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카메룬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카메룬은 마법에 능한 나라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베냉 토고 나이지리아와 같이 마법을 잘 하는 나라보다 축구를 더 잘 한다."
1981년 프랑스 풋볼 France Football 에서 로저 밀러(Roger Milla)가 한 말
이 장에서는 아프리카의 월드컵 역사에 관한 사실들을 다룬다.
월드컵에 출전한 최초의 아프리카 국가는 이집트였다. 1934년의 일이었는데 당시는 참가만 하면 어느 팀이라도 환영을 받았다. 이집트는 한 경기를 치렀고 헝가리에 4대2로 패했다.
곧이어 월드컵은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국제적인 대회로 발전했다.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은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에 예선전 기회도 부여하지 않았다. 마침내 FIFA가 한 발 물러나 아프리카의 월드컵 출전 역사가 1970년에 시작된다. 1970년 대회는 아프리카에 한 장의 본선 티켓만을 허용했고 모로코가 이를 거머쥐었다. 멕시코에서 열린 본선 대회에서 모로코는 서독에 2대1, 페루에 3대0으로 졌고, 불가리아와는 0대0으로 비겼다. 결과는 형편없었지만 그렇다고 경기를 쉽게 내주지는 않았다.
1974년 자이르가 흑인 아프리카 국가로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 자격을 획득했다. 서독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자이르팀은 아프리카 월드컵 출전사상 최악의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고 유럽 언론은 이에 환호작약했다. 자이르는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고정 관념, 곧 가공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미숙함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대회 기간 중에 먹을 원숭이를 가져왔고, 전술 이해 능력 또한 미개인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들이 보도되었다. 자이르는 스코틀랜드에 2대0, 유고슬라비아에 9대0, 브라질에 3대0으로 졌다. 이에 자이르의 탈취주의자(kleptocrat) 대통령 모부투(Mobutu, 그는 여전히 권좌에 있다)가 팀의 소환을 고려했는지도 모른다.
선수들은 다른 문제들도 있었는데, 물람바 은다이에(Mulamba Ndaie)가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심판을 가격했다고 퇴장당하자 이것들이 밝히 드러났다.
네덜란드 잡지 프레이 네덜란트 Vrij Nederland 가 자이르의 유고슬라비아인 코치 블라고예프 비디니치(Blagoyev Vidinic)에게 은다이에의 퇴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공격 행위 자체는 레드카드감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하지만 단서를 하나 달아야겠습니다. 심판을 걷어찬 선수는 13번 선수가 아니라 2번 일룽가 음웨푸(Ilunga Mwepu) 선수였습니다."
은다이에가 말했다. "심판의 엉터리 판정으로 볼 때 그들에게 우리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력하는 모습도 안 보이더군요. 퇴장당할 땐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심판에게 내가 아니라고 말했고, 음웨푸도 자기가 했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런데도 심판은 꿈쩍도 안 하더군요. 여기 심판들은 모두 흑인들에게 적대적입니다. 사실 심판뿐만이 아니죠. 스코틀랜드 4번 선수는 주장이었는데 경기 중에 몇 번씩이나 나에게 야유를 퍼부었어요. '깜둥이, 이봐 깜둥이!' 하고요. 그 놈은 나에게 침까지 뱉었습니다. 팀 동료 마나(Mana)의 얼굴에도 침을 뱉더군요. 스코틀랜드의 4번 선수는 짐승 같은 놈입니다." 스코틀랜드의 4번 선수, 그는 빌리 브렘너(Billy Bremner)였다.
언론은 또 자이르가 유고슬라비아에 3대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골키퍼 카자디(Kazadie)를 교체한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비디니치에게 요구했다. 이 조치로 비디니치가 유고슬라비아의 첩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그가 경기 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이에 대한 해명을 거부하자 소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비디니치는 다음날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만 말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체육부 파견 대표 로크와(Lockwa) 씨가 세 번째 골을 먹고 나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선수 빼.' 그래서 뺐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내가 겪고 있는 특별한 어려움들이죠." 비디니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정부 관리들에게 내 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말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모로코팀을 감독했을 때(그는 이 팀을 이끌고 1970년 월드컵에 출전했었다) 국왕의 간섭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시합 직전에 국왕이 내게 자기가 좋겠다고 생각한 출전 선수 명단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말했죠. '이런 식으로 하신다면 저는 즉시 팀을 떠나겠습니다.' '좋아. 하지만 자네 대형으로 해서 모로코가 지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걸.'" 비디니치가 잠시 말을 멈췄다. 기자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물론 우리 팀이 이겼죠. 더욱더 다행스러웠던 건 우리의 최대 라이벌 알제리를 꺾었다는 점입니다."
이 인터뷰는 모두 자이르 선수단이 머물고 있는 호텔 밖에서 이루어졌다. 비디니치와 선수들은 호텔 안에서는 언론과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호텔은 체육부에서 파견나온 관리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자이르는 '피라미[약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아프리카 팀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들은 정말 이상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아프리카 축구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폴 은크위(Paul Nkwi) 교수가 카메룬에서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 시대에는 한 선수가 네 명 선수를 제치고 돌파한다는 얘기를 귀로 들어야만 했죠. 이제는 거리마다 TV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앉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프랑스 방송을 보면서 영국 축구와 프랑스 독일 축구의 차이점들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이제 카메룬 축구에 이것을 접목했죠. 자이르는 차이점 같은 건 전혀 몰랐습니다."
자이르는 1978년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러자 체육부 장관이 팀에 "일정한 결함"이 있었다고 변명하며, 한편으로 일부 선수들의 "비애국적 행위"를 비난했다. 1978년 본선 참가국 튀니지는 메히코[한국 사람들은 보통 멕시코로 읽지만 사실 그 '멕시코'의 정확한 발음과 표기는 메히코다]를 3대1로 격파했지만, 불행히도 폴란드에는 1대0으로 졌고 서독과는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1982년 카메룬은 이탈리아 폴란드 페루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반면 알제리는 서독과 칠레를 격파했고, 오스트리아에는 졌다. 두 팀 모두 골 득실차에서 밀려 2회전 진출에는 실패했다. 1986년 알제리는 세 경기에서 단지 승점 1점만을 얻으며 죽을 쒔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한조였던 모로코는 2회전에 진출했다.
1990년 이집트는 네덜란드 에이레와 무승부를 이루었고, 잉글랜드에는 졌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카메룬팀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1회전을 통과한 카메룬은 콜롬비아를 물리치고 잉글랜드에 졌다. 그것은 쓸데없는 패배였지만 로저 밀러(Roger Milla)는 프랑스 풋볼 과의 인터뷰에서 자기는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만약 우리가 잉글랜드를 이겼다면 아프리카는 폭발하고 말았을 겁니다. 꽝, 폭발 말이에요. 심지어 죽는 사람도 생겼을 거예요. 지혜로운 신께서는 무엇을 해야할지 아십니다. 난 말이에요, 준준결승에서 우리를 멈춰 세운 그 분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약간의 융통성을 허락하신 거죠."
월드컵 본선 대회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거둔 성적은 흥미 있는 기록을 보여준다.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아프리카의 본선 참가국들은 모두 총 24경기를 치렀고, 거기서 승점 23점을 기록했다. (나는 승리에는 2점, 무승부에는 1점을 부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의 성적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굳이 무얼 찾는다면 오히려 성적이 좀 저조해졌다고도 할 것이다. 1978년에 아프리카는 3경기에서 3점을 얻었다. 1982년에는 6경기에서 7점을, 1986년에는 7경기에서 5점을, 그리고 1990년에는 8경기에서 8점을 획득했다. 자 이제 아프리카 팀들이 약체 팀으로 분류되어 시드 배정을 받기 때문에 엘살바도르와 뉴질랜드 같은 진짜 약체 팀들과는 대전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아프리카 팀들이 획득한 승점은 모두 혹독한 시험을 거쳐 얻은 점수인 것이다. 카메룬이 1990년에야 비로소 월드컵 8강까지 진출함으로써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그 이전에 아프리카 축구의 진면목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벨기에의 리에쥬(Li ge) 클럽에서 뛰고 있는 나이지리아 출신 골키퍼 알로이 아구(Alloy Agu)가 말했다. "백인들은 우리 아프리카인들이 자기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피부색을 보지 말고 우리의 능력을 봐주십시오! 흑인, 백인, 아시아인, 우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그러나, 흑인인 당신이 잘 차려입고 멋진 차를 몰고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신의 돈을 노릴 겁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인들이 축구를 할 수 없는 민족이라고 말해왔다. 1990년 이후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고안해냈다. 우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인들은 경기를 즐기듯 가볍게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고난 운동선수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들이 그라운드에서 조직력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천부적 능력과 경기에 대한 열정, 유연성, 그리고 경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겁니다." 1992년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 Independent on Sunday 와의 인터뷰에서 그레이엄 테일러(Graham Taylor)가 한 말이다. 심지어는 일부 아프리카인들마저 이렇게 믿고 있다. 알로이 아구는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천부적 유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이라면 로저 밀러 라크다르 벨로우미(Lakhdar Belloumi) 피터 은들로부(Peter Ndlovu)는 천부적 선수들이지만, 트레버 스티븐(Trevor Steven) 레 페르디낭(Les Ferdinand) 나이젤 윈터번(Nigel Winterburn) 역시 그런 선수들이라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또 아프리카인들은 전술 관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논평가들은 "그들은 축구를 단지 즐기기 위해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982년 그 '죽음의 조'에서 그리고 1990년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에 맞서 카메룬이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친 것을 상기해보라. 카메룬 수비수 3명이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 클라우디오 카니자(Claudio Caniggia)에게 몸을 날렸고 그러다가 벤자민 마싱(Benjamin Massing)이 퇴장당하자 신문들은 일제히 일련의 파울들이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논평하면서 선수들의 지나친 열정을 언급했다. 우루과이 선수 세 명이 상대팀 스트라이커를 꽁꽁 묶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지독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연습 따위는 하지 않으며 전술도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마법이 있다. 유럽 기자들은 늘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주술에 관해 묻는다. ("이곳 아프리카에서 나는 주술사나 다름없죠. 한쪽 다리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다리로 넌 골을 넣을 거야.'" 비디니치 감독이 한 말이다.)
주술에 대한 믿음은, 보츠와나축구연맹 기관지 보츠와나 스포츠 매거진 Botswana Sports Magazine 이 독자들에게 "무티[muti, 본문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를 사용한다고 해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정식으로 경계할 만큼 강력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팀들이 무티나 주주[juju, 서아프리카 부족들의 특정한 물신, 또는 물신숭배, 그리고 이와 관련된 주술]를 신봉한다(자이르축구연맹은 한때 금지하기도 했다).
무티는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종종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황당한 의식도 볼 수 있다. 팀의 주술 치료사가 선수들에게 칼로 상처를 입히고 선수들은 공에 오줌을 눈다.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특별히 만든 약을 경기복이나 축구화, 탈의실 문에 뿌리기도 한다. 측면 공격수에게 스피드가 더 필요하다면 주술사가 파리를 희생 제물로 삼을지도 모른다. 잠비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프러펀드 워리어스(Profund Warriors)팀이 홈 연승 행진을 계속하자 원정팀들이 탈의실 사용을 중단하고 타고온 미니버스에서 옷을 갈아 있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리고는 주출입구를 피해 담장을 넘어 운동장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프러펀드가 갑자기 홈에서 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유한 남아프리카공화국 팀들은 주술사를 시합에 대동하고 다닌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주술사들이 선수들보다 돈을 더 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신봉하는 선수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도 많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유능한 선수들은 무티는 단지 기분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공할 골잡이 마크 윌리암스(Mark Williams)는 마멜로디 선다운(Mamelodi Sundowns) 시절 자기가 감독의 무티를 위해 시간을 내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내게 말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아마 심리적 효과 때문이겠죠. 누군가가 싫으면 그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코스모스(Cosmos)에 있을 때도 주술사가 한 명 있었는데 선수들이 다 무티를 받아들이고 또 잘 지내는 거예요. 하지만 트샤발랄라(Tshabalala)와 저는 정말 싫었습니다. 축구화에 항상 의식을 치른 물약 같은 걸 뿌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제 축구화를 따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걸 신어야 마음이 편했거든요. 저는 그 축구화를 신고 항상 득점을 했죠, 항상.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조용히 신발을 신고 있는데 주술사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면, 당신은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대다수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이런 주술 행위는 미신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내가 만난 어떤 사람도, 물으면 답을 해줬지만 먼저 주술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로자리오 묵주를 지니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경기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주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페루 출신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팀 감독 아우구스토 팔라시오스(Augusto Palacios)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무티 의식을 행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어떤 선수라도 원한다면 무티를 집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캠프에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지만 무티는 미신이고 단지 심리적 문제일 뿐이라고 선수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선수들의 무티 의식을 중단시킬 수 있었을까? "이건 그들 전통의 일부입니다. 선수에게 무티 의식에 필요한 희생 제물을 구할 돈이 없으면 우리가 돈을 대주죠. 하지만 팀 전체의 의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용 청구서가 필요한 주술이라니! 무티 의식을 요구한 선수는 없었을까? "전혀요." 모든 흑인 아프리카 출전팀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주술에 관해 추궁을 받는다. 이를 통해 우리 유럽인들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무지몽매한 미신의 신봉자들일 뿐이며 세계적 수준의 축구 선수들이라는 사실에는 눈감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시합 전에 닭을 잡아 죽이냐고 계속 묻는데 정말 짜증이 난다." 1990년 월드컵 기간 중에 카메룬 선수 프랑스와 오맘-비이크(Fran ois Omam-Biyik)가 한 말이다. 이게 오맘이 받은 열 번째 질문 정도 된다면 아마 그도 별로 귀찮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항상 첫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어렸을 때 맨발로 축구를 했느냐?"다.)
물론 여러분이 주술을 신봉하는 아프리카인이 될 필요는 없다. 네덜란드 선수 루트 훌리트(Ruud Gullit)와 마르코 판 바스텐(Marco van Basten)에게는 테트 트로스트(Ted Troost)라는 개인 치료심리학자(medic-cum-psychologist)가 있다. 그는 그들을 탁탁 치면서 강한 어조로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을 가지라고 촉구하다가 갑자기 그들의 불알을 움켜쥔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기분이 훨씬 더 나아진다. 훌리트와 판 바스텐은 전세계적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선수들이지만 트로스트를 언급하는 외국 기자들은 거의 없다. 1990년 월드컵에서 다시 부상당한 브라이언 롭슨(Bryan Robson)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신앙요법 치료사 올가 스트링펠로우(Olga Stringfellow)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그녀는 실패했다.) 한때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였던 테리 페인(Terry Paine)은 이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위츠 대학(Wits University)팀을 지도하고 있다. 내가 무티에 관해 묻자 그가 영국식 무티를 얘기해주었다. 이런 식이다. 어떤 선수들은 시합 전에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다. 어떤 선수들은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고 그 다음에 왼쪽을 신는다. 또 어떤 선수들은 자기가 여덟번째로 경기장에 입장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한다. 잉글랜드 리그에서 825경기를 치르면서 그는 아프리카의 주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내게 자기팀이 더반[Durban,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도시]에서 화제가 되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페인이 탈의실 문을 열려고 할 때 동료 선수들이 문을 못 열게 막았다. "이봐! 문에 무티가 있어!" 페인은 개의치 않고 문을 열었다. "그날 우리는 17경기 무패 행진을 마감하고 1대0으로 졌습니다." 그가 슬픈 표정으로 얘기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골키퍼였던 개리 베일리(Gary Bailey)도 남아프리카 그의 고향에서 무티를 배웠다. 그는 자신의 약한 오른쪽 무릎을 강화하기 위하여 "특별한 힘을 주는 무티를 무릎에 묶고 다녔"으며 "제 3의 볼[third ball, 짐승의 불알 같은, 의식의 봉헌물]"을 바지 속옷 아래로 집어넣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에 왔고 유나이티드(United) 소속으로 가진 최초의 세 차례 웸블리(Wembley) 결승전에서 7골을 허용했다. 1983년 FA컵을 놓고 브리튼(Brighton)과 가진 결승전 재경기에서 그는 남아프리카 주술사의 말에 따라 골문에 붉고흰 색의 리본을 매달고 골그물에는 자물쇠를 채워놨다. 중간 휴식 시간에 그는 자물쇠를 다른 골문으로 옮겼다. 유나이티드가 4대0으로 승리했다. 그가 다음 두 차례 웸블리 결승전에서도 무티를 사용한 것은 당연했다. 유나이티드는 1983년 채리티 쉴드[Charity Shield, 1908년 시작된 이 자선 경기는 열리지 않기도 하고 중단되기도 하며 많은 변화를 겪다가 FA컵 우승팀과 리그 챔피언 사이의 경합으로 자리를 잡았다]에서 리버풀(Liverpool)을 2대0으로 격파했고, 1985년 FA컵 결승전에서 이버튼(Everton)을 1대0으로 물리쳤다.
감독이 평판이 좋은 사람이면 주술 의식이 팀을 단결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팀 전체가 황소 피로 목욕을 함으로써 시합에 대비한다면 선수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회의적인 선수들도 피의 세례 의식에 동참해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카이저 치프(Kaizer Chiefs)의 감독이었을 때 팔라시오스는 다른 엄격한 기독교인에게 무티 의식에 참여하도록 강제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 레체(Lecce)팀 감독 즈비그뉴 보니엑(Zbigniew Boniek)은 팀 전체가 시합 전에 미사에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피에트로 파올로 비르디스(Pietro Paolo Virdis)가 이를 거부하자 보니엑은 폭발하고 말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위클리 메일 Weekly Mail 기자 줄리아 베폰(Julia Beffon)도 아프리카 무티 의식은 교묘히 걸려들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유럽의 상대팀들을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뉴질랜드 올 블랙의 하카춤[All Blacks' haka dance, 마오리족 전사들이 전의를 높이기 위해 추는 전통춤. 괴성과 혀를 날름거리는 동작이 특징적이다]이 럭비 경기에서 맡는 역할처럼 말이다.
가보로네 (또는 '갑스'), 보츠와나.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전 보츠와나와 니제르의 경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긴 했지만 나는 네덜란드인 사진작가 빌렘(Willem)과 함께 미니버스--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교통사고가 났다하면 늘 등장하는 바로 그 차량--에 구겨 타고 요하네스버그를 출발, 북쪽으로 다섯 시간을 달려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까지 갔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보츠와나는 인구가 130만 명으로 전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26%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민주 정체 국가로 간주된다. 그러나 보츠와나 대표팀 제브라(Zebras)는 아마 아프리카에서 가장 형편없는 팀일 것이다. 그들은 사상 최초로 출전한 월드컵 대회에서 코트디부아르에 6대0으로 패한 직후였다. F.S. 찰웨(F.S. Chalwe)는 보츠와나 스포츠 매거진 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그 무엇이라면 "우리가 아프리카 최고의 팀이 되려면 8~10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니제르인들은 보츠와나보다 축구를 더 잘 하지만 더 가난하고 사막 지역도 훨씬 더 넓다.
가보로네 국립 경기장(National Stadium)은 작은 규모로 테니스 경기장과 모스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하늘색과 흰색으로 단장한 관중석은 정말 깜찍하지만 불행히도 지붕이 없다. 비를 막기 위해서 지붕이 필요한 게 아니다. 보츠와나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35도의 열기 속에서 축구 경기를 관전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일부 팬들은 우산을 가져와 해를 가렸다. 나는 조금 있는 차양석(遮陽席)에 앉을 수 있었는데, 모두들 어찌나 탐을 냈던지 좌석 앞뒤 사이 여유 공간마저 사람으로 가득했다.
관중석의 긴장과는 달리 운동장 상황은 다소 느긋했다. 우리는 사무처 직원들이 운동장을 느릿느릿 배회하는 걸 지켜보았다. 보츠와나축구연맹 총서기 애쉬퍼드 마멜로디(Ashford Mamelodi)는 굉장한 뚱보로 단연 눈에 띄었다. 한편 니제르 선수들은 그 동안 빌렘(Willem)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나라 국가 연주를 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보츠와나축구연맹 회장 이스마일 브함제(Ismail Bhamjee)가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국가가 니제르의 국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팬들은 자리에 앉아버렸고 새로운 국가도 연주되지 않았다. 니제르팀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주도 없이 국가를 불렀다.
경기 시작은 3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보츠와나 스포츠 매거진 이 솔직히 실토했다. "국제 경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고된 훈련만이 아니다. 원정팀의 승리를 어렵게 만드는 무언가가 또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잡지는 경기 시간을 오후로 잡아 보츠와나가 타는 듯한 더위를 충분히 이용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경기는 3시 55분에야 겨우 시작되었다. 그러나 니제르는 사하라 사막에 위치한 국가로 이 책략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 열기가 내 동료 빌렘(Willem)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경기 내용은 형편없었다. 그라운드는 뼈처럼 단단했고 마멜로디가 걸으면서 평탄 작업을 했음에도 몹시 울퉁불퉁했다. 공은 멋대로 구르는 강낭콩처럼 바운드를 예측할 수 없었다. 두 팀 모두 전술 없이 싸우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러나 선수들은 놀랍도록 활기차게 움직였다. 공중 볼 접전이 계속되었다. 이 시합을 통해 나는 더이상의 증거 없이도 영국은 보츠와나를, 프랑스는 니제르를 식민지로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보츠와나 선수들은 마치 영국의 3부리그 팀처럼 시합을 하는 반면 니제르 선수들은 신체 접촉을 몹시 꺼렸다. 아프리카 축구에도 도버와 칼레의 단절[도버 해협 양안의 두 도시]이 존재하는 것이다. 니제르는 경기의 열세를 딛고 종료 직전 득점에 성공해 1대0으로 승리했다. "니제르의 승리는 부당하다"고 잠비아 출신 보츠와나 감독 프레디 음윌라(Freddie Mwila)가 항의했다. 코트디부아르와의 다음 경기는 어땠을까? "그들은 아프리카 챔피언이고 우리는 그 아프리카의 일부죠."
니제르팀의 탈의실에서 나는 롭[남녀 공용의 길고 품이 넉넉한 아프리카식 겉옷]을 걸치고 높은 서아프리카식 모자를 쓰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발 아래로 공을 굴리고 있었다. "니제르팀 감독이신가요?" 내가 묻자, 그가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체육부 장관입니다." 정말 대단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체육부 장관이면 내무부 장관만큼이나 대단한 실세다. 나는 경기가 영국식 축구와 프랑스식 축구의 한판 대결이 아니었느냐고 은근히 떠보았다. 그러자 그가 "프랑스어 사용자 스타일"이라고 바로잡았다. 그는 니제르가 프랑스어를 말하는 아프리카 민족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선수단도 직접 선발했는지 물어보았다. "당연하죠. 내 일인 걸요."
가보로네에서 이스마일 브함제가 취급하지 않는 축구화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보츠와나와 니제르의 경기 다음날, 나는 그가 운영하는 스포츠 용품 가게 중 한 곳에서 판매대를 사이에 두고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브함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나 보츠와나에 정착한 인도인으로, 아프리카 스포츠계를 좌지우지하는 실력자 중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프리카축구연맹(CAF)의 집행위원이다. "여러 분야의 일을 맡고 있어서 항상 자리를 비웁니다. 이곳엔 거의 못 오죠." 그가 한숨을 쉬면서 보츠와나 올림픽 위원회 명함을 내게 주었다. "그래서 내가 운영하는 가게인데도 물건값을 잘 모른답니다."
그는 내게 CAF가 아프리카 대륙에 본선 출전 티켓을 더 배정해달라고 FIFA에 로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대륙은 본선 참가 24개국 중 겨우 3장의 티켓만을 할당받고 있다. [현재는 32개국으로 늘었으며, 이중 아프리카에는 5장의 티켓이 배정되어 있다.] (니제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한 평화봉사단원은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내내 이 문제로 자기가 욕을 먹었다고 불평했다.) 아프리카인들은, 1990년 본선 대회에서 스코틀랜드나 스웨덴이 코스타리카를 맞아 멋진 경기를 펼쳤던 것처럼 나이지리아나 가나도 이런 팀들과 한 조로 편성되었다면 그 이상의 멋진 경기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유럽 국가들은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을 배척하고 있다. 마치 강대국들이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이들을 못 들어오게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러나 월드컵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나는 브함제에게 자신의 주장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FIFA의 입장이 언제나 기준이 되어 왔죠. 이제 상황도 바뀌었고 우리는 유럽과 대등한 수준의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FIFA는 이렇게 말하죠. '하지만 아프리카팀은 준준결승 이상 진출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본선 참가 24개국 중 두 나라만 출전시킬 수 있다면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반면 유럽에는 14장의 티켓이 배정되어 있고 당연히 본선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훨씬 더 많습니다. 이 신발은 75풀라[pula, 보츠와나의 화폐 단위]군요." FIFA의 청소년 대회를 보라고 브함제가 말했다. 아프리카 팀들은 더 공정한 기회를 갖고 그리하여 가나와 나이지리아는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는 여전히 비관적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안건을 놓고 표결만 하면 "유럽 국가들이 작당을 해 아프리카 국가들을 저지했다"고 한다. FIFA 집행위원회에서 "백인들과 경합하는 투표 상황이 벌어지면 아주 캄캄하죠". 그래서 FIFA가 1998년 월드컵 개최 국가로 모로코가 아니라 프랑스를 선택했을 때 그는 "아주아주 화가 났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유럽인들이 그토록 완고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그는 생각했을까? 그는 자기도 아프리카에 더 많은 출전권을 배정하면 유럽 출전국 수가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지만 동시에 인종주의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인종주의'란 말은 참으로 모호한 용어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특별한 형태를 취하고 나타나는 법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아무 것도 없는 거지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월드컵은 우리들의 축제이고 국외자들은 단지 우리가 인정을 보여 끼워준 것뿐이다. 우리가 이 세상 전부다. 인종주의의 두번째 형태는 브라이언 클루프(Brian Clough)에 의해 잘 표현된 바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렇게 제 멋대로 날뛰고 앞으로 영국은 한 팀만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면 나는 차라리 보수당에 표를 던지겠어. 생각해 보라구. 들판에서 창이나 던지던 놈들이 우리의 국기 축구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어. 그 놈들은 지금도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종이야 ." 올드 빅 이어드[Old Big 'Ead, 브라이언 클루프의 별명]는 한 축구 저널리스트의 말을 되풀이한 것뿐이었다. 그 기자는 파푸아뉴기니가 정글을 달리고 있을 때 영국은 이미 축구를 시작했고 따라서 네 팀씩 출전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들보다 덜 문명화된 사람들이 상당수 FIFA 위원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월드컵 출전사를 살펴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첫번째 결론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했다는 점이다. 두번째 결론은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들만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1970년 이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아프리카 국가는 모두 7개국으로 모로코 자이르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카메룬 나이지리아다. 아프리카의 평균 생활수준과 비교해볼 때 이들중 자이르--월드컵에서 실패한 유일한 아프리카 나라다--만이 가난한 나라다. 아프리카에서 부의 확산은 축구 발전의 확산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1957년 아프리카축구연맹을 창설한 네 나라는 에티오피아 수단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이 네 나라 중 이후 계속 축구가 발전한 나라는 이집트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제재로 국제 스포츠계에서 축출되었고, 에티오피아와 수단 역시 기아와 내전으로 사실상 마찬가지였다.
에티오피아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을 치를 수 있었던 27개 아프리카 국가중 하나였다. 첫 시합은 모로코와의 원정경기였다. 에티오피아 선수단은 비행기를 타고 로마를 경유했는데, 그곳에서 선수 5명이 정치 망명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선수단에는 경기를 할 수 있는 선수가 8명밖에 안 남았다. 보결 골키퍼와 조감독, 그리고 동행자 한 명을 급조한 에티오피아팀은 교체 선수 1명 없이 시합에 임했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에티오피아는 부정 출장 선수 2명이 탈진해 쓰러졌고, 모로코는 5대0으로 앞서나갔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선수 3명이 더 경기를 포기했고 이래서 운동장에 남은 에티오피아 선수는 6명뿐이었다. 마침내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에티오피아는 월드컵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가장 고통 받은 나라는 잠비아였다. 1993년 4월 28일 잠비아팀 비행기가 가봉 연안 대서양에 추락해 선수단 전원이 몰살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네갈과 예선전 경기를 치르기 위해 가고 있었다. 루사카에서 다카르까지 3000마일에 걸쳐 그들을 실어나를 비행기는 단거리 군용 수송기였다. 잠비아축구연맹은 정기 항공편을 확보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잠비아 국민은 이 소식에 경악했고, 각료들과 조사관들이 대통령 전용기 DC-8을 타고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현장으로 날아갔다. "잠비아축구연맹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돈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 덕택에 대표팀에 끼지 못한 앨버트 브왈야(Albert Bwalya)의 말이다.
돈이 이 사망 사고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가나팀을 지도했던 독일인 부르크하르트 치제(Burkhard Ziese)가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임원들과 선수들에게는 군용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더 수지맞는 일이다. 이들은 세관을 통과하지 않으므로 값싼 고급 비누와 향수, 진과 위스키를 무한정으로 사들여 가나에서 값비싸게 파는 것이다."
아프리카 각국 축구연맹들과 비교해보면 유럽 각국 축구연맹들은 아주 잘 조직되어 있는 것 같다. 세네갈은 부유하고 축구도 잘 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 나라 축구연맹은 깜빡 잊고 1990년 월드컵 대회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고, "아프리카니까 그렇지" 하고 말한다.) 1억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또다른 부유한 나라 나이지리아를 보자. 이 나라에서는 정부가 축구연맹 직원들을 모두 내쫓는 사건이 가끔씩 벌어진다. 몇 년 전 이 사건의 최신판이 벌어졌다. 나이지리아팀 경기복 담당자가 부르키나파소와의 홈경기에 깜빡 잊고 선수들이 착용할 경기복 하의를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뭐라도 있을까 하고 이리저리 헤맸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선수들은 보온복 아랫부분을 무릎까지 잘라 입고 운동장에 나섰다. 다행히 나이지리아는 7대1로 승리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세계로 타전되었고 연맹 직원들은 또 한 차례 무더기로 잘렸던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알제리를 격파하고 1994년 월드컵 대회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며칠 후 체육부 장관 아키니엘레(Akinyele)가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네덜란드인 대표팀 감독 클레멘스 베스터호프(Clemens Westerhof)를 해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곧이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키니엘레는 해임되었고 베스터호프는 그의 직책을 회복했다.
아프리카 전체로 볼 때 20개국 이상이 1994년 월드컵 대회 참가 신청을 못했거나 신청을 했다 해도 예선전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빈곤이나 내전(또는 둘 다)이 장애물로 작용했다. UN의 비행 통제로 여행을 할 수 없는 리비아와 같은 나라도 있었다.
전쟁중이 아니어서 대회 참가 신청을 할 수 있고, 또 다행히 이 일을 깜박 잊지 않아, 예선전 일정을 소화할 수 있으며, 적어도 신체 건강한 11명의 선수를 매 경기에 출전시킬 수 있는 아프리카 국가라면 이미 대부분의 경쟁 국가들을 압도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본선 진출의 가능성을 상당히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가 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게 그 나라 국민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정확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월드컵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들이 한 달 동안 가까운 TV 수상기 앞에 모여들고 아프리카 전지역은 후끈 달아오른다. 축구는 아프리카가 세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다. 추락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잠비아가 최근 역사에서 국제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유일한 사건은 서울 올림픽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을 4대0으로 격파한 것이었다. 경기 결과에 놀란 이탈리아의 한 신문은 친절하게도 아프리카 지도를 실어 독자들이 잠비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시합 전에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우리를 본 체도 안 하고 지나쳐버리더군요. 그런데 나중에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 와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 시합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아직도 살아 있는 칼루샤 브왈야(Kalusha Bwalya)의 말이다. 월드컵은 아프리카에 중대한 사안이다. 아프리카인들에게뿐만 아니라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와 같은 유럽에 살고 있는 흑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993년 나이지리아 대선 후보 모슈드 아비올라(Moshood Abiola)는 당선되면 나이지리아의 월드컵 우승을 책임지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군부실권자 이브라힘 바반기다(Ibrahim Babangida) 장군이 이 선거를 무효화했다. 바반기다는 '마라도나'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적들의 도전을 교묘히 피해나가는 그의 정치수완 때문이다.
월터 윈터바텀(Walter Winterbottom)은 1962년에 장래에 아프리카 국가중에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나라가 나올 것이라고 최초로 예상했다. Richard M ller-Nielsen{덴}도 라트비아에서 내게 똑같은 예측을 했다. 그레이엄 테일러(Graham Taylor)도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 Independent on Sunday 와의 회견에서 같은 예상을 했다. 아프리카 축구를 취재한 거의 모든 기사가 윈터바텀의 이 지적을 인용한다. 이것은 젠 체하는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하는 예언일 뿐이다. 이 예언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숭고하게까지 들린다. 이 예언은 제3세계에 아주 호의적이다. 예언의 그릇됨을 바로 증명할 수도 없다. 더구나 월드컵 대회 때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요아힘 피커르트(Joachim Fickert)는 아프리카의 축구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독일인 피커르트는 콩고 국가 대표팀 기술위원이다. 그는 10년 넘게 아프리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오고 있다. "유럽 축구와 아프리카 축구의 수준 차이는 더욱더 현격해질 겁니다." 그가 내게 해준 말이다.
나는 가보로네에서 보츠와나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그를 만났다. 그는 가보로네 선호텔에 함께 머물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팀, '바파나 바파나(Bafana Bafana)'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우리는 시합 전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남아프리카공화국 선수들 기자들 축구팬들 임직원들은 풀장 주변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며 한데 어울렸다. 단정한 차림의 피커르트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자기는 아프리카의 예정된 영광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에서 10년 이상 살며 관찰해온 한 독일인이 느끼는 깊은 슬픔이랄까.
그는 아프리카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축구도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축구는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의료 서비스와 식량 공급에서 이 나라들은 앞으로도 심각한 고통을 겪을 겁니다. 당신이 월드컵 우승을 계속 말하신다면, 글쎄요,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언젠가 나올지도 모르죠. 그쪽은 경제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니까요." 같은 이유를 들어 그는 약체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미래를 다소 밝게 내다봤다. 다른 곳은 사정이 어렵다. 콩고와 이웃한 자이르는 이제 더이상 수도 킨샤사로 대표팀을 소집해 훈련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그가 내게 전했다. 가나 대표팀 감독은 차출할 선수들을 살펴보러 지방에 가려면 먼저 체육부 장관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기름을 얻어야만 한다.
나는 피커르트에게 관리들이 그의 일에 간섭하지는 않느냐고도 물어보았다. "콩고에서 그런 일은 없습니다. 2년 동안 체육부 장관이 다섯 차례나 바뀌었죠. 그리고 최고 지도자도 항상 바뀝니다. 장관들은 그저 연설이나 하고 일상사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물론 긍정적 개입도 없죠. 봉급이 안 나온 지도 여섯 달째군요." 남아프리카공화국팀과의 최근 원정 경기에 대비해서 콩고축구연맹은 유럽에서 뛰고 있는 자국팀 선수 2명을 겨우 데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선수는 대전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경험 없는 콩고팀은 1대0으로 지면서 월드컵 대회의 쓴 맛을 봐야 했다. 다가올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홈경기는 무의미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피커르트는 어떻게 가보로네까지 날아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좋은 호텔에 머물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팀을 정탐할 수 있단 말인가?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런 경기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의 대답이다. 이 흥청망청 관비 여행에는 또다른 관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