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태고사 기도입재
42년 째 1000일 기도
1만일 염불기도 회향 후
무생법인-상락아정 一味
늦가을 저녁 비가 내렸다. 앞서 가는 도광 스님은 배티재 산길 10리를 단걸음에 주파하려는 듯 서둘렀다. 그 뒤를 따르는 26살의 행자 정안 스님은 도광 스님의 짐까지 얹은 걸망을 메고 있어 그야말로 사경을 헤맬 지경이었다. 도광 스님은 단 한 번도 쉬어 가는 법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딱히 탓 할 이유도 없었다. “큰 스님 한 번 만나 뵙고 싶다”한 건 정안 스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정안 스님은 세납 24세 때 전북 임실 죽림사로 출가했다. 대학시험에 낙방한 후 수 년을 방황했던 그가 죽림사로 발길을 돌린 이유는 ‘깨달음에 이르러 보자’는 원력을 세웠기 때문이다. 죽림사에서 계운 스님으로부터 사미승이 갖춰야 할 기본 예법과 예불의식은 물론 어산(범패)까지 배웠지만 계운 스님이 몸져눕자 또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난 스님이 도광 스님이었고, 정안 스님의 의중을 헤아린 도광 스님은 무작정 태고사로 향했던 것이다. 태고사에 도착한 스님의 심경은 남달랐다.
“한 밤 중에 도착했는데 희열과 평온함이 교차했어요. 신기한건 배티재 오를 때에는 그리 힘들었는데 걸망 하나 내려놓은 순간 온 몸이 날아갈 것 같았지요.”
희열과 평온함을 느낀 자리! 이 순간 자신이 머물러야 할 도량이 바로 이곳 태고사임을 직감했을 법하다. 다음 날, 큰 스님 도천 스님을 친견했다. 예를 올리고나니 도광 스님은 도천 스님과 함께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고, 정안 스님은 뒤따라가지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도천 스님이 이내 돌아와 한마디 건넸다. “태고사에서 기도해 보라. 뜻한 바를 이룰 것이다.” 정안 행자의 그릇을 한 눈에 알아 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광 스님이 배티재 길을 그리 빨리 오른 건 ‘정안의 신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려 했던 것이었으리라. 힘들다는 이유로 “스님 쉬었다가요. 더는 못 가겠습니다”했다면 ‘그럼, 오를 것도 없이 지금 내려가라’는 호령과 함께 그 자리서 내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허 선사 문하에는 ‘경허의 세 달’, 수월(水月), 혜월(慧月) 그리고 월면(月面, 만공·萬空)이 있었다. 수월은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그리고 월면은 중간 지점인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다. 그 중 경허 스님의 맏상좌였던 수월 스님은 달 중에서도 ‘꽉 찬 달’로 통했다. 경허 선사 열반 후 북간도로 올라가 품삯으로 주먹밥과 짚신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시했던 스님이다. 말년에 만주 송림산 아래에 화엄사라는 작은 절을 짓고 밭을 일구며 8년을 지내다 열반에 들었는데 호랑이와 새, 산천초목이 모두 울었다고 전해진다.
수월 스님의 법은 묵언(默言) 스님을 거쳐 도천, 도광 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도천·도광 스님은 수월 스님의 손상좌요, 사형간이다.
“도천 큰 스님은 당시 기왓장 하나도 손수 나르시며 불사를 하고 계셨어요. 낮에는 울력하시고, 저녁이면 참선 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진짜 스님 중의 스님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원효 스님이 창건한 태고사는 유래가 깊은 산사다. 원효 대사가 절터로 잡아 놓고는 가사장삼을 수한 뒤 ‘세세생생 도인이 나올 자리’라며 춤을 추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만해 스님도 ‘태고사를 가보지 못하고 순례했다 말하지 말라’한 사찰이 태고사다. 그러나 이 가람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에 의해 전소됐다. 도천 스님은 당시 미래의 후학을 위해 태고사 중창원력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태고사에서 기도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스승의 일언에 정안 스님은 곧바로 1000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그 때가 1968년 음력 11월 보름이었고, 세납 26세였다.
“깨달을 수 있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미력하나마 은사 스님의 원력에 힘을 보태고 싶었지요. 솔직히 중창불사 만큼은 한 3년이면 이뤄질 줄 알았습니다.”
3년 동안 낮에는 일하고 아침과 저녁에는 염불정진만을 거듭했지만 적어도 중창불사만큼은 허사였다. 도천 스님은 ‘다시 1000일 기도에 들어가자’며 정안 스님을 다독거렸고, 대신 여행을 시켜주겠다며 길을 나섰다. 난생 처음으로 불국사, 통도사, 해인사를 참배했다. 성철 스님을 친견한 건 그 때가 처음이다.
성철 스님이 물었다. “태고사가 좋은가, 해인사가 좋은가?” 마음에는 태고사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실망감이 사라지지 않았던지 즉답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성철 스님은 정안 스님에게 “해인사에 머무를 생각이 없는가?”하고 물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를 알아챈 듯 도천 스님이 한마디 건넸다. “태고사는 태고사대로, 백련암은 백련암대로 좋지!” 성철 스님은 “맞다”며 웃었다.
태고사로 돌아온 정안 스님은 하루 네 번 기도를 올리는 사분정근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1974년 초 두 번째1000일 기도를 회향 하던 그 날, 정안 스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 회향 때와 마찬가지로 신도는 한 명도 없었단다.
“이 한 손에 온 우주를 쥐고 흔들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습니다. ‘부처님도 소용없구나!’ 하는 망념까지 들더군요.”
그러나 정안 스님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곧바로 세 번째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스승 도천 스님과 정안 스님의 원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세 번째 입재에 들자 신도가 중심이 된 태고사중창불사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족제비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와 도천 큰 스님 품으로 안기더군요. 상서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 해부터 본격적인 불사가 시작됐다. 이후 1000일 기도가 회향될 때마다 관음전, 지장전, 산신각, 선원, 종각 등이 자리를 잡아 갔다. 정안 스님은 지난 1999년 1만일 기도를 회향했다. 물론, 정안 스님의 1000일 기도는 처음 입재 후 42년 되는 2010년 지금도 진행형이다. 12년은 관음정진을 했고, 이후 지금까지 지장정진에 매진하고 있다.
무척이나 궁금한 게 하나 있다. 1만일 기도회향에서 건져 올린 보물은 무엇일까!
“온 우주도 제 손으로 부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분심. 그게 다 경계에 걸려들어 나온 망심일 뿐입니다. 그 때 도천 스님이 말씀하셨지요. ‘염불 하는 그 놈이 무엇인가’를 보라고. 그 가르침이 참으로 컸습니다. 1만일 기도 후에는 참 편했어요.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점도 그렇게 소중할 수 없었지요. 제가 믿고 지니는 이 법, 부처님 말씀 한 마디 한마디가 제 몸의 세포처럼 살아 숨 쉬는 듯 했습니다.”
수행-실천 병행해야 증득
말 한 마디도 함부로 말라
연기-무아 알았다 해도
空 체득해야 흔들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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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 스님은 “일하면서 수행하라”는 수월 스님의 가풍을 이어받아 지금도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하고 있다. |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용수보살에 따르면 인에는 생인과 법인이 있다. 비록 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우대를 받더라도 그 역경계와 순경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생인이라 하며, 일체법의 ‘실상(實相)이 바로 공(空)’임을 체득한 것을 법인이라 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흔들림 없는 고요’를 취할 수 있다고 옛 선인들은 누누이 말해왔다. 청정함 속에 즐겁고 자재(自在)한 참된 자아가 확립되어 있다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묘미를 맛보지 않았을까?
정안 스님의 표정만 보아도 무생법인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공(空)의 이치에 편히 머물러 일체의 동요가 없는 그 평온함이 범부의 눈에도 보인다. 정안 스님이 염불기도에 매진하더라도 『금강경』을 꼭 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처음엔 부처님 명호를 염하는 지명염불을 하더라도 궁극에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정안 스님은 재가신도들에게 매일 ‘대자대비와 일체 법을 증장하겠다’는 『츰부다라니경』과 『천수경』 그리고 『금강경』을 매일 독송하라고 당부하는데 무엇보다 염불할 때에는 일심(一心)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심이 되지 않으면 삼매에 들 수 없습니다. 그 일심은 간절함에서 출발합니다. 일심 할 장소와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이 순간 그 마음을 내야 합니다. 법당에서 염불하더라도 지극한 정성이 없으면 몸은 법당에 있지만 마음은 바깥에 있는 것이지요.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인연법과 무아법을 알았다 해도 『금강경』을 통해 공의 도리를 체득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정안 스님은 수행뿐 아니라 실천도 뒤따라야 한다고 한다. 수행 이후 실천이 아니라 수행과 실천이 병행돼야 하는데 ‘십선(十善)’을 행하라 권한다.
십선이라 하면 신삼선(身三善) 불살(不殺), 부도(不盜), 불음(不淫)과 사구선(四口善) 불망어(不妄語), 불기어(不綺語), 불우설(不雨舌), 불악구(不惡口) 그리고 의삼선(意三善) 불탐(不貪), 불진(不瞋), 불치(不痴)를 말한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비수로 꽂힐 수 있습니다. 작은 탐욕 하나가 일생을 망칠 수 있는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내 부모 내 형제뿐 아니라 내 친구와 이웃도 부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처처가 불상이요 일마다 불공이라 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인 사람들이 하는 일체의 모든 일들 또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불공입니다. 법당 앞에 난 풀 한포기도, 저 울창한 초목총림도 땅을 의지하여 태어나 성장하고 있습니다. 십선도 이와 같습니다. 『십선업도경』에 분명히 나와 있지요. 모든 천인이 십선에 의지하며, 모든 성문, 독각의 보리와 모든 보살행과 모든 불법이 모두 십선대지(十善大地)를 의지해 성취된다고 했습니다. 의심할 게 없지요. 십선을 행하면 찰나가 즐겁습니다. 모든 인연이 행복해집니다.”
송(宋) 나라 약우는 운천 선담에 살면서 무량수각을 지어 승재가인들에게 염불을 권하며 30년 정근했다. 어느 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대중들에게 『관경』을 독송하게 했다. 묵묵히 앉아 있다가 “정토가 앞에 나타났으니 나는 가야겠다”하고는 열반송 하나를 남겼다.
본래 집이 없으니 돌아갈 곳 있으랴만(本自無家可得歸)
구름 곁에 길이 있는 줄 누가 알랴(雲邊有路許誰知)
계광에 서산 달이 지니(溪光搖落西山月)
바로 선담에서 꿈을 깰 때네(正時仙潭夢斷時).
무명을 타파하고 일심(一心)을 증득하면 상적광정토에 왕생한다고 했다. 세간법 잣대로의 천상 정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깨닫고 보면 극락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지만 마음 한 자리 제대로 추스르기 어려운 우리는 십선에 의지해 행을 닦아갈 뿐이다.
금산 대둔산 자락에 자리한 태고사로 발길을 돌려 보라. 그윽한 ‘정안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향광장엄(香光莊嚴)이 따로 없다.
채한기 상임 논설 위원 penshoot@beopbo.com
정안 스님은
1943년 전북 장수 출생으로 1966년 임실 죽림사에서 출가했다. 1969년 전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하고, 1991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현재 금산 태고사 주지로 재임 중이다.
1047호 [2010년 05월 06일 08:37]
첫댓글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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