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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칼빈개혁신앙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sola
벨직 신앙고백서(1561)
벨직신앙고백서는 남부 네델란드(화란)의 벨기에 지역에서 가이드 브레(Guido de Bres)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다. 특히 화란은 1618년에 도르트 총회를 개최하는 중요한 개혁교회의 요충지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개혁교회의 총회가 집행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지역의 교회들이 사도적이고 어거스틴적이며 또한 칼빈주의적인 개혁신앙을 뿌리깊게 받아들이고 정립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561년에 이미 이 화란에서는 개혁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된 본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정도로 깊은 신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16-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혼란한 정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화란으로 이주해 오면서 화란은 보다 더 철저한 개혁신앙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찰스 5세가 공적으로 이단(개혁교회)을 처형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개혁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의 수도승이었던 헨리 보에스(Henry Voes)와 요한 에쉬(John Esch)는 브리쉘에서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가 화란에 있었다. 이들은 죽어 가면서도 “사도신경”과 “Te Deum”을 부르며 죽어 갔던 역사는 개혁교회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정신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런 핍박의 역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그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핍박 속에서 화란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독립교회를 세우는 열매들을 낳게 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본 신앙고백서는 아드리안드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와 모데투스(Modetus)와 윙켄(G. Wingen)의 도움을 받아서 가이오 드 브레(Guido de Bres)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것인데, 후에 엔트웝의 왈룬(Walloon)과 보르쥬(Bourges)의 프렌시스 쥬니우스(Francis Junius)에 의해서 좀더 분명한 칼빈주의적 정신이 포함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본 신앙고백의 가치는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신앙고백서는 1566년의 엔트웹 회의와 1568년 베셀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이 되고 보다 더 공적으로 채택이 된 것은 1571년 엠덴 총회와 전국 도르트 총회(1574), 미델부르그 총회(1581)와 1618-1619년에 있었던 도르트회의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의 규범 교리의 하나로서 채택하였고, 모든 교회의 책임자는 반드시 이에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됨으로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교회에서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584년에는 로마교회의 광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한 윌리암 오렌지(William Orange)공은 자신의 둘째 아들과 투쟁을 벌이면서 성경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영적인 안내자와 위로자로 삼고 원수들의 공격을 맞서 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칼빈주의 사상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와 맞서 승리를 얻게 하는 중요한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는 화란의 교회와 정치, 사회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신조의 채택과 표명이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표현이었기에 이것을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은 곳 성경의 참된 진리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목숨을 걸고 순교할 수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오렌지공이 자신의 아들과 신앙적인 표명의 차이 때문에 부자지간의 인연을 정리하는 엄격한 신앙의 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마지막까지 투쟁하면서 그의 힘의 원천과 위로로 삼았던 것은 성경과 함께 본 신앙고백서였음을 보면서 우리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을 어떻게 고백하고 드러내는가에 따라서 때로는 가족과도 분리하면서 까지도 이 신앙적 가르침과 그 정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 성경과 신앙고백서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신조를 채택하고 표명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신앙적 내용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에 대한 엄밀한 정신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드러나고 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에서는 우리는 인본주의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거룩한 신본주의적 신앙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으면서 1618년 도르트 회의 당시에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받았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철저한 개혁교회의 신앙 정신이 잘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에서는 오히려 이 벨직 신앙고백서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프랑스, 라틴어, 화란어 개정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즉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수정을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른 방향의 수정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수정 정신이 아니라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보다 더 성경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초판본은 1562년에 나왔으며, 후에 1669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1787년, 1850년에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라틴어 판은 1581, 1612년 판이 있다.
제1장.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오직 그 분만이 유일한 절대자요, 영적인 존재자이심과 또한 그 분은 영원하시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분이시며 불가시적이며 불변하신 분이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그 지혜는 완전하시고 의롭고 선하신 분이시며 모든 선의 넘치는 근원이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바이다.
제2장. 인간이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방법
다음의 두 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첫째로는 그 분의 창조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그 분의 온 우주를 다스리심에 의해서인데, 이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때 크고 작은 온갖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훌륭한 지침서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인데, 마치 사도 바울이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라고 함과 같다(일반계시). 모든 만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깨달아 알게 해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그 분의 성스럽고 거룩하신 말씀을 통하여, 즉 이 세상에서 그의 영광스러우심과 인간을 위한 구원에 관하여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쓰여진 그 말씀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고 충만하게 그 분을 알 수 있다.
제3장.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뜻에 의해 나온 것이거나 전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벧후1:21) 쓰여진 것임을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은총으로 인하여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을 명하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쓰여졌음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십계명을 기록하셨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들을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바이다.
제4장. 정경(正經)인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정경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음을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구약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비롯해서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도, 그리고 욥기,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세 책 즉 잠언, 전도서, 아가 그리고 대선지자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열두 명의 소선지자인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신약은 사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비롯해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 바울의 열 네 서신 즉, 로마서, 고리도전서.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후서, 디모데전서.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히브리서이며, 그 외에 다른 사도들의 일곱 서신, 즉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이다.
제5장. 하나님의 말씀의 신성과 권위의 근거
우리는 이 모든 성경을 우리의 믿음을 규정하며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또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성스러운 정경으로 믿는다. 이 쓰여진 모든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은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거나 승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며, 성경이 그 스스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라 할지라도 예언된 말씀이 성취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6장. 정경과 외경 또는 위경(僞經)의 차이점
우리는 다음의 책들, 즉 에스드라 제 삼. 사권, 토비트, 유디드서, 지혜서, 벤 시락의 지혜, 바룩서, 에스더서의 부록, 불구덩이 속의 세 소년 찬미서, 수산나의 역사서,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의 두 책 등 소위 외경이라고 부른 것과 정경을 구별하는 바이다.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정경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한계 내에서만 읽혀질 수 있고 교훈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면이라도 확증을 줄 수 있는 능력이나 효능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이 책들로 인해 정경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7장.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충족성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듯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이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그 속에서 지시하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태도가 그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성경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합당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말씀 외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은 모든 면에서 성경의 말씀이 완전하고 충분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의 글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세상의 관습이나 고대의 제도, 대중의 태도 그리고 사람들 또는 그들의 판결 혹은 규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는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 바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모든 것 위에 존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영이라도 배격하는 바인데, 이는 사도 요한이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10)
제8장.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심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본질에 있어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동시에 그분은 곧 공유할 수 없는 바 인격적이시며 참되시며 진리되신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는다. 성부는 원인과 근원이 되시고 모든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능력과 힘이 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분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신데,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의 인격성을 가지시고 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나, 이 세 인격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신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도 아니시며 성자도 아니심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구별된 인격은 나뉘어지거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성부나 성령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고 다만 성자만이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계시지 않았고 또한 성령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셨다. 이 삼위(三位)는 영원하심과 그 본질에 있어서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처음이고 어떤 분이 나중이 되시는 그러한 분들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삼위는 진리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제9장. 한 분 하나님의 삼위 인격 되심에 관한 전장의 증거
위에서 언급한 모든 사실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서 깨닫는 바 그 증거가 주는 힘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우리고 하여금 성(聖) 삼위일체를 믿도록 가르치는 성경의 증거들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모든 구절들을 열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창1:26-27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으며, 창3:22에도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라는 말속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그 속에 한 분 이상의 또다른 분들이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으나, 구약에서 불분명한 이 문제가 신약에 와서 매우 분명하게 보여짐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고, 성자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강림하셨던 것이다. 이 모습은 또한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워진 것인데, 이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도 천사 가브리엘은 주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3)라고 했으며 “하늘에서 증거하는 자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니, 이 셋은 하나이니라”라고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신적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신 세 인격이 계심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가르침이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을 믿으며, 장차 이 온전한 가르침을 깨닫고 하늘나라에서 이로 인해 즐거워할 것을 믿는 바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 삼위의 특별한 직위와 그 행하심이 우리 인간을 향하고 계심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성부는 그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창조자가 되시며, 성자는 그의 피로써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주가 되시며, 성령은 그가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은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여 늘 확증되었고 주장되어 왔으며 이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또한 마르키온파, 마니교,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나테누스, 아리우스등 정통 교부들에 의하여 거짓 기독교로 또는 이단들이라고 정죄 받은 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꺼이 세 신경, 즉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다나시우스 신경을 받아들이는 바이며, 이것은 고대 교부들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일치하는 것이다.
제10장.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본질에 따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심과 영원부터 계시되 피조되거나 창조함 받은 분이 아니시며(왜냐하면 창조받으신 분이라면 피조물이 되시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을 따라 성부와 함께 그 본질에 있어서나 영원에 있어서, 또한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은 그가 우리를 만드신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증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대로 영원 전부터 되시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며, 사도 요한은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 그 말씀에 의하여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인하여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증거하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될 당시에도 계셨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는 (미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으며, 사도는 (히7:3)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 분은 우리가 바라고 예배하며 섬겨야 할 참되고 영원하신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제11장. 성령은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심
또한 우리는 성령이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발출)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따라서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창조함을 받은 것이나 생겨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것임을 믿는다. 순서에 있어서 성령은 성 삼위일체의 제 삼위에 해당하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한 본질과 위엄과 영광을 가지신 분이시며, 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 해 주는 대로 참되시며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제12장. 만물의 창조, 특히 천사들의 창조에 관하여
우리는 성부께서 그 말씀, 즉 그 아들로 말미암아 무(無)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온갖 피조물들을 만드셨으며, 이 모든 것이 창조시에는 성부께 좋게 보였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그 존재나 모습 또는 형태 그리고 그 직위에 있어서 창조주를 섬기도록 되었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섭리와 그 무한한 능력으로 그 모든 것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되,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심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천사들을 선하게 지으셨고 자신의 전달자가 되어 그의 택하신 자를 섬기도록 만드셨다. 그런데 천사 중의 얼마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높은 지위에서 영원한 파멸로 떨어졌으며, 그 밖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킴으로 처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악마와 귀신의 영들은 타락하여 하나님과 선한 일에 원수가 되었고, 극도로 타락하여 살인자로서 교회와 신자들을 파괴시키고자 하며, 그 악한 궤계로써 모든 것을 멸망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그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 날마다 무서운 고통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한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거부하며 이를 배격하는 바이다. 또한 악마들은 그들 스스로의 구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악마들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본성상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마니교의 잘못됨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13장. 하나님의 섭리와 만물을 주관하심.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을 내버려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에 맡기신 것이 아니라 그의 거룩하신 뜻대로 다스리시고 주관하심으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음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발생하는 그 어떤 죄에 대한 책임자가 될 수 없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하심은 너무나 위대하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사단과 사악한 인간들이 불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는 가장 놀랍고도 의로운 태도로써 자신의 사역을 명하시고 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3중 방식).
또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이해 능력의 한계를 넘어 있는 그 놀라우신 뜻을 호기심으로 감히 찾아 알 수는 없으며, 다만 지극한 겸손과 경외함으로 우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따를 뿐이며,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계시하여준 그 사실만을 배울 뿐 그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이유는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은혜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어남을 이 교훈을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마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라고 하심같이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능력으로 감싸고 계신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뜻이나 허락 없이는 사단이나 온갖 악의 세력이라도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은 그 어떤 것도 돌보시지 않고 다만 만물을 우연에 방치하셨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루스 학파의 거짓된 주장을 철저히 배격한다.
제14장.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을 행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흙으로 지으셨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즉 그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또한 거룩한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영광된 위치에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여 자신을 스스로 사악한 죄악에 내던져 결국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죽음과 저주의 상태에 빠졌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받았던 생명의 계명들을 범했기 때문에 죄로 인해 참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고, 따라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됨으로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악해지고 잘못되어 부패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들을 다 잃어버리고 그 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만 남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변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속에 비친 빛이 어두움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인데,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인간을 어두움으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이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을 배격하는 바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노예일 뿐이며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수”(요3:27)없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 누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자랑할 수 있으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임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 그 누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 왜냐하면 성경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요약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조차도 감히 우리 것으로 내놓을 수 없는데, 이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한 바를 확실하게 붙잡고 나가야 할 것이다. 주께서 (요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외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없는 것이다.
제15장. 원죄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내려졌음을 믿는다. 이것은 전적인 부패와 유전적인 질병으로서 심지어 모태에 있는 아이에게까지도 전염되어 온갖 종류의 죄악을 낳게 함으로 죄의 온상이 되었고 따라서 이 모든 죄악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천하고 혐오할 만한 것이라 모든 인간이 저주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모든 죄를 없앤다거나 멸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세례를 받는 일로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죄란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이 이 비참한 근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이 죄악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진노를 받기에까지 전가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악 속에서도 안일하게 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 타락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이 사망의 육신 세계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죄란 단지 모방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 학파의 잘못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16장. 영원한 선택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 그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해서 타락되어 멸망에 빠졌다는 것과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 모습, 즉 자비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셨음을 믿는다. 자비롭다함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신 계획 속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모든 사람들을 이 파멸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보존하시기 때문이요, 공의롭다 함은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타락과 파멸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심에 있다.
제17장. 탁락한 인간의 회복
우리는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놀라우신 지혜와 선하심으로, 인간이 육체적이며 영적인 사망에 빠져들어가 전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시고 그 아들(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로 하여금 그 보좌를 떠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아들을 복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범죄한 인간일지라도 그를 기뻐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이심을 믿는다.
제18장.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르시되,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를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참되신 인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는 없으신 채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사람과 같이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심을 믿는다. 인간이 되신 것을 사람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은총을 입은 처녀 마리아이 몸을 통하여 이뤄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에 있어서만 참 인간의 성품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도 그러하셨으므로 그는 참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인간이 육신만 범죄하여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도 타락하였으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 두 본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육신과 영혼의 두 면을 모두 취해야만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그리스도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재침례파의 이단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신과 혈통을 취하시되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요, 다윗의 씨에서 난자요, 여인에게서 난 자로서 마리아의 태의 열매요, 다윗의 가지요,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요, 유다 자손에게서 생겨난 자요, 육신으로는 유다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씨이심을 믿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게 하시고, 죄는 없으시되 모든 면에서 그 형제들과 같이 인간의 모습을 갖게 하신 것은 그 분이 진실로 우리의 임마누엘 되심,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음을 믿는다.
제19장.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두 성품의 연합과 구별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 인간의 성품과 구별될 수 없도록 연합되어 있음을 믿는다. 이 뜻은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다는 것과 두 인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성품이 한 사람 속에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요, 여전히 그 성품은 그 자체의 구별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신의 성품이 태초부터 우주에 충만했을 뿐,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성도 그 성품을 잃지 않고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지닌 채 참 인간의 모습으로 계셨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취하셨다 하더라도 인간 본성의 그 실재가 변화한 것이 아닌데, 이는 마치 그의 육신의 실재를 따라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이뤄질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본성들은 한 인격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합하여서,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 의해서도 두 본성이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긴 것은 그가 육신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참 인간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신의 본성은 심지어 그가 무덤에 있었을 때 조차라도 인간의 본성과 항상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늘 그의 마음 속에서 계셨던 것처럼, 비록 이런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늘 그 속에서 함께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께서 순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순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순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죽음을 이기신 그의 능력에 의해서의며, 순전한 인간이라 함은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제20장.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안에서 그의 공의와 자비를 나타내심
우리는 완전한 자비와 공의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한 죄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하여, 죄의 대가로서 받는 가장 쓰라린 고통과 죽음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시되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으며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을 쏟아 주시되 그 아들로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그를 일으키셨음을 믿으며, 바로 그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한 삶을 얻게 됨을 믿는 바이다.
제21장.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음을 믿는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7)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12)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비록 처음에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무죄한 분으로 판결 받았으나 결국은 행악자로 정죄를 받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받을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형벌을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짊어지신 채 불의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의로우신 그 분께서 보혈을 땅에 흘리심으로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그는 이렇게 고초를 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는 고백을 마땅히 하는 바인데, 바로 그의 아픔 속에서 우리는 온갖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단번에 희생이 되심으로 영원토록 온전케 된 바 바로 이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이나 길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하나님의 천사에 의하여 “예수”, 즉 구세주라고 불림을 받았는데, 이는 (마1:21)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제22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칭의
우리는 이 놀라운 비밀스런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올바른 믿음을 밝히 보여주심을 믿는데, 이 믿음은 그가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바 그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며 그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음의 둘 중의 하나, 즉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믿든지, 또는 만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음을 믿든지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고 그 외에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엄청난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절반의 구원자밖에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또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말을 마땅히 하는 바이다. 그러나 좀더 분명히 말해서, 믿음이란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단지 하나의 방편일 뿐이요, 이 방편이 되는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거룩한 사역들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그의 모든 공로 안에서 우리를 그와 교통하도록 해주는 도구인데 우리가 이 모든 공로를 받아들일 때에 이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멀리해 주는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23장.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조건.
우리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씻어 주셨음으로 되어짐을 믿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행위와는 관계없이 의를 심어 주셨다고 선언함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고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 앞에서 낮추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늘 인식하며 이 은혜의 기초를 항상 굳게 붙잡고 나갈 것인데,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서는 그 어떤 신뢰할 만한 요소라든지 자랑거리가 없고, 다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의지하고 따르면서 그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이 진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고자 하는 힘을 주기에 충분하며,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당황하여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감추려고 했던 사실과는 달리 두려움이나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이나 보잘 것 없는 다른 피조물들을 의지한 채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마땅히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시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제24장. 인간의 성화와 선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써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얻게 된 이 참된 신앙이 인간을 중생케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얻게하여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의롭다 창함을 받은 이 믿음 때문에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 태만해져도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생활태도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나 형벌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그릇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이 거룩한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서 일컫는“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인간에게 명하신 실천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 선한 일들은 마치 좋은 믿음의 뿌리에서 선한 열매가 나오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착한 행위들로서, 이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이 선행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하기 전일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선행(先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선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그 나무 자체가 우선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결코 그것으로 공적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무엇으로 우리에게 공로가 있겠는가?).
25장. 의식법의 폐기
우리는 율법의 의식이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끝났다는 것과 그 분명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율법의 참 진리와 그 실체는 이 모든 것의 완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되, 이 율법의 의식을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필요 없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율법의 제3용법).
26장. 그리스도의 중보자되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고, 다만 중보자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음을 믿는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成肉)하심으로 한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닌 분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 이 분이야말로 그 거룩한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에 접근하도록 해주신 분이심을 믿는다. 그러나 성부께서 그와 인간 사이에 세워 주신 중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그의 위엄으로써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거나 우리 멋대로 다른 것을 찾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는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범사에 그 형제들과 같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를 사랑하여 가까이 나아오고자 하는 분을 우리가 찾고자 한다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심지어 그에게 원수되었을 때라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분 외에 어떤 다른 존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능력과 권위를 지니신 분을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이 외에 그 누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뿐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르쳐 준 바를 행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기록한 말씀의 경계를 계속 거부하는 이 모든 것은 오직 불신앙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변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공적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심과 그 보배로우심에 근거하여 드리는 것이며,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이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은 두려움,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해서 인간의 불신앙을 우리에게서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7-18)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께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또한 사도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4-25).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중보자로서 주신 것을 기뻐하셨다면,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얻고자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다른 중보자를 구한다거나, 그를 발견할 수 없다 하여 다른 중보자를 찾음으로 참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실 때 우리가 죄인되었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하심을 따라서, 마치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과 같이 오직 한 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다.
27장.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
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혹은 우주적인 교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씻음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교회는 순간적으로 비록 작아 보이고 인간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마치 아합왕의 시대와 같은 위급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 두셨던 것같이, 이 악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를 받으며 유지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특정한 사람에 한정되거나 경계를 이루는, 또는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이요, 동시에 믿음의 힘에 의하여 동일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을 모두어 하나로 뭉쳐야만 된다는 것이다.
28장.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 교회와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공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요, 그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태나 조건 속에 있든지 간에 이 거룩한 모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그 스스로 이 모임의 구성원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공회에 모여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바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들 스스로가 교회의 원리와 그 가르침에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서로가 동일한 몸의 지체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이 국가의 행정 명령이나 칙령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서 스스로 그 구성원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들을 교회에서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의 마땅히 행할바이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 내에서 신자들 사이에 구별을 한다는 것이나 또한 신자들끼리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29장.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
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고 주의 깊게 참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바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이단도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위선자들, 비록 외형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선한 성도들과 함께 존재하면서 실상은 참 교회의 요소가 아닌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온갖 이단들로부터 참 교회의 하나됨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 다음의 몇 가지로 인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인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에 죄를 멀리 하며, 의를 따라 살고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참으면서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치 허물이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성령을 힘입어 모든 죄악과 싸워나가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를 사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으심, 그리고 고난당하심과 순종하심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거짓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지 않는 교회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성례를 시행치 않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
30장. 교회 행정과 그 직무에 대해서
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며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 받고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믿음 있는 성도들이 뽑히게 될 때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선한 순서와 질서를 따라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31장.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교회 직원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가 주의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 주는 질서 속에서 교회의 정당한 선택에 의해 그 각자의 직무에 따라 뽑혀져야만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처신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또한 택함 받은 소명에 대해 증거를 갖고, 이것이 주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확신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목사는,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유일한 목자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과 같이 동일한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파괴되거나 경솔히 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그 맡은 일을 위하여 높이 존경할 자로 여기고, 불평과 다툼과 논쟁이 없이 가능한 한 그들과 화평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32장. 교회의 질서와 가르침
우리는 비록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교회를 질서있게 움직이기 위하여 만든 규칙과 질서들이 쓸모있고 유익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유일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모든 규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생각과 인간의 양심을 묶어 버리며 강요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그 어떤 인간적인 수단들을 배격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가르치며 돌봄으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길만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주는 모든 가르침을 따라 징계하거나 다스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33장. 성례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성례를 제정하셔서 그의 약속하심에 이르기까지 인을 쳐주시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함과 은혜로 약속해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일으켜 주시며 강하게 해 주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되, 두 가지 측면에서 즉 그의 기록된 말씀의 선언하심을 따라 그리고 그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을 따라 좋을 것을 주시는데,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구원을 확증토록 하시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내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외적인 징표들인데,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역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징표들은 우리를 기만하기 위한 속임수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의 참된 주인이시오, 그가 없이는 일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다음의 두 성례에 만족하는데,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성찬인 것이다.
34장. 세례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을 흘리시되 인간이 죄에 대한 속죄나 보상으로 마땅히 드려야 되는 그 피를 대신 흘려주심으로 모든 속죄를 이루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그가 피흘려 주심으로 할례를 폐기하시고 그 대신에 세례를 규정하셨음을 믿는 바이다. 이 세례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앎으로 다른 모든 사람이나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이로써 그를 영원토록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이시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주께서는 물론 세례를 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셨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서 몸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듯이, 물뿌림의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피가 그 영혼을 내적으로 깨끗케 하여 죄를 씻어줌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중생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물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받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탄과 같은 바로의 폭정을 모면하기 위하여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홍해와 같은 것인데, 이로써 우리가 영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 직무에 따라 주께서 의미를 부여하신 이 가시적(可視的)인 성례를 행하는 것인데, 이는 은사요 눈에 보이는 은혜로써, 세례를 통하여 죄를 씻고 깨끗케 함으로 우리 영혼의 추하고 불의한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모든 위로로 우리 마음을 채우며,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며, 새 사람으로 옷입어 과거의 모든 행위와 더불어 옛 사람을 벗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일단 세례를 받은 사람은 또 받을 필요가 없는데, 이는 우리가 두 번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세례는 물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우리가 이를 받는 순간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를 통하여 효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세례파의 잘못을 배격한다. 그들은 한 번 받은 세례에 만족하지 않고 더구나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내려진 동일한 약속에 근거하여 할례를 받았듯이 계약의 징표로서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죄씻음을 위해서도 그의 보혈을 흘려주셨던 것이다.
그런 고로 어린아이들도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주께서 명하신 대로, 마치 희생 제물이 되는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표적과 성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행해졌듯이 세례는 우리 자손들에게 행해져야 마땅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던 것이다.
35장. 성만찬
우리는 이미 중생함을 얻고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을 기르치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해 주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다음의 두 가지의 생활면을 갖게 되는데, 첫째는 육신적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갖는 것이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둘째로는 영적이며 영원한 것인데 이는 중생할 때 갖게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복음의 말씀에 의하여 효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에게만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와 이 세상의 삶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데 이것은 생활 그 자체로서 누구에게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지녀야 되는 영적이며 영원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를 취할 때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고 힘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영접할 때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영적이며 신령한 양식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가시적인 제도를 세우셨는데, 그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그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 예식을 잘 행하되 육신의 손과 입을 통하여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공급을 받듯이,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를 취함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성령의 역사가 인간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서 깨닫기 어렵듯이, 이 성례의 참 의미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깨닫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례를 헛되이 행치 않도록 명령하셨다. 그는 우리 속에서 이 거룩한 징표들을 통하여 그의 사역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몸과 피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가 취하는 수단은 육신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영에 의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기는 하지만, 그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 예식은 영적인 식탁에서 이뤄지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은혜로써 우리와 교통하시며 그를 즐거워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또한 기꺼이 얻도록 하신다. 이것은 그의 살을 취함으로써 영양을 공급받고 든든해져서 우리의 가련하고 쓸쓸한 영혼이 위로를 받도록 함이요,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고 새롭게 함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성례식이 비록 의미 심장한 일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예식을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는 없다. 진실로 경건치 않은 이들은 이 예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 성례식의 참 진리를 받을 수 없는데, 이는 마치 유다와 마술사 시몬이 이 예식을 좇아 행하기는 했으나 이 예식의 참 의미가 되시며 모든 믿는 자와 하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것과 같다.
끝으로 우리가 성례식을 성도가 모인 곳에서 행하되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우리 구세주인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엄숙히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자기를 잘 살피지 않고 이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 떡과 잔을 마심으로 스스로 심판에 이르게 될 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 거룩한 예식을 행할 때는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례식에 있어 인간이 조작하여 덧붙인 모든 조잡하고 그릇된 생각들을 불경건한 것으로 배격하는 바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 예식의 규정에 만족하며, 그들이 말한 바로 즉 그 방식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바이다.
36장. 정부에 대해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왕과 군주와 행정 장관을 세우셨음을 믿는데, 이는 세상이 특정한 법과 정책에 의해 다스려짐으로 인간의 방종이 제어되고 만사가 선한 질서와 순서에 따라 움직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직무는 국가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뤄나가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 신성한 직무를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디서나 복음서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옹호해야 하는데, 이럼으로써 주께서 말씀 가운데에 명하신 대로 누구나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형편과 자격 또는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어진 의무이다. 세금을 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지 않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을 높이고 존경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그 모든 길에 있어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이러므로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권세자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공의를 무시하며 재산의 공유를 내세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 선한 질서와 순서를 깨뜨리는 재세례파와 그 외의 거짓을 선동하는 자들을 철저히 배격하는 바이다.
37장. 최후심판에 대해서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약속하신 때가 이르고 구원받은 수가 차게 되면,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하늘로 승천하셨듯이, 놀라운 영광과 위엄으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강림하시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또한 옛 세상을 불과 화염으로 사르셔서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오실 것을 믿는다.
그 때에는 모든 개개인, 즉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의해 놀라운 심판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일으킴을 받아 그 영혼과 몸이 연합되어 예전에 살던 모습으로 되어질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에 관해 볼 때, 그들은 죽은 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썩이질 모습에서 썩지 않을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 때에 죽은 자들이 이 땅위에서 선악간에 행한 그들의 행위를 따라 책들이 펴지고 책들이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진실로 모든 이들은 그들이 말한 무익한 말들, 즉 오락의 말이나 농담조차 판단을 받게 될 것이며, 인간의 말한 것이나 위선조차 밝히 드러내어 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심판은 악하고 불경건한 이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것이며 택함받은 의인들에게는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때에야 의로운 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이 이뤄지며 그들이 수고한 모든 노력과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무죄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질 것이요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게 될 것인데, 이 사악한 자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서 무죄한 자들을 박해하고 억누르고 괴롭힌 사람들로서, 그들의 양심의 증거를 따라 심판을 받고 죽지는 아니하되 악한 자들과 악한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선택된 신실한 성도들은 영광과 존귀로 관쓰임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그 택함받은 천사들 앞에서 성도들의 이름을 밝히게 되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씻기움을 받고, 이 세상에서 있을 때 많은 재판관과 통치자들에 의해 이단이요 불경스럽다고 정죄받은 성도들의 주장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주장으로 되어질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은혜의 선물로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볼 수 없는 놀라운 영광을 성도들에게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위하여 이 놀라운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하는 바이다. 아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출처] 벨직신앙고백서(1561)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