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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재회한 제해용 부부
돌연한 전화를 반기다가 관율에 있다는 말에 더욱 반색인 제해용님.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 죽봉마을 해동농원(배밭) 주인이다.
2004년 9월 21일 오전, 낙남정맥 위에 자리잡은 그의 과수원을 통과
할 때 그들 부부는 추석대목용 배따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억척인가 인력난 때문인가.
남편은 경운기로 천천히 배밭을 누비고 그 위에서 부인은 떡애기를
업은채 배를 따고 있었다.
나와 마주친 부부는 시비는 커녕(비록 정맥이라 해도 엄연한 사유지
인데) 일을 멈추고 목이 타실 것이라며 배를 깎아주었다.
'특수절도죄'라는 공포의 올가미때문에 낙과(落果) 하나라도 함부로
줍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에서 이런 인심도 있다니!
늙은이의 무거운 배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배낭 안에 자꾸 넣어
주지 못해 안달난 부부 같았다.
찍어온 사진을 보내주고 종종 하는 통화로 안부를 나눠왔다.
저번 통화(2009년)에서는 애가 탈 없이 자라 벌써 유치원 다닌다며
흐뭇해 하고 "할아버지 꼭 한 번 오시이소"를 잊지 않은 그들이다.
한데, 아무 사전 연락 없이 불쑥 지호지간 관율이라니 놀랄 수 밖에.
대동지지의 통영별로는 사천~진주가 30리길이다.
15리인 관율역에서 다시 15리 진주에 당도하려면 어차피 사천시와
경계인 정촌면(井村) 소곡리와 화개리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만, 정맥과 달리 생경한 외지인이 도로에서 찾아가기가 용이
하지 않은 위치다.
더구나, 완만한 경사의 낮은 구릉지대가 주를 이루고 있는 정촌면은
배와 단감 등의 과수원이 발달해 지형이 모두 유사하다.
5년만의 재회를 기다리다 지쳤는가.
휴대폰으로 길 안내를 하던 그는 한 참 거리를 내려와 나를 맞았다.
과수원 옆 낙남정맥 산불감시초소(1), 해동농원과 제해용 부부(2.3)
그간, 과수원이 많이 성장한 듯 해서 다행이고 반가웠으나 여기에도
미구에 변화바람이 불 것이란다.
대밭에 봉이 날아왔다 하여 애초의 마을이름 죽방(竹坊)을 죽봉(竹
鳳)으로 바꿨다는 마을이건만.
남해고속국도와 통영대전중부고속국도, 국도3호선이 통과하고 5분
거리의 사천공항 등 교통 요충지라는 이점을 살려 이 일대에 대규모
유통시설과 첨단산업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라니까.
교통 요충이라기 보다 현기증이 나도록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낙남
정맥 종주때도 애먹었던 지역이다.
중부고속도가 한참 공사중이던 정맥 종주 때도 그랬는데 개퉁 후인
지금은 더욱 혼란스럽다.
기발한 지혜
지난 일들을 얘기하는 중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빈 소주병에 대해
서울 山할아버지가 힐책(?)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저 많은 술을 마시다니?
그러나, 비시시 웃기만 하는 그를 대신한 부인의 자초지종 설명에
나는 겸연쩍기 짝이 없게 되고 말았다.
제해용은 과수원 안(멧돼지들의 주통로)에 넓고 깊은 웅덩이를 파고
그 바닥에 막걸리를 채운 큰 통을 묻었다.
먹이찾아 몰려왔다가 웅덩이에 빠진 멧돼지들이 허겁지겁 막걸리를
마시고 모두 대취해 쓰러지면 끌어다가 우리에 넣었다.
소문 들은 술꾼들이 술을 싣고 오면 원하는 대로 잡아주는데 그들이
남기고 간 빈 술병들이며 아직도 20여마리가 우리에 있단다.
멧돼지에 의한 막심한 피해를 막는데 골몰하던 제해용이 멧돼지가
막걸리 애주가라는 사실에 착안해 만든 묘방(妙方)이다.
피해를 막을 뿐 아니라 보상도 받는 일거양득의 기발한 아이디어다.
나는 제해용의 학력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알만 하지 않은가.
지식과 학력은 비례할 수 있겠으나 학력과 전혀 무관한 지혜를.
그들 부부는 정맥때처럼 내 배낭에 뭘 가득 채워주려고 안달이었다.
저온창고에 보관중인 배1박스를 서울집에 보내도록 하고 일어섰다.
(당도가 지금껏 먹어본 배중 최고라는 막내딸의 평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우수한 배와 질좋은 감자 등을 택배로 받아 먹고 있다)
산불감시초소까지 정맥을 잠시 걸어보고 과수원, 밭둑, 논둑을 두루
거쳐 개양역(경전선) 앞으로 진출했다.
진주(晉州)의 관문이라는 가좌동(가좌동)에 들어선 것이다.
한데, 역 주변이 왜 쓸쓸하도록 한가할까.
지근에 있는 경상대학교 통학생들로는 양에 차지 않기 때문일까.
개양오거리까지 나아가 우체국에 들르는 일이 우선이었다.
배낭 무게를 줄이려면 그들 부부가 꾸역꾸역 넣어준 배즙과 먹거리
기타 여러 불요 불급품들을 덜어내야 했으니까.
경도발850리, 관율과 15리인 진주성(본성동, 남성동)에 입성하려면
일단 3번국도 따라 북상해야 한다.
LG그룹이 설립 지원한다는 연암공업대, 시(市)의 랜드마크로 조성
했으며(아직도 공사중), 시화(市花) 석류를 이름으로 딴 석류공원을
지나 진주교(橋) 또는 천수교(千壽)를 건너야 한다.
석류공원(1)과 천수교 건립기념비(2)
망성교차로에서 진주교길 3번국도를 버리고 진주역 뒷 길을 따라서
천수교를 건넜을 때는 이미 하루해가 기우는 시각이었다.
홍보책자를 참고해 남강변'갑을가든'(신안동)에서 먹은 진주음식의
명품이라는 비빔밥은 아침과 점심 겸 저녁식사였다.
사천 이후 진주 한하고 식당은 커녕 매점도 없고 죽봉 과수원에서는
바쁜 일손들에 부담주지 않으려고 먹은체 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왜 제해용과 같은 대비하는 지혜가 없을까.
mintomin님과의 재회
물어물어 찾아간 찜질방 '테마건강랜드'(신안동)에서 보내는 진주의
첫 밤은 마냥 행복한 시간이었다.
시설과 분위기는 시답지 않았으나 낮의 재회처럼 내일도 'mintomin'
님과의 재회가 약속되어 있는데 어찌 아니 행복했겠는가.
mintomin님은 두 달 전(2009년 1월 17일 셋째 토요일) 한라산 정상
에서 만난 젊은 이다.
갑작스런 하반신 고장으로 한라산과 영별(永別)하게 될 줄 알았다가
다시 오르게 되어 감격과 환희가 이만저만 아니었던 백록담.
그러나 눈보라와 급강하한 기온은 카메라 꺼낼 엄두마저 얼게 했다.
이 때, 순백(純白)으로 내게 비취인 젊은 한 쌍이 혹한도 아랑곳없이
서로를 카메라에 담다가 나도 담아갔다.
며칠 후 그 사진들이 아래 글과 함께 내 e메일을 타고 왔다
<반갑습니다.
한라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가 제주에서 오늘 집으로 돌아와 사진이 좀 늦었습니다.
원본 사진과 제가 약간 수정을 한 사진을 같이 보내 드립니다.
필요에 따라 쓰시면 될 듯 합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mintomin님이 수정해 보내온 한라산 백록담 사진
그의 거주지가 마산임을 서울 떠나기 전에 알고는 진주를 통과할 때
재회할 것을 약속 받아둔 터다.
3월 18일, 옛 평거역(平居驛) 터인 평거동에서 진주성과 명석자웅석,
대평면 경계까지 진출한 후 되돌아와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마산행
버스를 탔다.
낙남정맥 이후 5년만의 마산행은 오직 그와의 재회를 위해서였다.
이 노.청(老靑)의 만남에서 나는 '반갑다' 외의 표현을 찾을 수 없었
는데 그에게도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 달전의 한라산에서 시작되었다.
마산의 한 초등교 교사들인 그들은 미구에 커플교사가 된단다.
이 역사적 사건의 완성에는 저번의 한라산이 결정적인 공로자라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처음 인상에서 전혀 빗나가지 않는 그는 불가피
한 일 때문이라면서도 그녀와 함께 나오지 못한 것을 미안해 했다.
둘을 함께 재회하게 되기를 신신 부탁했으니까.
오동동의 음식점(마산전통아구찜)에서 우리는 주객이 바뀌었다.
호스트(host) 지위를 부득이 그에게 양보한 것.
막무가내어 결혼식 초대를 전제로 그랬건만 왜 아직껏 무소식일까.
약속을 어겼는가 아직도 때가 되지 않은 것인가.
어떤 경우라도 실망할 사건이 되지 못한다.
마산 버스터미널까지 동행해 늙은 이를 배웅해 준 28세의 박화민과
그가 꾸릴 가정.
내가 축복해 줄 기회는 아직 충분히 있으니까.
왜 진주대로가 아닐까(미라가 돼버린 진주라 천리길)
꽤 깊은 밤이었지만 진주행 버스기사와 한 승객의 호의로 쉬이 찾은
호탄동의 '남강워터피아'가 길손의 두번째 밤을 책임지게 되었다.
온천관련법에 따른 허가 제1호로 진주 최초의 공인 개발온천이라는
선민의식(?) 정도가 나그네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역시, 단지 하룻밤 몸을 의탁하는 것 뿐인데.
진주, 마산은 최초로 들른 1983년과는 격세지감이 들며 백두대간의
첫 종주길에 오르던 2001년과도 딴판이다.
5년 전일 뿐인 낙남정맥 종주때에 비해서도 엄청 변했다.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가히 혁명적인 도로망이 이같은 변화의 가속패달이다.
휑뚫린 도로들에 의해 공간개념이 시간개념으로 환치됨으로서 대중
가요로도 불리며 아득히 멀리 느껴지게 하는'진주라 천리길'을 미라
(mirra)로 만들어버렸다.
한양길 영남의 관문은 3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추풍령(秋風嶺)이다.
그러나, 추풍령과 죽령은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의
우선순위 1, 2위 타부(taboo 금기 또는 기피)의 길이었단다.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거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신세가 된다 해서.
조령만이 금의환향 확률이 가장 높다 하여 대부분의 영남 선비들이
먼 길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오직 그 길만을 고집했더라나.
한데, 간과한 길 하나가 있다.
영남 남부지역에서 중부내륙으로 올라가다가 해남대로에 병합되는,
더러는 아직도 또는 이 길도 삼남대로로 알고 있는 통영별로다.
앞의 세 길이 모두 충북을 거쳐가지만 호남을 통해서 한양에 오르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의암의 주인공 논개는 전북 장수산(産:장계)이다.
통영별로 인근의 전북인들은 고속국도가 개설되기 이전까지는 수도
서울보다 진주와 부산, 마산을 선호했었다.
4. 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상고학생 김주열(金朱烈)도 전북 남원
출생으로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마산의 상급학교를 택했다.
그런데, 왜 진주대로라 하지 않았을까.
고려태조23년(940)에'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이래 한결같았으며 6대
성종2년(983)에는 전국 12목중 1인 진주목이 된 지역이다.
이조 500년 동안에도 변함 없이 잘 나간 영남 남부지역의 중심도시,
천년 고도인 진주다.
이중환은 진주에 대해 "지리산 동쪽의 큰 고을, 정승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온 곳, 땅이 기름지고 강산의 경치가 좋아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고 제택(第宅)꾸미기를 좋아하여 비록 벼슬은
못하더라도 한유공자(閑遊公子)라 불리기도 했다"고 썼다(擇里志)
그럼에도, 진주를 두고 왜 무명의 통영을 선택했을까.
3면이 바다인 반도라?
동래, 해남, 평해, 강화 등은 동서남 3면의 바다에 연한 지명이지만
의주, 경흥, 봉화 충청 등 바다와 무관한 지명도 있지 않은가.
경흥대로는 경흥 이후에도 무이진(憮夷鎭)-조산진(造山鎭)-서수라
진(西水羅鎭)까지 80리가 더 이어진다.
해남대로의 끝 우수영은 해남에서 남리역(南利驛)-우수영(右水營)
까지 70리를 더 가야 한다.
그러니까 '진주대로'는 전혀 무리가 아니며 오히려 바람직한 명칭이
아니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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