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친구 홈피에 있는 대륙백제설인데;; 제가 보기에는 좀 앞뒤가 맞는 것 같아서;; 님들한테 좀 평가좀 부탁할려고 합니다;;
친구한테 몰래가저와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올려 볼려고요
첫번째 이유는 북위 내용이 나오는데 그건 좀 식상하니까 ㅎㅎ
문법도 틀리고 이상하지만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두번째 이유는 ㅎㅎ;
내가 삼국지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그러다 문뜩 가진 궁금증이 생겼다..
삼국지에서는 왜 해전이 없을까?
오나라가 수전에서 강하고 위나라는 육지에서 강하다는 것은 삼국지를 만화로만 봐도 충분히 알수 있는 내용인데 오나라가 유리한 해전을 버리고 굳지 육지로만 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지의 세력 지도를 보면 해전을 하면 위나 오가 꽤나 효과적인 전투를 할수있다. 예를 들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산둥반도를 공격하여 소금공급에 차질이 생기게 만들수도 있고, 위나라 뒤에서 깔짝대던 공손씨를 도와준다면 위나라의 신경을 나눌수 있다. 실제로 위나라는 뒤쪽에 있던 공손씨나 고구려를 정벌했다. 만약 이때 오의 해군이 이들을 도와줬다면 위나라는 피해가 막심했을것이다. 그런데 오나라는 그런 효과적이 방법대신 오로지 장강을 넘어 육지로만 공격하려 드렀다. 심지어 해군으로 후방 교란 마저 안시켰다.
오나라가 이렇게 게릴라만 하여도 위나라는 해안가에서 주민을 이주 시키거나 많은 병력을 해안가에 주든 시켜야 된다. 우리나라가 왜구때문에 고생한것처럼 말이다.
위나라도 해군으로 오나라를 공격할수 있다. 물론 수군이 강한 오나라에게 할만큼 쉬운 작전은 아니었을테지만 내가 생각하는 작전은 충분히 도박을 할만하다.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은 지금의 항저우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에 주요도시중 하나인 오라는 도시도 해군으로 갈수있다. 여기에 해군으로 몰래 대군을 투입시켜 수도를 잠깐이라도 점령하여 손씨들과 대신들을 잡았다면 위는 손쉽게 승리할수 있었을것이다.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할만한 작전이고 군세는 위나라가 훨신 많으니까 몇만 버린다고 실행할법한 작전이다.
그런데 내가 이때까지본 삼국지에는 한번도 해전이 안나온다. 내가 읽기편한 번역본만 봐서 그럴수도 있지만 이정도 나라의 국운을 걸고하는 작전이 안적혀있는것은 이상하다. 이것은 이런 일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위나라나 오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멍청하다고만 생각할수 없으니까. 그럼 왜 이런 작전을 못 세웠을까? 자신들의 영토가 바다에 다아 있지 않거나 다아있다고 하여도 뭔가가 막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무었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현실성 있는 세력은 백제이다. 고구려도 가능할순 있지만 백제가 훨신 가능성이 높다. 당현히 백제가 더 가깝기도 하고 내가 이글을 쓰는 주제인 백제가 대륙에 없었다면 이상한점이 더욱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이유는 백제 성의 수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이런말이 있다. 태왕이 백제 58개성 700여 촌을 점령했고 그중 30개성에 관리를 파견 했다고. 이상한점은 별로 없어보이지만 그건 성에 대한 개념의 차이이다.
나는 성이 그렇게 쉽게 세워질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이란걸 대충 지었다가는 점령당하여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딱좋고 완벽하게 세울려면 돈과 인력이 장난아니게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은 그렇게 많이도 필요없다. 지금의 시나 군에 하나나 둘정도 있으면 충분하다. 물론 광역시들이나 서울에는 더욱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곳에 읍단위나 시단위로 하나씩 있으면 많이 있는것이다. 그것도 좀 많은 느낌인데 지금보다 인구도 훨신 적었던 삼국시대에 거의 면단위로 성을 지었을까? 이때 고구려가 점령했던 지역은 잘해봐야 지금의 평안남도 남쪽에서 한강 유역 근처정도 일것이다. 이정도 땅에 58개나 성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한반도 내에 성이 별로 없다는 것은 황산벌에서도 알수있다. 오죽하면 계백이 성이아니라 벌판에 목책이나 쌓고 싸웠을까? 성이 그렇게 많은백제에서 근처에있는 성 하나 골라서 막고 그냥 지나가면 뒤를 공격하면 되고, 그런데 그렇게 전혀 하지 못했다. 결국 한반도의 백제는 진짜 백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백제 부흥운동때 부흥군은 백제의 200여개 성을 점령했다고 했는데 200개의 성에 당과 신라가 정령한것까지하면 거의 300개의 성에 가까울것이다. 한반도에 백제가 제일 영토가 작을때라고 말하는 때에 300개에 가까운성이 있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부여성이 점령당할때 그 성들에 있던 군대는 뭘하고 있었을까? 계백이 시간끌때 수도 결집하여 큰 전투라도 한번 해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럼 나머지 성에서 차차 지원군이 도착할텐데.
백제의 성이 그렇게 많았다면 군대도 꽤나 됬을것이다 한성은 최소 몇백에서 많으면 몇만이나 몇십만도 수용할수 있어야 한다. 고구려의 안시성은 주민까지 5만좀 안되게 있었다. 이정도는 되야 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300개에 가까운성에 군사가 1500정도 씩만 있다고 해보면(이건 큰성에서 보면 너무나 작지만) 300x1500= 450000 이다. 45만이다. 이것은 물론 반정도까지도 줄어들수 있다.백제가 망하고 있던 시점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20만은 된다. 한반도에 20만이 있다고 한다면 당이라도 쉽게 노릴 수 없는 병력이다. 이것들이 뭉친다면 원정은 고구려 원정을 한뒤 육로로 대군을 이끌고 가야지 백제를 점령할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수군과 신라군들 만으로 백제를 점령하였다. 계백이 시간을 끌어 줬으니 이들 군대가 다는 못 모여도 가까이에 있는 성들에서는 수도인 부여로 들어와 있을수 있었지만 그렇게 못 하고 백제는 망하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결국 한반도의 백제에는 극히 일부분의 성과 군사만 주든하고 있었던것이다. 나머지는 대륙이나 규슈등에 나눠져 있었을것이다.
첫댓글 고대 그리스의 아폴로가 몇 개였죠? 세번째 부분에 있어선 그리스를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론 2천개는 넘었던 것 같은데요.
minamjun11님;; 죄송하지만 아폴로가 아니라 폴리스 아닌가요?;;
그런데 글면 군사 숫자나 계백이 왜 굳이 성에 안들어가고 벌판에서 싸웠는지가;; 아닌가? ㅡ,.ㅡ
이미 산성에서 막기에 신라군이 너무 가까이 왔는게 아닌가요?
수도나 기벌포가는 길목만 막으면 됬는데;; 그렇게 많은 성중에서 갈만한곳이 없는건 좀..
계백이 황산벌에서 맞선이유: 김유신군은 당군의 병참군입니다...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으로 일관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여로 향하는 길 즉, 당군의 주둔지로 향하던 김유신을 막아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농성전을 풀고 황산벌로 나선이유일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전의 영역확보가 아니라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전이 광역화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음~아직도 황산벌에 진군한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 5만 정병(정예병)을 당군의 병참군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계시는군요..삼국사기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인지?..아니면 정황상 전혀 맞질않는 정병을 보급부대쯤으로 사료조차 없는 내용을 저렇게 단언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병참군 5만에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이틀을 채 넘기지 못하고 격파당한 계백의 백제군은 허접한 군대밖에 안된다는 결론인데..아무래도 삼국사기를 꼼꼼히 살피셔야 겠습니다..
백제 도성인 사비성 부근으로 당군과 합류차 직공하는 신라군을 성안에서 농성전은 의미가 없고 황산벌이든 어디이든간에 좌우지간 합류를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백제군의 절박함을 먼저 이해하고 난뒤에 따질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당연합군은 광역화된 전쟁이 아니라 백제도성을 직공하는 속전속결의 백제 멸망전 그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요..
소호금천씨님 말씀에 덧붙이자면 신라의 군이 병참군이였다 하여도 그것을 근처에있는 성으로 들어가서 지나가면 뒤쪽에있는 수송물자를 공격하는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초지일관 주장한 황산벌로 진군한 신라군은 삼국사기 사료 그대로 보급품을 싣고 가는 기동성이 늦은 보급 수송군단이 아니라 신속하게 행군해 가는 정병 즉 정예병 5만 군사라는 뜻입니다..이러한 정병의 전투부대 대군단을 소수병력으로 성밖에 나와 기습을 한다 치더라도 오히려 계란으로 바위치기로써 역공으로 전멸당하기 십상이지요.
두번째 : 수군에 대한 내용에서 적벽대전의 대규모 수군을 연상하면 곤란할듯 차라리 KBS의 불멸의 이순신을 연상하시는것이 좋을듯,.... 즉 전근대해전은 연근해전투입니다... 임진왜란시 왜군이 넓은 바다를 그대로 두고 명량으로 진군한 이유와 그곳을 막아선 이순진장군,,,그리고 명량해전을 보면 알수 있을듯합니다... 오나라 수군이 연근해로 중국의 연근해를 타고 가서 발해만으로 향한다는 것은 수만의 해군을 위나라의 요격에 나잡아 잡수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물론 발해만을 넘거나 상해인근에서 한강유역이나 당항성이나 또는 웅진으로 대양으로 도강도 염두에 둘수 있으나.....대부분 몰래 사신을 파견하는 정도였음
당나라가 고구려의 요동성을 필두로 하는 방어선을 뚫는것에 많은 희생을 치룬후 이르바 대규모 드롭작전으로 대규모 육군을 상륙시키는 전술을 채택하기도 하엿으나, 이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 될수 있기에 신라와 연합한 병참지원을 약속받고 상륙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것입니다.... 고려이전의 해전 즉 화약무기가 나오기전의 해전은 육군을 실어나르는것이 주역할이 아니었나 합니다.
신라가 당나라에게 육로로 병참지원을 하는 형태는 참으로 어리석은 전략이지요..5만의 육로군으로 당나라 13만 대군의 보급품을 싣고 탄현을 넘는다면 우선 기동성면에서나 수송물자의 한계와 백제군과 조우시 매우 위험스런 상황을 맞게 되는 어린애같은 전략에 불과하다고 봅니다..차라리 보급품을 덕물도에서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병선을 이용하여 당나라 소정방군과 행동하는게 훨씬 안전하고 대량의 보급품을 안전하게 공급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만일에 신라군이 당나라를 지원하는 5만의 병참군을 가지고 백제의 5천 결사대를 단 이틀만에 돌파했다면 이것은 전후무후한 전쟁으로 수송병이 특히 유리한 지역에서 방어하고 있는 적의 결사대인 보기병을 단 이틀만에 전멸시키며 격파한 그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전쟁사가 되는데 그렇다면 백제의 5천 결사대 4승의 전공은 너무 과장된것에 불과하다는 뜻인지요?
계백이 병참군을 굳이 정면에서 막을 필요는 없었지않을까요? 그냥 지나가면 뒤치기봐도 어느정도 성공할텐데;;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 전쟁에서 고구려가 수성전위주로 했던것은 이런걸 할려고 그랬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유신도 황산벌에서 돌아갈수 없었지 않나 십습니다. 제가 황산벌을 인터넷에 처보니 충분히 우회해서 돌아갈수 있었던 곳이었던것 같습니다.
경우가 다르지 않나요? 당시 백제는 수도 주변에 지방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한 듯 보이는 데다가, 동서 양면에서 공격을 받는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모은 중앙군의 태반은 당군을 막는 데에 보내고, 소수의 부대를 신라군을 막기 위해 계백에게 주어 보낸 듯 보이는데, 이 말은 자칫 계백이 신라군의 발목을 잡지 못하면 (채 다 모이지도 못한) 백제의 주력이 당군을 막느라 도성수비를 못하는 동안 신라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백제 멸망기 백제 조정의 논의를 보면, 어느 누구도 농성은 크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이 말은 사비성이 평양성과 달리 대군의 공격을 막기에 유리한 성이 아니라는 뜻일 겁니다.
즉, 대중국전 당시 적군의 공격방향이 서쪽 하나로만 국한되고 도성 자체도 철옹성이었던 고구려와 동서 양면을 대군에 의해 협공당하고 있고 도성 자체의 방어력도 기대하기 어려운 백제를 똑같이 비교할 순 없다고 봅니다.
저는 사비성에서 수비를 하는 것을 말한것이 아니라 계백이 신라의 진입로에 근접해있는 성에서 막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 했던것입니다. 아무리 군대가 많더라도 식량이 없으면 어쩔수 없이 회군해야하죠. 그런 뻔할걸 알면서 김유신이 뒤에 다른 누구도 아닌 계백을 남기고 바로 사비성으로 향했을것 같진 안습니다.
계백이 성에 틀어박혀 있는 건 어려웠을 겁니다. 우선 황산벌에서 사비성 일대는 충남지역으로서 평야 내지는 낮은 구릉지대입니다. 산이나 협곡도 없고, 큰 강도 없어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황산벌 인근에서 사비성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습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천리장성의 방어선과 수도인 평양성까지의 거리가 꽤 길어서 방어선상의 각 성에서 침략군의 뒤를 치는 전략이 유효할 지 몰라도, 황산벌 인근 성에 계백이 들어박힐 경우, 신라는 부대를 나누어 1만 정도로 성을 포위한 채 4만 정도로 계속 군량을 운반하거나 혹은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 사비성으로 쾌속 진격하여 당군과 합류할 경우
계백의 5천 부대를 별도로 편성한 이유가 없어지게 되지요.
그리고 연해로만 가는 척만 하더라도 위나라는 자신들의 수군이 약한것을 알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았을까요?? 일본수군이 조선의 근해로만 간 이유도 나중에 올 수송부대를 위해 조선 수군의 격멸이 아니었을까요? 제주를 지나서 한성까지 가는데 물자를 실은 배가 조선의 수군에 포획될수도 잇고 그때마다 대규모로 호위를 부치는 것도 부담되고 근해에 있는 조선군을 섬멸하면 최단 루트에 수송선에대한 걱정도 별로 없을테니 일본입장에서는 일석이조라고 생각됩니다.
중토님 본문중에 백제와 신라의 성이 생각이외로 많습니다..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 안시성처럼 대규모의 큰성은 아니고 甲士 1000~3000정도의 거주 할 수 있는 규모나 고구려의 보루정도의 성으로 보는게 옳을듯 합니다...그리고 성민들은 항상 성에 갇혀있는게 아니고 적의 공격시에만 성으로 들어가 싸우는데 신라 백제간의 기습전에서는 수십성을 순식간에 빼앗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사실 신라군이 황산벌로 진격시 성안에 있는 기천의 병력들을 일일히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5만의 대군이라면 무시하고 그냥 진격하면 되고 소수의 병력이 성에 나오면 그때 후군정도로 요격하면 됩니다..
질서정연하게 대군이 흐트림없이 행군하는데 소수의 병력으로 감히 접근하기도 힘들며 그렇게 접근하도록 방치하지도 않습니다..일부러 성에서 끌어내어 전투를 벌이는게 상책인데 소수의 병력으로 성에서 기어나와 싸우자고 하는데 대군을 움직이는 장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요..그래서 그 중간에 성이 잇었다고 치더라도 적어도 일만명 이상의 병력이 성에서 대비하고 있질 않았다면 감히 나와서 싸움을 걸 엄두도 못내었을 것입니다..그렇다고 당시 백제가 대륙이나 규수에 나누어져 백제본토에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는 추론은 약간 당혹스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