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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시아=조선 원문보기 글쓴이: 이호근
추측록 제2권 |
추기측리(推氣測理) |
지구는 오른쪽으로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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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도다. 지구에 대한 설이여! 천지(天地)의 정체를 밝혔고, 천 년의 몽매를 일깨웠다. 역술가(曆術家)가 천체(天體)는 왼쪽으로 돈다고 한 것은 역산(曆算)의 간편을 위해 그랬을 뿐이니, 학자는 반드시 지구가 오른쪽으로 돈다는 것을 알아야 천체 운행(運行)의 연관성을 알게 된다.
지구는 둥근데 그것을 싸고 있는 몽기(蒙氣)가 해의 빛을 받아 구슬처럼 광채를 내니, 이것을 지구(地球)라고 한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도(地球圖)를 헌상하였는데 지면(地面)을 오대주(五大洲)로 나누었다.
화하대계(華夏大界)라 한 것은 즉 아세아(亞細亞)이고 남쪽으로는 여송(呂宋)ㆍ아재(亞齊)ㆍ갈라파(喝喇巴), 북쪽으로는 신증(新增)ㆍ백랍(白臘)ㆍ빙해(氷海), 동쪽으로는 일본도(日本島), 서쪽으로는 대내하(大乃河)ㆍ흑해(黑海)ㆍ서홍해(西紅海)ㆍ소서양(小西洋)에 이른다. 대서양(大西洋)이라 한 것은 즉 구라파(歐羅巴)이고 남쪽으로는 지중해(地中海), 북쪽으로는 백해(白海), 동쪽으로는 흑해(黑海), 서쪽으로는 대서양의 각 섬에 이른다. 서남양(西南洋)이라 한 것은 즉 이미아(利未亞)이고 남쪽으로 대랑산(大浪山), 북쪽으로는 지중해(地中海), 동쪽으로는 홍해(紅海)의 성로능좌도(聖老楞佐島), 서쪽으로는 성다묵도(聖多黙島)에 이른다. 외대서양(外大西洋)이라 한 것은 즉 아묵리가(亞墨利加 아메리카)인데, 지형이 길쭉하면서 허리 부분이 가늘므로 남아묵(南亞墨 남 아메리카)ㆍ북아묵(北亞墨 북아메리카) 2주(洲)로 나누었다.
대지(大地)는 바다와 함께 본래 하나의 둥근 모습을 이루고 있는데 정덕(正德: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이전에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 사람 가노(嘉奴)가 지구를 일주하고 돌아왔는데, 땅이 둥근 것이 분명해진 것은 이때부터이며, 그 후 1백여 년 뒤에 지구도가 중국에 들어왔다. 이 도가 중국에 들어오고부터 처음에는 의심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믿게 되고 점차 그것이 정론임을 알게 되었으나, 역산(曆算)의 여러 설에 구애되어 땅이 움직인다는 이치를 석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양에는 땅이 움직인다는 역설(曆說)이 있어 시행된 지 오래되었는데 중국에도 이 역설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땅이 움직인다 하고 일곱 별의 움직임을 징험하는 것과 땅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고 일곱 별의 움직임을 징험하는 것과 비교하면 꼭 맞지는 않을 것 같으나, 실제는 하늘의 하루 운행을 땅의 하루 운행으로 바꾼 데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비록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 이치는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다. 별들의 운행은 지구에서 멀수록 그 움직임은 느리고, 지구에 가까울수록 그 움직임은 빠르다. 지구가 해를 돌고 있다는 것은 실로 정당한 이치이다. 이는 밀물ㆍ썰물의 이치에 있어서 더욱 단적으로 나타난다.
분명히 서양 사람이 처음으로 지구도(地球圖)를 헌상하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한 포도아(葡萄牙:포르투갈) 사람 가노(嘉奴)가 지구를 일주하고 돌아왔는데, 땅이 둥근 것이 분명해진 것은 이때부터이며, 그 후 1백여 년 뒤에 지구도가 중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구도라는 것은 땅이 둥글다는 가설하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15세기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가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하고,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된 16세기 이탈리아의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지구 자전설을 주장했는데 아마도 이 주장이 유럽에서 전해져오다가, 유럽과 조선이 교역하면서 19세기에 유럽인들이 조선에 전해준 지구전도와 지동설을 받아들인것 같습니다
지구도가 조선에 들어오기전 중국에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않았슴을 상기 내용으로 알 수 있으며, 또한 지구가 오른쪽으로 돈다는 것을 조선이 알게된 내용이 있습니다 즉, 이전에 지구전도는 조선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포르투갈인 사람 가노(嘉奴)가 지구를 일주하고 돌어옴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였지만, 조선인 최한기가 지구를 일주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증명한 기록은 그 어떤곳에서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구전도를 조선인 최한기가 만들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또한 아래 기록에는 건륭28년 [1763 영조 39년.]에 영길리국 사람들이 건륭 28년[1763 영조 39년.]에
조선에 바친 공물중에도 지구전도(地球全圖)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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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17년 계축(1793,건륭 58) | |
10월26일 (병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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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부윤 이의직(李義直)이 헌서 재자관(憲書齎咨官) 홍택복(洪宅福)의 수본(手本)을 가지고 치계하였다. 수본에 아뢰기를,
“영길리국(暎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마알침(嗎戛)과 이시당동(呢嘶噹㖦) 두 사람은 영길리 국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서양 포랍니대리옹(布爉尼大利翁) 큰 틀 1대는 하늘의 해·달·별과 지구의 전도(全圖)에 관한 것인데 해·달·별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만일 일식·월식 및 별의 도수가 어긋나게 되면 모두 틀 위로 나타나며 그 일이 발생할 연월일시를 아울러 가리켜준다. 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있는데 이름을 천문지리표(天文地理表)라고 한다. 좌종(坐鍾) 한 틀은 천문 기구가 있는데 지구와 하늘 위의 해·달·별이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므로 천문을 학습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천구전도(天球全圖)는 하늘을 쪽빛으로 만들고 금과 은으로 별을 만들었으며 안에 은사(銀絲)로 하늘 각곳의 도수를 구별하였다. 지구전도는 천하 만국과 4개 주(州)의 산·하천·바다·섬들을 둥근 지구 표면에다 그렸고 또 바다의 뱃길과 서양의 배를 그려넣었다. 갖가지 모양의 기구 11합(盒)은 기후를 관측하는 것과 해·달빛의 변화를 찾아내는 데 관계되는 것으로 천기(天氣)가 어떨지를 미리 알 수 있으며, 기후를 탐지하는 틀 1좌는 기후의 변화를 관측할 수 있는 것이다. 동포(銅炮)와 서과포(西瓜砲)는 군사 조련용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모두 조금 구분이 있으며 홍모국(紅毛國)의 군사가 현재 수행 중인 공사(貢使) 앞에 나와서 포 쏘는 법을 시험삼아 펼쳐보이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의자가 1개인데 사람이 몸 절반을 그 위에 얹어놓고 마음대로 빙빙 돌리게 되어 있었다. 집에서 사용하는 저절로 불을 붙이는 기구는 그 안에 갖가지 새 병과 헌 병 따위를 채웠으며 그 화구(火具)는 유리·자기·금·은·철 등을 녹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한 덩이 큰 유리로 만들어졌다. 갖가지 인쇄한 그림과 도상(圖像)은 홍모국과 영길리 국왕의 온 가족의 인물상과 함께 성지(城池)·포대(砲臺)·당실(堂室)·화유(花囿)·향촌(鄕村)·선척(船隻)의 각종 그림이었다. 채등(彩燈)이 하나인데 유리에 도금하여 만들었고 벽에 걸어놓으면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으며 금선전(金線氈)은 정밀하고 촘촘하게 만들었는데 방안에 까는 것이고, 대융전(大絨氈)은 대전(大殿) 위는 까는 것이며, 말안장이 한 개인데 누런 황금색을 겉에 입혔으며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졌었다. 수레가 2대인데 1대는 따뜻하고 1대는 시원하며 모두 기계 장치가 있어서 굴러갈 수 있었다. 군기(軍器)는 10가지인데 길고 짧은 자동 화기와 칼 등으로서 그 칼은 구리와 쇠를 깎을 수 있었으며 크고 작은 금은선(金銀船)이 있는데 홍모국의 전선(戰船) 모양으로 되었고 배 위에는 1백 개의 작은 동포(銅砲)가 있었다. 익력가(益力架)가 한 대인데 사람이 움직일 때 기력을 증진시키고 정신을 건강하게 하여 주며, 잡화 한 꾸러미는 홍모국 물품인데 곧 치니양포(哆呢羊布)와 구리와 쇠로 만든 기구들이었다.】 그런데 만들어진 것들이 기이하고 정교하여 서양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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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평(雜評) | ||||
유영재(柳泠齋) 득공(得恭) 필기(筆記)에 대한 평(評) 계축년에 북경으로 들어간 뇌자관(咨官) 수본(手本)에 ‘영길리국(暎咭唎國)이 광동(廣東)의 바다 남쪽 밖에 있는데, 건륭(乾隆) 28년(1763, 영조 39)에 조공을 바치고 금년에 또 조공을 바쳐 왔다. 그 두목관(頭目官)인 마알시니(嗎戛呢)와 시당간(嘶噹) 두 사람은 그 나라 국왕의 친척으로서 일행 이 모두 7백 24명이다. 그 중 1백 명은 경사(京師)에 나갔다가 이어 열하(熱河)로 갔고, 나머지는 천진 부(天津府)에 머물러 있는데, 진공물(進貢物)은 19종으로서 제작이 극히 정교하여 서양(西洋)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다. 9월 초에 천진의 수로(水路)를 따라 귀국하였다.’ 여기까지가 수본(手本)의 내용이다. 고 하였다. 이를 상고해 보면 홍모이(紅毛夷)는 바로 왜(倭)가 길리시단(吉利是段)이라고 부르 는 자이다. |
저는 영길리국의 위치가 19세기에 지금의 북서유럽에 위치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나타낸적이 있습니다.(참고 http://cafe.daum.net/coreahistech/LHET/165)
그런데 윗 문헌의 내용을 보면
"영길리국(暎咭唎國)이 광동(廣東)의 바다 남쪽 밖에 있는데, 건륭(乾隆) 28년(1763, 영조 39)에 조공을 바치고 금년에 또 조공을 바쳐 왔다. 그 두목관(頭目官)인 마알시니(嗎戛呢)와 시당간(嘶噹) 두 사람은 그 나라 국왕의 친척으로서 일행이 모두 7백 24명이다. 그 중 1백 명은 경사(京師)에 나갔다가 이어 열하(熱河)로 갔고, 나머지는 천진부(天津府)에 머물러 있는데, 진공물(進貢物)은 19종으로서 제작이 극히 정교하여 서양(西洋)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다"
'예부(禮部)의 관례에 구라파(歐羅巴)와 영길리(暎咭唎)를 또한 나누어 말하는 것은 그 오는 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영길리국(영국)이 섬나라이기 하지만 유럽과 지근거리에 있고 배로 조선까지 오는 길이 동일할 것임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사료에는 분명히 영길리국(영국)과 구라파간에 조선까지 오는 길도 같지 않다고합니다
또한 영길리국(영국) 조선에 진상한 지구전도를 포함한 19종의 공물이 정교한 제작물로서 구라파 즉, 서양(西洋)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라 하여 영국의 기술력이 구라파(서양)의 기술보다 우위에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즉,영길리국은 현재의 북서유럽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슴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구라파의 나라들보다 영국이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