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행연습
박종해
아침에 뜰 앞에 내리는 햇살이나
저녁답에 나뭇가지에 어리는 노을빛을 볼때도
그때가 좋았다.
그 빛이 머무는 동안, 이제 나혼자 간다해도
외롭지 않다 쓸쓸하지 않다.
간절한 그리움으로 단풍잎이 떨어져 뒹굴고
새 한 마리 울며 하늘 끝으로 날아가도
그때가 좋았다.
금빛 은행잎이 나리는 길을
황금을 밟고 가는듯한 이 찬연한 기쁨
언젠가는 한 번은 걸어가야 할 그때 그 길도
은행잎 깔아놓은 황금의 길.
가을길은 홀가분하게 떠나는 예행연습과 같은 것.
고해의 다리
사람들은 무리지어 출렁다리를 건너 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다리가 끊어질세라 조심조심 건너
는데 어떤 사람들은 불한당 같이 발을 구르며 출렁다리를 더
욱 출렁이게 한다. 그럴 때 마다 겁이 많은 사람들은 겁에질
려 엉거주춤 멈춰서 떨기도 하고 기분이 좋은 사람들은 소리
지르며 환호한다. 출렁다리는 이 두 종류의 삶을 무등 태우며
출렁거려야 이름을 얻는 것처럼 출렁거린다.
다리 아래는 악어가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꼬리를 마구 흔들
어 대듯이 성난 파도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고통의 바다-인생은 고해를 건너가는 도정이다. 출렁다리는
고해위에 하늘에 잇닿아 있다. 출렁다리가 끝나는 저 언덕은
하늘과 맞물려 있어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하늘 속으로 들
어간다.
이쪽과 저쪽, 이승과 저승사이에 출렁다리가 출렁이고 있다.
나는 출렁다리 입구에서 사람들의 뒷 모습을 보고 있다.
나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저 고해
의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가 바라만 보고 있다.
하염없이, 나를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안 과 밖
거울 밖에 있는 내가 거울 안쪽을 복사한다
거울 속에 들어가 있는 나는 그 안쪽에서만 생활하고
밖에 있는 나는 밖에서만 사는데 길들어져 있는데
그 속을 탐색할 때마다 거울 속의 그는 나를 닮아서
자꾸만 낡아져가고, 요즈음은 아주 낡아서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이 나를 맥없이 쳐다 보고 있지 않는가
거울 속엔 세월이 정지되어 있지만, 실은 거울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홍안의 소년이 눈부신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진초록빛 나뭇잎새에 싸여 싱싱하게
빛나고 있지 않는가. 그는 그 속에 들어박혀 있어서
누구도 꺼낼 수가 없다. 거울 밖의 세상은 시시각각
변해서 어느새 빛바랜 몰골이 낯선 풍경 속으로
나를 떠밀고 가고 있다.
다시 돌아와 거울 속을 복사하려해도 그것은 그전에
내가 보던 거울이 아니다. 거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나의 애잔하고 부조리한 내력이 또아리 치고 있어,
후회와 자책이 실실이 풀려나와 회한에 젖는다.
그 안쪽의 사연들을 복사하여 세상 밖으로 전송하려 해도
이미 나는 기진맥진하여 구름처럼 소멸하고 만다.
만추(晩秋)의 길을 가며
어느새 나도 나목이 되어
가을을 보내는 문턱에 서 있다.
푸른 초원과 무성한 숲속
새와 짐승이 싱그러운 햇살 속에
풋풋한 과일처럼 영글던 한 때
나의 젊음이 거기에 있었다.
세월의 물결이 휘살 지으며 퍼져가는 잔주름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나에게
찬연한 의상을 거두어 갈 하늘 한 자락이
어느새 벌써 단풍나무 그늘까지 내려와 있다.
문득 뒤돌아보니 무수한 가닥으로 실타래처럼 얽힌
가뭇한 길 위에 내가 걸어왔던 발자국도 지워지고
기억 밖으로 가물가물 거리며
바로 어제런듯 찬연한 무지개도 사라지고 없다.
낙엽이 몇마디 언어로 뒹굴고 있는 길 위에서
내가 가야할 길이 실루엣처럼 얼비친다.
노랗게, 혹은 빠알갛게 무늬지어
한 생애를 물들이고 있다.
철면피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동자는 창틀에 끼인 투명한 유리와 같아서
그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복사하여 마음속에 전한다.
마음은 창을 통해 복사된 언어를
입으로 타전한다.
그는 눈동자가 없다.
마음의 창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안과 밖을 소통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게 없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도무지 겁이 없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 부어도
그는 눈동자가 없기 때문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창문이 없으므로
거짓말을 무수히 지꺼려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성토하지만
그는 마음으로 통하는 창이 없어서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눈동자가 없는 사람
세상이 캄캄하게만 복사된다.
아하 그림자가 없다.
빛으로 전하는 말
누군가 나의 꿈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문득 잠에서 빠져나와 일어나보니
둥두렷한 얼굴이 빛으로 말했다.
천여년전에 시선(詩仙) 이백이 읊었던 것처럼
나의 침상 위에 은은한 빛의 말씀이 실려 왔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금빛 미소
변한 것은 단지
이백은 가고 내가 그 달빛에 젖는 것일뿐.
床前 明月光 疑是地上霜
또다시 천년 세월이 지난 후
누가 나 대신 저 환한 미소 앞에 내가 그랬듯이
이백의 시를 읊어주며 나를 생각할까
아득하고 아득한 무상한 세월의 흐름이여!
무심한 달빛이
나의 침상을 찾아와 나와 함께 밤을 지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