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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하는 어떠한 것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참 흥미있는 일입니다.
락을 좋아하시는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자 제가 직접 작성한 글을 올립니다.
음악을 하시는 분들께는 많은 공부가 될꺼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곧바로 지적해주십시오.
기타의 탄생
락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설명하려다보니, 먼저 기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기타는 처음에 누가 만들었을까요?
학자들은 기타의 기원을 중앙 아시아로 보고 있습니다만, 현재 발견된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점토로 보고 있습니다. 기타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려진 이 점토가 기원전 2000년 ~ 15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최소 4000~5000년간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뜻입니다.
▲ 아주 오래전 악기지만 바디와 넥이 있으며 왼손으로 줄을 잡고
오른손으로 탄현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악기들이 고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등지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에서 이 악기를 "키타라(Kithara)"라고 불렀으니, '기타'란 말의 어원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하지만 키타라는 현대 기타의 모양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 후 이 악기들은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라비아에서는 류트(Lute)로 불리는 하나의 완전한 악기로 발전했으며, 그것을 711년 사라센의 침공과 더불어 무어인(Moors)들이 스페인에 들여옵니다. 이것을 기타라 모리스카(Guitarra Morisca)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스페인에도 이미 키타라가 발전한 형태의 악기가 존재하고 있었죠. 이것은 기타라 라티나(Guitarra Latina)였습니다. 두 악기 모두 많은 영향을 미쳤겟지만, 기타라 라티나가 현대 기타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 기타라 라티나와 기타라 모리스카를 연주하는 모습
15세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등장한 기테른(Gittern)이라고 불리는 악기는, 4개의 겹줄 형태로써, 류트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16세기에는 한줄이 추가되 5개 겹줄이 되었습니다. 겹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두개의 줄을 겹쳐놓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음량을 더 크게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비엘라(Vihuela)라는 중요한 악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류트와 비슷한 튜닝을 사용하지만 현대 시대의 기타와 비슷한 모양의 바디와 6개의 겹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타라 라티나가 비엘라가 되고 비엘라가 현대적인 기타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 비엘라를 연주하는 16세기 천사의 모습.
현대 시대의 천사는 어떤 악기를 연주할까요?
▲ 당시 작곡가들은 비엘라 악보를 채보할때 타브악보를 사용했습니다.
이 악보는 1554년 제작되었으며, 빨간색 글씨는 보컬 라인입니다.)
(※ 주의 :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계시는 기타는 당시 비엘라와는 튜닝이 다르므로 연주하려하지 마세요!)
그 후 기타는 드디어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유명한 음악가들이 사용하게 되었고 바로크 시대에는 아름다운 기타들도 제작되었습니다.
기타의 전성시대
18세기들어 기타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류트 역시 발전했으나 류트는 점점 더 복잡해져 현이 24개가 넘어가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기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기타는 드디어 6줄 단현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클래식 기타의 모습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당시엔 기타의 연주 기법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같은 사람들이 기타 연주 테크닉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토니오 토레스(Antonio Torres Jurado)는 기타 제작에 대해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던 기타의 표준을 완성시켰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제작자들이 토레스의 표준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6현 기타는 점점 널리 보급되어 미국 대륙에도 건너가게 됩니다. 산업혁명으로 운송수단이 발달해 기타 음악이 더 많은 곳에서 알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온 흑인들
그렇다면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보겠습니다. 1619년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흑인들이 미국 남부에 들어오게 됩니다. 강제로 노예로 팔려서 온 것이죠.
그들은 미국에 와서도 고향에서 부르던 전통 음악을 여전히 불렀는데, 이것은 백인 주인들에게도 권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래를 부르는것이 생산성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들게 일했지만, 노래를 통해 그나마 고통을 덜었습니다. 이것을 노동요라고 합니다.
▲ 반조 악기에 맞춰 춤을 추는 흑인 노예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흑인들은 백인들의 문화인 기독교 찬송가, 그리고 유럽 전통음악과 친숙해집니다. 그러면서 탄생한것이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입니다. 기존 찬송가를 아프리카의 방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미국 내 교회에서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심했습니다. 분리주의자들은 차별에 대항해 아예 흑인교회를 따로 분리시키자는 운동을 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최초의 흑인 집사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은 1801년 흑인들로부터 사랑 받던 찬송가를 실은 책을 발간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그 운동 이후로 흑인 영가들의 출연을 고무시킨것이지, 흑인 영가를 남부의 노예지대에서 일하던 흑인들이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간에 흑인 영가가 흑인들의 전통음악에서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9세기의 미국
19세기 초에는 미국에서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이라는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던 백인들을 다시 교회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흑인들은 자신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영적인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대각성운동으로 탄생한 천막 집회(Camp Meeting) 같은 경우에는 노동의 괴로움과 고립감을 완화시키고 노래에 뜨거운 감정과 가사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의 천막 집회 분위기는 매우 감정적이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천막 집회가 중요한 이유는, 19세기가 지나고 1916년에 리틀 원더 레코드(Little Wonder Records)에서 녹음한 <더 캠프 미팅 쥬빌리 The Camp Meeting Jubilee>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We`ve been rocking and rolling in your amrs / Rocking and rolling in your amrs / In the arms of Moses
많은 사람들은 로큰롤(rock`n roll)이란 단어의 기원을 이 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이때는 대학에서도 영가를 부르는 보컬 그룹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1870년대의 '피스크 주빌리 싱어즈(Fisk Jubilee Singers)'는 유럽 순회 공연을 했습니다.
▲ 피스크 주빌리 싱어즈는 현대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1877년에는 레옹 스코트가 만들었던 축음기를 에디슨이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당시엔 실린더형이었다가, 훗날 디스크형태로 발전합니다. 드디어 음악이란 것을 팔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는 흑인 아티스들이 드디어 미국 문화의 주류에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랙타임(Ragtime)이라 부르는 리듬은 피아노를 이용해 기존 서양의 전통 리듬과는 달리 싱커페이션을 구사하였는데, 특히 스캇 조플린(Scott Joplin) 같은 사람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랙타임은 훗날 재즈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 영화 '스캇 조플린(1976)'에서의 랙타임 연주 모습
특히 이 시기는 '할렘 르네상스'로 불릴만큼 많은 미국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며 다양한 방면에 두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블루스와 힐빌리
1914년에는 W.C. 핸디(W.C. Handy)가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St.Louis Blues>를 발표합니다. '블루스의 아버지'로 호칭되는 그는 많은 블루스적인 흑인 음악들을 실제로 채보하고 정리하고 가사를 붙여 악보를 출판하는 일을 해낸 최초의 인물입니다.
블루스(blues)란 슬프고 침체된 감정과 영혼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조지 콜먼의 "Blue Devils, a farce in one act(1798)"라는 작품에서 나왔다고 보여집니다. 노예제도의 폐지로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차별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20년대 블루스는 미국의 대중음악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성 블루스 싱어도 등장합니다. 블루스 음반을 내는 많은 레코드사도 생겨납니다
1922년에 트릭시 스미스(Trixie Smith)는 <마이 맨 록스 미 (윗 원 스테디 롤) My Man Rocks Me (With One Steady Roll>을 발표합니다. Rock과 Roll이 블루스에도 등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컨트리 뮤직(Country Music)이 등장하는데, 1923년 피들린 존 카슨(Fiddlin` John Carson)은 "리틀 로그 캐빈 인 더 레인(Little Log Cabin in the Lane)"을 통해 최초로 컨트리 뮤직을 녹음하는 인물이 됩니다. 당시엔 컨트리 음악이란 용어는 없었고, 힐빌리(Hillbilly)라고 불렀습니다.
힐빌리란 말 그대로 산골 지방의 사람들이란 말로 그만큼 도시가 아니라 시골 농부들에게서 불려졌던 노래였습니다. 그랬던것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블루스가 흑인 전통 음악에서 나왔다면, 힐빌리는 유럽의 전통 음악, 즉 백인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백인들에게는 블루스보다는 힐빌리를 받아들이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버논 달하트(Vernon Dalhart)는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첫번째 힐빌리 싱어가 되었으나, 힐빌리 뮤직에 어쿠스틱 기타를 이용한 것은 1922년부터입니다.
따라서 현대적인 컨트리 음악을 정의하고 이름을 날린 진정한 첫번째 컨트리 스타는 지미 로저스(Jimmie Rodgers)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컨트리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컨트리 음악적 규범을 확립했다고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곡들을 히트시켰습니다.
델타 블루스와 로버트 존슨
실베스터 위버(Sylvester Weaver)는 레코딩에 처음으로 슬라이드 기타를 도입합니다. 기타 프렛위를 병목(bottle neck) 으로 옮겨가며 연주한 것입니다. 이는 곧 델타 블루스(Delta Blues)의 탄생이 됩니다.
델타 블루스는 그야말로 로큰롤 형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델타 블루스의 대가이자 "로큰롤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이 이때 등장합니다.
그는 27세에 여자친구에게 독살당하기 전까지 겨우 29곡을 남겼을뿐이었고, 30년이 지나서야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곡들은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던 곡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미국 예술가들에게서는 전례가 없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곡에 표현했고 심지어는 악마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그의 노래가 <크로스로드 블루스 Crossroad Blues>로써, 교차로에서 악마와 조우한다는 부두교의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파우스트적 모티프가 혼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큰롤이란 결국 흑백인종의 문화적 교차로에서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그는 격렬한 보컬과 신들린 기타연주 등 당시 대중음악에서는 그 전례가 없는 혁명적 전환점을 만듭니다.
그가 죽은 후 머디 워터스(Murdy Waters)는 그의 곡을 카피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수많은 블루스 연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켜나갑니다.
따라서 로버트 존슨은 로큰롤을 탄생시킨 인물로써 현시대에 인정받고 있으며, 에릭 클랩튼과 키스 리처드(롤링스톤즈), 지미 페이지(레드제플린) 등 수많은 훌륭한 뮤지션들에게 칭송받게 됩니다.
에릭 클랩튼, "내가 정말 그 정신과 형식 그리고 테크닉을 배우고 싶었던 단 한사람의 기타리스트가 있다. 그 이름은 로버트 존슨이다."
로버트 존슨의 미발표곡이 등장하는 영화 [크로스로드 Crossroads]를 보시면 블루스에 대한 느낌을 많이 받으실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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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우기
1920년대 초반, 미국 남부의 많은 흑인들이 빠르게 공업화되고 있는 북부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블루스 역시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옮겨집니다.
그들은 배럴하우스(barrelhouse)라 불리던 통나무로 만든 술집에 모여 인종차별과 억압 받는 상황을 토로하며 신나는 음악을 즐겼습니다.
▲ 배럴하우스의 모습. 그들은 술과 피아노 한대만 있으면 재밌게 놀았습니다.
이로인해 탄생한것이 부기우기(Boogie-Woogie)입니다. 블루스에서 파생된 장르로 여겨지고 있으며, 주로 피아노를 이용했고 매우 경쾌했습니다.
1923년 클라렌스 윌리암스(Clarence Williams)는 최초로 부기우기 스타일의 곡을 축음기로 녹음했습니다만, 조지 W. 토마스(George W. Thomas)는 1916년에 이미 그러한 곡을 발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8년에는 파인탑 스미스(Pinetop Smith)가 <파인탑 부기우기 Pinetop`s Boogie Woogie>를 내놓았는데, 이는 최초로 히트된 부기우기 노래가 되었습니다.
▲ 파인탑 부기우기를 연주하는 실비안 징(Silvan Zingg)
부기우기는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백인 밴드들이 연주하게 되면서 범국민적인 대중문화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1938년과 1939년에는 역사적인 카네기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습니다.
힐빌리의 전성기
1930년대에는 스윙 재즈(Swing Jazz)와 부기우기, 그리고 힐빌리가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특히 힐빌리는 1920년대부터 자리잡은 헐리우드 영화에 카우보이들이 등장하고, 영화에 힐빌리 곡들이 삽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화되었습니다. 이제 도시 사람들도 이 음악을 듣게 된 것입니다.
미국 백인 대중들에게는 흑인들에게서 나온 블루스나 재즈보다는 아마 컨트리 음악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보수적인 백인들 중에서는 흑인 뮤지션들을 경멸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 유명한 힐빌리 뮤지션으로써 행크 윌리암스(Hank Williams)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적인 감수성과 선명하고 명료한 멜로디, 현실적 소재의 해학적 노랫말, 그리고 기타 중심의 사운드로 초창기 로큰롤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요들링이나 크루닝(섬세한 저음창법)이 대세이던 시절에 생생하고 직선적인 목소리로 사랑받았습니다.
레너드 코헨, "행크 윌리암스는 나보다 100층은 더 높은 노래탑 위에 있다."
일렉트릭 기타의 등장과 세고비아
그렇다면 다시 기타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당시 기타는 매우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음량이 너무 작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깁슨(Gibson)에서는 할로우 바디 모양의 기타에 픽업(Pickup)을 장착하게 됩니다.
오빌 깁슨(Orville Gibson)이 세운 이 회사에서 제작한 픽업은 당시엔 거의 마이크에 가까웠습니다.
그 후 1931년, 조르주 보샹(George Beauchamp)과 아돌프 리켄바커(Adolph Rickenbacker)은 회사 리켄바커(Rickenbackers)를 세우고 해리 왓슨(Harry Watson)이 만든 텅스텐 픽업(Tungsten Pickup)을 이용하여 최초로 전자화된 악기인 랩 스틸(Lap Steel)을 만들어냅니다.
▲ 첫번째 전자악기로 불리는 리켄바커의 랩 스틸
그 후 드디어 일렉 기타가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깁슨에서는 그들의 첫번째 일렉 기타인 ES-150을 내놓았고, 레오 펜더(Leo Fender)가 설립한 회사 펜더(Fender)역시 랩 스틸 기타와 앰프를 내놓았습니다.
1938년에는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반스(George Barnes)가 처음으로 일렉기타를 이용해 곡을 녹음합니다.
1940대 들어서는 펜더가 브로드캐스터(Broadcaster, 후에 텔레케스터로 이름이 바뀜)를 세상에 내놓았고, 깁슨은 레스 폴(Les Paul)을 내놓습니다. 이 기타들은 단단한 나무로 만든 솔리드 바디(solid-body) 형태였습니다.
▲ 1949년산 브로드캐스터와 1952년산 레스폴의 모습
레스 폴(Les Paul)은 본래 사람 이름으로써, 그는 연주자로써도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가 고안한 디자인을 본 깁슨은 처음엔 픽업달린 빗자루라고 했을만큼 혹평했으나, 이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편 기타 얘기를 하면서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독학으로 기타를 익힌 그는 기타연주가, 작곡가로써 이름을 떨치며 전 세계에 기타 음악을 전파하는데 공헌했습니다.
▲ 세고비아의 손가락은 매우 두꺼웠습니다.
그는 기타 연주법을 개선함으로써 그의 운지법은 현시대의 기타 학도들의 교본이 되었고, 대규모 연주회에서 제외되다시피 했던 기타를 다시 화려하게 꽃피웠습니다. 기타가 예술적인 지위를 얻게 된 것입니다.
안드레스 세고비아, "우리는 아직 기타가 가진 모든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1940년대 미국과 점프 블루스
1940년대에는 점프 블루스(Jump Blues)란 스타일이 확립됩니다. 기존 빅밴드 사운드에 색소폰과 브라스, 기타등을 사용한 업템포(Up-tempo) 사운드와 연설하는 식의 보컬로써 루이스 조단(Luis Jordan)과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등에 의해 불려졌습니다. 점프 블루스는 곧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로 불리며 훗날 로큰롤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1942년 빌보드에는 레이스 뮤직 챠트(Race Music Chart)가 생겨납니다. 흑인 음악의 순위를 따로 매긴 것입니다.
이 때 챠트를 석권한 사람이 바로 루이스 조단으로써, 그는 1944년 그의 곡 <지아이 지브 G.I. Jive>를 R&B 챠트 뿐만 아니라, US 챠트 1위까지 석권하며 블루스가 이미 미국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 루이스 조단의 <칼도니아 Caldonia>, 1945
사실 리듬앤블루스란 말은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1947년 빌보드 잡지의 제리 윅슬러(Jerry Wexler)가 음악 마케팅의 일환으로 만들어낸 말입니다. 따라서 점프 블루스와 리듬앤블루스를 같은말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1947년에 레스 폴은 녹음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멀티트랙 레코딩(multi-track recording)을 개발해, 캐피탈 레코드(Capitol Records)에서 처음으로 시도합니다.
▲ 기타 연주를 녹음하는 레스 폴과 그의 아내 메리 포드(Mary Ford)의 모습
원래는 한개의 트랙으로만 녹음했기 때문에 연주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스 폴은 혼자서는 절대로 연주할 수 없는 부분을 여러개의 트랙을 사용해 녹음함으로써 당시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주기법을 선사하며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48년에는 RCA가 처음으로 개발했다가 제조를 중단한 LP 레코드판을 미국 콜룸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에서 개량해 마침내 LP 시대를 엽니다.
부유해진 미국,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결합
1950년대 들어 미국 대중 문화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블루스와 힐빌리. 이 두 음악의 형식은 어쩌면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인 음악인 힐빌리는 좀 더 보수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흑인 음악인 블루스나 부기우기 등은 좀 더 공격적이고 성적인 표현까지 노래에 담아낼 정도로 보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흑인 음악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방송국들이 백인들의 음악만을 계속해서 틀어주었기 때문에, 흑인 음악가들이 설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인들이 출입하지 않는, 술집들과 사교 파티장, 댄스홀에서만 연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이러한 인식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백인들이 흑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흑인들도 백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흑인 뮤지션인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는 "흑인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다"며 컨트리 스타인 진 오트리(Gene Autry)를 열렬히 좋아했습니다.
백인 뮤지션인 죠니 레이(Johnny Ray)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온몸을 구르는 등 인상적인 무대 매너를 보여주었습니다. 부드러운 창법이 유행하던 시절에 거칠고 직선적인 창법을 시도했습니다.
▲ 노래에 감정을 불어넣는 죠니 레이
이처럼 서로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늘어나면서 대중들의 귀는 점점 열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음악에 가장 열광한 것은 백인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활력이 넘치는 블루스와 스윙을 받아들였습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엄청나게 부유해졌으며, 각 집안마다 큰 차와 가전제품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자란 미국 청소년들(베이비붐 세대)이 부모와는 차별된 문화를 갖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고생 없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그들은 보수적인 백인 어른 세계의 낡은 소리에 등을 돌렸고, 새로운 음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흑인 음악이었던 것입니다.
▲ 1950년대의 TV 광고
사이먼 프리스, "흑인 음악은 백인 십대들을 위한 정상적이고 개인적인 관능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보노(U2의 보컬), “로큰롤은 두 개의 문화 즉 '유럽 백인의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만나서 잉태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만남, 그리고 백인 젊은층의 의식 변화는 로큰롤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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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릭 블루스
1950년대 들어와 블루스는 드디어 전기 기타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를 일렉트릭 블루스(Electric Blues)라고 불릴만큼 새로운 탄생이었습니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에 영향을 받은 일렉트릭 블루스는 시카고, 디트로이스, 세인트루이스 등지에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때 유명세를 떨친 사람이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와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같은 사람들입니다.
▲ 머디 워터스, <갓 마이 모조 워킹 Got My Mojo Working>
그들은 로버트 존슨의 영향을 받아 슬라이드 일렉기타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B.B 킹(B.B. King) 같은 사람은 슬라이드 기타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렉트릭 블루스 스타일의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또한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Howlin' Wolf) 같은 사람은 "듣기에 불쾌한" 보컬로 유명했습니다. 베이시스트인 윌리 딕슨(Willie Dixon) 역시 시카고에서 매우 유명했습니다.
로큰롤의 탄생
한편 1951년 클리블랜드의 라디오에서는 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디스크자키 앨런 프리드(Alan Freed)가 맡은 이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인기있던 리듬앤블루스 음악들을 방송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음악들을 가리켜 블루스 같은 노래에 종종 등장하던 단어인 "로큰롤(Rock`n Roll)"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로큰롤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큰롤이란 용어를 구지 풀어서 해석해본다면 댄스, 음악, 성교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큰롤은 곧 하나의 음악 장르로 일컬어지게 됩니다. 1951년에는 최초의 로큰롤이라 불릴만한 곡, <로켓 88 Rocket 88>이 녹음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곡의 원작자가 누군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재키 브렌스턴(Jackie Brenston)과 그의 밴드인 델타 켓(Delta Cats)이 만들고 녹음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아이크 터너(Ike Turner)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크 터너는 킹스 오브 리듬(Kings of Rhythm)이란 밴드를 이끌고 있었는데, 여기서 색소폰을 불던 사람이 바로 재키 브렌스턴이었습니다.
원래는 아이크 터너와 킹스 오브 리듬이 이 노래를 녹음해야 했지만, 레코드 회사와의 계약 문제 때문에 델타 켓이라는 유령 밴드를 만들고 재키 브렌스턴의 이름으로 내보냈다는 것입니다.
어쨌건 이 곡은 전설적인 프로듀서 샘 필립스(Sam Phillips)가 인정했듯이, "최초의 로큰롤곡"으로써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크 터너는 정작 여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아이크 터너, "부기우기를 윤색한 것에 불과하며, 흑인들은 그것을 리듬 앤 블루스라 불렀고 백인들은 로큰롤이라 칭했을 뿐"
이 곡을 들어보면, 기존 블루스나 부기우기 사운드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리듬을 일렉 기타로, 그것도 디스토션(Distortion)이라는 이펙터(기타 본래의 소리와는 달리 일그러지는 소리)를 걸어서 연주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로큰롤은 새롭게 탄생한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단지 좀 더 격렬해졌고, 단순해지고, 당시 보수적인 사회에 대한 반향을 좀 더 드러내는, 사랑이나 자동차 같은 젊은이들의 관심사를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흑인 음악을 받아들인 백인들이 로큰롤(Rock`n Roll)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지칭해 널리 알리게 된 것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결국 로큰롤은 포크 또는 힐빌리와 가스펠 가창의 결합이다."
리틀 리처드, "템포가 빨라졌을 뿐 리듬 앤 블루스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앨런 프리드, "로큰롤은 많은 줄기가 있는 음악의 강이다. 리듬앤블루스, 재즈, 랙타임, 카우보이송, 컨트리송... 그 모든것들이 모여 거대한 비트가 되었다."
빌 헤일리
원래 빌 헤일리(Bill Haley)는 그가 이끄는 밴드 더 코멧츠(The Comets)와 함께 힐빌리를 부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적인 성과가 좋지 않자, 로큰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로켓 88>이 녹음된지 3년 뒤인 1954년, 빌 헤일리와 코멧츠는 <락 어라운드 더 클락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합니다.
▲ 빌 헤일리의 <락 어라운드 더 클락>
발표 당시에는 큰 인기가 없었지만, 당시 미국의 백인 청소년들의 실상을 그린 영화 <폭력 교실 Blackboard Jungle>에 사운드트랙으로 쓰이면서 유명해집니다.
그는 백인인데다가 친근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흑인들의 리듬앤블루스처럼 가사가 심하게 노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백인들은 그의 음악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 폭력 교실과 함께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이 백인 청소년들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미국 챠트 1위에 올랐고, 전세계적으로 2200만장이 팔려나가는 대히트를 기록합니다.
이제 로큰롤이라는 음악이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칼 퍼킨스와 로커빌리
한편 칼 퍼킨스(Carl Perkins)는 로커빌리(Rockabilly)의 개척자로 불립니다. 로커빌리란 말그대로 Rock - a - billy, 록과 힐빌리가 합쳐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힐빌리 가수들이 로큰롤의 영역으로 진출했는데, 특히 칼 퍼킨스가 유명했습니다.
그는 1954년 샘 필립스와 선 레코드(Sun Records)사에서 그의 곡들을 내기 시작했으며, 1955년 발표한 <블루 스웨이드 슈즈 Blue Suede Shoes>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유명해집니다.
▲ 칼 퍼긴스의 로커빌리 메들리
훗날 칼 퍼킨스는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쟈니 캐쉬 같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보 디들리
보 디들리(Bo Diddley)는 블루스에서 로큰롤로 넘어가는 중요한 인물 중 한명입니다.
그는 룸바(rumba) 같은 리듬을 이용해 그 만의 비트를 만들어내는데, 훗날 야드버즈, 롤링 스톤즈 등 많은 뮤지션에게 영향을 줍니다.
▲ 보 디들리의 <로드 런너 Road Runner>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네모난 기타를 들고 퍼즈(Fuzz)사운드와 트레몰로(Tremolo) 같은 혁신적인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라이브에서 그는 매우 역동적이었고 보컬 스타일도 독특했습니다.
비틀즈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존레논은 미국의 아티스트 중 가장 만나보고 싶은 단 한명을 꼽으라는 질문에 보 디들리를 꼽을만큼 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리틀 리차드
리틀 리차드 역시 절대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레이 찰스(Ray Charles)와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발굴한 로버트 블랙웰(Robert Blackwell)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1955년 <투티 프루티 Tutti Frutti>를 발표, 빌보드 챠트 17위에 오르며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 리틀 리차드의 <트루 프루티>
이후 <롱 톨 셀리 Long Tall Sally>, <릿 잇 업 Rit It Up> 같은 노래들을 히트시켰습니다.
또한 로큰롤 영화인 1956년 작품 <돈 낙 더 락 Don`t Knock The Rock>과 <더 걸 캔 헬프 잇 The Girl Can`t Help It>에도 출연 하였습니다.
그는 독특한 독특한 헤어 스타일과 의상으로 눈길을 끌었으며, 심지어는 무대에서 발을 피아노에 올려놓고 고함을 질러대는 무대매너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역동적인 모습과 음악은 초기 로큰롤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그의 음악은 내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음악은 위대하다."
딕 클락, "그는 50년대 이후 모든 로큰롤 연주자들의 모델이다."
뿐만 아니라 비틀즈, 롤링스톤즈, 지미 핸드릭스, 데이빗 보위 같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을만큼, 그가 로큰롤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특히 지미 핸드릭스는 데뷔하기 전에 리틀 리차드의 백밴드로 기타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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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
빌 헤일리의 성공에 고무된 샘 필립스는 흑인음악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백인이 있다면 대성공을 할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등장시켰습니다.
점프 블루스와 부기우기의 음악을 바탕으로 그는 성적 매력을 물씬 품기며, 구레나룻을 기르고 다리를 흔드는 등 불량스러운 모습으로 곧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제 로큰롤의 인기가 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는 <Heartbreak Hotel 하트 브레이크 호텔>, <Jailhouse Rock 제일하우스 락>, <Hound Dog 하운드 독>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표합니다.
21세의 나이로 이미 대중문화와 시대의 변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 엘비스 프레슬리, <하운드 독>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트럭 운전수에서 자수성가한, 미국적 영웅의 전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백인이면서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살던 미시시피강 유역의 목화밭에서 흑인 노동자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샘 필립스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컨트리와 블루스를 로커빌리 스타일로 혼합해 그의 흑인 보컬의 '필'을 살려낸 것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 같은 스탠다드 팝이 주도하던 음악 판도 시장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그는 각종 약물을 통해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이는 서구사회의 풍속에 갇힌 개인적인 쾌락들을 해방시키게 했습니다.
결국, 엘비스 프레슬리와 로큰롤은 서구 십대들의 욕망의 문을 열어젖혔고, 히피에서 펑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20세기 청년문화의 시작점에도 바로 엘비스가 있는 것입니다.
▲ 엘비스 프레슬리의 <제일하우스 락>
존 레논,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밥 딜런, "그의 음악을 들었을 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엘튼 존,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엘비스다. 난 정말 어렸을 적부터 엘비스의 팬이었다. 엘비스가 없었다면 팝음악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비비 킹, "선 스튜디오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열렬한 팬이 됐다"
믹 재거, "모방의 시대에 있어 그는 진정한 독창적 뮤지션이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턴, "왕은 오직 하나였다"
로드 스튜어트, "엘비스는 왕이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믹 재거나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저 그의 자취를 쫓아갔을 뿐이다."
재키 윌슨, "많은 사람들이 엘비스가 흑인 음악을 훔쳤다고 했죠. 하지만 실은 거의 모든 흑인 솔로 뮤지션들은 그의 무대 매너를 모방해 왔습니다."
기타의 신, 척 베리
여러분들이 만약 영화 <펄프 픽션 Pulp Fiction>이나 <백투더 퓨처 Back To The Future>를 보셨다면 이미 당신은 척 베리(Chuck Berry)의 로큰롤을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로큰롤에서 기타 연주가 이렇게 발전한 배경에는 보 디들리와 함께 바로 기타의 신, 척 베리가 있었습니다.
1955년 <메이벨렌 Maybellene>에서 그의 연주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것이었으며, 곧바로 음악계의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어 <롤 오버 베토벤 Roll Over Beethoven>, <락앤롤뮤직 Rock & Roll Music>, <죠니 비 구드 Johnny B. Goode> 등 히트곡을 발표합니다.
▲ 척 베리의 <죠니 비 구드>
키스 리차드, "처음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 마치 내 머리위에 수소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존 레논, "척 베리!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 (존 레논이 척 베리를 처음 만난 날)
또한 그는 천재적인 작사 능력과 무대위의 퍼포먼스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추상적이거나 실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닌, 일상의 사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얘기했습니다.
음악계의 관계자들은 그의 그러한 작사가 포크송의 번성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평가합니다.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작사하고 연주하는 것이 척 베리에 의해 절정에 이루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척 베리가 없었다면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또한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흑인인 그는 비록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에 가려 그만큼의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로큰롤에 끼친 영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척 베리, "록이건 블루스이건 R&B 음악이건,우리의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진정한 음악이다"
버디 홀리
컨트리 뮤직을 연주하던 버디 홀리(Buddy Holly)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고 감동을 받아 로큰롤러가 됩니다.
그가 그렇게 전향한지 몇달만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한 무대에 설 정도로 그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크리켓츠(The Crickets)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뎃 윌 비 더 데이 That'll Be the Day>, <페지 슈 Peggy Sue>같은 히트곡들을 발표합니다.
버디 홀리가 로큰롤에 끼친 영향 역시 컸습니다.
그의 밴드 크리켓츠는 리드기타, 리듬기타, 베이스, 드럼의 라인업으로 구성된 첫번째 백인 밴드 였으며, 이는 비틀즈의 밴드 구성에 영향을 줍니다.
크리켓츠가 귀뚜라미인것 처럼, 비틀즈의 이름 또한 거기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오버 더빙(Overdubbing)이나 더블 트랙킹(Double Tracking) 같은 녹음 기법도 혁신적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노래는 백인들 뿐만 아니라, 로큰롤의 기원인 흑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공연에서는 전 관객이 흑인일 정도였습니다.
아쉽게도 1959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지만, 그는 비틀즈, 에릭 클랩튼, 엘튼 존 등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리 리 루이스
피아노 연주자인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는 주로 다른 사람의 노래를 자유분방한 로큰롤 음악으로 편곡하여 불렀습니다.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를 RCA로 떠나보낸 샘 필립스가 그를 픽업했으며, 곧 그는 <홀 로타 샤킨 고잉 온 Whole Lotta Shakin` Going On>, <그레이트 볼 오브 파이어 Great Ball of Fire> 등 많은 곡 들을 히트시켰습니다.
특히 그는 'The Killer'라 불리며 악명을 떨쳤는데, 그의 수많은 기행과 섹스어필적인 노래는 학부모들에게는 악몽과 같았습니다.
피아노 위에 발을 올려놓고 치는가하면, 피아노에 불을 질러버리는 등 진정한 가치전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릴때부터 이미 텍사스의 성경학교에서 찬송가를 부기우기 스타일로 연주하여 쫓겨난 경력이 있을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년만인 1958년, 13살의 사촌동생과 비밀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곡이 방송금지가 되고 모든 공연도 취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포기하지 않고 컨트리 음악가로 변신, 성공을 거둬 30여곡의 히트곡을 냈습니다.
영화 <그레이트 볼 오브 파이어>를 보시면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로큰롤의 위기
하지만 로큰롤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발도 점차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정치계와 기독교는 "십대들에게 부모에 대한 반항심을 가르치는 공산주의 보다 더 악한 문화"로 규정하고 앨런 프리드를 <악의 전파사>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큰롤에 위기가 닥쳐옵니다.
1957년 리틀 리차드는 로큰롤을 그만두고 갑자기 목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음해인 1958년 엘비스 프레슬리는 군복무를 위해 음악계를 떠났습니다. 미군 이발사의 면도날에 의해 엘비스의 상징이던 구렛나루가 밀어지던 그날, 그의 신화는 끝났습니다.
존 레논, "그것은 로큰롤의 죽음이었다."
제리 리 루이스 역시 사촌동생과의 스캔들로 더 이상 로큰롤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앨런 프리드는 페이올라 스캔들 때문에 방송국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가수들에게 돈을 받고 그 음악을 틀어줬다는 혐의를 받은 것입니다. 더 이상 라디오에서 로큰롤을 틀지 않게 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으며, 척 베리는 미성년인 여자를 데리고 주경계선을 넘어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척 베리는 아무 일도 없었고 여자가 나이를 속였으며, 재판 과정에 인종주의적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3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1960년에는 영국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던 에디 코크런(Eddie Cochran)과 진 빈센트(Gene Vincent)의 택시가 화물 트럭과 충돌했습니다.
에디 코크런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진 빈센트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여생을 장애로 고생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로큰롤이 순식간에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는 몇 년 사이에 이런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 것에 대해 "로큰롤 문화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미 보수진영의 음모론적 사건으로 읽는 시각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비틀즈의 등장
이런 시기에 등장한 그룹이 바로 그 유명한 비틀즈(The Beatles)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미국 음악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영국인들은 로큰롤과 자신들의 전통 음악을 결합한 스키플(Skiffle)이란 음악을 탄생시켰습니다.
비틀즈도 여기서 출발합니다. 존 레논(John Lennon)이 처음 학교에서 결성한 그룹 쿼리맨(The Quarrymen)도 스키플 그룹이었습니다.
이 후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교회 축제에서 만나 합류시켰고, 폴 매카트니가 버스에서 우연히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을 만나 그를 합류시켰습니다.
그들은 척 베리, 버디 홀리,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로큰롤과 스키플 등 다양한 장르를 흡수했습니다.
비틀즈가 유명해지기 전 여러 레코드 회사에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수많은 레코드사들은 그들을 거절했습니다.
지금 시대에 로큰롤을 하는 기타 그룹은 인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만난 그들은 EMI의 자회사인 팔로폰(Parlophone) 에서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결국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 비틀즈의 <아이 워나 홀 유어 핸드 I Want To Hold Your Hand>
비틀즈가 대중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의 로큰롤을 다시 주류로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팝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르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주로 노래하던 초기에는 주로 10대와 20대(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가, 이후 그들의 곡이 예술적 가치까지 얻으면서 그야말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밴드가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만 1억장 이상, 전 세계적으로 10억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니, 대중 음악 역사상 그들을 능가하는 스타는 없습니다. 그들은 20세기의 대표 우상(icon)이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그들은 발라드, 레게, 싸이키델릭, 헤비메탈 까지 현대 음악 스타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로큰롤 밴드의 가장 기본적인 라인업을 확립시켰습니다.
그들은 백인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로큰롤의 시초인 흑인 음악가들에게도 칭송 받았습니다.
비틀즈의 성공에 고무되어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더 후(The Who),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 등을 비롯해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등장, 로큰롤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출처 -악숭[락.메탈]