 ‘감히’ 어전(임금의 면전)에서 담뱃대를 빡빡 빨았다는 것.
이 꼴을 보다못한 장인이 핀잔을 주었다는 것.
“사부빈객(세자의 스승)인 자네가 어찌 어전에서 남초(담배)를 피우시는가.”
장인의 꾸지람을 들은 장유가 재빨리 담배를 끄지 김상용이 더 쏘아붙였단다.
애연가 사위와 혐연가 장인 그런 사위(장유)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렇게 꼴보기
싫어했던 장인(김상용)이 훗날 담배불 때문에 자폭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청나라군의 진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김상용은 원임대신(퇴직한 대신)으로서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적병이 곧 강화도를 함락시키려 했다.(1637년 1월 22일)
김상용은 “구차하게 사느니 죽음을 택한다”고 하면서 남문의 문루에 나가 화약상자에 걸터 앉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가서 불을 가져오너라.”
명령을 받은 시종은 공(김상용)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았기에 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상용은 끝내 불을 재촉해서 가져와서는 폭약상자에 붙이고 말았다.
김상용의 13살짜리 손자와, 그를 따르던 측근들, 그리고 시종까지 모두 피하지 않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
(<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강화도 함락’)
그런데 이 김상용의 ‘순절(殉節)’은 훗날 무수한 억측을 낳았던 것 같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다 담뱃불을 실수로 떨어뜨려 폭사한 것이 아니냐는 뒷담화가 퍼졌던 것이다.
인조 임금도 그 소문을 듣고 ‘혹’ 했던 모양이다.
8개월 뒤인 1637년 10월 28일 예조가 김상용의 순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김상용을 위한 제문을 바쳤다.
수찬 조중려가 바친 제문은 “(김상용이)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고, 홍모(鴻毛·깃털)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 임금은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는 쪽지를 붙여 내렸다. 반려한 것이다.
제문을 지은 조중려가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떨어뜨려 살신성인을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조는 “진실을 가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인조실록>)
특히 김상용의 아들인 김광환·광현 형제가 올린 피눈물 나는 상소가 심금을 울린다.
“신의 아비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신의 아비가 어전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위 장유를 면전에서 질책했지 않았습니까.
이는 성상의 총명한 기억 속에서도 있지 않습니까.
신의 아비가 어찌 죽을 때에 평생에 싫어하던 담배를 피웠겠습니까.”
김광환·광현 형제는 그러면서 “평소 피웠다 해도 죽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화약 옆에서 불을 잡고 담배를 피웠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인조는 “김상용의 일은 워낙 목격한 사람들이 많아 과인이 의심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 해명했다.
그리고는 “담당부서에게 진상을 파악해서 결론을 내릴 것”이라 전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
급기야 인조는 한달 반 뒤인 12월 8일 “김상용은 의리를 택해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인조실록>)
자칫했으면 담뱃불 실화로 인한 어이없는 폭사로 손가락질 받을 뻔했던 순절의 명예회복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