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시 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 반공 독립 노선
이승만의 천재성은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갈채를 보냈다. 국민들을 노예로 삼아 억누리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러시아의 짜르(황제)를 물리치고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혁명의 대의(大儀)에 열광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바로 그 순간부터 반공(반공)이었다. 1917년 혁명 직후부터 공산주의는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해 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 체계"라고 간주했다. 공산주의를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공산주의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이승만은 어떻게 그토록 일찍 공산주의를 꿰뚫어보고 그토록 강경하게 반대할 수 있었을까? 이승만 연구가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손세일, 김길자의 견해가 같다. 그것은 이승만이 철저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그는 진리에 정통했기에 거짓의 가면에 속지 않았다. 빛에 몰두했기에 어둠은 쉽게 분별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임시 정부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임시 정부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920년 한인 사회당 대표로 박진순, 박애, 이한영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60만 루블의 지원금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들과 이동휘, 김립 등 상해의 공산혁명 간부들은 1920년 9월 15일 한인 공산당을 조직했다.
1920년 임시 정부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력은 조국을 공산주의자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라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일생을 특징지은 강력한 반공주의의 시작이었다.
1923년 이승만은 논설 "공산당의 당 부당"을 집필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다가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히려니와, 재정가(기업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되기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묘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모든 물건이 다 더 진보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 "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이승만은 임금이 없어지고 양반 제도가 없어지고 상투가 없어져서 좋다는 말을 하여 물의를 일츠킨 적이 있었다. 나라가 망한 판에 좋아진 점이 있다고 하니, 위험한 발언이기는 했다.
하지만 임금과 양반과 상투를 그토록 싫어했던 이승만의 평등주의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실제로 왕족 이승만은 독립 운동을 하면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가 어울렸다. 그의 협력자들은 양반에서부터 하층 양반, 중인, 상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뼛속까지 평등주의자인 이승만은 공산주의가 평등을 주장하는 점은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사유 재산 제도가 폐지되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없어지리라고 지적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똑같이 갖는다면, 누가 구태여 고생해 가면서 일하겠는가? 똑같이 갖게 되면 일도 안 하게 되고 경쟁도 시들해져서 결국 인간 능력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 그런 세월이 모이고 쌓이면 인간 개발이 중단되는 엄청난 사태가 닥친다고 이승만은 예언했다.
이승만은 "물질적 개명이 중단"된다고 말했다. 개명이 중단되면 원시 상태가 된다. 이 주장은 휴전선만 넘어가면, 실체로 확인된다. 수십년 공산주의를 따라간 결과, 길바닥에 시체가 뒹구는 북한이야말로 개명이 중지된 원시 사회가 아니면 무엇인가.
시간은 예언을 확증한다. 이승만의 예언적인 논설이 발표되고 66년이 지난 다음,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대회에서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심각하게 토로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기술 혁신이 이토록 발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뒤집어 읽으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기술 혁신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승만의 예언이 정확하게 맞았음을 입증한다. 이승만의 글은 이어진다.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 하야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하고 총과 창을 녹여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야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백만장자가 된다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 바라 ... "
공산주의 운동은 계급투쟁이다.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을 기본으로 한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조국은 없고 계급만 있을 뿐이었다. 이승만은 그 점을 비판한다. 나라를 잃은 우리에게는 일단 나라를 되찾고 외세를 물리친 자주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는 독립 운동에 제약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둥글둥글하고 무난해야지, 튀어나와 모가 나면 표적이 되기 쉽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무수한 표적이 되어왔다. 그에게는 비난이 빗발쳤다. 실제로 소련의 자금이 지원된 상황에서, "노예"운운하며 소련을 배척하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미국에 집중한 외교 노선은 임시 정부 내에서도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1925년 3월 31일자 <독립신문>이다.
"원래 외교라는 것은 외국과 교섭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비추어볼 때,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중국과 약소민족, 그리고 침략적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를 적으로 하는 소련과 제3국제당(코민테른 - 국제 공산당)이 일차적인 외교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했다. 태평양과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을 놓고 일본과 다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열강도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제2위에 속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소련은 적색(赤色)이라 위험하니 불가근(不可近)이고, 중국 등은 약자라 무세(無勢)하니 불가교(不可交)라 하여 오직 백색유세(白色有勢)한 미국만을 하늘같이 신뢰했다. 그러나 미국이 우리 민족 운동에 대하여 하등의 원조를 주었다는 것을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더욱 투철해졌다. 이미 1917년 무렵부터 가졌던 반공 의식은 1933년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분명한 확신이 되었다. 여행을 즐겼고 수많은 대륙과 바다를 건넜던 이승만은 파리의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한 뒤 모스크바에 갔다. 짧은 체류였지만, 이승만은 분명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의 느낌을 적은 기록이다.
"내가 모스크바를 다녀온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농가들보다도 러시아의 농가가 가장 빈약한 점이었다. 기차 속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러시아의 길거리에서 굶어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고 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라는 소련에서 길거리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었다. 이는 공산주주의의 허구성과 악마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공산주의는 사람 잡아서 무기 만드는 귀신이다. 소련과 중국과 북한이 똑같이 핵을 개발하고 무기를 구입하느라고 수천만, 수백만의 대량 아사(餓死)를 방치했다.
그런 북한을 추종하는 자들은 입만 열면 평화를 말한다.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고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 굶겨죽이면서 핵을 만드는 것이 평화라니, 더 이상 위선적일 수 없을 만큼의 위선이다.
1933년 모스크바로 떠나기 직전에 이승만은 제네바, 그리고 비엔나에 있었다. 그곳의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훗날의 반려자 프란체스카를 만났다. 그 사연을 생각해보면 1933년은 이승만의 일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해이다.
비엔나의 숲을 거닐며 서양 여인에게 '사랑'이란 한국어를 가르쳐준 동양 신사는 곧이어 모스크바에서 평생을 바쳐 싸워야할 증오의 대상을 발견했다. 1933년 한 해에, 사랑과 증오가 극심하게 교차했다.
흥미로운 점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과 함께 건국의 어머니로 존경받는 김성수 역시 소련을 방문하여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며 <동아일보>의 발행인이었던 김성수가 소련을 방문한 것은 이승만보다 1-2년 앞선 때였다. 소련을 본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평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계급 차이가 극심할 뿐 아니라 빈부 격차가 심하여 참다운 사회주의가 정착할 것 같지 않다. 당 지도자들의 호화, 사치 생활 풍조가 도를 넘는다.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소련에 노동자들이 아사 상태에서 힘겨워 길가에 쓰러져 죽어나가고 있다."
이승만이나 김성수나 그 당시는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부러울만큼 세계를 두루 돌아본 이들이다. 거의 세계 일주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넓은 세상을 누비며 공산주의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본 이들이 이 나라의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어 공산주의를 막아냈다. 국민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이 아닐 수 없다.
반공 노선이 확고해지는 것은, 먼 미래를 향해서는 당연하고 바람직했다. 우리 민족의 차원에서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당시의 이승만에게는 고립과 적대를 의미했다. 독립 운동과 건국의 시기에 시대의 유행은 반공이 아닌, 좌우합작(左右合作)이었다.
2차 대전의 연합국들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좌우 합작 형태의 전쟁을 진행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 대항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국공합작을 주도하고 이승만을 괴롭힌 인물이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이다. 그는 국민당 최도 지도자 장개석의 처남으로 외교를 관장하는 실력자였다. 송자문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역사에 비추어 평가한다면,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망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국민당을 망하게 만든 그가 상해 임시 정부에도 영향을 끼쳤다. 송자문은 장차 한국이 독립되었을 때, 김원봉, 조소앙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좌파가 집권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김구에게 좌파 세력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승만은 김구에게 공산당과 손을 잡으면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강경한 경고를 거듭 보냈다. 하지만 김구가 임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고 자금을 제공하는 송자문의 압력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결국 김구는 김원봉 등 공산주의자와 제휴했다. 1942년 12월 상해 임시 정부가 좌우합작 정부가 되었다.
♣ 기약 없는 외교, 구미(歐美)위원부의 활동
한성 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이승만은 1919년 8월 25일 집정관 총재 명의로 공포문을 발표한다. 그중 제 2호에 "대한민국을 구미(유럽과 미국) 각국에 대표"하는 기관으로 구미위원부를 성립한다는 내용이 있다.
구미위원부의 권한과 기능은 구미에서 정부의 주권 되는 기관이었다.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유럽과 미국 지역에서의 국사와 외교는 물론 교포에 대한 행정적 기능도 상해 임정을 대신하여 총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해 임정과 구미위원부의 관계는 동서 양쪽에 분립된 일종의 연립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의 친미 외교 노선을 실행하는 기구였다. 구미 위원부를 통하여 미주 교민들로부터 안정적인 자금 지원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방 열강, 특히 미국에 대한 외교, 선전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나감으로써 미일(美日)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될 때 미국의 지원을 얻어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본토에 25곳, 미국의 속령 하와이에 11곳, 멕시코와 쿠바에 6곳의 지방 위원부를 두었다.
구미위원부 출범 이후 이승만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독립 운동 자금 모금이었다. 모금을 위해 이승만은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대한민국 명의의 독립 공채(公債)를 판매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활용했다.
그것은 핀란드의 유명한 여류 독립 운동가 말름스트롬(Malmstrom) 여사에게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이승만은 1918년 뉴욕에서 열리는 약소국 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여사에게서 공채 발행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공채 발행 실적은 양호했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칠레, 캐나다 교포와 화교에게 1921년까지 81,351달러가 모금되었다. 그 액수는 구미위원부 총수입의 65%였으며, 해외 독립 운동 단체가 거둔 자금 중 최고액이었다.
구미위원부는 공채 판매 대금으로 매달 상해 임정에 천 달러 이상을 송금했다. 그리고 독립 운동 관련 저서 및 잡지, 팜플렛 출판을 지원했다.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이 발간한 <한국 평론 (Korea Review)>, 프랑스 파리에 있던 황기환의 <자유한국> 등의 발간을 후원했다.
특이한 점은 공채에 적힌 글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조국 독립을 전취(戰取)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 그 자금난에 봉착하였다. 하나님은 기필코 한국민에게 자유를 부여할 것이며 정의에 호소하는 우리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임시 정부는 자금 염출 방법으로 공채를 발행하나니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여, 솔선하여 공채를 구입하기 바란다. 이 금액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합법 정부가 수립되는 즉시 상환한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 비율은 1% 남짓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임시 정부의 공채에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공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성 감옥의 사형수 이승만을 사로잡았던 기독교 입국론은 독립 운동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미위원부의 활동으로 1920년 미국 상원 본회의에 "한국 독립 승인안"이 제출되었다. 34대 46으로 부결되기는 했지만, 미국 의회에 한국 문제가 상정되었다는 중요한 전례를 남겼다. 유럽과 미국 등 열강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끊임없이 호소한 이승만의 입장은 "코리아 완충 지대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승만은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만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중국도 공격하고 결국에는 미국과도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면 전 세계가 싸움터가 되어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 그 비극을 방지하려면 한국을 독립시켜서 일본을 견제하고 강대국들의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지대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이 세계 평화에도 좋고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좋다."
현재의 시점에서 판단해보면 이승만의 주장에는 틀린 말이 없다. 결국은 그의 말처럼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 이승만의 주장은 웃음거리로 취급당했다. 이승만이 맨주먹 붉은 피로 외교전을 벌일 때, 일본이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승만과 비교할 수도 없는 자원과 역량을 활용하여 서구 열강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세계 최고 패권국의 지위를 차례로 차지하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동맹국들이었다. 강력한 일본을 기반으로 태평양에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이 미국 외교의 기본 방침이기도 했다.
일본은 인구는 늘어나는데 땅은 좁아서,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팽창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열강들이 공감했다. 사실은 그네들이 한통속이기도 했다. 같은 강대국의 입장에서 약소국, 더군다나 멸망해버려서 지도상에도 없고 망국민들의 가슴과 목소리에만 살아 있는 나라를 위해 다른 강대국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의 주장은 결국에는 맞았지만 시간이 걸린 점도 문제였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것이 1931년, 중국에 쳐들어간 것이 1937년, 미국과 한판 승부를 벌인 것이 1941년이다. 그때까지는 누구도 일본의 침략을 이승만처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 앞서간 이에게, 기다려야하는 형벌이 내려졌던 것이다.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서 때가 되었을 때도, 이승만은 여전히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국제 관계의 기본은 힘이다. 더군다나 이승만이 외교 활동을 벌였던 기간은 노골적인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였다. 맞는 소리를 했다고 해도 힘이 없으면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참으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조국 독립을 향한 애국자의 발걸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거절당하면서 계속해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그때마다 최고위급의 외교관들을 접촉하고 문서들을 뿌려서 한국을 홍보했다. 세계 일류 정치가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독립 운동가 이승만의 마지막 10여 년은 참으로 고독한 세월이었다. 기약 없는 외교 활동에 모두들 등을 돌렸다. 소수의 지지자들마저도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성과에 지쳐있었다. 이승만의 거듭된 독립 요구에 피곤해진 미국은 그를 고집불통에 타협을 모르고 개인적 야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해 관계에 집착하는 인물로 매도해 버렸다.
그 시절 이승만을 지탱한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서 끊임없는 활동력과 영감을 얻었다. 그를 지탱해 주신 하나님은 그의 오랜 기도에 응답하셨다. 눈물로 씨를 뿌린 이가 기쁨으로 거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승만은 결정적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