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혹은 아름다운 영혼의 응시
여전히 티브이에선 미국 테러 사건에 대해 이리저리 말이 많군요. 희생자들과 그 주변인들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서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지만, 미국의 충분히 예상되는 다음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게 틀림없겠군요.
결국 예상해보면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상황만 더욱 나빠지게 될 결과만 남았군요(테러리스트들에게 그 책임은 마땅히 돌아가겠죠). 그런데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숨겨진 진짜 적은 테러리스트(그들은 처음부터 예상가능한 적이었고 충분히 노출된 악이었으니까)라기보다는 이 불쾌하리만치 흥미있는 사건(칸트는 그것을 "숭고"의 체험과 관련지어 일찌감치 말한 적이 있죠. 불쾌한 것을 응시하면서 모종의 쾌락을 느끼는 주체의 안전한, 혹은 그렇다고
가정된 위치)들을 응시하는 미디어가 아닐까도 생각해봤답니다. 그리고 그
미디어의 제한된 시선을 통해서 이번 사건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의 중립적인(그렇다고 가정된) 응시, 세상의 악을 바라보면서 테러리즘에 분노하며 미국인들에게 동정적 시선을 보내는 나, 그렇게 순수하다고 스스로 가정하고
비평하고 관조하는 나의 시선(헤겔이 "관조적인 시선"혹은 "아름다운 영혼"이라 부른)이야말로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봤답니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라는 소설에서 착한 아이들을 돌보는 여자 가정교사는 불길한 집안에서 유령을 보고 아이들을 그 유령으로부터 지켜내려고
노력하는데, 정작 아이들은 유령을 보지 못하죠. 소설이 끝나는 지점에선
아이들은 죽어버리고, 가정교사만 남는데, 소설에서 살해자는 누구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죠. 소설을 벗어나 이야기한다면, 그 아이들의 진짜 살해자는 아마 유령이 아니라, 유령을 봤다고 주장하고 아이들을 보호하려던 스스로 선인을 자처한 가정교사였을 겁니다. 이미 그 가정교사는 헛것을 볼 정도로 미쳐있었던 거지요(참고로 이 소설의 화자는 그 가정교사랍니다. 그녀가 보는 전부가 바로 소설의 세계전체이지요. 1인칭 화자의 순수주관성에
이미 침탈당한 세계).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순수하게 가정된 그 가정교사의
입장, 집안을 감도는 악령을 오로지 혼자만 보는 괴상한 능력을 지닌 그녀의 시선이야말로 치명적인 것이지요(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걸프전과 포스트모던적 냉소주의
아침에서야 그 사건을 티브이에서 보며 저는 그 미디어의 공세에 붙박혀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한탄과 동정의 마음을 금할 길 없었는데, 거기엔 묘한
쾌락도 얽혀 있었죠. 다른 쾌락("미국놈들, 잘 됐다, 인과응보다")이 아니라 방송을 통해 중계되는 사건 자체를 계속 호기심있게 바라보려는 지속 자체의 쾌락 말이죠. 저는 어차피 안전한 거리에서 그 사건만을 보면서 충분히 동정하고, 마음껏 분노하고, 그 다음엔 그 사건을 느긋히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번 사건을 보면서 언젠가 시뮬라크르의 주창자 장 보드리야르가 걸프전에
대해서 했던 "걸프전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발언을 떠올려봤습니다. 이 지극히도 냉소적인 발언은 89년 이후에 가속화된 서방의 냉냉한 분위기와 지구 남반구의 인종적 열광에 대한 정확한 알레고리로 읽혔죠. 걸프전으로 다국적군이 100명 가까이 사망했을 때, 그것은 온 세계의 언론을 타고 대대적으로 보고 되었지만, 정작 30만에 가까운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한
이라크의 상황에 대해서는 미디어들은 침묵했죠. 100명과 30만. 이 간단한
통계적인 숫자대비의 놀음은 그 자체로 환상적입니다. 탈근대를 살아가던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무기력으로 대응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지요. 한편에는 계몽주의의 오랜 아들들인 냉소주의가 만연해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런 냉소주의의 은밀한 쾌락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종교적, 인종적 근본주의가 판치고 있는 시대. 과연 이 시대가 대서사는 종말을 맞았고, 다양한 지류의 서사들만이 언어놀이로 유희를 벌이고 있는 때인지.
미국과 이스라엘, 임시적 도덕
오래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긴 팔레스타인 어린 아이가
총에 맞아 숨지는 광경을 보도하면서 서방 언론들과 국가의 수뇌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이번엔 그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테러를 보며 다시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했지요. 저는 그 국가와
수뇌부들이 정의로운 시선으로 학살과 인종적 갈등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한 이들의 입장이 혼란스럽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두 가지로 가정되는 입장을 생성시키는 조건, 그게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 뿐이죠. 이들 서방국가는 일찌감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력을 드러낸 적이 있으며,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경찰 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 역시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방어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면서(미국은 라캉식으로 말하면 정치, 경제, 군사의 "상징"적 시설의 단단한 중핵이 근본적으로 토대없고 불안정한 "무"임을 이번 사건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지요)동시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중재하거나 인종적 열광(악=테러리즘)으로 뭉쳤다고 가정되는 중동이나 발칸반도에 군사적인 개입을 하면서 이득을 취할 명분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공개한 셈이지요.
미국은 걸프전의 만행과는 정반대로 "미국에 대한 테러는 일어났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걸프전에서 억압된 무언가가 그대로 이번 테러
사건의 한 가운데로 귀환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 저주는 고스란히 희생자 미국시민에게 돌아가고 있고, 미국은 이들 희생자를 담보로 삼아
정의의 보복이란 명분으로 꼭같은 테러(전쟁)을 테러국가들에게 행할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지금은 미국의 테러에 환호성을 지르는 자신들의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을 볼모로 잡고 대기상태이고..."오늘날 근본적인 적은 더 이상 근본주의가 아니라 냉소주의다." 어떤 윤리도 부재한 채 단지
그때그때의 임시적인 도덕으로 몰락하는 세계를 땜질하는 사태, 오늘 그런
걸 생각해봤지요.
****************************************
테러리즘과 비합리주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테러'가 한일합방의 "원인"이다? 혹, 그
테러 때문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법적으로 지배한 "결과"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형식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이 말은 옳지 못한 듯 합니다. 일본의
대한제국의 지배에 대한 계획은 오랫동안 철저히 계산된 결과이며, 안중근의 행동만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일본의 대략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한국을 지배할 명분을 획득하는데 일종의 조그마한 빌미로 삼은 것입니다. 즉
안중근의 테러는 대한제국 합병의 "원인"이 아니라 차라리 그 "결과"인 셈입니다. 이는 비단 안중근을 의사라고 부르는 한국이나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일본인들의 시각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총격은 대한제국의 합병(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인)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합리적 행위라고 보면 안되나요? 그건 폭력을 옹호하는 행위인가요?
그럼 절 비난해도 좋습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광신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나요? 문명화된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인을 항상 더럽고 불결하고 교활해서 교정이 불가능한 야만인으로 잘도 보았지요.
미국과 이스라엘, 문명의 강박증
같은 상황으로 볼 때, 당연히 이번 테러 사건을 통해 궁극적인 이익을 손에
넣는 것은 미국이리라 생각됩니다. 근데 그게 진짜 이익일까요? 미국이 분명 이익을 취할 것이라면, 테러리스트들의 공격(명확하지도 않은데 대다수
사람들은 오사마 빈 라덴을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더군요)은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동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태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예상을 하지 못했을까요? 이들이 노린 건 이익이었을까요?
미국이 생각하는 그런 이득? 합리적 이익을 노린 게 아니니까, 당연히 이들
테러리스트 집단을 새뮤얼 헌팅턴이나 그 밖의 미국인들처럼 광신도로 생각하는 게 편리하겠죠. 미국 하버드의 옌칭 연구소(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박물관이자 공장"이라 부른)의 교수 헌팅턴, 며칠 전 <중앙일보>에 대담한 내용을 보니, 기가차서 말도 나오지 않더군요. 그는 완전히 문명/야만의 구도를 통해 이번 테러 공격을 문명세계에 대한 야만인의 도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번 미국의 보복공격을 21세기의 새로운 전쟁형태(거의 60여개에 달하는 테러국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로 보면서 적극 지지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는 이슬람 국가들을 이번 테러지원국으로 거의 기정사실화 하더군요. 그는 <문명의 충돌>(요즘 베스트셀러를 다시 구가한다고 하지요)인가 하는 책에서는 이슬람을 잘도 "문명"(근데 그가 말하는 문명은 대단히 단일하고도 정체적이더라고요. 그는 문명 혹은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습니다. 그는 문화인류학자도 아니고 미국 행정부를 위해
일했던 중동정책기획자입니다)이라고 부르고서는, 이슬람 남자들은 머리와
목에 긴 터번을 두르고 수염을 기르고 소련제 총을 맨 채 라마단 때에는 땅바닥에 절을 하며 미국 타도를 외치는 광신도로, 여자들은 아직도 얼굴에
검은 면을 두르고 종종 걸음으로 다니고 가부장제에 순종하는 여성으로, 그리고 아이들은 미국타도라는 깃발을 들고 아침만 되면 학교에 가는 게 아니라 집총훈련소에 가는 걸로 잘도 그려놨더군요. 솔직히 우리가 이해하는 이슬람의 이미지, 단 한 사람을 통해 이슬람 전체를 상상하는 방식, 이건 잘
알다시피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헌팅턴에겐 이슬람의 문명(실상은 과거에 한정된)이란 이 정도의 이미지에서 그치고 맙디다. 그리고 뭐, 과거 이슬람의 찬란한 유산을 칭찬하면서도 현재 이슬람은 왜 이런가, 왜 이리도
비이성적이며 전근대적이며 반문명의 광신도들인가하며 반문하는 게 바로
헌팅턴의 시각일 겁니다. 그건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다시 이슬람으로 시선을 돌리는 우리들의 이슬람에 대한 선험적 심상과도 조금도 다를 바 없지요. 우린, 미국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이도 미국식 교육제도와 교회의 설교를 통해 들었지만(그래서 우리가 미국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게 뭐가 있을까요? 우리는 미국이 어떻게 나쁜지 제대로 알고 있나요?), 이슬람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건 미국식 교육과 영화, 요컨대 "문명의 교육"을 통해
여과되고 상상된 "야만"의 이슬람밖엔 없습니다. 그럼 분명하군요.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이란 야만을 상상하고 조작하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고 또
궁극적으로 정복, 지배해야 마땅한, 더러운 제 1세계의 삶의 방식이군요.
정말 위대하신 맑시스트 랍비=스승(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이런 "문명의 역사치고 야만의 역사가
아닌 게" 없네요. 아래의 지젝의 말은 이번 자유세계를 수호하고자 하며 선(미국)/악(이슬람, 테러국가)이라는 구도를 따라 무자비한 전쟁을 획책하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정신분석적 충고로 들릴 만 하네요.
만일 우리가 선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세속적인 것에 대한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선에 대한 우리의 강박증은 악의 힘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선 관념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파괴적인 증오라는 형태로
변해버리게 될 것이다. 진정한 악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에서처럼
세상에서 오직 악만을 인식하는, 결백하다고 가정된 시선이다. <나사의 회전>의 경우 진정한 악은 화자(젊은 여자 가정교사) 자신의 시선이다.(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런던: 버소출판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