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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 을사오적암살단과 호남의 선비정신
1. 충의지사를 현창하는 사업은 계속되어야 ....
우리나라 각지에 세워진 서원 사우에서는 선현의 학덕을 기리기도 하고 임진 병자 양란 유공자의 충절을 추모하는 분이 많다. 특히 충렬사. 의열사. 포충사. 충민사. 현충사. 등으로 불리는 사우는 모두가 양란의 충신,열사,의인을 제향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서원과 사우의 시작은 향촌사회 유림의 자발적 발의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라에서 사액하여 공인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는 등 관민이 합심하여 충의정신을 선양하여 공동체 정신의 지주로 삼았다. 그러한 충신열사의 현창사업은 18세기 말 정조대왕 때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 지원하여 호남절의록이 간행되고 충신 열녀의 정려는 물론 고려 말 망복신(罔僕臣)에게까지 시호를 내리거나 치제하여 충의정신을 추앙하고 존현상덕의 기틀을 다졌다. 구한말 국가존망의 시기와 망국의 암담함 속에서도 수많은 의병이각지에서 봉기한 것도 조선 후기 사회의 시대정신과 충신열사의 현창사업에 임은 바 크다 할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우리 지역을 침범하지 않았을 때도 우리 호남사민이 근왕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기고 강토를 수호하였듯이 을사 정미 늑약에 우리 지역 전라도만 특정한 조항이 없어도 이 지역 우국지사들은 나라를 위하여 사생취의의 대도를 걸었다.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는 일제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애국 활동을 한분들이다.
우리는 이 지역 독립유공자들이 실천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본받기 위하여 그 분들을 현창하는 일에 힘써 민족혼을 바로 세우고 공동체정신을 길러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물려주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2. 오적 칠적 열 두놈을 응징해야..
19세기 중반 병자수호조규 이래 20세기 중반에 이른 100여 년간 우리나라를 잔학하게 짓밟아 왔던 일제의 만행은 헤아릴 수 없다. 특히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10여 년 간에 나라를 병탄하기 위하여 강제로 작성한 문서행위가 을사.정미늑약에 고종황제도 모르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응징하려는 것은 민족정기의 당연한 발로라 하겠다.
흔히들 을사오적과 정미 칠적을 합하여 “오적 칠적 열두놈” 이라고 부른다. 1905년에 있었던 을사늑약의 오적 신은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등 5명을 말하는데 을사늑약의 원문을 이렇다.
을사늑약 원문
日本國政府及韓國政府난兩帝國을結合하한利害共通의主義를鞏固케함을欲하야韓國의富强之實을認할時에至할가지此目的으로써左開條款을約定함
일본 정부 및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 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며 한국의 부강해진 결과가 인정되는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다음 조약을 약정함
第一條 日本國政府난在東京外務省을由하야今後에韓國이外國에對하난關係及事務를監理指揮함이可하고日本國의外交代表者及領事난外國에在하난韓國의臣民及利益을保護함이可함
제1조 일본 정부는 재일 도쿄 외무성을 통하여 향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여 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독, 관리하고 지휘하는 것이 마땅하며, 일본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 신민과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함.
第二條 日本國政府난韓國과他國間에現存하난條約의實行을完全히하난任에當하고韓國政府난今後에日本國政府의仲介에由치아니하고國際的性質을有하난何等條約이나又約束을아니함을約함
제2조 일본 정부는 현재 한국과 타국이 맺고있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임무에 임하며, 한국 정부는 향후에 일본 정부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갖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일체 하지 않기로 약속함
第三條 日本國政府난其代表者로하야韓國皇帝陛下의闕下에一名의統監을寘하되統監은專혀外交에關하난事項을管理함을爲하야京城에駐在하고親히韓國皇帝陛下에게內謁하난權利를有함日本國政府난又韓國의各開港場及其他日本國政府가必要로認하난地에理事官을寘하난權利를有하되理事官은統監의指揮之下에從來在韓國日本領事에게屬하든一切職權을執行하고幷하야本協約의條款을完全히實行함을爲하야必要로하난一切事務를掌理함이可함
제3조 일본 정부의 대표자는 한국.황제 폐하의 궁궐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며 통감은 모든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머물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에게 은밀히 만날 권리가 있다. 또한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이나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두는 권리가 있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를 받아 종래의 재한국 일본영사의 모든 업무를 집행하며 이 협약의 조항을 완전하게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 가함.
第四條 日本國과韓國間에現存하는條約及約束은本協約條款에抵觸하는者를除하는外에總히其效力을繼續하는者로함
제4조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조약과 약속은 이 협약 조항에 저촉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함.
第五條 日本國政府는韓國皇室의安寧과尊嚴을維持함을保證함
제5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함.
右證據로하야下名은各本國政府에셔相當한委任을受하야本協約에記名調印함
증거로 다음 각 사람은 각각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
光武九年十一月十七日 外部大臣 朴齊純
광무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明治三十八年十一月十七日 特命全権公使 林権助
명치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임권조(하야시)
물론, 을사늑약은 당연히 불법 무효이다.
조약에 특정한 제목도 없고 고종황제의 서명도 없고 허가한 적이 없으며.위임한 사실도 없고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처리한 것이며, 있는것은 친일파 박제순의 날인 뿐이어서 국제법상 무효이다.
당시 고종황제는 헐버트씨를 특별위원으로 임명하여 그를 밀사(密使) 로 삼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라리아 항가리 이탈리아 벨지움 청나라 등 각국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친서를 1906.6.22일 발송하고 그에 앞서 전보도 발송하였다. 아울러 이준 등 관료 3명을 뽑아서 헤이그 만국 박람회에 보내는 등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 후 1907년7월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경찰권의 위임, 관리임명권 등을 일본에게 넘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정미 7조약이 있었는데 그 조약체결에 동조한 농상공부대신 송병준,군부대신 이병무,탁지부대신 고영희,법부대신 조중응,학부대신 이재곤,내부대신 임선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 7명을 정미 칠적으로 부른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서 대한제국은 내정에 관한 사실상의 모든 권한을 상실하였고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가 되었다. 이 조약의 명의는 내각총리대신(수상) 이완용과 전권위임 특사 겸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 되어있다.
고종황제는 갑신정변처럼 급격한 개혁보다는 점차 개화를 목표 아래 여러 개혁 정책들로 미국의 근대 도시를 모델로 한 근대 도시를 건설하여 부유해지려던 때입니다. 각종 도시계획을 실시했으며 발전소, 근대기업, 근대학교, 근대국군을 신설하고 일본보다 먼저 전차를 개통하여 백성들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국가 수입은 7년간 약 257배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내정간섭을 마음대로 하려고 “일본의 대표자는 고종황제 궁궐 아래에 통감을 둔다” 고 하였으니. 고종황제 바로 밑에 영의정이나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에서 보낸 통감이 있게 되었다.
정미칠조약이 소위 한일신협약이란 이름아래 체결되고 그해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우리의 장병들이 무기를 들고 의병으로 봉기하여 각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후 1909.7월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우리의 사법권마저 앗아가 각지의 의병이 봉기하는 상황에서도 통감 사내정의(寺內正毅)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비밀리에 합병 조약안이 작성되었으며 1910년 순종 4년 8월 22일 내각회의와 어전회의를 거쳐 경술합방의 조약이 조인되고 8.29일 순종황제가 합방조서를 발표하였으니 조선왕조 27대 519년만에 나라가 망하는 국치를 당한 것이다.
3. 호남의 우국지사
1905년 우리 민족사의 치욕이라 할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조짐이 보일 때 홍암 나철 선생을 비롯한 호남의 우국지사들이 유신회(維新會) 자신회(自新會) 동학당(東學黨) 정의단(正義團) 등의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매국노를 응징하려는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을사오적 암살단[乙巳 五賊暗殺團 은 기산도, 김석항, 김일제, 이홍래 나철등 호남의 우국지사들이 1906∼1907년에 이완용(李完用) 이근택(李根澤)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권중현(權重顯)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라고 전한다. 광복후 유공자로 서훈된 독립지사 나철 기산도 이홍래 등 선열의 행적을 통하여 오적암살단 활동의 전모를 알아본다.
o 나철( 羅喆: 1863년 ~ 1916년)
나철( 羅喆: 1863년 ~ 1916년)선생의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이니 전라도 보성(寶城) 벌교 출신이다.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1904년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홍필주(洪弼周) 그리고 한단고기를 주해하신 해학 이기(李沂)선생,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서로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발노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한단고기에 나오는 ≪삼일신고 三一神誥≫와 ≪신사기 神事紀≫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오적 암살단을 구성하고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을사오적 암살단[乙巳 五賊暗殺團 ]은 기산도, 김석항, 김일제, 이홍래 나철등 호남의 우국지사들이 1906∼1907년에 이완용(李完用) 이근택(李根澤)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권중현(權重顯)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다.
기산도는 1905년 말부터 김석항(金錫恒)·김일제(金一濟) 등과 더불어 5적 처단의 기회를 노리다가 1906년 2월 16일 밤 군부대신을 지낸 이근택의 집에 잠입해 거사를 결행했었다.
당시 친일고관들에 대한 삼엄한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었다.
이들은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으나, 또 다른 의열투쟁에 연루되어 기산도가 체포됨으로써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산도는, “오적(五賊)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탄로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말하며 매국노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대변했다.
기산도는 김석항 등 11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2년형을 선고받다. 석방된 후에도 그는 한말의병에 투신한 바 있으며,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등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1907년 3월 25일 나인영(羅寅永:나철) 등을 중심으로 한 자신회(自新會)가 을사오적 가운데 권중현을 저격해 부상을 입혔다. 자신회의 행동대원 이홍래(李鴻來)·강상원(康相元) 등이 입궐(入闕)하던 권중현을 저격했으나, 가벼운 부상을 입히는데 그쳤다.
당시 나철을 비롯한 자신회는 5적을 모두 처단한 다음 친일정부를 전복하고서 신정부를 수립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을사5적이야말로 2천만 민족을 노예로 만들고 국권을 농단한 자들이므로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었다.
그리하여 나인영과 오기호는 5적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했고,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이용채(李容彩) 등은 전라·경상도에서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입을 맡았으며, 김인식(金寅植) 등은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1907년 2월 200여 명의 회원으로 결성된 자신회는 애국가(愛國歌)·동맹서(同盟書)·참간장(斬奸狀)·취지서(趣旨書)·자현장(自現狀)·포고문(布告文) 등을 작성해 5적 처단의 대의(大義)와 조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애국의 혈성(血性)으로 나섰음을 밝혔었다.
1907년 2월 하순부터 이들은 5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번번히 미수에 그쳤다. 1907년 3월 25일의 거사는 자신회의 네 번째 시도였다. 이들은 박제순·이지용·권중현·이완용·이하영·이근택을 제거하기 위해 결사대를 보내어 저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6개조 가운데 이홍래 조 만이 매국노 권중현을 저격했을 뿐 나머지 조는 실패하고 말았다. 권중현의 저격에 가담한 강상원은 체포된 후 “죽고 사는 것은 처분에 맡기겠다.”며 매우 의연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일제가 연루자의 색출에 나서자 나철 등 자신회의 간부들은 스스로 주모자임을 밝히고 결사대를 모두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나철을 비롯한 30여 명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호남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5∼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아 정배(定配)되었으나, 1907년 12월의 특사(特赦)로 석방되었다.
그 뒤 나철 오기호 등은 대종교를 창시해 민족의식을 북돋우고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또한 서정희 등은 광주지역 3·1운동과 일제하 농민운동의 중심인물로도 활약한 바 있다.
이 밖에도 5적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읍니다.
오적암살단의 활동은 친일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계몽운동과 의병운동 계열의 연합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으며, 나아가 이들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나철선생은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으나 별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友),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박호암(朴虎巖),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라고 합니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고,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읍니다.
1910년 8월에는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 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읍니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읍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o 기산도(奇山度
기산도(奇山度·1878.10.16 ~ 1928.12. 4·)는 전남 장성(長城) 사람이다.
식재(植齋) 기 재(奇宰)의 장자이고 의병장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재종손이며 의병장 녹천(鹿泉)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1905년 11월 18일 기필코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 세자루에 실탄을 장전하고 단도(短刀) 네자루를 헝겊으로 싸서 준비를 완료한 후 동지 손성원(孫聖元)·박용현(朴鎔鉉)·김필현(金弼鉉)·이태화(李太華) 등으로 하여금 적신배(賊臣輩)의 동정을 염탐케 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9시경 결사대 본부인 중서(中署) 니동(泥洞) 한성모(韓聖模) 집에서 왜경의 경무고문(警務顧問) 환산중준(丸山重俊)의 부하에게 그를 비롯하여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손성원(孫聖元) 등과 결사대 동지가 전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6년 2월 16일 퇴궐한 역적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은 내방한 6인의 방문객들과 담화하다가 상오 1시경에 후실과 취침하였다.
이때 의사 세 사람이 뛰어들어 이근택을 붙잡고 마구 찔렀다. 당황한 이근택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촛불을 껐다. 방안이 캄캄해지자 의사들이 닥치는 대로 칼을 내리쳐서 이근택은 10 여 군데 난자 당한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이근택의 머슴이 이근택의 신음소리와 그의 후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뛰어들다가 자객의 칼을 맞아 얼굴·배·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었다. 이때가 되서야 비로소 소란한 소리를 듣고 이근택의 집을 지키던 병사 6인과 경위원(警衛院) 순검(巡檢) 4인이 달려오고 이근택의 방에 장치하여 둔 설렁줄 (일종의 비상벨)소리를 듣고 일제 헌병과 경찰이 뛰어왔다.
그러나 의사들은 담장에 줄사다리를 놓고 도망한 뒤였다. 이때가 17일 상오 2시경이었다. 이근택은 한성병원에 입원 가료한 결과 추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혈안이 되어 의사들을 검거하고자 날뛰었다.
이근택의 집 대청 위에 변장하였던 가발 하나가 단서가 되어 그와 이상철(李相哲)이 피체되어 악형을 받게 되었다.
그와 공모하였던 전 경무사(警務使) 구완희(具完喜), 전 경무관(警務官) 이세진(李世鎭)은 도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가 심문을 받을 때에 동지가 800여 명이 된다고 말하자 매국적신들은 일본헌병까지 끌어들여 집과 신변을 엄하게 경계하였으며 내방객에게 꼭 명함을 받고 몸을 수색한 후에야 들여보내곤 하였다 한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16년 고흥 도화에 사는 일가 기하요씨 집에서 낮에는 머슴 일을 하며 밤에는 야학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0년 임정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이범석 사상규 등과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서도 혀까지 깨물어 동지들의 신변에 함구하였으나 결국 광주(光州)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 심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1928년 전남 장흥(長興)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장흥지방에는 순창 장성 등지에서 배일항쟁 후 만주 흑룡강까지 찾아가 김좌진 이범석의 독립군에 가담하여 日警이 폭도수괴로 지목한 치재 김여회(痴齋 金汝會 )를 비롯하여 김재계 박진 박호암 독립지사 등 천도교와 대종교 신자가 많아 유리걸식하여 호구(糊口)하기가 쉬어 장흥지방을 떠 도라 다니다가 죽음에 임하여 망국의 서러움을 토하면서 무덤에 “遊離丐乞之士 奇山度之墓유리개걸지사 기산도지묘”라고 표해주길 유언하였고 현재는 국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o 이홍래( 李鴻來:생년 1888년(고종 25)
대한제국 말기 민영환(閔泳煥)의 심복으로 총순(摠巡)으로 복무하다가 1905년 민영환이 순국한 뒤 사직하였다. 그 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의병규합에 노력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을사조약에 찬동한 매국 5적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과 연락하여 매국 5적 암살계획에 동참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계획을 수정하여 동지들 각자가 5적을 맡아 암살하기로 하였다. 자신은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암살하기로 하고, 강원상(康元相)과 함께 사동(寺洞)에서 기다렸다가 권중현이 탄 인력거를 습격하였으나 호위 일본 군인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1910년 동학당(東學黨)을 조직하였고, 1918년 정신(鄭信)외 1명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등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종교도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정의단(正義團)에 가입하여, 기관지 『일민보(一民報)』를 간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해 8월김좌진(金佐鎭)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모연국장(募捐局長)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3년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다.
만주교포를 학대하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원과 형사부장을 살해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맺는 말
고려 말에 단군세기를 집필한 행촌 이암(1296-1364)선생은“爲國之道 莫先於士氣 莫及於史學 學不明則士氣不振 士氣不振則 國本搖 政法岐矣”라고 하여 “역사를 바로알지 못하면 사기를 떨치지 못하고 사기를 떨치지 못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치와 법률이 갈라져 혼란하다” 고 말씀하셨다.
나철 선생을 비롯한 “을사오적암살단원”이야 말로 국가의 원기라 할 수 있는 선비정신이 투철한 분 들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仁與義”의 선비정신이 맹자의 이른 바 호연지기로 발현되어 捨生取義의 大義로 나아가 悲哀의 細情을 갖지 아니하신 참된 선비 로 오래도록 추앙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혼탁한 우리사회의 피할 수 없는 구성원이 되어 정의롭지 못한 부끄러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에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가치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한반도의 화해 협력과 국제간의 평화. 전통윤리의 붕괴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다문화 다민족의 문제 등은 우리 호남의 지식인도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일 뿐 아니라 “ 수기치인”의 자세로 “종신지우(終身之憂)”로 삼아 참된 선비 정신으로 풀어야 할 과제라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한말(韓末) ‘자신회(自新會)’의 ‘취지서(趣旨書)’·‘동맹서(同盟書)’ 등」(신용하, 『한국학보(韓國學報)』 13, 일지사, 1978)
첫댓글 고얀 놈들
나인영(나철) 기산도 오기호 이기선생등 당시 수 많은 애국지사의 우국충정을 헤아리는 민족정기가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