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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면 답사자료집
2015년 11월 14일
동강서당-지방유형문화재 제285호
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치선오상길 639-15
퇴계 이황 선생의 삼종손 동강 이희정이 세운 서당이다. 조선 광해군 12년(1620)년 세운 것으로 전하는데 건물에 새긴 기록으로는 인조 27년(1649)년경에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많은 유학 자를 배출하였고 개화기 이후에는 사설학원으로, 한일합병 이후에는 당시 보통학교 2년 과정을 교육하였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고 앞면은 대청마루를 꾸몄다.지금은 오동 진성 이씨 종친 모임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필곤 기념비
이필곤은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으로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형원(馨遠). 호는 죽포(竹浦). 동강(棟岡) 이희정(李希程)의 후예이다.[활동 사항] : 이필곤(李苾坤)[1864~1907]은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오상동 출신이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 김상종이 의성에서 창의하자 이필곤은 주변 청장년들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함께 김상종 의진에 참여하였다. 김상종의진의 중군을 역임하기도 하였던 이필곤은 비봉산 전투에서 패배한 뒤 김상종의진이 해산되자 잔병을 수습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하고 항쟁을 계속하였다. 의성 의진을 계승한 이필곤의 의병 항쟁은 현재 구체적으로 현재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필곤 휘하 의병 부대의 부대원 명부인 『이필곤 부대 명부』를 보면, 이필곤이 적어도 50명이 넘는 의병을 통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필곤이 의병을 해산하면서 의성 군수에게 총기를 반납한 것을 기록한 『오동총납상기(梧洞銃納上記)』에 의하면 이필곤이 이끈 부대가 최소한 21정의 총으로 무장한 의병 부대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1907년 7월 이필곤은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안동 형무소에 수감 중, 일본군의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43세에 총살당하여 순국하였고, 1977년에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작승리 선돌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작승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선돌로 신승동 마을 오른쪽 폐교부근에 작승리 선돌은 민가 담벼락 중간에 위치한다.작승리 선돌의 전체적인 형태는 직사각 기둥이고 상부는 일부 훼손되었다. 재질은 역암이며, 남향을 하고 있다.
작승리 선돌이 있는 민가 서쪽 구릉 위에는 작승리 고인돌이 있다. 작승리 선돌은 후에 조성된 민가의 담과 거의 붙어있고 바닥 부분에는 가로, 세로 1m 정도의 시멘트로 선돌의 아래 부분과 함께 기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비닐 천막이 놓여있는 등 유적은 따로 관리되고 있지 않으며, 유적임을 알려주는 안내판, 보호 시설은 없다.
[의의와 평가] 작승리 고인돌과 작승리 선돌의 입지는 마을 앞으로 남대천 지류와 협곡들이 펼쳐져 있어서 선사인들이 선호하는 지형이다.
주월사 住月寺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 10에 있는 주월사(住月寺)는 통일 신라 신문왕 때 창건된 고찰이다. 그러나 주월사가 언제 폐사되었고 현재의 사찰이 언제 중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현재의 주월사 위쪽 불출산(佛出山)에 천지(天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에서 세 분의 부처가 솟아나서[주지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세 분의 부처는 은혜사, 고운사, 주월사에 각각 모셨다고 함] 이곳에 절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주변의 목재를 베어 절을 지을 준비를 해 두었는데,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목재가 없어져서 찾아다닌 결과 현재의 절터에 목재가 운반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피로에 지쳐 쓰러져 있는 수십 마리의 토끼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토끼가 목재를 이곳으로 운반하였으며, 이곳이 명당이라 여기고 의상대사가 주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주월사에 토끼상이 있었는데 한때 절을 비우면서 고운사로 옮겼다고 한다. 사찰 창건이 완성된 날 밤 하늘의 달이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을 멈춰 있다가 움직여서 사찰의 이름을 ‘달이 머무는 절’이라 하여 주월사로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주월사는 통일 신라 신문왕 때 창건되어서 조선 초기 사찰 정리시기에 폐사되었다가 18세기경에 주월사로 재 창건 되었다. 그러나 사세가 기울어지면서 19세기 말엽이나 20세기 초에 주월암(住月菴)으로 사격이 떨어졌다가 1994년에 중수를 하면서 주월사로 승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가운데 대웅전이 있고, 뒤에 용화전(龍華殿), 대웅전 좌우에 요사채, 좌측 요사채 옆쪽으로 비스듬히 삼성전(三聖殿)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대웅전 오른쪽 앞에 4마리 해태가 바치고 있는 5층 석탑이 있다. 고려 시대로 추정되는 이 탑은 원래 이 절에 없던 것으로 최근에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용화전에는 창건 당시에 조성되었다는 석조 미륵불이 모셔져 있으며, 건물 양식과 크기는 대웅전과 같다. 삼성전은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스님과 신도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2동 있다.
신리리 유물 산포지
사곡면 신리리 산78에 있는데 유물 산포지는 비봉산[672m] 동북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리 마을에서 신리교를 건너 마주보이는 북동-남서향 구릉의 남서쪽 사면 김상만 묘 주변에 위치한다. 유물 산포지 동남쪽에 인접하여 신리리 고인돌 떼가 있고, 남대천을 따라서 상류 쪽으로 7~8㎞ 지점에는 공정리 고분 떼가 있다.신리리 유물 산포지는 높이 130~150m의 구릉 단부에 위치한다. 김상만 묘가 조성된 아래쪽 일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지표상에서 유구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지만 주변에 20~30㎝ 크기의 강돌과 산돌들이 흩어져 있고, 토기편과 자기편들이 채집된다. 2012년 현재까지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의의와 평가] : 신리리 유물 산포지는 돌덧널무덤의 벽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들과 토기편이 산재한 것으로 보아 봉토가 유실되고 없는 소규모 고분 떼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사곡면 산수유 마을
사곡면 화전리 일대의 산수유를 주제로 한 관광 테마 체험 마을로 의성읍내에서 15분 거리인 사곡면 화전리는 이른 봄이면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며 가을이면 빨간 열매가 계곡과 논밭두렁 일대를 뒤덮는 장관을 이루는 마을이다. 특히 화전 2리와 화전 3리는 산수유나무의 군락지로서, 매년 3월이면 의성 산수유 꽃 축제가 열린다. 의성 산수유 꽃 축제에서는 산수유 꽃의 화려함을 자연 그대로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린다. 화전리에서는 산수유를 한약재와 산수유 차 등의 제품으로 가공·판매하여 농가 수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명칭 유래] : 이른 봄에 개화하는 노란 산수유 꽃과 가을철의 빨간 열매가 장관을 이루는 산수유 군락지이므로 산수유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형성 및 변천] : 본래 의성군 외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전동, 하전동, 화곡동을 병합하여 화곡과 상전의 이름을 따서 화전동이라 하여 사곡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의성군 조례 제1225호에 의거 동이 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6년 행정 자치부와 서울 신문사가 공동 주관한 ‘제1회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자연 경영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였고, 2008년부터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는 산수유 꽃을 주제로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축제와 다양한 체험 행사를 통하여 산수유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자연환경] : 동쪽으로는 늑두산, 서남쪽으로는 비봉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큰 하천이 없고 평지가 보기 드문 산간 지역이다. 산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발달한 마을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며 계곡 사이에서 발원한 많은 소하천과 저수지들이 있다. 산비탈과 논, 밭두렁에 산수유가 자생 또는 식재되어 있다.이른 봄, 가장 빨리 산수유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 군락지인 사곡면 화전리 일대에는 조선 시대부터 자생한 200~300년생 산수유나무가 3만여 그루 이상 군락을 이루고 있어 마을 전체가 산수유 물결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노란 산수유 꽃을 보기 위해 많은 방문객들이 이 마을을 찾고 있으며, 2010년에는 6만 3000명, 2011년에는 5만 7000명이 방문하였다. 2008년부터 매년 3월에 의성 산수유 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축제 기간 중에는 풍년 기원제, 군민 노래 자랑, 산수유 꽃길 걷기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산수유를 이용한 한약재와 산수유차 등의 생산과 판매로 농가 수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매강서원(梅岡書院)-상현사(尙賢祠),매강원(梅岡院)
매강서원은 사곡면 매곡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설 교육 기관이다.
매강서원의 역사는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을 비롯하여 『교남지(嶠南誌)』, 1996년에 발간된 『의성 유적지』, 2007년에 발간된 『경북 서원지』 등의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는 매강원(梅岡院)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신원복(申元福)[1516~1584]·신홍도(申弘道)[1558~1611]·신류(申瑠)[1606~1671]를 봉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남지(嶠南誌)』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의성 유적지』에는 매강서원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선 중엽에 이룩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건한 시기는 1910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경북 서원지』에는 "1807년(순조 7)에 상현사(尙賢祠)를 건립하여 정은·신원복·정봉·신홍도·청재·신류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 복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상의 자료를 정리해 보면매강 서원은 기록된 내용이 소략하고 각 문헌마다 내용상 차이 및 출처가 불문명하여 그 내력을 명확히 밝히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최근 발간된 『의성 유적지』와 『경북 서원지』에 의하면 건립 시기를 조선 중기 혹은 상현사(尙賢祠) 건립 시기인 180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1868년 훼철 이후 복설시기 역시, 1910년 또는 1920년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매강 서원은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지역 유림과 후손들의 협력으로 개축 및 중수되어 오늘날에 이른다.매강서원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과 사당인 상현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건물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명교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 건물이다. 양 끝 협칸에 방을 1개씩 두고, 주칸은 마루를 깔았다. 방은 1칸 반의 너비로 구획되어 있고, 정면에 0.5칸 너비의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또한 서측의 방은 후면으로 0.5칸 너비의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명교당의 좌측에는 ‘경의문(景義門)’을 세워 강당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명교당 동쪽에 위치한 상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맞배기와 건물이다. 정면에 반 칸 너비의 헛주를 세웠고 헛주에 하인방을 덧대었다. 전면에는 ‘사주문(四柱門)’을 세워 외부에서 바로 사당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현사에는 신원복·신홍도·신류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매강서원에서는 유교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고 있으며, ‘경의문’·‘명교당’·‘상현사’·‘매강 서원’ 등의 현판을 소장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초정(初丁)[첫 번째 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용물뜨기 복(福)물, 수복수(壽福水), 복물뜨기, 복물퍼오기, 용알뜨기, 새알뜨기
용물뜨기란 의성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 새벽에 우물물을 떠오는 것이다. 이 행위는 집안에 복을 가지고 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복(福)물, 수복수(壽福水), 복물뜨기, 복물 퍼오기, 새알 뜨기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모두 같다. 용물뜨기는 농사에 필요한 물과 관련된 속신 행위이다. 즉 비를 상징하는 용과 마르지 않는 우물에 대한 기원에서 유래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연원 및 변천] : 물뜨기에 대한 연원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찾을 수 있다. 책에는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 온다. 이것을 용물뜨기라 한다. 맨 먼저 물을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고 기록되어 있다.의성 지역에서 전승되던 대보름날의 용물뜨기라는 속신 행위는 물·달·여성·대지라고 하는 생산과 풍요의 주술적 상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도 수도 시설이 구비되고 우물이 그 기능을 다하면서부터 이러한 풍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용소마을에서는 정월 보름날 아침에 닭이 울면 마을 여성들이 공동 우물로 달려가는데, 그 이유는 이 날 뜬 우물물로 찰밥을 지어 먹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재수가 좋다고 전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부들은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가 우물물을 먼저 떠가려고 한다. 우물에 가서 두레박을 쥐고 우물 안에 넣어 두었다가 닭이 울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물물을 떠올린다. 이러한 행위를 ‘용물 뜬다’고 하는데, 떠온 용물을 가지고 찰밥을 지어 먹는다.[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 의성군 사곡면 공정 3리 용소 마을에는 과거에 구먹골·음지못·양지못 세 곳의 공동 우물이 있었다. 개인 우물이 있는 집도 있었으나 이 세 군데의 공동 우물을 ‘옭은 샘’[물이 좋은 샘]이라 여겼고, 세 곳의 우물 중 자기 집과 가까운 우물에서 용물을 떴다고 한다. 공동 우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정에서는 이웃의 개인 우물에서 용물을 뜨기도 하였다. 음력 정월 14일을 ‘촛불 켜놓는 날’이라고 해서 개인 우물이 있는 가정의 주부는 두레박에 촛불을 켜서 세워 놓았다. 이렇게 하면 물이 좋아지고 많이 난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웃에서 용물을 뜨러 오면 우물 주인이 켜 두었던 초가 두레박에 담겨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리 석불 입상 孔亭里 石佛 立像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 산145에 위치한 공정리 석불 입상은 고려/고려 후기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곡면 공정리 공곡 마을 앞 차도에서 남쪽으로 약 200m 지점 혈산(穴山)으로 가는 계곡 입구의 서편 가파른 산 중턱의 석굴 내에 봉안되어 있다. 석불이 위치한 동굴의 길이는 약 10m 정도이고, 입구의 높이와 폭은 각각 2m 정도이다. 석굴은 내부로 들어 갈수록 사방이 넓어졌다가 다시 좁고 낮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석불은 석굴의 가장 높고 넓은 곳에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에서 약 5m 지점에 동향을 하고 있다. 석불 입상 앞에는 배례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탑 옥개석 1매가 있고, 그 외의 다른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공정리 석불 입상이 있는 석굴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되어 있으나, 석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로 보아 석불과 탑의 옥개석은 『동국여지승람』이 발간되는 1481년 이후 옮겨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형태] : 공정리 석불 입상의 전체 높이는 173㎝이고, 머리 높이 46㎝, 머리 폭 23㎝, 어깨 폭 53㎝이다. 연화 대좌 위에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상이며, 보관의 사방에 각 1구씩의 화불이 양각되어 있다. 풍화되기 쉬운 사질암에 과거 주민들의 민간 신앙의 행위로 눈과 코, 입술 부위는 훼손되어 원형을 잃고 있다. 입은 가늘고 길게 다문 형상을 하고 있다. 귀는 보관 아래서부터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목 부위와 어깨, 귀 등이 거의 구분 없이 조각되어 있다.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끝을 붙여 내장하였으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 염주를 드리우고 있다. 목에는 나비형 매듭의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허리에 4엽문 매듭의 허리띠를 둘렀고, 아래에 사각형의 띠고리에서 좌우로 흘러내린 매듭을 묶었다. 법의는 하체에서 치마형으로 늘어져서 발목 부위까지 덮고 있으며 그 아래로 도톰한 발을 살며시 내밀었다. 사질암으로 된 이 입상은 측면 두께가 20㎝ 내외로 얇은 편이다.
[특징] : 공정리 석불 입상은 중후한 두상과 보관, 수인의 표현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시대의 미륵불과 흡사한 것으로 보이며, 시기적으로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 공정리 석불 입상은 현재 봉안된 형태로 보아서는 석굴 사원의 형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석불 입상이 처음부터 이곳에 봉안되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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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집 잘 봤습니다~^^
김광엽위원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