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언제나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발 밑에서 아스팔트가 가쁘게 숨 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거리의 창 틈으로 먼지가 도주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는 퇴적된 흙알맹이의 분열하여 흩어지는 아픈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아침과 저녁의 시간적인 차이는 쿵쿵 울리는 소음의 진주곡이 구별하고 있었다. 밤의 시야에 깔리는 거리는 웃다가 백치가 되는 것을 어느 골목에서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차라리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 계절은 피부에서부터 옷으로 기어가는 게 아니라 언제나 옷에서부터 피부로 기어왔고, 시간은 수도꼭지의 신선한 물소리처럼 통쾌한 것은 못되었다.
어디선가 많은 사람의 눈은 불타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부터 한 사람의 눈은 흐려지고 있다. 바람의 탓이었다. 모진 바람이 황토색 티끌을 몰아왔기 때문이었다.
피부가 움직이고 있다. 피부가 맞대어 비창의 숨결은 거리로 흘러번지고 있다. 누군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를 도청하려고 애쓴다. 부질없는 일은 아니었다. 사건은 아침 이슬처럼 어느 골목에 맺혀 사라지고 있다.
그는 걷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침바르며 오렌지색 꿈을 가난하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동요하는 회오리바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이 열려있는 한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기온은 항시 집중을 풀어헤친다. 물결은 바람을 잘 타지만 무력한 혼돈이었다. 왁자하게 생겨나는 새로운 소음은 제각기 생명력을 가지려고 애쓴다. 그것은 아기가 요람에서 흔들릴 때의 부드러운 욕망 같은 것이었다.
창문은 개방된 하나의 밀폐였다. 먼지는 개방의 속셈을 용케 파고든다. 그 속으로 벽은 위험한 도구였다. 일용품이 아쉬울 때, 벽은 더욱더 거만을 부린다. 그러나 겁나는 것은 벽이 아니라 빈 공지였다. 공지에서 좌판은 성행하고 있다. 소리는 거기에서 높이 하늘로 퍼진다. 구원자의 욕심은 그런곳으로 손이 뻗친다. 빈 그릇을 파리가 핥는 것처럼.
그는 걷고 있었다. 거리는 조금씩 달라지면서 소리는 동일한 것이었다. 달라진 의미는 기계의 허덕이는 신음소리였다. 무릎을 꿇고 싶었을 때, 그를 받쳐주는 무서운 얼굴이 가로막았다. 그 얼굴이 어떠한 인상이었는지 그는 기억할 수가 없다.
그는 완전한 무기가 있었다. 종점이 가까왔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가 자기 자신의 일정에 중간발표나 할 시기다. 알코홀은 아직은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였고, 니코틴은 생각하고 싶은 그의 사고방식이있다.
그는 무기가 있었다. 아직은 중간발표나 할 시기다. 그의 거리는 공지(空地)가 많다. 어디까지 왔을까, 그는 종점의 의미를 잘 안다. 죽음이란 그의 생식능력을 돋우어주는 마력이었다. 종점은 그런 의미였고, 역시 출발이었다. 그는 무기가 확실히 강한 사내였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
생활이 식탁 위에서 졸음에 겨워 자주 눈이 감겨있을 때, 그는 태연할 수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비명해가는 사람의 얼굴은 자랑스러운 귀화(歸化)라고 느꼈다. 어서 일세기쯤 빨라버렸으면, 그는 이러한 웃음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걷고 있었다. 걸어가야 한다. 거리의 창문은 닫혀 있다. 새 골목은 자꾸 생겨나며 개방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전부 봐야했다. 눈이 피로할 때까지―.
어둠이 거리에 밀려왔다. 어둠은 가난하게 보이는 마분지 같이 거리에 깔렸다. 골목은 움직이고 있다. 마분지에 타액(唾液)같은 대화가 넘치기 시작하면, 그는 거기에서 군중 속의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그는 걷고 있었다. 무엇인가 발견하고 싶어졌다. 가슴이 간지러웠고 발길이 너무나 가벼워 억제할 수 없는 피의 율동을 정체시킬 수는 없었다.
낙엽이 그의 발밑에 패자의 훈장처럼 짓밟혀졌다. 어디 쯤에선가 여름은 퍽 무성했었나보다. 그는 갑자기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단 삼초쯤이지만.
그는 배설이 한가해진 수의 공중변소(公衆便所)의 사면벽의 잡다하게 그려진 추상화와 서투른 웅변 문귀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지금도 그 사면벽 한 귀퉁이에 서푼짜리 인생론을 펼치고 있으리라. 거기에는 이방인들의 절규가 있었다.
소음방지구역(騷音防止區域). 이 도시에 이러한 구역이 있다는 건 사치스러운 치장술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차도를 울리고 있는 음향효과는 어떻게 하려고. 누가 방귀께나 마렵던 모양이다. 체면상 소리나게 배설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는 지금, 이 소음방지구역을 걷고 있다. 밤이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거리를…….
그는 어둠 속에서 사람의 주위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가로수는 높은 건물의 수위처럼 조용히 어둠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여자는 그 가로수에 등을 기댄 채 남자의 눈을 찾았다. 남자는 여자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기가 막힌 액션을 해치울 생각으로 신경을 온통 집중시키고 있었다.
한 쌍의 연인, 가난한 한 쌍의 연인은 그 가로수 밑에 서서 찬란한 대도회의 역사를 장식하려 한다. 아직 카메라 맨은 오지 않았다. 좀 싱거운 장난이 될지 모르지만 그는 걸음을 약간 늦추고 연인들의 고요한 눈빛이 극광(極光)처럼 반짝이기를 은근히 바랐다. 이렇게 하여 거리는 결코 쓸쓸하지 않은 것이었다. 카메라 맨이 온다는 것은 짧은 시간에 그가 착상해 낸 예술 작품의 일련이었다.
여자는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남자가 주춤하는 듯 싶었으나 용감해질 수 있었다. 그가 거길 지나서 서너 발자국 옮겨놓자 야릇하고 통절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기다리겠어요.」 그 다음은 무어라고 속삭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귀에 이 말은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위는 다시 잠잠해졌다. 「기다리겠어요.」 그는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서랍 속의 낡은 봉투를 꺼내어 그 내용을 다시 읽는 듯한 쾌감이 몸에 짜르르 흘렀다. 기쁜 사연이었거나 슬픈 사연이었거나 낡은 봉투의 내용을 생각한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울음 섞인 음성에서 전쟁을 느끼고 있었다. 밤은 푸른 제복, 푸른 제복으로 넘치는 거리의 한 모퉁이, 슬픈 언어는 얼마나 많이 구사되고 있을까. 어디선가 그의 여자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그가 현실을 하루쯤 빨리 생각하고 있다거나 하루쯤 늦게 생각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어차피 기다림으로 묶어진 시간. 아내는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화장술을 익혀야 하였다. 남편은 아내가 베풀어주는 화장술을 기다리면서 또 다른 일을 기다린다. 욕구불만이 아니라 기다림이 없으면 시간은 차압 당해 있는 거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농부는 벼 이삭을 기다리고 어부는 묵사리를 기다리고, 장사치는 손님을 기다리고, 선생은 많은 학생을 기다리며 교문을 활짝 열어놓고, 정치인은 시운을 기다리고, 외아들을 가진 시어머니는 며누리의 해산을 기다리고, 통학생은 차를 기다리며 거미는 저녁을 기다린다. 그러나 세계의 재벌(財閥)들은 우주가 정복되기를 기다리며 과학자를 역시 기다린다. 기다림은 세기의 찬란한 치장을 위하여 어느 골목에나 도사리고 있다.
그는 걷고 있었다. 통금시간(通行禁止時間)만은 기다리지 않으면서 줄곧 걷고 있다. 통금시간은 생활의 발치에 머물러 억세게 위협을 하는 생리의 비폭력적인 고문이었다.
소음방지구역을 떠났다. 연인들은 이제 팔장을 끼고 포도를 누비고 있다. 그들의 발자국이 여러번의 키스소리를 내며 그의 주위를 거쳐갔다. 그의 주위는 활발해졌고 약간씩 달라갔다. 연인들은 쓸쓸하게 서있는 가로수를 무시하고 밝은 곳으로 밀려나갔다. 밤의 시간이 활용되는 한 얼굴은 낮 같이 밝아야 하고 그늘이 싫어서였다.
그는 걷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가슴속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회는 있을 것이라는, 그를 기다리고 있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네온 불빛보다는 신선한 과일이 내뱉는 색채가 좋았다. 거리의 창문마다 열려진 채로 계절의 열매를 눈부시게 진열해 놓았다. 감빛, 사과빛, 계절의 결실은 온통 빨간 열정의 온상이었다. 역시 기름진 골목의 군침이 도는 빨간 커어튼 사이의 기온만큼이나 열이 올랐다.
그는 걷고 있었다. 눈부시게 유혹하던 과일빛은 어둠 밖으로 밀려나고 소음방지구역 같은 그늘이 내리는 어느 골목이었다. 「기다렸어요.」 여자가 다가오며 히죽이 웃고 있다. 그를 기다렸는지 다른 사람을 기다렸는지 기다리고 있었단다. 밤은 어느 골목에서나 기다림의 그물을 치고 있었나보다. 여기는 소음방지구역도 아닌데, 그는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곧 통금시간이 될꺼에요.」 여자가 시간을 이용하자는 배포였다.
그는 걷고 있었다. 오늘은 이 골목에서 되돌아가야한다는 느낌이 들자, 마음이 바빠졌다. 「기다렸어요.」 다른 여자가 다가왔다. 통금시간은 아직 멀었다고 부정을 해본다. 「기다렸어요.」 이럴 때, 통금시간은 퍽으나 효율적인 비즈니스가 아닐까. 소음방지구역은 훨씬 벗어나 있었는데―.
오전, P공원의 벤취였다. 이런 곳에서 그가 그를 만난다는 건 명예스러운 일이 못된다. 여기는 불건전한 소피스트들의 언어도박장이니까. 그가 인정하기에는 그도 그런 무리라고 얼른 봐버리기 쉬었었다. 다행히도 빈 벤취에 그 혼자 있었다는 게 변명을 반복할 자신이 생기기는 하였지만.
P공원에는 이십일세기로 달리는 기사(騎士)들이 많다. 비록 기사복은 디자인이 달라졌지만 정신은 기사도에서 떠나서는 못산다. 그 기사도란 옆눈치기 기사도다. 그런가하면 군웅이 할거하여 무혈의 전투를 벌이는 곳이다. 입씨름이 한참 심할 때는 의사당도 무색할 정도다. 여기서 비릿한 사람 냄새를 실감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거리에서 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서 친구나 선배나 스승이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복잡한 시선이 교차되면서 비실비실해진다. 어려운 일이다.
그가 조팔기(趙八基)를 여기에서 만났다는 건 서로가 깊은 의미가 있으면서 기실 통쾌한 일은 못되었다.
「아침부턴가?」
조팔기는 그를 보자, 아침부터 이런 곳에 앉아있는 이유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는 그럼 저녁부터 와있다는 소린가. 그는 그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다툴 일은 못되었다.
「하기야 자넨 철학도(哲學徒)였으니까.」
조팔기의 긍정적인 말투다. 철학도는 아침부터 와있을 법한 곳이라는 투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역사의 물결이었다. 동상(銅像)의 의미와 고색(古色)도 현대적인 감각도 느낄 수 없는 건물, 이 자리가 다만 역사의 비정이 아무렇게나 청색 베폭에 수 놓아진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많은 사람. 기사의 전통도 아닌, 제멋대로 피부에 칠한 벽종이의 무늬, 그런 것과 같은 전시장이 시들은 꽃잎처럼 간신히 메마른 가지에 매달려 있다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움직이는 무리를 이러한 감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자개미가 간지러워 못견딜 가려움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가 한무리의 새에 끼었을 때 여기저기에서 바람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갈망한다거나 외치는 법이 없이 바람들은 무우에 공이가 박힌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럴법한 얘기야.」 그럴법한 얘기. 연사는 열이 올라 주먹을 내두른다. 열변을 들으려면 탁상이나 하나쯤 가져다 놓을 일이지, 청중도 연사도 그런대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가끔 그럴법한 얘기야, 하고 청중은 긍정적인 해석을 자기들대로 굳히는지 아니면 연사의 사기 문제에 해당되는 단순한 격려인지, 하여튼 그 소리는 가끔 크게 들렸다. 뭐가 그렇게 그럴법한 얘기인지는 누구를 지적하더라도 꼭 이런 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연사의 시사성이 중요한 것인지, 신랄한 비관이 통쾌한 것인지, 사람들은 그저 그런 자세로 열중해 있었다. 그럴법한 얘기는 언제나 현실과는 어긋난 것이니까.
가깝게 바라보이는 동상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삼십삼 인들의 거사(擧事)는 결코 그럴법한 얘기 가지고는 어림없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그럴법한 얘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삼십삼 인이 훨씬 넘었고 그 그럴법한 얘기가 그럴법하게 끝나면 그만인 것이다. 좌우간 귓속이 간지럽고 뱃속의 느른한 내장이 재료가 없어서 운동을 할 기력이 없을 때, 그럴 법한 얘기는 무상으로 잘 팔리는 것 같았다.
그는 거기 서있었다. 조팔기의 손이 자꾸 그를 나꿔챘다. 그는 조팔기도 그럴법한 얘기를 들려주려나 싶어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벤치. 그는 추상화의 한 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법한 얘기와 그럴듯한 연사와 그럴듯한 사람들을 캔버스에 옮기면, 지금 그가 앉아 있는 벤치와 그의 표정과 조팔기의 서있는 모습으로써 안배(按配)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추상화는 확실히 설명을 불허한다. 그럴법한 얘기처럼. 또한 여기엔 추상화와 같은 추상적인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린다. 추상어가 있는 한 추상적인 인간은 필요할 것일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그의 얼굴은 또한 추상화처럼 설명을 불허하는 표정으로 어떻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추상적인 인간. 철학은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이다. 추상적인 언어는 추상적인 인간을 만들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이렇게 달라지면서 역시 추상적인 웃음이 쏟아져나왔다. 조팔기가 갑자기 왜 웃느냐고 항의해왔다. 그는 또 그렇게 웃고 있었다.
「뭐 기묘한 발견이라도 했나?」
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역시 너다운 짓이라고 했다.
「자넨 엉뚱한 얘기를 곧잘 했으니까. 자네의 철학도적인 매력이랄까, 하여튼 엉뚱한 얘기는 그런대로 무엇을 느끼게 했지. 자네가 언제 철학을 체계에 의해서 설명한 적이 있나? 아무것도 아닌 얘기를 엉뚱하게 구상하거든. 내가 자네에게 <데카르트>네, <칸트>네, <헤에겔>이네, <쇼펜하우엘>이네, <싸르트르>네, 나열해 놓고 그 중 한 사람의 철학적 사상을 얘기해보라면 자넨 그 중 누구의 것도 아닌, 누구의 주장도 아닌 얘기를 늘어놓을 거야. 자넨 원래가 체계라는 것을 무시하니까 말야.」
조팔기는 그에게 자못 힐란하는 듯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조팔기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넨 지금도 철학을 하고 있나?」
그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으며 대꾸가 없다.
「철학은 자네 호주머니에 있을 걸세.」
조팔기는 새로운 발견이나 한 듯 빠르게 지껄였다.
「철학은 자네 호주머니에 있다니까.」
그가 대꾸를 안하자, 조팔기는 다구쳐 말을 뱉았다.
그는 그의 말도 그럴법한 얘기라고 간주하는 것이었다. 조팔기가 이렇게 말하고 자기는 장사차 이 곳에 누구를 만나려고 잠깐 들렸으니 가봐야 한다면서 휭 가버렸다.
그는 조팔기가 사라지자 추상화를 감상하다가 그만 두어버린 듯한 어려운 해석이 끝내 풀어지질 않았다.
철학을 같이 공부한 친구가 장사를 하기 위해서 누구를 만나려고 여길 왔다니, 철학은 호주머니에 있다고 자꾸 지껄인 조팔기의 말이 또한 그럴법한 얘기가 아닌가. 또한 장사 얘기로 여길 왔다는 것도 그럴법한 일이고.
어디에고 그럴법한 얘기는 많다. 재판장에게는 그럴법한 얘기가 더 많다. 죄인은 자기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되도록이면 법에서 멀어지려고 그럴법한 얘기를 해야한다. 그뿐아니라, 시장에서는 물건을 팔기 위하여 장사들의 그럴법한 선전이 날개를 치고, 라디오의 보륨을 높이면 높일수록, 약선전이 그럴법하게 울려나오고, 꼬마는 그럴법하게 얘기하는 부모들의 말에 죽자살자 시험공부를 하고, 사장의 그럴법한 얘기에 여비서는 넘어가고, 사기꾼의 그럴법한 얘기에 뻔질한 대학생이 턱 걸려들고 어디에고 그럴법한 얘기로 걸려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그는 P공원의 그럴법한 얘기는 악의가 없어 소화불량이 될 염려는 없다고 안심이 되었다.
그럴법한 얘기는 철학에도 많다. 참말 그럴법한 얘기에 그가 질려버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는다고 조팔기한테 조롱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는 이곳의 그럴법한 얘기가 부담이 없어 좋았다. 추상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이곳의 추상적인 얘기와 추상적인 인간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느끼고 있었다. 추상적인 것은 끝내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곳 외의 그럴법한 얘기가 많은 곳엔 더욱더 어려운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놀라게 했다.
그만그만한 사람들은 그만그만하게 모여 그럴법한 얘기에 귀를 모우고 자꾸 그렇다는 긍정의 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발한발 그 많은 사람들을 등지고 문을 향하여 걸어나갔다.
문 저쪽이나 이쪽, 어디에서나 그럴법한 얘기가 쏟아져나오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에게 미치자 포도의 더 많은 사람들이 역시 그럴법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추상화의 갖가지 의미가 내리그은 선 하나로 달라지듯이 이 모두가 추상적인 인간이라는 관념이 그의 머릿속을 꽉 메웠다. 추상적인 인간―.
더 많은 군중 속의 오후. ××회관 안이었다. ○○○씨 특별 시국강연회. 연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관계가 깊은 사람들은 물론,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 연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많은 사람들의 새에 끼어 있었다. 박수갈채가 폭풍우처럼 한바탕 장내를 뒤흔들고 난 뒤 주위는 을씨년스럽게 조용했다. 연단에서 ○○○씨의 거의 기계적이고 틀에 잡힌 목소리가 잔잔한 물결이 일듯 장내에 퍼졌다.
그는 그 연사의 표정을 건성으로 살피면서 누구를 찾기나 하는 듯 장내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굳은 얼굴은 마치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릴 것 같이 칩칩하고 역겨워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그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연사의 달라지는 말을 따라 청중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그는 그게 퍽 재미있는 문제였다. 잔잔하게 울리던 연사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맨 뒷자리에서 박수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미끼에 취하여 모여든 고기떼들의 아가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 없는 거품을 튕기며 미끼를 삼키는 고기떼들의 집중. 그 거품이 박수소리와 같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연사의 목소리는 잔잔히 퍼지다가 또 급상승할 기세였다. 어느 좌석에서인가 흥, 하고 콧방귀를 튕기는 소리가 마치 어긋난 차바퀴가 맞닫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분명, 조소도 멸시도 아닌 자기 자신의 내부의 통렬한 배설에 불과했다. 어디선가 궤도는 어긋나고 있었다. 연사의 목소리는 팽팽한 활줄기처럼 고조되어 곧 하강할 기미가 보일 때, 어디선가 「어렵소.」하는 소리가 콧방귀보다 크게 들려왔다. 그것은 좀더 강렬한 것이었다. 「어렵소.」 놀랬다거나 경이의 표현이 아니라 좀 거북스럽게 말하자면 잘 논다는 의미였다.
그는 부단한 고통의 물결이 어느 구석에 넘쳐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흥, 하고 콧방귀가 튕겨졌다. 그리고 시국강연회는 박수에서 시작되기보다는 콧방귀에서부터 비판해져야 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우기 특별한 경우에서는……. 청중은 이제 잡담으로 의자의 무게를 지키고 있었다. 옆의 사람과 또 그 옆의 사람과 참새처럼 조잘대기 시작했다.
연사는 대부분의 청중을 잃어버리면서 강연은 계속되었다. 잡음은 재빠르게 장내를 뒤덮고 있었다. 시시덕거리는 소리, 야유 섞인 핀잔, 엉너리를 치는 소리, 참새떼처럼 조잘거리는 입모양은 자유의사를 표현하기에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건물에 박은 꺾쇠가 빠져버리자 건물이 힘없이 주저앉는 것 같이 긴장이 풀어진 청중은 제멋대로 모가 난 판자조각으로 변해버린 듯했다.
그는 어설프게 싱거워졌다. 연사는 청중을 필요로 하지 않고 혼자서 취해 있었다. 연사의 고저 진폭이 흐르는 음향은 청중속에서 쓸데없는 잡담으로 엉켜버리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좀더 노골적인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그 소리는 미명에 솟아나는 산줄기처럼 높아가고 있었다. 어느 한구석에서는 아직껏 감탄사가 연달아 쏟아져나오고 박수가 끊일 새 없었으나 청중의 무겁고 튼튼한 호흡의 벽은 허물어져버렸다. 연사가 여러분, 하고 크게 외쳤을 때, 어디선가 까르르 웃었다. 연사가 다시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하고 흥분한 주먹으로 앞의 탁상을 한번 치자, 탁상 위에 올려졌던 물주전자가 한번 껑충 뛰더니 많은 물을 피처럼 콸콸 쏟아놓고 있었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고혈압은 곤란해.」 하는 지껄임이 청중을 웃기고 있었다. 연사가 쓸쓸해 보이는 연단은 귀빈들이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멋적게 벙실벙실 입을 헤벌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그들의 그러한 짓이 무슨 의미인가를 알듯 하였다.
연사가 고개를 나볏히 수그려 인사를 하였을 때 청중은 뜻 모를 박수를 열광적으로 보냈다.
그는 가장행렬의 대렬에 끼어있는 듯한 느낌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출입구로 연기처럼 엉겨 나오는 대중속에서 누가 맥빠진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전류처럼 급속도로 대중속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더럽다.」 누가 더러운지 몰랐다. 「더럽다.」 무엇이 더러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후각으로 느끼는 더러움이 아니라 시각, 청각으로 느끼는 더러움이 어디에고 많이 있었다. 그것보다 더러움을 느끼며 의자를 떠나지 않는 청중의 가슴이 좀 메말라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더럽다.」 쇼걸의 엉덩이가 더럽다고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가. 가수의 멋들어지게 움직이는 입이 더럽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먼지를 날리며 가도를 휩쓸어가는 바람을 사람들은 더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럽다.」 어디선가 그 말은 엄청난 무게로 사람들에게 흡수되어 있다.
어디에나 더러운 것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지적하려 하지 않는다. 더러운 것은 그대로 남아 악취를 풍기고 있지만 냄새가 더러운 것은 피하면 그만이었다. 시각적인 더러움과 청각적인 더러움은 보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럽다.」는 그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본다. 후련하지가 않다. 누가 더러운지를 모른다. 자가 비판의 눈이 트일 때, 더러운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포승처럼 조여오는 것이었다.
대낮에는 더러운 것이 밤보다 많이 보인다. 더럽다는 말은 추상적인 용어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절실하지 않고는 이러한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을 느끼고 마음으로 삭히는 것은 비교적 가벼운 무게지만. 그것이 대중 속에서 메아리쳐올 때 더러운 것은 기름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에게 거창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더러운 땅에 뿌려진 씨앗은 좋은 영양분을 흡수하며 무럭무럭 잘 자란다. 그 씨앗이 베푸는 결실은 아름다운 윤기로 하여 탐스러운 것이다. 꽃이 될 수도 있고 독버섯이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이 선택되었을 때, 해로운 것은 해로운 것끼리 처리되고 이로운 것은 또 그만큼 환영을 받는다. 더러운 땅에 뿌려진 식물은 더럽다는 표현과는 너무나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더럽다는 의미의 광범위한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고 느꼈다.
「더럽다.」 현실적으로 어디선가 그 소리는 지금도 들리고 있다. 골목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교회에서, 그 소리는 청량제처럼 산뜻하게 사람들에게 쾌감을 느끼게 하는 소리였다. 그는 미지근하게 지근거리는 분노를 느끼며 배설물을 토하듯, 「더럽다.」 가만히 외치는 것이었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는 아까부터 뱃속이 불안하였다. 자꾸만 높아가는 언덕을 오만상을 찡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제이 공중변소. 제일 공중변소는 이 막바지의 어느 곳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었다. <깨끗이 사용합시다.> 그는 글자를 눈으로 읽으면서 노크도 없이 대변소의 문을 잡아 당겼다. 유독성을 느끼게 하는 진한 냄새가 정신을 아찔할 정도로 취해 왔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앉아 엉덩이를 조준하였다. 마음속으로 걸리던 미적지근한 배설물이 기분 좋게 쏟아졌다. 시원하였다. 참말, 통쾌한 것이었다. 작업이 순조로와지자 눈 앞의 것이 한가하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하얀 벽이 위대한 사람들의 사인 공세나 받은 듯 온통 새까맣게 종횡무진 특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누군가 몹시 외로왔을 것이다. 누군가 고도로 흥분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미치게 사랑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 음탕한 짓을 자행했을 것이다. 벽은 만난의 목격자인 듯 그걸 증명하였다.
복잡하게 얽힌 낙서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설명을 허락지 않는 초상화였다. 여자의 국부를 사실적으로 그려놓은 것도, 남자의 국부를 상징적으로 그려놓은 것도, 또 다른 것도 추상적인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했다. 주로 미적 감각은 여자의 사타구니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걸 다른 모형으로 표현해 보려는 노력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림에는 설명이 꼭 필요되어 있었다. 관람자를 위한 친절한 설명이 이색적인 전시회이기는 하였지만, 역시 그 설명만은 하지 않았어야 될 것 같았다. 작자의 의도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관람자로 하여금 싱겁게 느껴졌다.
그 많은 추상화가 갖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자가 표현해 보려는 세계관, 인생관이 이 많은 그림속에 전혀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그는 생각지 않았다. 그림과 똑같은 현실적인 여건은 충분한 것이니까. 너무나 작은 캔버스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불만이었을지 모른다. 누가 섹스어피일한 그림을 보고 자위행위를 했으면 그 그림은 그만큼 성공한 셈이고 실감이 나는 것이었을 게 아닌가.
그는 추상화에서 얼굴을 돌려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 갔다. 대개 다 영탄조의 사랑타령이었다. 가끔, 누굴 죽이겠다는 공갈이나 폭언을 휘둘러놓았으나 누군, 누구 때문에 미칠지경이라느니, 누군 밤마다 상사몽에 잠을 잘수 없다느니, 그 많은 사랑의 갈망은 어려운 사건을 느끼게 했다. 불행을 딛고 일어서려는 끈질긴 욕망이 아주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알지못할 그늘이었다. 그 그늘 속에 피를 원하는 아수라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낙서 속에는 애국자가 유별나게 눈에 띄기도 했다. 웅변은 대개 큰 글씨를 여러번 정성들여 맥질을 하다시피된 것이었다. <동포여! 일어섭시다.>이라든지 <아, 때는 왔읍니다.> 등 막연한 갈망이 울음 섞인 음성으로 적혀있는 것이었다.
그는 웅변에서 비명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비명, 웅변에 담겨진 고도로 팽창된 울분의 자맥질이 절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어디에고 그 비명은 가냘프게 떨고 있다.
그는 눈이 피로했다. 새까맣게 분장된 하얀 벽이 어설픈 낙서가 흥미를 더 이상 돋우어 주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렇게나 지껄인 (실은 가장 심각할지도 모를) 웅변의 내용 같은 귀절이 몹시 마음에 뒤틀리는 일이긴 했지만, 그것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가슴의 장인(掌印)으로 남을 것이었다. 한낱 낙서로 뱉어놓은 무질서한 정신적인 산물이라고 그냥 건성으로 봐버리기에는 그 자신 목구멍에 걸리는 구토물 같은 것으로 꺼림직하였다.
아직 미지근한 배설물이 그를 그 자리에 쪼그려앉혀 놓았다. 그는 다시 얼굴을 들어 낙서를 훑어갔다. 거미줄 같이 얽힌 많은 글자와 그림 속에 빨간 크레용으로 새겨진 다음과 같은 지시가 그를 다시 흥분하게 만들었다. <화살표와 함께 뒤를 돌아보시오.> 명령문이 아니라 간절한 호소로 그 글자는 그에게 점철되어 오는 것이었다.
그는 야릇한 흥분과 미지의 기대를 뿌리칠만큼 바쁜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다. 어떤 결과마저 눈에 선한 것이었다. 그는 얼굴을 뒤로 돌려 앞과 똑같은 색깔의 글자를 찾았다. 그러한 형의 글자는 뒷벽 낙서 가운데 점잖게 도사리고 있었다. 뒷벽에도 앞벽과 유사한 조잡성의 난색질이 장황하게 펼쳐져 있었다. 국부를 심장으로 그려낸 추상화, 비통하게 부르짖은 웅변문귀, 누굴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는 절개, 이런 것들로 빈틈이 없이 꽉 메워져 있었다.
그는 그 사이에서 뒷벽의 지시를 또 따라야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화살표를 좌변 벽쪽으로 그려놓고,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시오!>하고 앞의 것보다는 위압을 느끼게 약간 굵직한 글씨가 크레용으로 이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고개를 다시 왼쪽으로 돌렸다. 왼쪽 벽도 앞 뒤와 똑같이 낙서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다른 벽과 좀 특이하다고 느낀 점은 조류(鳥類)가 여러 마리 그려져 있는 사실을 발견한 점이다. 국민학교 아동이 일부러 벽화를 그려놓았으리라는 추측이 그를 씩 웃음을 흘리게 했다. 새의 종류는 분별할 수 없었고 날개를 퍼득이며 새들은 여러 마리가 한데 얼려 날으고 있었다. 그는 새의 날개 밑에서 예의 똑같은 글씨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힘이 빠진 듯한 크레용 빛이 이렇게 원하였다. <미안하지만 우편으로 얼굴을 한번 더 돌려주셔야 하겠읍니다.> 그는 어쩌면 동화와 같은 세계를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미지로 이끌어가는 크레용 글씨의 마력에 그는 빨려들고 있었다. 얼굴을 한번 더 돌리면 무엇이 씌어져 있을까. 더우기 글씨는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보라는 듯, 크레용의 매력적인 글씨는 흡인력(吸引力)이 다분했다. 그는 화살표가 지시하는 데로 얼굴을 우측으로 돌렸다. 어느쪽 벽이고 벽은 검정칠을 바르고 점점 퇴색되어 갔다. 오른쪽 벽은 자못 위험스럽게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동물들을 그대로 구분해 보면 사람의 얼굴, 사자의 머리, 사슴의 뿔, 이런 것들이 한데 얼려 동물전시회를 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역시 웅변과 사랑과 추상화는 어느쪽 벽이나 삽화되어 있었으나 낙서는 각기 한가지씩 특색을 나타내며 벽마다 다른 인상을 느끼게 했다.
그는 사자의 머리 밑에서 크레용 글씨의 내용을 읽었다. 화살표는 위로 치솟은 채,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수고하셨읍니다. 얼른 천장을 바라보십시오.> 실수 없이 침착한 지시로 크레용 글씨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는 몸 전체가 짜릿한 감화를 받은 듯 상기되어 있었고, 이상한 위협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 미지의 천장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베니아판의 천장, 정사각형의 천장 한 중앙에 크레용으로 짓이겨진 그림―.
주먹이었다. 투박하고 억센 주먹이 불끈 쥐어져 있지 않은가. 주먹 옆에는 대서특필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보기는 무얼 보니?> 이렇게, 이렇게……. 거기에는 주석(註釋)까지 달아놓아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것, 이것이 서민의 생활이다. 무명철학자(無名哲學者)―
그는 웃을 수 없었다. 묘한 감정이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뻥 뚫린 변소 밑바닥으로 무거운 얼굴을 떨어뜨렸다.◑
첫댓글 구슬님께서도.... 아웅.. 감동....왕창,,,,,, 정말~~~~ 잘~~~~~~~~~~~~~~~~읽겠습니다... 감사,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