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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의 가계도
송익필의 증조모 중금은 천출로써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는 노비인 중금을 천첩으로 삼았는데 이때 중금은 출신을 모르는 다른데서 낳은 감정 이라는 딸을 데리고 있었고, 이 서녀 감정이 송씨와 결혼을 하면서 송익필의 아비 송사련이 태어나게 된다.
결국 안당 집안과 송사련 집안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노비나 다름없는 천출외가 였지만 송사련은 자신을 보살펴준 외숙 안당을 배신하고 음모에 빠뜨려 외가를 멸문케 한다. |
송사련의 간악한 음모에 의해 좌의정 안당을 비롯한 일가들이 모두 처형되고 순흥안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게 된다.
송사련은 그 공로로 천출로 당상관에 오르게 되며, 안씨 집안의 가산 까지 차지하게 되니 억울하게 변을 당한 안씨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복권과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이후 신사년의 무옥(송사련의 무고)는 거짓으로 밝혀지고 먼저 1566년에
안당의 관작이 복작되자 안당의 증손인 안정란은 형수인 윤씨를 통해 장예원에 판결을 구하는 송사를 제기한다
또한 천출인 송씨들이 안씨를 모함하여 벼슬을 하고 그들의 재산을 차지하여 호위호식하는것을 볼수 없어, 본디 송씨
집안은 안씨 집안의 노비였음으로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해 달라는 송사를 제기한다.
이로인해 송익필 형제들과 일가 70명은 하루 아침에 신분이 급락하여 안씨의 개인 노비가 되버리고 안씨집에 끌려가
그들의 피맺힌 복수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도망 노비가 되게 되며, 안씨들은 추노꾼을 풀어 이들을 뒤?게
된다. 하지만 당대의 천재로써 당시 실력자인 이이와 정철의 신임을 얻고 있는 송익필은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
노비생활을 이어가며 애써 부당함을 호소하며 노비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이이와 정철의 반대파인 당시
집권층인 동인의 반대로 인해 그 뜻을 펼수 없게 되자 비로소 복수에 불타 거대한 음모를 꾸미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당대의 천재이자 조선의 제갈공명 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의 지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알수가 있을것
같다. 최근 조선의 숨은왕 이라는 책을 낸 저자는 송익필을 조선 중기 통치원리 대부분을 만들어낸 사상계의 군주로 보고
그를 '조선의 숨은 왕'이라고 할만큼 대단하게 평가하며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말대로 조선의 숨은왕 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노비 신분으로 정철등을 뒤에서 사주하여 조선 최대 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능력은 있지만 출신 때문에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최고의 모사꾼 송익필과, 정권창출에 눈이 멀고 귀가 얇은 아부꾼 정철이 만나서 조선 당쟁의 시작이자
임진왜란을 자초하고,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여립의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를 조작하게 된다.
4봉에 오르며 되돌아본 3봉
장군봉을 제외하고 제일 높다는 4봉
치밀했던 음모
송익필 일가가 노비로 전락하여 도망노비 신세가 되었을때 당시 황해감사 이산보는 송익필이 아끼던 사람 이었는데
송익필의 동생 송한필은 이산보의 배려속에 조생원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훈장노릇을 하며 점괘 뽑아주는 일로 소일
하면서 송익필이 계획한 거대한 음모에 동참을 한다. 송한필은 황해도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왕이 된다는 설을 유포
시키며, 정씨성을 가진 성인이 새나라를 열고 백성을 구제한다고 거짖으로 설포를 하기 시작한다.
이어 다시 정씨성을 가진 성인을 정수찬으로 변경하여 유포하면서, 새로운 인물 길삼봉을 등장시켜 정씨를 돕는 신선과
통하는 사람으로 둔갑을 시킨다. 물론 길삼봉은 (홍길동+삼봉 정도전) 송익필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나리오의 가공인물에
불과 한데, 학자들은 괴수 홍길동과 조선초 역적 정도전을 묶어서 작명한 거대한 음모속의 송익필의 섬세한 부분까지도
놀랍다고 언급을 한바 있다.
송한필은 우매한 민생들을 선동하여 그들의 '조상묘 덕으로 3년내에 장상이 될수있고, 호남에 왕기가 왕성하니 무리를
모아 내가 알려준 사람을 찾아가서 대사를 도모하면 부귀를 누리리라 하며, 정수찬을 추천 한다. (정여립에게 보낸다)
그의 거짖 참언은 포장되고, 가공되면서 세상에 빠르게 유포되고, 송익필의 계략으로 황해도 사람들이 진안 죽도의
정여립에게 몰려드는데, 대부분 세상에 실패한 선비나 떠돌이, 한량들 이었다.
송한필의 거짖 참언에 현혹되어 해서지방에서 내려온 이들은 정씨가 왕이되고, 전주에 왕기가 있다는 거짖 참언을
정여립의 대동계원들에게 퍼뜨리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들중 정여립에게 잘 대접받고 황해로 돌아간 이들은 다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데,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소문의 눈덩어리는 겉잡을수 없이 부풀어지게 되고 확산이 되니
송익필이 구상한 역전의 대하드라마는 이렇게 그 화려한 오프닝을 기다하며 오랜시간 준비를 한다.
왜 하필 정여립 이었나?
사실 송익필과 정여립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 이었다.
하지만 송익필은 자신이 억울하게(?) 당하도록 하고 복권되는것을 방해한 동인들에게 원한을 갚고자 했고,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서원을 열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왜적을 소탕하는등 대책없는 조정과 관군에 비해 크게 인심을 얻어가고
있었는데, 역시 또 다른 당대의 천재인 정여립의 성격이 호방하여 대동사회를 주장하며 군주제를 비방하는등의 위험한
발언을 하는등 역모의 재료로 써먹기 딱 좋은데다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는 동인의 수장 이발과 막역하게 지내고 이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백유양의 아들이 정여립의 조카사위다 보니 동인을 일거에 뒤집어 엎고 서인세상을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에 같은 목적을 가진 정철을 선동하고 사주하여 모든 사건을 총괄 계획하고
시행하기에 이른다.
결국 정철의 수하인 진안현감 민인백으로 하여금 정여립을 암살케 하고 황해감사의 고변에 의해 해서지방에 거짖 참언을
퍼뜨리면서 시작된 장기간 계획되고 조작된 역모의 서막이 오른다. 역모 고변 초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정여립이 출두
하여 진실을 밝히면 아무 문제 없을거라 했는데, 이미 암살당한 정여립이 무슨수로 왕 앞에 나와 진실을 말할수 있겠는가?
정여립의 인맥이 넓은만큼 수천명의 억울한 인재가 몇년간 역모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고, 나라는 도저히 전쟁을 수행
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첩자를 통해 이를 파악한 풍신수길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임진왜란때 그토록 고전을
했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싸울만한 인재들이 임란 직전에 송익필과 정철의 음모로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도 정여립 사건에 휘말려 큰 고초를 당했으며 이순신 장군 또한 정여립과의 교분으로 목숨을 잃을뻔
하였는데 이이와 성이 같다는 이유로 풀려났다고 한다. 하마터면 조선이 왜국의 속국이 되버릴뻔한 아찔한 순간 이기도
했던 것이다.
훗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정여립을 4백 년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성을 지닌 위대한 사상가로
표현하며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며 그로 인해 조선이 국운을 잃어가게 되었다고 언급을 했다.
4봉에 서니 지나온 봉우리들이 시선 아래로 보인다.
4봉에서 바라본 용담호, 지장산, 적상산
4봉에서 바라본 5~8봉과 장군봉
송익필의 말년
정철이 몰락할때 송익필의 죄상도 같이 드러나게 된다.
정철이 송익필을 숨겨주고 온갖 흉악하고 비밀스러운 음모를 함께 계획하였으며, 이미 환천된 신분을 뒤엎으려고
기축년 겨울에 송사를 맡은 관리를 협박하여 이를 실현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며 언관들이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사노 송부필, 익필, 한필 등은 사대부 집안에 드나들면서, 조정의 시비와 사대부의 인사에 끼어들지 않은것이 없으며,
사악한 말로 선동하여 나라 전체를 어지럽히고, 남에게 상소하도록 사주하여 사림 모함을 평생의 능사로 삼았습니다.
수십년 이래 선비들의 논의가 갈라지고 조정이 시끄러웠던 것은 모두 이자들의 소행 입니다. 그들의 속사정을 살피건데,
주인에게 죄를 지은뒤, 온가족이 도망나와 세력가에 의탁해 소굴로 삼고 기어이 세상을 뒤엎어 옛주인에게 보복을
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지난번 정철이 ?겨난 이후로는 몸을 숨길데가 없어지자 더욱 간악한 독기를 부려 때로는
서울 근교에 숨고, 혹은 지방에 의탁하여 마치 귀신이나 물여우 처럼 기회를 보고 틈을 노려 또 일을 꾸미려고 합니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뒷날의 화가 이루 말할수 없을것 입니다." (선조실록)
이후 송한필과 익필 형제는 잡혔는데, 이들이 동인들에게 맞아죽게 될것을 염려한 선조가 이들을 각각 제주와 남해로
유배를 내렸다가, 머리가 똑똑한 간악한 이 두 천재 형제가 왜적이 자꾸 출몰하는 시기에 왜적에 잡히거나 접촉하여
왜적과 부화한다면 기축옥사를 능가하는 엄청난 국난이 생길것을 우려해서 다시 각각 함경도 이성과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지를 변경 하였다. 하여, 임진년 1월 송익필은 평안도 희천에 도착한다. (천하는 천하다 - 양자허언님)
4봉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장군봉 우측으로 능선 중앙에 뾰족한게 지난번 다녀왔던 운장산 복두봉 이다.
운장산의 이름은 언제부터?
운장산이 송익필의 이름(자)을 따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은 다들 아는 내용이다. 하지만....
진안군지를 보면 ‘운장산의 옛 이름은 구절산인데, 송익필이 운장산의 서봉 아래 오성대에 은거한 뒤로 그의 자를 따서
운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송익필이 세상을 떠난 이후인 18세기의 택리지, 19세기의 대동여지도
등도 모두 주줄산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죽은 송익필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것도 아닐텐데 주줄산이 다시 언제부터
운장산으로 불리우게 되었을까?
4봉을 내려가면서 밧줄을 잡고 몸이 휘청하며 돌아가는 일을 겪으며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내려서고 있다.
4봉을 내려서며...
복두봉(왼쪽)과 명도봉(오른쪽)
어떤 이들은 복두봉의 원래 명칭은 북두봉이 분명한데, 후손들이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현재 복두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송익필이 칠성대와 오성대를 명명하면서 북두봉이라 했을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근거 자료는 없는것 같다.
4봉을 내려서며 바라본 5봉
5봉에 오르며
4봉의 가파른 암벽
5봉에 오르며 쉬어가던 조망터
뒤돌아본 4봉
등로가 매우 가팔라서 겨울에는 위험할것 같다.
5봉
자그마한 6봉과 그 뒤로 7~8봉과 맨 뒤에 우뚝선 장군봉
5봉을 내려서는 길도 가파르다.
6봉에 가며 돌아본 5봉
구봉산 장군봉 능선뒤로... 운장산 복두봉 능선을 따라 명도봉 - 명덕봉 그리고 우측으로 진악산이 멀리 보인다.
6봉에서
6봉에서 바라본 7봉과 8봉
7봉과 8봉은 바로 오르지 못하고 우회를 하도록 되어 있으나 현재 7봉에 바로 오를수 있도록 안전시설 공사를 하기
위한 자재를 날라서 쌓아두고 있는걸 보니 몇달 후에는 7봉에도 올라 볼 수 있을것 같다.
절벽 중간에 7~8봉은 우회를 하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그 앞에 공사를 위한 자재를 쌓아두고 있다.
7~8봉을 우회하는 일행들
어찌 오르면 7봉에 오를수도 있을것 같지만 매우 위험해 보인다.
7~8봉을 우회하는길
가파른 벼랑 중간에 우회할수 있는 루트가 만들어져 있다.
우회하며 바라본 지나온 봉우리들
일행들은 8봉을 지나 너른곳에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달려 8봉에 올라선다.
가파르지만 충분히 오를수 있는데, 아마 다음엔 이곳도 안전시설이 세워질것 같다.
장군봉과 그 아래에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일행들
제9봉 장군봉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야 하니 그 위용이 엄청나 보인다.
장군봉을 요즘엔 천왕봉이라 하는데, 마치 봉우리가 장군같기도, 천왕같기도 해보인다.
8봉과 지나온 봉우리들
8봉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더 진행을 해야 실제 8봉 정상에 갈수 있다.
8봉정상으로 가는길의 통천문 닮은 바위
8봉 정상에서 바라본 1~7봉
8봉 정상에서 바라본 장군봉과 8봉 정상석 (우측아래)
8봉정상에서 바라본 장군봉 방향 파노라마
방금 올라 서서 조망사진을 담았던 8봉의 진짜 정상
식사터에서 바라본 지나온 구봉산 연봉들
산아래 저수지와 양명마을
7봉 안전시설 작업을 하기 위한 시설물들과 7봉 정상석
다음에 구봉산에 오면 7~8봉을 우회하지 않고 바로 올라갈수 있을것 같다.
한숨 자고 돈내미재에서 바로 내려가겠다는 일행들을 장군봉으로 향하는데
가파른 길에 철계단이 만들어져 훨씬 오르기가 수월해 졌다.
석간수가 후두둑 떨어지는 이곳은 겨울이면 엄청난 고드름이 공포스럽게 매달려 있는 곳이다.
긴 철계단을 지나서 만나는 밧줄 구간
지나온 구봉산 연봉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윽고 식사터를 출발한지 약 55분 만에 구봉산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에 올랐다 (15시17분)
장군봉과 천왕봉
무엇이 진실인가?
천황봉은 일제의 잔재인가?
진안군지에 구봉산의 주봉은 장군봉으로 나오는데, 얼마전까지 천황봉이라 새겨진 정상석이 떡하니 놓여있었다.
구봉산에 천황사라는 절도 있고, 천황암 이라는 암자도 있지만, 일제의 잔재가 분명할 이름을 정상석에 떡하니
올려 놓고 있으니 지역 산꾼들이 크게 반발을 하였는지 어느새 천왕봉으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천왕봉 또한
천황봉의 대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 찾아봐도 그 유래를 알수가 없다. 만일 뚜렷한 유래가 없이 천황봉에
대한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만든거라면 원래의 이름인 장군봉으로 돌려놔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게 얼핏 보기에
쉽게 떠오를수 있는 생각이다.
자 문제는 여기서 비로소 출발을 한다.
진안군지는 일제시대 이후의 자료이다. 즉 최근의 자료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일본에 40년동안 침탈을 당하면서
수십만권의 역사책을 그들에 의해 불살리우고 기록된 역사들이 구전으로 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며, 40년 동안,
강산이 네번이나 변하는 동안, 우리의 역사기록이 얼마나 많이 사라지고 망각속으로 흩어져 버렸던가.
그렇게 머나먼 과거속으로 사라진 왜곡된 역사가 입을 통해 전해내려 오면서 진실을 변질시키는 일제시대를 거쳐
만들어진 자료가 진안군지다. 즉, 온전히 신뢰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전 (1872년)에 만들어진 기록인 용담현지에
따르면 구봉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래 지도 참조)
용담현 지도 1872년도
위 지도를 보면 용담현 남쪽으로 현재 운장산인 주줄산이 보이며, 그 바로 밑에 천황산이 보인다.
또한 그 왼쪽으로 구봉산이 따로 보이며 맨 왼쪽으로는 험준한 절벽사이로 난 잔도가 그려져 있는 운일암 반일암이
보인다. 자 그러면 이 지도만 봐도 뭔가 느껴질 것이다.
현재의 구봉산 1~8봉과 장군봉(천왕봉)은 1872년도 조선말에는 별개의 산 이었던 것이다.
현재 1~8봉이 구봉산이고, 작금의 천왕봉은 천황산 이라는 별도의 산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독립된 산 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2봉과 3봉 사이에 명패 없는 봉우리가 하나 더 있더라니, 구봉산은 장군봉을 제외하고 독립적으로 9봉산 이었던
것이다.
또한
천황봉 또한 일제의 잔재가 아닌 우리의 전통이다 !!
여기서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현재 장군봉 즉 천왕봉의 이름이다.
우리는 그동안 친일잔재 청산을 한다는 핑계로 <천황> 이라는 이름에 대해 무척이나 터부시 하고 거부 해왔다.
하지만 이런 <천황> 이라는 명칭을 쓴다고 해서 전부다 일제의 잔재가 아니고, 우리민족도 예전부터 <천황> 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천황>을 모두 일제의 잔재로 몰아붙혀 쌩뚱맞은 천왕으로 일괄 개명을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해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크게 공감을 한다.
우리가 부르던 천황은 <옥황상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먼 조상인 환웅을 이야기 할때도 환웅천황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예로부터 천황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왔는데, 일본이 천황을 자기네 우두머리를 지칭
하는데 사용하는게 알려지면서 부터 우리들 또한 <천황> 이면 무조건 일본의 천황 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일제의
잔재라고만 치부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중의 대표적인 例 중의 하나가 바로 진안의 천황산 이며
현재의 구봉산 장군봉 또는 천왕봉 이라고 부르는 곳 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우리가 지칭하던 천황과 자기네들의 천황을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던 기존의 <천황> 지명에 그들의 천황을 의미하는 てんのう(덴노)를
쓰지않고 외래어표기인 가타카나로 チョンハン또는 チョンフヮン으로 써서 천황에 가까운 음으로 기재했다.
그 대표적인게 바로 월출산 천황봉이며 현재 구봉산의 천왕봉 이라고 불리우는 천황산도 그 한 예라 말할수 있다.
즉 이러한 <천황>은 일제의 잔재가 아닌 전통적인 의미의 <천황>인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천황> 이면 무조건 일제의 잔재인줄 알고 기존의 전통적인 이름을 헐고 엉뚱한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옛 기록에 모두 천황봉, 천황산이 나오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장군봉, 천왕봉의 유래는 또 무엇인가?
일제이후의 진안군지에 장군봉이라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 기록인 용담현지도에 뒤쳐지니 그 유래를 따질것도
없을것 같고, 천황봉이 일제의 잔재라고 지역 산꾼들이 건의를 해서 천왕봉으로 바뀐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현재의 천왕봉이 원래 조선시대에 천황산 이었으니 작금에 와서 천황봉으로 불리워도 그 개연성이
충분할것이고,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최근의 진안군지를 빌어 장군봉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
잔재 청산을 빌미로 엉뚱하게 <천황>을 <천왕> 으로 고친 것은 시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터 구봉산 + 천황산이 현재의 구봉산이 되었을까?
그것은 알수가 없지만, 일제 이후의 일인것 같다.
또한 1872년 용담현 지도에 나오는 천황산에는 崇岩寺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현재의 天皇寺라 볼수가 있으며
현재의 구봉산이 그 의미를 제대로 찾으려면 조선시대 처럼 구봉산과 천황산이 분리가 되거나, 최소한 현재의
천왕봉을 천황봉이라 고치고, 그 유래를 제대로 설명해 놓아야 할것이다.
누가 보든지 현재의 천왕봉과 구봉산은 동떨어진 별개의 산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군봉 정상에서 바라본 구봉산 1~8봉
남쪽으로 마이산과 그 우측으로 부귀산이 보이며, 마이산 왼쪽 뒤로는 덕태산과 선각산 라인이
희미하게 보인다.
쉬어갈 벤치가 있는 구봉산 장군봉 정상
장군봉을 내려가며 바라본 조망
바로앞의 능선이 자루목재에서 휴양림으로 가는 능선이며, 그 너머가 복두봉에서 운장산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갈거계곡이 있는 곳 이다.
천황사 쪽으로 능선을 타고 하산을 하며 바라본 구봉산
가을에 단풍이 지면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나온다.
용담호
조망터에서 바라본 구봉산과 용담호 파노라마 전경
용담호로 인해 운해가 가득하고...
밤낮으로 기온차가 심한 단풍이 예쁜 가을날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구봉산 일출은 황홀하기만 하다.
진안 구봉산 구봉산에 봉우리는 과연 몇개일까?
바랑재 갈림길에서 천황사로 가려던 것을 원점회귀를 위해 바로 주차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바랑재에서 주차장으로 장군봉을 내려가는 하산길은 끝까지 무척 가파르다.
구봉산은 오를때나 내려갈때나 가파르기가 그지 없다.
중간에 하늘이 활짝 열린곳을 찾아 조망을 보러 올라갔더니 기가막힌 자리에 경주김씨 묘가 있다.
다 내려와서 교회 뒤로 보이는 구봉산
주차장으로 가기위해 도로를 따라 양명마을앞을 지나는데 멋진 솟대들이 구봉산을 배경으로 서있다.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는길 (17시2분)
진안 구봉산 등산지도
산행일자 :: 2011년 8월27일 토요일
산행코스 :: 구봉산주차장 - 1봉 ~ 8봉 - 장군봉 - 바랑재 - 주차장 (식사포함 7시간)
최근 안전시설후 구봉산을 다녀온 산행기(2012.10.7)
산행일시 : 2012년 10월 7일
날 씨 : 맑음
산행코스 : 상양면주차장~암부~(1.2.3.4.5.6.7.8.봉)~구봉산 천황봉(1002m)~천황사삼거리~교회임도~주차장
산행거리 및 시간: 주차장~암부0.8km 20분소요. 암부~제2봉20분소요. 제2봉~제3봉20분소요. 제3봉~제4봉5분소요. 제4봉~제5봉15분소요.
제5봉~제6봉5분소요. 제6봉~제7봉15분소요. 제7봉~제8봉20분소요. 제8봉~천황봉1시간35분소요(식사시간포함)
천황봉~천황사삼거리0.6km 25분소요. 삼거리~주차장2.8km 50분소요. 총6.2km 5시간10분 산행.
2012년 10월 7일 전북진안 구봉산을 가는 날이다.
구봉산은 전북 진안군 주천면으로 가는 도중 정천면과 주천면의 경계선 좌측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 구봉산이다. 바로 뒤쪽 서북방에 솟아 있는 1천m 높이의 복두봉과 칼크미재, 그리고 운장산 동봉과 연계된 산줄기로 운장산 동부 능선 7㎞ 지점에 자리 잡은 이 산은 기암괴석의 암봉 으로 뾰족뾰족 솟아있는 특이한 모습이 남쪽 천황사 쪽에서 바라보면 아홉 개의 봉우리가 뚜렷해 구봉산으로 불린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탈출하여 중동 나들목 을 출발한 산악회 전세버스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서 휴게소를 두 곳 경유하여 잠시 졸았나 싶었는데 어느새 대진 고속도로 무주 나들목을 빠져나와 전북진안 방향 13번 지방 국도를 지나고 있다. 차창 가에 펼쳐지는 가을 추수를 목전에 둔 잘 익은 황금들판이 풍요로움을 전해주고 가로수를 대신하여 잘 자란 코스모스가 양 길가로 활짝 피어나 고향에 온 듯 따듯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10시30분에 구봉산 들머리인 전북진안군 주천면 운봉리 상양면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준비체조와 스트레칭을 마치고 구봉산 제1봉을 배경으로 단체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고 10시40분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다.
마을과 들녘으로 연결되는 양명교 농로를 따라 제법 가파르게 올라가는 등산로에 진입한다. 맑고 청명한 파란하늘은 높아만 보이고 따스하게 내려 쫴 이는 가을 낮 햇볕은 오곡백과를 무루 익히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30분쯤 진행하여 안부에서 숨고르기를 한번하고 가파른 암벽을 오르니 어찌된 일인지 제1봉이 아니고 제2봉에 도착한 것이다. 무심코 앞만 보고 진행하는 바람에 좌로 돌아서 능선 진행방향에서 조금 벗어나있는 제1봉으로 오르는 길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제2봉에서 줌으로 1봉을 카메라에 담고 11시25분에 제2봉 인증 샷을 남겼다. 봉우를 넘을 때마다 가파르게 다가서는 오름길을 올라 3~4~5~6~봉을 넘어서 12시 10분에 제7봉 오름길 앞에 도착하였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벗어나있는 제7봉을 경유하려면 거의 직각으로 놓여 있는 철 사다리를 올라야한다. 자칫 뒤로 넘어갈 것 같이 가파른 철 계단을 올라 12시20분에 사방이 탁 트인 7봉정상에 올랐다. 산골짝이로 푸른 물이 고여 작은 섬 모양을 만들어낸 용담 땜을 배경으로 여러 장 인증 샷을 남기고 또다시 8봉을 향한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연결되는 약간 흐릿한 오름길은 처음 구봉산을 오르는 산객이라면 10명에 8~9명은 8봉을 오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고 할 정도로 이정표도 없고 등산로 또한 미끄러운 흙과 자갈로 된 가파른 길이여서 정상적인 등산로로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12시 40분에 제8봉에 올라 정상 석을 카메라에 담고 여기가 8봉이라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모두들 그냥 지나쳐 버린다. 사진 한 장씩 찍어주고 8봉을 내려와서 제9봉을 향하는 능선에서 자리를 펴고 정상 식을 먹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들 각가지 음식을 푸짐하게도 짊어지고 왔다. 진수성찬에 반주까지 한잔 겹들이니 금상첩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느긋한 정상 식을 마치고 제9봉을 향한다. 9봉을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 거쳐 온 봉우리보다 많이 가파르고 거리도 멀다. 약500m 남짓 올라가는 가파른 철 계단 오르막길은 조금 전에 먹은 음식물이 소화도 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되새김질을 반복하게하고 목가지 차오르는 거친 숨소리는 더욱이 갚아지기만 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형형색색이 단풍 옷을 갈아입은 나뭇잎들은 산 꾼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높고 푸른 가을하늘에 넘실되는 뭉게구름이 은빛물결로 수를 놓고 작은 공룡능선을 연상케 하는 뾰족뾰족 솟아오른 지나온 괴암석 바위봉우리가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온몸에 땀이 흠뻑 젖을 무릎 14시10분에 구봉산 주봉인 천황봉에 올랐다. 천황봉 정상은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빼어나고 서쪽으로 북두봉과 운장봉이 함께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덕유산과 백두대간 마루 금이 저 멀리서 가물거린다.
우뚝 솟은 봉우리 두 개가 말귀를 닮아서 마이산으로 불리는 진안에 명산 마이봉이 뚜렷이 시야에 들온다. 14시40분에 천황사 삼거리를 경유하여 좌측 상양면 방향 내리막길로 진행하여 작은 동굴이 있는 곳을 통과하고 약40분쯤 진행하여 밤나무 숲에서 빨갛게 익은 밤 몇 톨을 주웠다. 15시50분에 교회를 짓다 중단한 폐건물을 좌로 하고 세민트길 농로를 따라 5시간 10분만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도로에 도착하였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호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사는 1885년에 입산하여 솔잎 등으로 생식하며 수도한 이갑룡 처사가 30년 동안 쌓아 올린 80여개의 돌탑이 있는 불교 신비의 성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종로 한마음님 구봉산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한 결과입니다.
11월 정기산행 전북 진안 구봉산에 많이 참석하여 주시여
더 늦기전에 인생에 진실한 가치를 산행하면서 서로 나누고 배풀고 가면 어떨지요?
버물리 편집
첫댓글 버물리님 대단 하십니다
한마음 식구들이 많이 보고 미리 숙지하면 안전 산행과 즐거움이 2배가 되겠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울쥔장님 전임 회장님 감사 감사 칭찬에 할말이 넘 과분에 말슴을 최선을 다해 보조로 도움울 드릴께요.
만만치 않는데요 긴장좀 해야겠는데요
명산인데 쬐금 힘이~^^지금안가봄 언제가나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무주쪽이 아니고 진안에 잇는 산이네요~
가파르고 힘든산일거 같아 망설여 지네요~~
구천동님 망설리지 마시고 함께 출발 합시다
주위에 건장한 남성들 있자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