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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완성되는 순간/ 김륭 벽이 쩍쩍 갈라진 임대아파트 아줌마들 모여 인형 눈을 붙인다. 매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 비비며 덩치 큰 곰인형에게 눈을 달아준다.
인형에게 눈 주고 반찬값 몇 푼 챙기는 아줌마들의 수다는 실밥 터진 단춧구멍 같아서 방안 가득 뒹구는 인형들 눈에 오래된 별처럼 붉게 터진다.
눈 동그랗게 어디 한번 살아봐라 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눈물 없이는 살 수 있는 세상인지
막노동 가는 남편 작업복에, 병든 닭마냥 학교 가는 자식들 앞가슴에 단물 빠진 껌처럼 눈물 으깨 붙이던 아줌마들 엉덩이 비집고 칠순 어머니, 눈물을 단추처럼 매달고 사신 당신도 가물가물 인형 눈을 붙인다.
눈이 없으면 눈물도 없겠지만 정말 그렇겠지만 눈물이란 한사코 칠이 벗겨지지 않는 生의 그늘 적셔 반짝, 입 열게 하는 금金단추 같은 것이어서
아예 단춧구멍만한 눈물을 달아준다. 눈물을 단추로 채워준다.
반짝, 인형이 웃는다. 눈물로 웃는다.
푸른 방/김윤이
창문이 덜커덩거리고 사개가 벌어진 틈으로 스며드는 빗방울, 나는 두 귀가 동그래진다 빗방울에 갇힌다 틈을 비집는 것들은 유연하다 윗도리를 걸치고 몸을 옹송그린다 녹물이 흐르는 몸을 빼낸다 오랫동안 참았던 빗물 벽지를 타고 흘러내린다 달력 위의 날짜를 떼어내고 푸른 누드*를 걷어낸다 미리 손 쓸 틈도 없이 가족사진은 뒷면이 축축이 젖어 있다 아버지 머리가 벗겨지고 어머니 웃음은 희미하게 번져 있다 그 많은 형제들은 출가出家했을까 토독, 토독, 누군가 창문을 두드린다 수위가 높아지고 출렁, 비가 그치자 비로소 우기가 시작된다
* 마티스의 '푸른 누드'
포도씨를 뱉으며/김초영
오도독, 엄마는 파마약 냄새를 풍기며 포도씨를 씹고 있다. 엄마의 배는 커다란 우주 같아서 어떤 것이든 저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엄마의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처럼 복잡한 미로가 있는 건 아닐까. 누워 있는 엄마의 배를 툭, 하고 건드리자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두 발을 적신다. 삼켜버린 포도씨는 엄마의 뱃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겠지. 엄마의 몸이 조금씩 거름이 되어 썩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말없이 포도알만한 눈물을 뚝뚝 흘렸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내 접시에 까만 포도씨가 쌓여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포도씨를 먹어야 엄마처럼 포도나무 울창한 커다란 배를 가질 수 있나. 팔월의 폭염 속에서 복수腹水로 가득 찬 엄마의 배는 출렁거리며 잘도 익어가고 있다. 나도 오도독, 하지만 맛없어 뱉어내고 엄마의 뱃속에 코를 묻는다. 출렁이는 은하수 속에서 자궁암 말기의 포도 냄새 올라오고 엄마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하얀 변기 속에 엄마가 쏟아낸 검은 포도밭이 만조처럼 꾸역꾸역 차오르고 있었다.
곡비哭婢*/신미나
오동나무 아래 호리병의 무덤이 있다
네가 묘비명 같은 표정으로 나를 읽고 지나간 후 나는 목이 긴 슬픔 하나 벼려두고 호리병의 입을 벌려 오동나무 아래 묻었다
속이 깊고 입이 좁은 호리병이었다
몇 번인가 소나기 지나고 물약 뜨듯 흙물 머금는 호리병의 귀, 다시 덮어두지 않았으나 귀 속에 물이 차는지 자꾸 바람소리가 들렸다
문 걸어 잠그면 잎 지는 소리 들리고 끝내 너를 허락하여 가지 꺾어 지팡이 짚고 너를 찾아가면 비탈진 너를 찾아가면
너는 이제 이 빠지고 귀가 삭아 내가 거짓으로 흔들려도 화낼 줄 모르고 생生의 방명록을 미리 넘겨 네 이름 위에 빨간 줄을 그은 죄로 다시, 물 위에 쓴 이름을 지워야 한다
* 곡비 - 지난날, 장례 때 행렬의 앞에서 돈을 받고 대신 곡을 하며 가던 여자 종.
우기雨期에는 사람이 없다/이기홍
비가 쏟아지자 자작나무 숲이 젖고 그 우둠지 위 까치집이 젖고 벌거숭이 어린 까치가 젖는다
젖어 실룩거리던 강물도 그예 주체할 수 없이 꿈틀대다 이내 아우성친다
모든 것들 비에 젖어들 때 사람들은 반동적으로 우산을 펼쳐든다 빗방울을 밖으로 퉁겨버리던 우산 우산은 즉각 사람들도 퉁겨버린다 금세 거리는 우산들로 우글거린다 우산이 달리는 택시를 잡기도 하고 벼린 뿔 곧추세운 채 한 우산이 다른 우산을 치받기도 한다
모든 것들 젖는 우기엔 사람이 없다 사람들 있던 자리엔 난폭한 동물만 득실거린다
세탁기/ 이산
아이는 상자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술래가 찾을 수 없게 뚜껑을 닫아 꼭 꼭 주무른 찰흙처럼 작아진다 아이는 무릎을 모으고 숨어 있는 중이다 잠은 아이를 녹여 어두워진다 상자는 다시 열리지 않는다
모두 돌아간 공터 호스 끝으로 더러운 물이 쏟아진다 아이는 술래가 된다
태양을 달리는 자전거/이혜미
저어기, 아버지 오시네 바람 가득 채워 넣은 지구가 쉴새없이 구르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별들은 황급히 제 별자리를 바꾸는데 사수자리와 염소자리 사이로 바퀴 자국을 남기며 아버지가, 저 멀리에선듯 문득 다가오시네
아버지의 팔에 굵은 은하수가 돋았네 어떠냐 아직은 죽지 않았지, 네 남자친구보다 단단할걸 껄껄 웃으며 팽창 중인 오오, 밀키 웨이 아버지가 명왕성의 껍질을 까서 입에 넣으시네 이 행성은 너무 차구나 혀가 굳어버릴 것 같아 뭐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페달을 돌리지 않으면 달의 불이 꺼져 버린다구요 이 아폴로 11호로 땀이라도 좀 닦으세요 얘야 그런 부끄러운 소린 꺼내지도 말아라 관음증 환자마냥 내 몸을 구석구석 훔쳐보는 짓도 이젠 그만두렴 왜 그런 쓰레기들을 자꾸 내 몸 속으로 던지는 거냐 바퀴는 자전하며 궤도를 돌고 태양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중력이 자꾸만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을 새기네 아버니 핸들을 쥔 손에 땀이 고이더니 순식간에 온 우주가 한 방울의 땀방울로 떨어져 내리고 떠돌던 별들 일제히 폭발하여 부서져 내리는데 아아 아버지, 당신의 눈이 온통 백색왜성이네
아버지 저 멀리에서 자전거 타고 오시네 붉은 태양이 유배당했던 땅에서 저렇듯 성큼, 오시네
동백꽃 화인/정재복
선창가 뒷골목의 동백여인숙 비닐 장판에 800C짜리 동백 한 송이 졌던가 보다 보일러의 파이프 자국이 물결치는 노르께한 비닐 바닥에 섬처럼 던져진 까만 점 하나
아까 다방에서 티켓 끊어 차 배달 나가던 핫팬츠의 손목에도 세 개나 찍혀 있던 동백꽃 자국 여인숙의 장판만이 아니라 사람의 살 속으로도 불을 찔러 넣을 수 있다는 증표 불의 도장을 꾹 찔러 넣은 화인火印
불이 심어놓은 뿌리는 깊고 깊다 보온병을 든 손목을 종두자국만하게 파고든 불도 이 막다른 선창까지 뿌리가 한참 깊을 것이다
그 불씨 한 점 가슴에 묻고 이 선창가 후미진 여창에서 너를 생각한다 네 속 깊이 찍혔을 화인을 눈여겨보고 있다 네 몸에 숙명처럼 떠 있을 섬 하나를 이 허름한 여인숙의 비닐장판에서 본다
불 덴 자국을 증거인멸할 수도 없는 너 그 깊은 뿌리를 더듬어 너에게 가리라 |
두시 /이용임
한손을 가슴에 얹고
두시가
다른 한손을 내민다
두시는
가장 더운 시간
가장 어두운 시간
두시와 두시 사이로 재깍거리는 저녁이 지나간다
두시의 양팔이 비스듬한 그늘을 만든다
두시에 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린다
두시의 차가운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친다
두시의 먼지들이 웅성거린다
두시를 바라본다
저 고요히 얹힌 손 아래
두시의 심장은
무슨 색깔일까
두시 아래
자주 쪼그려 앉는다
두시의 하늘과 두시의 돌멩이, 마른 흔적이 없는 두시의 눈물
눈 깜박하는 순간
두시는 사라진다
나는 종종 두시가 궁금하다
* 당선시집을 아직 못사고 이용임 씨가 올린 것 중 옮겼음,
이용임 씨는 자신이 올린 네 편 중에서
'두시'를 골랐음
첫댓글 숙선씨 좋은시들 올려줘서 고마워요 ...건필을 빕니다
감사 감사... 올해 멋진 시로 놀래주세요.
괜한 사람들 놀래서 병원갈까봐 좋은시 좋은시 못쓰겠네요...ㅎㅎㅎ
이론이론...그럼 나줘요. 나는 남 놀래키는 거 잼나는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