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1회 산행일지 : 일지암과 녹우당 그리고 꼬막정식
(전남 해남군 두륜산)
일시 : 2010년 4월 3(토)
날씨 : 맑음
지난 3월 26일 밤 9시 20분, 백령도 앞바다에서 해군의 1200톤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하고 구조하려던 군인과 민간인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20여일 만에 물위로 건져진 함정에서 38 용사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아직 6인이 실종상태에 있다.
46명의 천안함 승무원, 구조대원 한준위 그리고 금룡호 9인을 앗아간 이번 참사는 국가적 재앙이다.
동아대 의대 교수 김덕규는 ‘772함 수병은 귀한하라’는 시로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날씨도 비와 철 잃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과 몸을 더욱 서늘한 4월로 만들었다.
이들의 장례기간 동안도 날씨는 더욱 추웠고 29일 전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올해는 찬 기운이 오래도록 곁에서 비와 함께 서성이고 있어 기다리던 봄이 많이 늦다.
햇빛을 이리도 아껴두는 것을 보니 아마도 5월에 들자마자 따뜻함을 즐길 틈도 주지 않고 한꺼번에 쏟아내어 여름을 당장에 부를 모양이다.
봄꽃들도 늦어지는 바람에 꽃없는 꽃축제를 열어야 할 지경이고 꽃소식을 예보하는 기상대와 이를 받아 적는 언론들을 거짓말쟁이로 여러 번 만들었다.
100명산 중 깃대봉을 제외하면 남도산행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늘 이쪽은 쉴만한 곳, 볼만한 곳, 먹고 싶은 것들이 꽉 들어차 있는 곳이어서 하루걸음이 아쉬운 곳이다.
그런 탓에 어쩌면 다소 허전하기고 하고 섭섭하기도 한 그런 남도행이다.
해남은 땅끝을 품고 있어 지리적으로는 제일 먼 곳이지만 예로부터 문인과 시인의 고장이거니와 넉넉함과 편안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남도의 에센스가 농축된 곳이어서 항상 설렘이 있다.
내나라 삼천리의 봄이 첫발을 내딛는 첫 땅인 해남은 2003년 4월, 1박 산행으로 땅끝 마을, 월출산, 강진을 다녀온 지 7년만이다.
거리를 감안하여 이른 시간인 7시 30분 화원에서 모였다.
쌀쌀하지만 모처럼 맑은 날씨이다. 남으로 향하는 길의 가득한 햇살도, 봄꽃들도 그리고 물이 오른 들판도 보기에 좋다.
지리산 휴게소는 리모델링을 하는 지 옆에다 임시로 지은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광주, 나주를 지나 월출산을 거쳐 해남 삼산면에 들어서니 고을이 조용하다.
아닌게 아니라 삼산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삼산면민의 날 잔치에 다들 모여 있었다.
이곳이 고향인 혁명의 전사요 민중시인인 김남주, 김남주 보다 세 살 아래이지만 마흔 셋에 지리산에서 실족하여 저세상 나이로는 3년 선배가 된 민족여성시인 고정희도 살아있었다면 이 자리에 왔으려나?
해남은 이들 외에도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로 유명한 김준태 시인과 황지우 시인 등의 고향으로 가히 시인들의 터라고도 해도 과장이 아니다.
암튼 삼산면민의 날을 스치며 본 소회는 운동장에서 끓고 있는 솥에서 방금 떠놓은 고깃국처럼 따뜻하고, 타향에서 지쳐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버선발로 달려 나오시는 어머니처럼 푸근하다.
4시간이 걸려 두륜산 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 40분, 입장료 2,500원씩을 지불하고 국내 최고(最古)의 여관인 유선관 앞을 지나 대흥사 마당에 이른다.
두륜봉을 머리, 가련봉을 가슴이라며 두륜산 능선 전체를 와불(臥佛)이라고 하는 억지스런 간판이 마당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다.
오늘 산행은 대흥사-일지암-만일암터-만일재-가련봉-진불암을 거쳐 하산하는 약 3시간 코스로 정했다.
마당 넓은 대흥사를 우측으로 돌아 초록 들풀 가득한 뒷마당을 담 너머로 보면서 시멘트 길로 산으로 오른다.
마침 누군가가 느티나무에 기대어 둔 막대기가 오늘 산행 동안 내 스틱이 되어 주었다.
약 10여분 남짓을 오르면 우측으로 일지암과 나란히 있는 자우홍련사를 만난다.
우리나라의 차문화의 효시나 다름없는 초의선사가 말년 40년을 다산 혹은 추사 등 조선 후기 최대의 시인 묵객, 석학들과 교우하던 곳이 일지암이고 스님의 살림집이 그 옆 자우홍련사이다.
그러니 이 작은 암자가 정조 이후 조선의 문인화로 이어지는 예술, 학문, 그리고 서양문화의 유입에 따르는 시대 변혁의 시초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정치와 외교의 중심에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 모습은 참으로 경건하리만큼 소탈하다.
물론 최근인 1979년에 복원된 것이지만 1800년대 중반 대가들의 정갈한 삶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한 칸 초가 둘레에는 사방으로 3자 정도 폭의 마루를 깔았고 사립을 경계로 차나무, 그 바깥쪽으로는 동백을 둘렀다.
자우홍련사가 일지암을 마주하는 쪽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얹었다.
또한 연못이 보이는 쪽으로 약간 여유있는 마루를 놓아 대나무 연통을 타고 연못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꽃들과 두륜산을 아래뿐만 아니라 위쪽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마침 다탁과 다기가 놓였기에 靑竹, 每松, 喬梅, 樺山이 함께 올라 매실차를 나누며 여유있는 시간여행을 즐긴다.
서로의 얼굴에 환한 미소와 여유, 편안함이 번진다.
비록 두륜봉은 높이가 낮다할지라도 돌아갈 길이 멀기에 도끼자루가 썩기 전에 정신을 가다듬고 서둘러 200년을 다시 돌아와야 했다.
등산로를 접어들어 조금 오르다가 좌측으로 들었더니 거대한 rock stream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아랫삼거리, 웃삼거리, 천년수 삼거리를 지나 좌측의 만일암터에 이른다.
그리 너른 터는 아니지만 잔디가 잘 자란 절마당 한 가운데 늘씬한 오층석탑이 있고 맑은 물이 가득한, 이끼 낀 둘 우물이 한쪽 구석에 있다.
주위로는 키 낮은 돌담과 가는 대나무들이 마당을 둘렀다.
200미터의 거리에 있는 만일재에 올라서면 앞쪽으로 바다가 열리고 너른 억새밭 좌우로는 가련봉(정상 703m)과 두륜봉(630m)이 지척이다.
경치가 참 좋아서인지 사람도 많고 아이스케키를 외치며 막걸리, 생수를 파는 이도 있다.
10분이면 두륜봉에 이른다. 구름다리는 철제다리를 상상하였으나 자연이 빚은 돌다리다.
논과 바다, 섬들을 보며 사과를 깨물고는 검은 정상석 앞에서 인증샷을 하려는데 창원서 왔다는 아줌마부대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하산은 반대편인 진불암 방향으로 잡았다. 다소 경사가 심하고 너덜지대처럼 돌이 많다.
30분 남짓 하산하여 만난 진불암 샘터 가에는 아주머니들 앞을 지나니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단 대나무가 길게 드리워 있었으나 이를 넘어 조심 들어가니 떨어진 암자에서 스님 한 분이 나서며 ‘길이 잘 없을텐데..’한다.
앞서던 매송은 ‘조심해서 갈게요’, 청죽은 ‘앞사람 따라서‘ 그리고 나는 ’시멘트 길이 싫어서‘ 하며 각자의 핑계를 대고는 지난다.
조릿대가 길을 막지만 소로를 따라 조금 진행하니 일지암이 나타난다. 이제는 곧 대흥사이다.
대흥사 절 안을 통과하여 물이 많은 계곡 위 다리를 건너 대웅보전에 들었다.
절 마당에는 파랑, 초록, 빨강, 분홍, 노랑의 등들이 색깔별로 도열하여 하늘을 메웠고 그림자도 따라 마당에 도열하였다.
초파일이 한 달 보름이나 남았는데 이미 대웅보전 정면 앞쪽의 등들은 주인 이름표를 달았다.
옆에는 소원과 이름을 적은 암기와 수기와들이 성별로 줄지어 섰다.
유선관은 대흥사의 객사로 사용되다가 1914년경 여관 영업을 시작하였으니 국내에서는 숙박업으로 최장 기록을 가진 곳, 2008년 12월 KBS 1박2일이 예약이 밀렸다는 곳이다.
방들과 장독대, 그리고 계곡아래까지 둘러보았다.
하루쯤 조용히 묵을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사적인 공간이 익숙한 현대인에겐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 젊은 남자가 입구에서 호기있게 외치는 ‘주모’소리는 필시 공해다.
주차장을 향하는 길에는 아침에 군밤하나를 맛보기로 준 아주머니가 아직도 좌판에 앉아 있다.
우리가 다가갔더니 알아보기에 착한 모습으로 3,000원 봉지를 샀다.
돌아가는 길은 2번 국도를 따라 순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르기로 하고 길을 나서자 곧 싱싱한 마늘밭 옆의 녹우당 주차장에 도착.
입장료 1,000원씩을 지불하고 새롭게 신축중인 한옥 건물들을 오른쪽에 두고 입구의 굵은 은행나무를 지나 둥글게 한 바퀴 산책하다.
녹우당(綠雨堂)은 해남이 본향인 고산의 고택으로 뒤편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천연기념물 241호, 500년 이상 수령의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비소리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사랑채는 본래의 처마에 잇대어 다시 기둥과 서까래를 내고 기와로 얹어 처마를 길게 연장한 건축이 독특하다.
닳은 마루에 앉아 사랑채 마당에는 작은 연못 주위로 노란 수선화와 붉은 명자꽃이 예쁘고 머리를 둥글게 손질한 참 굵은 회양목 두어 그루가 마당을 지키고 있다.
해남윤씨 유물관에는 고산의 유물들과 고산의 증손이며 茶山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를 비롯 서화들도 상당량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다.
아직도 해가 남았는데 벌교읍에 들어선다.
앞서가던 남자의 걸음걸이를 보라고 했더니 교매는 ‘염상구 같다’고 한다. ‘곧 외서댁도 보겠다’고 하며 ‘원조꼬막식당’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입구간판에는 캐백수(KBS를 일컷는 요즘 젊은이들 용어)에 나왔다는 자랑이 붙었고 안으로 들어서자 허정무 감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대표들의 브로마이드와 사인, 정치인, 연예인들의 사인이 집안을 둘렀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4인요’ 하기에 ‘주문은?’ 하였더니 ‘꼬막정식 한 가지만 한’댄다.
1인당 15,000원 하는 꼬막정식은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상으로 배달되었는데 무침회, 전, 삶은 꼬막 각 한접시와 꼬막된장국 한 뚝배기가 10여 가지 반찬과 함께 나왔다.
맛은 괜찮았으나 쌂은 꼬막을 까먹기가 그리 만만치 않아 종업원에게 물어야 했다.
맞은 편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젓가락으로 톱질을 하더니 그래도 안되는지 꼬막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르면 묻든가...상을 깨끗이 비우고 순천을 지나 광양에서 남해고속도로에 올라 늦은 밤 돌아오다. 몸과 마음, 입까지도 행복한 하루였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