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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편 주해
필자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시편 11편이다. 본 시편의 기자가 서두에서 선언하고 있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이라는 신앙고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도전과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본 시편의 기자가 이에 대해 어떤 반응과 답변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주해 작업을 통해 그가 표현한 용어들의 바른 의미를 찾아보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주해 작업이 설교와 오늘날 청중의 삶에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본문의 역사적 배경
시편 11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인데, 다윗이 직접 쓴 시일 수 있지만 다윗을 기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쓴 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편 11편이 사울 왕이나 아들 압살롬 같은 대적에게 핍박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다윗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역사적 배경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 시편의 표제가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점에서, 그리고 내용 중에 성전, 보좌 등의 개념이 언급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본 시편이 포로기 이전의 제의적인 배경 속에서 노래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게르스텐버거는 이 시편 11편을 “제의적인 배경 속에서의 논쟁시”로 본다.
그러나 이 시편을 논쟁시로만 볼 수 없다. 시작은 논쟁적인 분위기를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권선징악을 말하고 있으며, 의인이 악인으로부터 박해 당하는 상황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다른 탄원시처럼 기도의 형식으로 되어있지 않으며, 결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시편 저자의 신뢰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본 시편은 탄식시 혹은 더 적당하게는 신뢰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본문의 문학적 특징과 구조
본문의 문학적 특징에 있어서 우리는 평행법을 통한 의미의 강조를 살펴볼 수 있다. 2절에서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라는 구절과 4절a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라는 구절은 진술과 보완을 위한 종합적 평행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4절b에서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라는 구절은 유사 평행법이며, 5절에서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라는 구절은 대조 평행법이다.
이상의 평행법 이외에도 이 시편의 저자는 여러 가지 은유를 노련하게 사용하고 있다. 우선 이 시편의 저자는 악인에 의해 공격 대상이 된 의인을 “새”에 비유하고 있고, 악인들의 공격에 대해서는 “활”을 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의인의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터”가 무너진다는 비유를 사용하였고, 악인에 대한 심판은 “그물”을 던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은유의 사용은 독자들에게 이 시편의 내용을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 언어로 제공하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 본 시편은 다음과 같은 교차대구법에 따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여호와께 피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이다(A와 A"). 악인이 의인을 공격하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악인을 공격하신다(B와 B"). 그리고 시편 저자는 터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지만 여호와의 터(보좌)는 하늘에 있다(C와 C"). 이러한 교차대구법은 아래와 같다.
A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1절)
B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2절)
C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절)
C"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4-5절)
B"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6절)
A"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절)
3. 본문 주해
본 시편의 서두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1a절)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선언은 저자가 본 시편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신앙고백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으며, 본 시편 전체의 주제를 결정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독자들에게 주제를 제시한 다음 뒤에 이어지는 나머지 내용들에서 이 주제에 따르는 도전과 갈등과 답변을 열거하고 있다. 제임스 L 메이스는 언급하기를 “이 시편의 나머지는 이 특정한 신앙의 고백을 설명하고 있다.” 고 지적하였다.
위의 교차대구법의 구조에서 살펴보았듯이 여호와께 피하였던 본 시편의 저자는 결국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선언에 대한 도전과 믿음의 갈등을 겪으며,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으로 여호와께 피하였다는 본 시편 저자의 선언은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도전을 물리치고 있다. 여기서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네 산’이다. 일차 독자들이 볼 때 이 ‘산’이 저자가 즐겨 찾았던 산이었다는 것을 가정할 때, 이 ‘산’은 다른 산이 아닌 시온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거짓된 충고는 어디로부터 오는 충고였는가? 본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할 때, 이러한 충고는 다윗의 모사들이 올린 충고일 수 있다. 김성수 교수님 역시 이러한 충고가 본 시편의 저자인 다윗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리는 충고라고 하면서 이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충고가 본 시편 저자의 내면에서 들리는 자기 음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저자는 비록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이라고 담대히 선언하면서도 여전히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갈등은 3절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라는 구절에서 계속되고 있다.
본 시편의 저자가 처한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기에 그로 하여금 처절한 갈등을 겪게 했는가? 이 상황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비유로 대체되고 있다. 악인은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의인은 밝은 곳에 있기에 어두운 곳에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악인을 눈치 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의인이 아무리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선언해도 악인이 볼 때에는 의인을 대적하기에 전혀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악인은 어두운 곳에 있기에 자신의 악행이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겼던 시위를 놓기만 하면 화살은 어김없이 날아가 의인을 적중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저자가 겪는 상황의 내용에 대해서는 은유를 통해 가리고 있지만 저자가 겪는 고난의 비중에 대해서는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본 시편 저자의 이러한 탄식은 인간 그 누구에게 하는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다. 왜냐하면 인간 편에서는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는 입장이기에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저자가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지를 알고 싶어진다. 악인이 자신을 쏘려고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공격이라고 보기에는 시편의 운문이라는 문학적 성격 상 맞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다른 시편들을 살펴볼 때 악인의 특징은 “궤사한 말”, “거짓된 입”, “아첨하는 입술”, “자랑하는 혀” 등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 시편의 ‘활’과 ‘살’이 멸망시키는 비방의 말을 의미한다고 보는 로스, 앨런 P의 입장은 타당해 보인다. 다윗에게 있어서 이러한 공격은 시므이 같은 자들의 비난과 저주일 것이다.
아무튼 대적들의 공격에 대해 저자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라고 탄식하고 있다. 본 시편 저자에 대한 대적들의 공격이 의인이 속해 있는 ‘터’를 뒤흔들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이 ‘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터’(tt;v;)는 구약성경에서 두 차례 등장하는데, 본문 외에 이사야 19:10에서도 언급된다. 문자적으로는 기초, 지지물, 지주를 말하며, 성경의 두 군데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사야 19:10을 유추해볼 때 이 터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질서와 같은 것이다. 본문 3절에서 이 ‘터’가 ‘의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터’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건전한 사회질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로스 앨런 P는 말하기를 이 ‘터’는 “주님의 통치에 근거한 사회의 법률과 질서”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아무튼 악인의 공격으로 인해 의인이 속한 터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지만, 하늘에 있는 여호와의 ‘터’(보좌)는 견고하다. 악인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흔들릴 수 없다. 마치 시편 2편의 언급과도 같다.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며,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입을 열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웃으신다. 이러한 대칭구조 속에서 의인(본 시편의 저자)은 어디에 있는가? 피터 크레이기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언급이 시편 기자가 성전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고 하였는데, 이 입장은 타당해 보인다. 시편 73편의 저자 역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악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시편의 저자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의인에 대해서는 감찰하시고 악인에 대해서는 미워하신다(5절). 앞에서 언급한 교차대구법 구조를 적용하면 의인을 공격하려고 활시위를 당기는 악인을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셔서 그들에게 그물을 던지시며, 하나님께 피하는 의인을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시고 그의 의로운 일을 좋아하셔서 그에게 얼굴을 비취신다.
여호와께서 의인을 ‘감찰’하시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감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행위를 자세히 살펴보시고 검토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때 ‘감찰’한다는 말은 ‘분석’이라는 말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인의 행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 검토하신다는 말인데, 과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수아 사람 빌닷의 궤변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4-6)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인에 대한 ‘감찰’은 악인에 대한 ‘감찰’과 별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감찰’하신다는 것은 금속과 같은 물질을 검사하거나 조사하여 증명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유혹하거나 시험한다는 의미도 가진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 26:2를 보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소서.”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감찰하신다는 것은 금을 정련함 같이 의인에게서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결국에는 그의 정직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한편 악인에게 있어서도 이 ‘감찰’은 똑 같이 적용되는데, 악인은 이 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미달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악인에게 있어서는 이 ‘감찰’은 심판을 위한 것이 되는 셈이다.
물론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는 말씀에서처럼 의인과 악인에게 ‘감찰’하신다는 용어가 똑 같이 적용된 경우도 있지만 이 ‘감찰’은 의인과 악인에게 각기 다르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고통과 수고를 살피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감찰’하시는 반면에 악인에게는 이러한 ‘감찰’이 적용되지 않는다. 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미워하심’은 심판으로 드러난다.
6절에 의하면 이 심판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에 의한 심판이다. ‘불’과 ‘유황’의 심판은 일차적으로 본 시편 저자와 같은 의인을 박해하는 악인들이 경험하게 될 심판의 엄중성에 대한 비유인 한편 궁극적으로는 문자 그대로의 지옥에서의 형벌을 의미한다. ‘태우는 바람’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부는 파괴적인 힘이다. 이 바람은 계절풍으로 팔레스타인에 뜨겁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동쪽과 남쪽 사막에서 뜨겁게 불어온다.” 그러나 이 비유 역시 궁극적으로는 문자 그대로의 지옥에서의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인은 어떠한가? 우선 7절에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게서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는 것은 자신이 의로운 일 하시기를 좋아하신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신다는 의미인가? 이에 대해 김정우는 전자로 보고 있으며, 피터 크레이기는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였다. 전자라고 가정하든지 후자라고 가정하든지 양자는 모두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필자는 후자일 가능성에 더 많은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시기에 그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신다. 이와 관련된 신약의 성구로는 마태복음 5:8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된다는 말인가(하나님은 영이시다)?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이 영광은 어떤 영광인가? 엄현섭은 이 “뵈오리라”는 말씀에 대해 제의적인 용어로 보고 있다. 이 말이 제의적인 용어라면 본 시편의 저자와 같은 의인들이 단순히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분명한 것은 시편이 가진 문학적인 특징을 전제하여 볼 때, “그의 얼굴을 뵈오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문맥을 고려해볼 때, 이 말은 단순히 “시편 기자가 굳게 믿고 있는 보응과 구원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4. 요약 및 결론
의인을 대변하고 있는 본 시편의 저자는 대적자인 악인들에 의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우선 피하고 보자는 거짓된 충고 앞에서 본 시편의 저자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이라는 믿음의 선언을 한다. 본 시편의 저자가 볼 때 하나님께서는 대적들보다 강하시며, 대적들의 손에서 능히 보호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라고 하면서 다시 믿음의 갈등을 겪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교차대구법의 구조 속에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해 보았다. 의인을 대변하고 있는 본 시편의 저자는 여호와께 피하였고 결국 그의 얼굴을 뵙게 된다. 그러나 악인들은 의인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며 궁극적으로 심판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교차대구법의 구조에서 역설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본 시편의 저자는 ‘터’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지만 여호와의 ‘터’는 하늘에 있어 영원히 견고하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들이 의인을 공격하면서 강성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세상의 ‘터’ 가운데서 소외된 적은 의인의 무리를 구원하신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깊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5. 참고문헌
김성수, “시편해설”, 고려신학대학원, 2014.
김성수, “시가서”, 고려신학대학원, 2016.
김정우, 『시편주석 Ⅰ』,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8.
목회와 신학 편집부, 『시편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 서울 : 두란노, 2009.
엄현섭, 『찬양의 책 시편』, 서울 : 컨콜디아사, 2000.
로스, 앨런 P, 『시편』, 서울 : 두란노서원, 1989.
제임스 L 메이스, 『시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피터 크레이기, 손석태 역, 『시편 상 1~50편』, 솔로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