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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여행기
2011년 7월3일 오후, 오랜만에 설레임 가득한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약 3년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이다. 일행과 함께 탑승수속을 마치고 항공기가 보여지는 라운지에 앉아 여유 있는 마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짧은 여행이지만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듯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던 교우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상을 떠나면 함께 하던 사람들이 더 그립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을 날아 오른 비행기가 아직 저물지 않은 태양빛을 받으며 구름 위를 날고 있다. 다섯 시간 가량의 비행 끝에 씨엠립공항에 안착, 늦은 밤에 <소카 앙코르 리조트>에 도착하여 낯선 곳에서의 첫날 밤을 보낸다.
아무리 피곤해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눈이 떠지는 직업병(?)으로 잠을 실컷 자고 오리라는 계획이 처음부터 무산되었다. 하지만 커텐 사이로 비추어오는 아침빛이 새로운 곳의 기대감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게 했다.
간단한 수영으로 아침 운동을 하고 일행과 함께 아침식사를 나누며 하루의 일정을 나누었다. 긍정적인 마음들을 가진 사람들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평소 편하게 지내던 사람들이라 특별히 일정을 정한다기 보다는 물 흐르듯 흐르는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행이 시작되었다. 캄보디아 여행의 처음 목적은 프놈펜에 있는 캄보디아선교센터에서 현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성 세미나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왕 캄보디아를 방문한 김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앙코르 와트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아직 보지 못한 나와 또 한 분의 후배를 위한 배려로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씨엠립>으로 먼저 온 것이다. 이곳에서 이틀은 캄보디아의 문화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체험이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씨엠립의 풍경이 상상했던 대로 그렇게 펼쳐지고 있다. 우리나라 70년대 정도의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 나도 이런 정도의 생활 수준에서 살았던 것 같은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 정비되어 있지 않은 도로들, 그 위를 위험스럽게 사람과 차가 비껴 다니고 있다. 마치 무질서속의 질서가 흐른다고 표현하고 싶다.
언제나 가난한 나라들을 여행할 때는 두 가지 감정이 나를 사로 잡는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대한 감사한 마음과 가난한 나라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곳 캄보디아 역시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렇게 가난하고 그에 따라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캄보디아에 도착한 날부터 떠나오던 날까지 내 마음에 흐르는 찬양이 있었다. <부흥>이라는 찬양이다.
<이 땅에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 땅에 황무함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손을 보아야 할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사실, 씨엠립에 처음 도착하여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할 때 많이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정해진 수수료가 20달러로 알고 있는데 1달러를 더 달라는 것이다. 소위 빨리빨리 처리해 주겠다는 급행료이다. 그곳에서 아쉬운 사람은 우리이기에 그냥 모르는 척 주기로 했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마지막 세관검사하는 직원이 또 “일달러”를 나지막히 말하며 테이블에 살짝 놓으라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역시 나는 내 성품대로 일 달러를 지갑에서 꺼내었다.
한 나라와 도시를 대표하는 공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어떤 수준인지 이미 파악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순히 일 달러를 더 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는 이런 나라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아픔이었다. 썩은 부분이 많은 만큼 아픔을 겪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 때문이다. 이런 부조리, 가난, 무지 등 이런 황무한 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아픈 캄보디아의 풍경이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이국의 풍경을 감상하며 한 시간 가량을 달려 첫 번째 유적지에 도착했다. 앙코르 유적은 크고 작은 사원들로 캄보디아 전역에 약 1,000여개 정도가 흩어져 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알려진 사원이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 타프롬 사원 등등 이라 할 수 있다. 주로 9세기에서 14세기에 만들어진 왕궁, 사원, 무덤 등이다.
무더운 날씨와 짧은 일정으로는 그 많은 유적을 다 볼 수도 없기에, 유명한 몇 몇 유적지에만 보기로 하고 도착한 첫 번째 방문지가 반테이스레이(Banteay Srei) 사원이었다. 앙코르 톰에서 북쪽으로 25Km에 있는 이 사원은 10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유명하며 프랑스 건축가들이 이 사원을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붉은색의 단단한 사암위에 새겨진 조각기법은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다고 하기에 자세히 보니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뱀의 형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가 셋이 달린 뱀의 형상이 조각물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화의 차원을 넘어 한 때 이 땅을 지배하던 우상의 잔재들과 여전히 캄보디아를 덮고 있는 우상의 문화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타프롬 사원(Ta Phrom)은 나를 놀라게 했다. 캄보디아를 여행한 사람들이 대부분 한 장쯤 가지고 있는 사진중의 하나가 커다란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고 있는 사진이 바로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어떤 책에는 비단목화나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정보에는 벵골보리수 라고도 하는데, 커다란 구렁이가 돌로 만들어진 사원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징그럽기도 하고 하늘을 찌를 듯 성장한 나무의 크기가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나무의 씨앗이 바람에 날려 돌로 만들어진 사원위에 떨어지고 그것이 뿌리를 내려 돌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뿌리를 내리며 성장한다고 했다.
12세기에 왕의 조상들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이 불교사원은 야바르만 7세 때 건립이 되어 한때 3,000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사는 대사원이었다고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톰레이더’의 촬영지로 더 유명하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곳이다. 이제는 커다란 나무에 힘에 눌려 돌과 기둥들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인간이 아무리 엄청난 건물을 짓고 탑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것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가 축조했다는 거대한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앙코르 톰을 지나 그 안에 있는 앙코르의 미소라 불리는 바이욘 사원을 보았다. 12세기말에 축조한 대규모 석조 불교사원으로 사원 곳곳에 관음보살 안면조각상으로 가득하다. 54체의 보살상이 모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옛날에 돌을 다듬는 망치로 일일이 조각할 때 분명 수많은 석공들이 달려들어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다른 표정으로 조각하는 것 보다 54체를 같은 표정으로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작업일 것이라는 반감이 마음속에 살짝 생겼다.
바이욘 사원을 나와 크메르 고대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평가받는 앙코르 와트를 향한다. 앙코르 와트는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 이집트의 피라밋, 중국의 만리장성와 더불어 세계 8대 불가사의인 건축물이다. 앙코르와트는 1119-1150년 사이에 쇼바만2세에 의해 약 2만 5천의 인력을 동원 30년간 걸쳐 지었으며 1.5Km-1.3Km의 인공호수를 둘레로 사방 약 1Km에 걸쳐 축조되었다. 12-3세기에 크게 번성했던 앙코르제국은 당시 인구 100만의 거대한 도시였으며, 이 건물은 500년 동안의 영화를 이제 유적으로 인류에게 남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원이다.
과연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 많은 돌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운반했으며 어떻게 높게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동과 수고를 했으며 또 희생되었을까 생각하니 한낮 인간을 위해 잘못된 신을 위해 살다가 그들이 인생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시대에 태어나 가장 높은 문화 수준을 누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과연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여행 시작 두 번째 날, 화요일에는 동양 최대의 담수호 톤레삽(Tonle Sap)호수를 방문하고 프롬펜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씨엡립 남쪽으로 약15km 정도 떨어진 호수를 방문하기 위해 바쁘게 차가 달렸다. 톤레삽 호수에서 살아가는 수상족들을 보는 것이 하나의 관광코스가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매연 냄새를 내뿜으며 어설픈 배가 출발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홍수철에나 볼 수 있는 황토빛 호수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측은하게 여겨지게 하였다. 그 물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 그 물에서 수영을 하는 아이들, 보여 지는 모든 것들이 충격이었다. 발 붙일 땅이 없어 물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훔쳐보는 관광객들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듯 그들은 무관심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 한편 같은 하늘 아래서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렇게 다르게 살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풍요속에서도 빈곤을 투정하는 우리가 너무도 큰 죄인임을 고백하게 했다.
톤레삽 호수를 보고 씨엡립 시내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북한여성들의 <반갑습니다> 공연을 보며 별미로 평양냉면을 먹기로 했지만, 굳어진 남북관계로 인해 평양냉면 집은 손님이 없었다. 장사는 하지만 손님이 없어 공연은 저녁에나 있다고 한다. 왠지 썰렁한 식당 분위기가 음식 맛도 없을 것 같은 생각들이 들었다. 아쉽지만, 냉면의 기대를 버리고 언제나 편안한 한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섯시간을 달려야 하는 프놈펜을 향한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매우 불편한 차량이 몸을 고단하게 했지만 펼쳐지는 풍경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중간 중간 휴식하며 먹었던 둘리안과 파인애플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게 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캄보디아선교센터를 방문하여 현지 목회자들에게 영성세미나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정예배훈련학교의 교육내용중의 일부인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강의했다. 가정예배는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성경의 위인들 모두가 가정예배에 충실했었지만 그것을 가정예배의 시각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 가정예배의 씨앗이 뿌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예배하는 나라를 찾으시며, 예배하는 땅에 복을 내리시는 분이시기에 이 땅에 가정예배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나의 강의를 통역하는 현지 목회자 시타 목사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한국말을 아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친구였다.
함께 동행했던 나석주목사님이 시타 목사의 아들 디모데를 손자로 삼겠다고 했다. 디모데가 대학을 공부할때까지 교육부분을 책임지겠노라고 현장에서 즉석 결연식이 있었다. 가슴이 찡한 순간이었다. 단순히 한 사람의 교육을 후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로 키우기 위한 씨앗을 뿌린 것이다. 디모데가 현재 두 살이지만 30년뒤에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캄보디아 신학교가 세워지고 약10여년이 지났는데 감보디아 성결교회가 약 14개 정도(정확치 않음)가 있었다. 그 교회들을 대부분 한국교회들이 건물을 지어 봉헌했다. 후원헌금을 하여 교회당을 봉헌한 교회의 이름들 가운데 낯익은 이름도 있었다. 청주내덕교회가 후원하여 2개 교회가 건물을 지었고, 청주지방 남전도회연합회가 1개 교회, 청주지방 여전도회연합회가 1개 교회를 지어 봉헌했다. 낯익은 이름이 반갑기도 했고 많은 도전을 주기도 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교회들이 아름다워 보였고,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한민국을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선교한국이 자랑스러웠다.
여행의 후반부는 프놈펜에서의 활동들이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첫 인상은 무질서속의 질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오토바이 뒤에 사람이 탈 수 있는 수레를 연결한 교통수단 툭툭, 거기에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자전거가 서로 섞여 거대한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곧 사고가 날것 같아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모습이었다.
로싸인 마켓, 센트롤 마켓, 티본스테이크가 맛있는 리버하우스, 된장찌개가 맛있던 연가 등 그곳을 오가며 이용했던 교통수단 툭툭 모두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즐거움들이었다. 모두들 커피의 깊은 맛에 길들여져 있기에 인터콘티네탈호텔 커피숍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대부분 뻔한 이야기들이지만, 이국땅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더욱 새롭고 즐거운 기분이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나라로 면적은 한국의 2배정도 이며, 인구는 1,400만 정도이다. 크메르족인 캄보디아인이 90%이고 베트남이 5%, 중국인들이 1% 정도 함께 사는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라오스, 동남쪽으로 베트남, 북서쪽으로 타이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로, 고대 인도로부터 힌두교와 불교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힌두교가 넓게 퍼져 앙코르 사원 등 대부분의 유적이 힌두양식을 띠고 있으나 현재는 95%가 소승불교를 믿고 있다. 대부분의 크메르족은 불교신앙에 젖어 있는 우상숭배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경제 수준은 우리나라 60-70년대 경제 수준으로 보였다. 물론 어느나라나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살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이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 우상으로 가득한 나라, 무지한 백성들, 무질서한 거리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교육해야 이 나라가 질서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캄보디아에 머무는 동안 내 입에서 떠나지 않는 찬양이 있었다.
이 땅에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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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 좋은 곳 다녀 오셨습니다. 그 엣날에 웅장한 문화를 보유했던 나라, 캄보디아 볼거리도 많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도 많지요? 올려주신 글 즐감하고 갑니다.
사무총장님 덕분에 저도 글과 사진을 통해 캄보디아 여행 잘 하고 갑니다.
우리 집 큰아들도 7월에 다녀왔어요.
예수교 장로회 총회(통합) 산하 각 노회 재정부 임원들이 프놈펜에 기독교 연합 봉사 관을 이용하며
관광을 하고 와 제 블로크에 글을 올렸다고 보라고 하기에 1차 관광을 했고요.
박 목사님의 글에서 2차 관광을 또 색다르게 해 봅니다.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관광도 하고 목사님의 느낌 속에 동참하여 선교의 사명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목사님의 기행문을 통해 저희들도 캄보디아에 대해 더욱 웅숭 깊어지고 느끼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