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10월의 어느 날 저녁, 앤은 교과서와 과제물이 널려 있는 탁자 앞에서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앤앞에 놓여 있는 종이에는 수업이나 학교 업무와는 상관없는
내용들이 빽빽이 씌어 있었다.
부엌문에 막 도착해 앤의 한숨 소리를 들은 길버트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앤은 얼굴을 붉히며 아이들이 낸 과제물 밑에 종이를 숨겼다.
"별 일 아니야. 해밀턴 교수님이 권하신 대로 생각을 글로 적어 보려는
중이었어. 하지만 막상 써 놓은 걸 읽어 보니 영 형편없어. 글이 너무 딱딱하고
우스꽝스러워서, 그냥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잉크구나 싶어. 상상은
마치 그림자 같아서 종잡을 수가 없어. 날갯짓하며
걷잡을 수 없이 날아 오르니까. 하지만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상상의 세계를
글로 옮기는 비결을 알게 되겠지.
너도 알다시피 난 여가 시간이 별로 없잖아.
애들이 낸 과제물과 작문 검사를 끝낼 때까지는 내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단 생각도 잘 들지 않아."
길버트가 돌계단에 앉으면서 말했다.
"앤, 넌 학교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어. 아이들 모두 널 좋아하잖아."
"아니, 모두는 아냐. 앤서니 파이는 날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라고 하지도 않아.
게다가 그 앤 날 존경하지도 않아....그래, 존경하지 않아. 그 앤 날 경멸할 뿐이야.
너한테 털어놓자면, 난 그런 생각 때문에 비참해져. 낸서니는 아주 못된 애는 아니야.
장난이 심하긴 하지만, 다른 애들보다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야. 앤서니는 대체로
내 말을 듣는 편이야. 하지만 그 앤 내 말이 대들 가치도 없으니 참아 주겠다는
식이야. 앤서니의 그런 태도가 딴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줘. 그 애를 꺾으려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는데 이제는 아주 꺾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
앤서니가 파이 집안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귀여운 어린애니까 바로잡아
주고 싶어. 앤서니가 내 마음을 받아 주기만 한다면, 난 그 애를 좋아할 수 있어."
"아마 앤서니가 집에서 쓸데없는소리를 들어서 그럴 거야."
"그래서만은 아니야. 앤서니는 독립심이 강한 녀석이라 자기 나름대로
판단의 기준이 있어. 그 앤 전에도 늘 남자 어른들한테 가서 여교사는
별 볼일 없다고 했대. 어쨌든 참고 잘해 주다 보면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난 어려움을 극복하는 걸 좋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재미있어.
다른 아이들이 채워 주지 못하는 부분을 폴어빙이 다 채워 줘. 길버트, 폴은 정말
귀엽고 아주 특별해. 머지 않아 세상에 이름을 날릴 아이란 생각이 절로 들어."
앤이 확신에 차서 말을 마치자 길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르치는 게 좋아. 우선 가르치면서 내가 많이 배우니까. 글쎄,
지난 몇 년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것보다 더 많아.
우리 모두 아주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뉴브리지 사람들이 제인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어. 화이트샌즈 주민들은 이 못난 종을 그럭저럭 봐줄 만한가 봐. 앤드루
스펜서 아저씨만 빼고 말이야. 어젯밤 집에 가는 길에 피터 블루엣 아줌마를
만났는데, 그 분은 스펜서 아저씨가 내 교육 방법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대,"
앤이 자기 경험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너에게 알려 주는 게 자기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땐.
기분 나쁜 말을 들을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왜 사람들은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건 도리로 여기지 않는 걸까?
돈 넬 부인이 어제 또 학교에 와서 하먼 앤드루스 부인이 내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탐탁잖게 여기고 있고, 로저슨 씨는 프릴리의 산수 실력이 빨리 늘지 않는다고
짜증낸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 주는게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하더군,
석판 너머로 남자 애들한테 눈웃음치는 데 들이는 공을 조금만 아껴도 프릴리는 산수 실력이
훨씬나아질 거야.
내가 그 현장을 잡을 수는 없다해도 잭 길리스가 프릴리의 산수 문제를
대신 해 주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돈 넬 부인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아들은 결국 그 고상한 이름을 받아들이게
됐니?"
앤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하지만 정말 힘들었어, 처음엔 세인트 클레어라고 두세번 씩 부를 때까지
이 녀석이 들은 척도 안하는 거야. 다른 아이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 그제야
뿌르퉁한 얼굴로 쳐다보더라구. 자기를존이나 찰리라고 부르기나 한 것처럼 자기를
부르는지 몰랐다는 듯이 말이야.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수업이 끝난 뒤에 세인트클레어를
붙잡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했어. 네 엄마가 널
세인트 클레어라고 부르길 원하시니까 내가 거역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야.
세인트 클레어는 이해를 잘하는 아이라서 내가 설명을 끝낼 쯤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그 앤 내가 세인트 클레어라고 부르는 건 괜찮지만 다른 아이가
그러면 '주둥이를 날려 버리겠다'고 말했어. 물론 나는 그런 상스러운 마을 쓰면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타일러야 했지. 그 후로 난 그 애를 세인트 클레어는 내게
목수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돈 넬 부인은 클레어를 대학 교수로 만들고 말거래."
대학이란 말에 길버트는 곧 딴 생각에 빠져 들었다.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지만,
앤과 길버트는 젊은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부푼 꿈을 안고 진지하게 자신의 계획과
소망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사이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길버트는 열심히 설명했다.
"의사는 정말 멋진 직업이야.사람은 평생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싸워야 해.
전에 누군가가 인간은 투쟁하는 동물이라고 말했지.
난 질병과 고통과 무지와 싸울 거야.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지.
앤, 난 나에게 주어진 숭고한 임무를 완수해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훌륭한 사람들이
쌓아 온 인류의 지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날 위해 많은 것들을 베풀어 줬으니, 나도 후세를
위해 뭔가를 이룩하여 보답하고 싶어.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일이
아주 고귀한 포부라는 건 알지만, 난 사람들에게 그저 지식만을 전해 주고 싶지는 않아.
그보다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더욱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어.
그리고 내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작은 기쁨이나
행복한 생각들을 간직하고 싶어."
길버트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넌 하루하루 그 꿈을 실현시키고 있는 것 같아."
길버트의 말이 옳았다.
앤은 본래 부터 밝은 아이였다.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여린 햇살처럼 흩어져 있는 미소와 말을 잃지
않고 살아 온 덕분에, 그 인생의 주인공인 앤은 적어도 현재의 삶을 희망적이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길버트는 아쉬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난 이만 맥퍼슨네 댁에 가봐야겠어. 어늘 무디 스퍼전이 안식일을
지키려고 퀸스 전문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댔거든. 보이드 교수님이 나에게
빌려 주신 책을 무디가 가져오기로 했어."
"난 집에 가서 다과상을 준비해야 해. 마릴라 아줌마가 오늘 저녁 키스 아줌마를
만나러 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거야."
마릴라가 돌아왔을 때 앤은 상을 차려 놓았다.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내며 활활 타오르고 , 서리를 맞아 하얗게 바랜 고사리와
빨간 단풍잎이 꽂힌 꽃병이 식탁을 빛내고 있고, 맛있는 햄 샌드위치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그러나 마릴라는 깊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앤이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눈이 아프세요? 두통인가요?"
"아니다. 그냥 좀 피곤해...........정말 걱정이구나.
메리와 그 자식들 말이다. 메리는 몸이 아주 안 좋아. 얼마 못 살것 같대나.
그 쌍둥이들은 어찌 될지."
"쌍둥이네 외삼촌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아니, 편지를 받긴 받았대. 그 사람은 벌목장에서 일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쳐박혀'있대나. 어쨌거나 그 사람은 봄이 올때까지
쌍둥이를 데리고 있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는 구나. 봄이 오면 결혼을 하고,
아이들과 살 집을 장만하겠단다. 그러니 이번 겨울엔 아이들을 돌봐 줄 만한
이웃을 찾아보라고 했대. 메리는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구나. 이스트그래프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거든. 그건 사실이야.
앤, 결국 메리는 내가 그 아이들을 돌봐 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그렇게 씌어있더구나."
앤은 흥분해서 두 손을 꼭 잡았다.
"어마나! 마릴라 아줌마, 물론 아이들을 데려 오실거죠. 그렇죠?"
마릴라는 약간 날카롭게 말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난 너처럼 무슨 일에나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 들지 않아.
팔촌은 꽤 먼 친척이야. 여섯 살짜리 아이 두을 데리고 있는 것도
보통일은 아닐 거야.
그것도 쌍둥이를 말이다."
마릴라는 쌍둥이들은 보통 애들 보다 훨씬 버릇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쌍둥이가 얼마나 재밌다구요, 한 쌍일 때에는 말예요. 지겨워지는 건 두 쌍,
세 쌍 있을 때죠. 제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도 누군가가 아줌마께
재롱을 떨어 주면 좋잖아요."
"난 별로 좋을 것 같지 않구나. 오히려 근심만 늘고 귀찮아지겠지. 그 아이들의
나이가 네가 처음 왔을 때 만큼이나 된다면 또 모르겠다.
도라는 착하고 얌전해 보여 별 걱정이 없는데 데이비라는 애는 말썽꾸러기라서."
아이들을 좋아하는앤은 키스 부인의 쌍둥이들이 걱정스러웠다.
앤에게는 어느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앤은 마릴라의 유일한 약점이 자기 일이다.싶으면 무서우리 만치 애착을 갖는
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해 교묘하게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마릴라 아줌마, 데이비가 말썽꾸러기라면 더욱더 교육을 잘 받아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우리가 그 애들을 돌봐 주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맡아서 어떤 환경에서 키울지 누가
알겠어요?
키스 아줌마 옆집에 사는 스프러트네가 그 애들을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린드 아줌마는 헨리 스프러트 씨만큼 교활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그 사람 자식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말라고 하셨어요.
쌍둥이가 그런 걸 배우며 자라야 하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집에 있는 쓸 만한 물건은 몽땅 내다 팔아서 그 집 가족들은 탈지유를먹고 산대요.
아무리 팔촌이라도 친척인데, 그 애들이 굶어 죽는 걸 보고 싶으시진 앉죠?
마릴라 아줌마, 그 애들은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해요."
마릴라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럴 것 같구나. 내일 쯤 메리한테 그 애들을 데려오겠다고 할까 보다. 앤, 그렇게
좋아할 건 없다. 아이들이 오면 넌 일거리만 늘 뿐이니까, 난 눈이 나빠 바느질도
할 수 없어. 그러니 애들 옷을 만들고 고치는 일은 네가 맡아야 할 거야.
넌 바느질하기를 싫어하잖니?"
앤이 조용히 대꾸했다.
"네, 싫어하죠. 하지만 아줌마가 의무감을 가지고 기꺼이 그 아이들을
데려오신다면, 저도 의무감을 가지고 애들 옷을 꿰맬 수 있어요.
때로는 싫어하는 일도 기꺼이 해야만 할때가 있거든요.
어느 정도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