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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념도 두방산(斗傍山)은 동강에서 사산이라 하여 봉두산, 병풍산, 첨산과 함께 명산으로 꼽고 있다. 높이 489m의 산 정상에 장군석과 신선대, 베틀굴이 있다. “귀절암”이 있어 귀절산 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낙안군수 및 선무원종 이등공신으로 봉하여진 송득운 장군의 충절을 기려 “서산”이라고도 하고, 향토사에는 “지내산”이라고도 하였다. 이찌보면 두방산보다 더 알려진 산이 첨산(313m)일 것이다. 비조암에서 동쪽으로 능선을 내려 섰다가 다시 오르면 첨산이다. 조정래의“태백산맥”에 인용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하고 신성한 산으로 각인 되어왔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던 송대립장군이 의병을 모집하여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던 곳이 또한 첨산이다. 사람들은 이곳 첨산을 숫첨산, 순천시 별량면 동송리에 있는 첨산(295m)을 암첨산이라 부른다. 별량에 있는 암첨산은 옛부터 국가에 큰 변란이 있기전에 사람 울음 소리와 비슷한 곡성이 난다고 전해지며, 여순사건, 6.25한국전쟁, 80년 5.18때에도 이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전해 온다. “김범우는 순천행 기차를 기다리며 첨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첨봉산 이라고 부르는 그 산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 기이한 생김도 생김 인데다가 자리잡고 앉은 위치까지 특별해서 생겨나는 신비로움일 것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첨산은 거대한 세모뿔이었다. 산은 으레 줄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첨산은 그렇지가 않았다. 양쪽에 아무 줄기도 거느림이 없이 혼자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경계를 짓고 있는 양쪽 능선은 흡사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으로 뻗어올라 봉우리에서 만나고 있었다. 첨산이 그런 생김일 뿐이었다면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물주는 직선의 단조로움을 파괴하여 조화를 이루고 싶었음일까, 직선으로 뻗어오르던 양쪽 능선이 거의 봉우리 가까이에 난해한 곡선으로 다시 정상까지는 직선으로 맞닿고 있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첨산의 신비로움은 잉태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삿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런 단정하고도 기이한 모습의 첨산은 자리를 잡아도 하필이면 뱀골재 너머에 바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지형적으로 보아 뱀골재는 어찌할 수 없이 벌교와 고흥반도의 경계였다. 그러므로 첨산은 고흥의 문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고흥 사람들은 첨산을 고흥을 지키는 수문장이라고 믿고 있었고, 벌교 사람들은 어디서나 그 기이하게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바라보면서 고흥 사람들 의 말을 수긍했다. 고흥 사람들은 그 산을 신성시해서 함부로 오르지 않는다 고 했다. 김범우는 자신도 첨산을 한 번도 올라본 일이 없음을 상기하며 엷게 웃음지었 다. 주위에 둘러쳐진 제석산이며 징광산 같은 것은 이미 국민학교 때 오르내렸 고, 멀리 있는 조계산이나 지리산까지도 다 올라봤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절 거리밖에 안되는 첨산은 왜 오르지 않았을까. 아마 '함부로 오르지 않는다' 는 금기 때문이었으리다. 오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산, 그런 산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니 첨산이 더 신비스럽게 다가드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중에서 전남 고흥군 동강면(東江面)은 고흥군 북부에 있는 면으로 면 소재지는 유둔리 이고 지형은 북고남저(北高南低)형으로 북에 두방산(斗傍山,489m), 병풍산(屛風山,481.7m),비조암(飛鳥岩,458m)을 경계로 보성군 벌교읍과 접하며, 북서쪽은 봉두산(鳳頭山,427m)을 중심으로 보성군 조성면, 고흥군 대서면과 닿는다. 동강면의 기후는 한마디로 하계고온다우(夏季高溫多雨), 동계온난건조(冬季溫暖乾燥)의 특성을 보인다. 고흥군의 주요 산지로는 고흥군 동강면과 보성군 조성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봉두산(427.4), 두방산(489), 남양면 망주산(349.2), 중부에는 오무산(356.5)과 고흥군의 주산 주월산(291), 운암산(486.9), 팔영산(608.6), 우각산(344.9), 우미산(449.7), 고흥군 시가지의 남쪽에는 조계산(463.1)이, 반도의 남쪽에는 천등산(550), 비봉산(447.6), 마복산(538.5)이 거금도의 동부를 거의 차지하는 적대봉(592)과 서부의 용두봉(418.6), 외나로도의 봉래산(410), 장포산(360), 마치산(380)등을 들 수 있다.
3. 산행정보 두방산 산행의 들머리는 15번 국도변의 고인돌 공원이나, 동강면 매곡리 당곡마을, 한천리 운동마을 등 어디에서 시작하던 약 4시간 코스로 넉넉하게 즐기면서 동쪽의 순천만과 서쪽의 득량만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당곡마을 입구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승용차는 가능하나 대형버스는 도로변에서 하차하여 등산로 입구까지 도보로 이동해야한다. 향후 동강면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장 시설도 갖출 계획이다. 등산로 입구의 등산로 안내판을 지나 조금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용흥사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상당히 가파른 등산로를 30분쯤 오르면 산죽군락지가 나오는데 여기가 “해조암‘터다. 그 위에 귀절암이 있는데 암자가 아니라 바위다. 20여m가 족히 넘을만한 바위가 깍아지를 듯 서 있는 귀절암, 가까이에 가 보면 어른 키 만큼의 동굴이 세 개 있다. 동굴 안쪽엔 야트막하게 물이 고여 있는데 바위 사이에서 눈물 방울만한 물이 떨어져 만들어 놓은 웅덩이 샘이 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두방산의 모양이 여인네가 반듯하게 누워있는 형상이니, 어머니 품안과같은 두방산, 젖가슴에 해당하는 귀절암, 그곳에서 흐르는 젖줄은 아래쪽에 위치한 당곡마을로 흘러내려 주민 모두가 그것을 평생 마시고 살기에 뽀얀 피부로 장수를 누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뭏튼 당곡마을 사람들은 평생 모유를 먹고 사는 셈이다. 귀정암에서 약수 한잔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10여분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우측으로 가까이에 두방산 정상이 보이고 좌측으로 10여m 가면 동강면 일대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잠시 전망대에서 쉬면서 동강면 일대를 관망하는것도 즐거움이다. 다시 북쪽으로 능선을 걸으면 고산지대의 고사목이 연상되는 풍광을 볼 수 있다. 암릉지대에 이르면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생긴 끈들바위가 있다. 우뚝 선 모습이 장군같다고 장군석이라고도 부르며, 누워있는 여자의 속눈썹에 해당되는 바위라 해서 눈썹바위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말봉산(두방산) 능선에 바위(주상절리)가 100개가 늘어서 있었는데 산 뒤쪽 보성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 바위가 해를 끼친다고 어느날 바위들을 모조리 쓰려뜨리려 했는데 99개의 바위가 쓰러지고 마지막 남은 1개의 바위를 쓰려뜨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쳐 사람들이 놀라 도망가는 바람에 그 바위만 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방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20분쯤 걸린다. 정상에 서면 북으로는 벌교읍의 부용산, 제석산, 금전산 등이 보이고 서족으로는 득량의 오봉산도 조망된다. 정상에서 다시 북쪽으로 능선을 오르면 암릉지대가 나오는데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다. 암릉의 맛을 느끼려면 암릉으로 올라서 가도 무방하다. 암릉에서 벗어나면 철제 계단이 나오는데 동강면사무소의 송성종 산업계장님이 손수 지고 날라 공사를 하셨다니 산을 사랑하는 분들은 감사 할 따름이다. 정상에서 20분쯤 걸으면 코재에 닿는데 아래 용흥사에서 올라오는 코스가 만나는 지점이다. 코재에서 15분이면 병풍산 정상에 다다른다. 병풍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능선을 타고 20분쯤 오르면 비조암에 닿는다. 비조암은 넓은 바위지대로 100명 이상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다. 비조암에서 동쪽 능선을 걸으면 첨산으로 이어지고, 북동쪽 능선을 걸으면 고인돌공원, 운동마을 이정표가 나오는데 고인돌공원방향으로 직진한다. 15번 국도 직전에 묘지가 나오는데 거기서 직진하면 고인돌공원이고 우측으로 빠지면 운동마을로 하산한다. 두방산 산행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산이다. 4. 주변의 명소 가. 봉두산 성지 동강면 마륜리 봉두산 정상으로부터 마치(馬峙)에 이르는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산성은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와 보성군 조성면 매현리의 경계부근인 속칭「성안」에 위치한다. 봉두산성에 대한 전거는 『湖南誌』의 기록이 유일한데 '동강에 있다'고 만 나올뿐 규모나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한편 『文化遺蹟總覽』(전라남도, 1986)에는 '둘레 1,400자, 높이 6자의 토성이다'라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의 소략함 뿐만 아니라 성내 수습유물 또한 없어 봉두산성에 대한 유래나 축성시기 등은 잘 알 수 없다. 나. 태강현성지 동강면 대강리 당곡마을 앞 중뫼산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이다. 이 중뫼산성은 태현성으로 비정되는데 그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태강현은 본래 백제의 비사현이었는데 신라 때 백주현으로 고치고 낙안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태강으로 고치고 후에 내속되었다(『世宗實錄 地理志』보성군 속현조). 고흥현을 봉황암의 서쪽으로 옮기고 또 보성에 임내한 남양현, 태강현을 비롯하여 풍안현, 도화현과 장흥도호부의 속현이었던 두원현, 도양현을 편입시켜 이름을 흥양이라 고쳤다(『世宗實錄』권 92. 세종 23년 2월 갑술조). 위의 자료에 의하면 태강현은 본래 백제의 비사현(比史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백주현으로 고치고 낙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태강현으로 고치고 현종 9년(1018)에 보성군에 내속되었다.
그 후 세종 23년(1443) 2월 현 흥양읍성 자리로 옮길 당시에 흥양현에 편입되었다. 이 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백제시대 태강현성으로 추정된다. 첫째 각종 지지류(地志類)에 북쪽 70리로 기록되고 있거니와 『湖南誌』의 기록에 「泰江山城」으로 나타나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둘째 표고 20~30m의 구릉성 야산에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또 축성기법에서 백제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호석열(護石列)이 나타난다. 다. 송씨쌍충정려 - 지방기념물 제110호 쌍충각은 마륜리 마서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宋大立)과 병자호란때 공을 세운 송심(宋諶)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에 명정을 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송대립(1550 ~ 1597)은 여산송씨 고흥 입향조인 간(侃)의 6세손으로 1594년(선조 27)의 임진왜란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希立·생몰년미상)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고향인 흥양(동강면 첨산)에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송심(1590 ~ 1637)은 부친의 뒤를 이어 1614년 무과에 급제하여 홍원현감으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항의 휘하에서 분전 끝에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 부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쌍충정려로 포상하고, 대립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심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인조 22년(1644)에 명정받은 명정판액 2매와 1915년에 기우만이 찬한 중수기가 있다. 라. 신여량장군정려 - 지방기념물 제111호 이 정려는 신여량(申汝樑)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53년(영조 29)에 명정(命旌)을 받아 유허지에 건립된 것이다. 신여량(1564 ~ 1606)은 고령신씨 고흥입향조인 석(碩)의 6세손으로 부 홍해(弘海)와 모 흥덕장씨(興德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중임(重任)이고 호는 봉헌(鳳軒)으로 15세때 부를 16세때 모를 여의고 4년간 시묘를 살았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15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1586년에는 평북용만(의주) 병마절제도위(兵馬節蹄尉)가 되어 북경(北境)의 거란족을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에 의해 압록강변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591년 병조판서 김응남의 천거로 오위도총부의 부부장(副部長)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과 의주로 피난갈 때 호종하였고, 조방장(助防將)으로서 이순산장군과 연합하여 노량·한산(露梁·閑山) 양대첩과 가덕양(加德洋) 싸움에 참전하였다.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우수영군첨정(慶尙右水營軍僉正)으로 특진되었다. 그때 조헌이 창의하여 옥천·대전(沃川·大田)을 수복하자 향리에서도 동생인 여기·여정(汝杞·汝楨)과 종제인 여극(汝極), 그리고 종숙인 영해·원방·홍수(榮海·元方·弘壽) 등이 창의하여 함께 권율의 막하에 편입하여 행주대첩(1593)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몫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공은 다시 향리 친척들과 창의하여 순천예교(順天曳橋) 싸움에서 대승하였다. 이순신장군이 죽은 후 공은 통제영우후 겸 절충장군(統制營虞侯 兼 折衝將軍)이 되어 고금도 앞바다에서 왜적을 대파하였고, 그 후 당포(唐浦)앞바다에서도 대승하였다. 1603년 목포앞바다에 출몰하는 왜적집단을 토벌하는데 원군하여 대승을 거두어 주민들이 「구휼선정송덕비(救恤善政頌德碑)」를 세웠다(현 목포시청 앞). 1606년 절충장군전라우수사(折衝將軍全羅右水使)로서 진도에 남아있던 왜적들과 싸우던 중 적의 탄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신여량의 충절사적은 왜란이 지난 뒤 묻혀있다가 공적의 포상을 바라는 정순상서(呈巡相書)가 1691년(숙종 17) 흥양유학 신숙 등에 의해 올려짐으로써 비로서 조야에 그 빛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조정의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1735년(창평유학고만령외 13인 통문)과 1738년(전주유학 김유성외 73인 통문)으로 이어지는 유림들의 노력으로 선양포창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753년(영조 29)에는 병조참판 겸 전라좌수사병사에 증직되고 충신정려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해에 명정액(命旌額)과 함께 례관이 파견되어 치제(致祭)하였다. 그후 1833년(순조 33)에는 도내사론(道內士論)으로 나주 충장사와 금산대첩단에 여정·여극과 함께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
이 정려의 1차 중수는 1838년(헌종 4)에 있었고 당시의 인근사림이 운집하여 지은 중수운이 전한다. 이어 1937년 2차 중수가 있게 되는데 당시 중수상량문은 후손 규환이 지었다. 한편 1955년 최병심이 찬한 정려기가 현재 편액으로 정려 내부에 걸려있다. 현재의 정려는 이후 1967년의 중수 단청과 1989년의 도·군비 지원과 문중합력으로 복원단청된 것이다. 정면·측면 각각 1칸의 정려안에는 3매의 현판이 걸려있다. 마. 유둔리 덕암 지석묘군 - 지방기념물 제159호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게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는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도 축조되는 유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 지석묘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 요령성과 일본의 구주지방에도 분포하나 우리나라가 중심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무덤방(石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卓子式)과 지하에 있는 것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하에 있는 것은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碁盤式)과 없는 것(蓋石式)이 있는 것이 많다.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대부분 지하에 무덤방이 있는 형식이며, 한곳에 수기 내지 수십기씩 무리지어 있다. 지석묘의 껴묻거리(副葬品)는 간돌검(石劍), 간살촉(石鏃), 비파형동검 등 무리류나 붉은 간토기(紅陶), 장식옥 등이 무덤안에서 출토되며, 무덤 주위에서는 생활용구나 공구류 같은 석기와 토기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유둔리 덕암 지석묘는 동강면소재지의 남쪽에 있는 구릉상에 있다. 이곳은 유둔리 성안마을의 진산인 표고 100m의 야산이 동진하여 덕암마을의 북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좁고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지석묘는 덕암마을과 15호선 국도의 중간쯤의 구릉 정상부에 약6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구릉의 남쪽은 좁은 계곡평지가, 북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이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평지이다. 이 평지를 중심으로 하여 약 180여 기의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의 하나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 다. 덕암 지석묘는 구릉의 방향과 같이 북동 ~ 남서방향으로 수열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다. 지석묘의 규모는 대개 200 ~ 300cm 내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지석묘의 상석이 땅에 밀착된 것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받침돌이 고인 것과 상석 아래 석실의 일부에 잡석이 채워진 것도 있다. 그리고 파괴된 상석이 겹쳐진 것도 있다. 이 지석묘의 가운데에 선돌(立石) 1기가 세워져 있다. 이 선돌은 높이 380cm, 너비 200cm, 두께 60cm로 규모면에서 초대형에 속한다. 지석묘들은 선돌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에워싸인 듯이 군집되어 있다. 덕암 지석묘군은 60여 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초대형 군집군이며, 선돌이 지석묘 축조시에 세워진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하나의 거석문화로 공존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지석묘 중 대표적인 지석묘군의 하나로,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바. 용흥사 조선중종 24년(1529년)경에 어느 도인이 斗榜山 상봉에 "귀절암"이라는 바위동굴에서 약수를 마시다가 부처님을 親見하고 바위옆에 "해조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해조암은 일제강점기말기에 소실되었으며 지금은 터만 남았다. 하지만 귀절암 약수는 지금도 흐르고 있는데 피부병에 효과가 잇다고 한다. 현 용흥사는 1930년경에 유둔 사는 서영민 거사가 창건했으나 한국전란때 불탔으며 그후 1953년에 김상호 스님이 다시 건립하여 도량을 확장하고 용흥사(龍興寺)라 칭하였다. 1974년과 1976년도에 대웅전과 종각을 중건하였으며 1980년 스님이 입적한 후 1998년 승범 스님이 법당을 새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 뱀골재 벌교에서 고흥땅을 넘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가 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하여 뱀골재라 불리는 고개이다. 이 뱀골재를 막 넘으면 붓끝처럼 뾰족하게 생긴 첨산(尖山)이 보이는데 유교사상을 중시하던 옛날 선비들은 이 산을 대강(大江)의 필봉(筆峰)이라 불렀단다. 첨산(尖山)의 필봉(筆峰)이 두방산(斗榜山)에서 흐르는 대강(大江)의 먹물로 글을 쓰면 천하일필(天下一筆)이라는 속언(俗言)이 있어 선비들이 몰려와 자기의 필적(筆蹟)을 다투어 남겼다고도 한다.
특히 마륜(馬輪)은 선비들이 수레를 타고 드나드는 고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동강에 선비들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선비들이 과거를 보려고 한양이나 전주 고을에 가려면 반드시 뱀골재를 넘어야만 했다. 이 뱀골재에는 어여쁜 미녀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면 그날이 무사히 지나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닥친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착한 선비가 수레를 타고 과거를 보러 가는데 뱀골재 모퉁이에서 어여쁜 미녀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더란다. 선비는 어여쁜 미녀의 안내로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과거에 급제했는데, 부도덕한 선비가 뱀골재를 지날 때는 큰 뱀이 길바닥에 서리고 있어 도망쳐서 시험장에 갔으나 과거시험에 낙방했다는 이야기이다.
인심좋고 정직한 고흥땅에 들어올 때 부정비리가 많고 시기와 질투, 모함과 배신, 그리고 부도덕을 일삼는 죄를 지은 사람은 뱀골재에 서리고 있는 큰 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괴상한 뱀을 만난 사람은 고흥땅에 와서 불행을 맞게 된다는데 개과천선하지 않고 부정한 사람들을 마을에 들이지 않으려는 조상들의 혼을 느낄 수 있다.
풍수지리설에 흥양 68혈 가운데 고흥읍으로부터 동북 60리에 비사재수형(飛蛇載水形)의 명혈(名穴)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이 뱀골재 부근일 것이라 추측되며 또 동북 50리에 군왕대좌형(君王大座形 )의 혈(穴)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동강면 마륜리 지점일 것으로 추측된다. 와우형(臥牛形)인 고흥에서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곳이 동강면인데 문필봉을 수문장으로 한 동강면은 많은 관료와 문관, 충효열사가 배출되는 명적지(名蹟地)라고 말하고 있다. - 고흥문화원 『고흥의 전설』 참조 등산로가 아주잘되어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